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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3. 묵상글 ( 연중 제14주일 목요일. - 하늘나라 방식.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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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3. 연중 제14주일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하늘나라 방식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파견의 목적입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 복음 곧 기쁜 소식인데
그런데 하늘나라라 가까이 온 것이 과연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요 기쁜 소식일까요?
슬프게도 그 기쁜 소식은 많은 사람에게 희소식이 아니고
오히려 슬픈 소식이거나 아주 듣기 싫은 소식입니다.
쉬운 예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 죽을 날이 가까이 왔다,
하느님께 돌아갈 날이 가까이 왔다는 말과 다른 말이 아니라면
그 말을 듣고 바로 기꺼워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혹 하늘나라가 가까이 온 것이 꼭 종말론적인 의미가 아닐지라도
제 생각에 그것을 좋아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세우는 그런 의미일지라도
그것은 지금까지 유효했던 이 세상 방식이나 가치들을 다 폐기해야
하는 것이기에 기꺼워할 사람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우선 하늘나라 방식은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는 오늘 주님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이 방식대로 하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가 가진 것은
다 하느님께 거저 받은 거라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받은 것을 거저 나누려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만일 거저 주지 못한다면 아직 이 믿음과 사랑이 없는 것이고
여전히 이 세상 방식과 가치대로 살려는 것이겠지요.
두 번째 하늘나라 방식은 파견되어 떠날 때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것입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에도 믿음이 있어야 하고 아울러 파견의식과 정체성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파견받아 떠난다는 의식이 있어야 하고,
하느님의 일을 하면 하느님께서 주신다는 야훼이레 믿음이 있어야 하며,
내 사업을 하는 자영업자가 아니라 주님의 일꾼이라는 정체성이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 하늘나라 방식은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어느 마을에 들어갔는데 환영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집에 머물고
아무도 환영하지 않으면 발의 먼지를 털고 훌훌 떠나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평화의 사도로서 평화롭게 현존하며 복음을 선포하는 방식입니다.
복음 선포라는 것이 사실은 하느님 나라의 평화를 전하는 것인데
힘을 겨루고 싸우는 식이여서는 안 되겠지요.
프란치스코는 이슬람에 가는 형제들에게
바로 이 지혜롭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선교하라고 하였지요.
여건이 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환영하지 않으면 겸손하고 평화롭게 현존하라고 말입니다.
어느 날 길 가는데 할머니 한 분이 “예수 천당, 불신 지옥”하며 고래고래 소리쳤고,
이에 마주 오던 할아버지가 시끄럽다고 하니 그 할머니는 대뜸
“당신도 지옥” 이렇게 대꾸하는 거였습니다.
천당 얘기만 하면 되고 지옥 얘기는 할 필요 없습니다.
천당의 행복만 전해주고 지옥의 저주는 입 밖에 낼 필요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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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3. 연중 제14주일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마태 10,7)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의 마지막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분부하십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마태 10,7)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제자들은 유례없는 위대한 직무를 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모세와 예언자들이 받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전혀 새롭고 놀라운 직무와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감히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직무였습니다. 그것은 “하늘나라”를 선포하라는 직무입니다. 그런데, 단지 하늘나라를 선포하라고만 하지도 않습니다. 그 징표를 행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권능도 주셨는데, 그것을 ‘거저 받은 것이니 거저 주어라.’ 하십니다.
“앓는 이를 고쳐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주어라, 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해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여기에서는 꼭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가진 것”, 그것은 그들이 만들거나 획득해서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받아서 가지게 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그것은 하느님의 자애로, 거저 주어진 선사되고 베풀어진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먼저 그 선물을 받아들여야 그런 일들이 가능해지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무 거나 주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거저 받은 것, 바로 그것을 거저 주라.’고 하신다. ‘받은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주어서도 안 될 일입니다. 결코 우리가 만든 다른 그 어떤 것을 주어서는 안 될 일이다. 더구나 ‘자신의 것인 양’ 주어서도 안 될 일입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기에 앞서, 먼저 ‘받은 것’을 제대로 아는 일입니다. 또한 ‘주신 분’을 제대로 아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선포해야 할 나라는 자기 자신의 나라가 아니라, 자신이 받은 “하늘나라”이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파견 받은 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자세를 이렇게 제시하십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마태 10,9)
그렇습니다. 당신께서는 당신의 일꾼을 챙겨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입을 것, 먹을 것, 그 어떤 안전장치도,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걱정도 말고, 오로지 주님께만 의탁하여 신뢰로 사명을 수행하라 하십니다. 그러기에, 이제 자기의 신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발을 신고, 자기의 옷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자신의 능력을 담은 보따리가 아니라 하늘나라의 보물을 담은 보따리를 지고, 자기의 힘이 아니라 말씀의 지팡이에 의탁하라 하십니다.
또한, “집에 들어가면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마태 10,12)고 하십니다. 언제나 주님의 평화를 몸에 달고 다니며, 먼저 입으로 축복의 인사를 하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을 받아주든지 않든지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말고, 자신에게도 집착하지 않으며, 자유롭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니 오늘 하루만이라도,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이에게 평화의 인사를 하고, 축복을 빌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마음으로 계산하지 말고, 군말 없이 주님께서 하라는 대로, 형제에게 평화의 인사를 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주님의 평화를 건네주는 평화의 사도가 되길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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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3. 연중 제14주일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근본에 충실하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마태10,9-10).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한 무소유를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오직 근본에 충실할 것이지 말단을 걱정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특별히 성직자, 수도자, 선교사들은 돈에 구애받지 않고 일합니다.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지 않을 때 사람들의 마음에 주님의 사랑을 불태울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부끄러움이 많습니다. “말 타면 종두고 싶다.”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아홉을 가지면 열을 채우고 싶어 합니다. 우리 믿는 이들도 철저한 무소유를 통해 가진 자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사실 재물을 소유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용해야 할 때 제대로 써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물질 때문에 하느님을 소홀히 합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돈이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야말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내셨으며 물질에 앞서 사람이 먼저라는 사실을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서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이 스스로 노력해서 얻은 것 같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활용하는 것뿐입니다.
성경 말씀을 기억합니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30,8-9).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며 훔쳐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것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6,19-21).
나의 삶에 있어서 참으로 보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이 보물일 수 있고, 부모나 배우자, 자녀나 어떤 물질이 보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보물을 잘 간수하고 빛나게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녀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쌓아놓으면 쌓아놓을수록 줄 것이 없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법입니다. 그야말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주님께서 주신 것이니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잘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남에게 무엇을 준다는 것은 보통 돈과 물품만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입니다. 금전적인 도움은 즉각적으로 수혜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받은 돈이 떨어지면 또 다른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의 마음을 공감해 주고 베풀 수 있는 마음을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물질보다 사랑에 굶주려 있습니다. 요즘은 재능기부도 많이 합니다. 더 많이 사랑하고 자기의 경험과 지식, 삶의 경륜을 나눌 수 있어 행복한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줄 것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주십시오. 그렇지만 기왕이면 물고기를 잡아 주지 말고, 물고기를 낚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리고 결코 물질 때문에 하느님께 소홀히 하는 일은 없기를 기도합니다. 제발, 가진 것에 의지하지 말고 주 하느님께 의지하고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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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3. 연중 제14주일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넷플렉스에서 ‘황우석의 몰락’이라는 다큐를 보았습니다. 지금은 그 이름이 많이 잊혀졌지만 20년 전에 ‘황우석 박사’는 지금의 ‘BTS와 손흥민’을 능가할 만큼 대중적인 관심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황우석 박사는 ‘동물 복제’에 선구적인 업적을 쌓았습니다. 그는 ‘개, 소, 양’을 복제하였습니다. 황우석 박사는 논문을 통해서 ‘배아줄기세포’의 가능성을 발표하였습니다. 배아줄기세포는 인체의 ‘장기’를 배양할 수 있는 ‘만능세포’와 같았습니다. 마치 자동차의 부품과 같아서 손상된 인체의 한 부분을 대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눈이 먼 사람은 눈을 뜰 수 있고, 걷지 못하는 사람은 걸을 수 있고, 듣지 못하는 사람은 들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각종 암과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황우석 박사의 ‘논문’은 광명의 빛과 같았습니다. 정부에서도 황우석 박사를 전폭 지워했습니다. 황우석 박사의 성공은 곧 대한민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고, 대한민국의 성공이 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황우석 박사는 대한민국 1호 과학자로 선정되었고, 매년 30억씩 연구비를 지원받게 되었습니다. 황우석 박사의 연구에 많은 기업과 독지가들이 지원을 하였고 그 규모는 1,000억이 넘었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황우석 박사의 성공을 기원했습니다. 국익은 물론, 인류의 건강을 위해서 획기적인 도약이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황우석 박사의 업적과 연구에는 ‘그늘’이 있었습니다. 그 그늘은 함께 연구하던 동료 직원의 제보가 있었고, 제보를 확인하면서 방송을 하기로 한 방송국의 결정을 통하여 드러났습니다. 저는 당시에 캐나다에 있었는데 한국사회는 크게 술렁였습니다. 황우석 박사의 성공은 국익이라는 논리로 황우석 박사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진실이 국익이라는 사람들이 대립하였습니다. 불치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과 가족들은 황우석 박사에게서 희망을 보았기에 황우석 박사를 지지했습니다. 그 논란의 중심에 가톨릭교회도 있었습니다. 당시 서울대교구 교구장이셨던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님은 배아줄기세포를 통한 연구를 반대한다고 천명하였습니다. 가톨릭은 성모병원을 중심으로 윤리적인 문제가 없는 성체줄기세포를 통한 연구를 지원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황우석 박사의 연구에는 크게 두 가지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윤리적인 문제였습니다. 연구 과정에서 많은 난자들이 사용되었는데 그 난자들이 불법적으로 제공되었습니다. 난자의 매매가 이루어졌습니다. 동물의 난자와 인간의 난자는 같은 것이 아니라는 윤리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논문’의 조작이었습니다. 어떤 과학도 윤리적인 기준을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어떤 과학도 조작으로 성과를 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과학이 아니라 사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황우석 박사는 국민적인 영웅에서 과욕 때문에 윤리적인 문제를 일으키고, 진실을 왜곡한 사람으로 몰락하였습니다.
황우석 박사는 지금 아랍 에미리트에서 연구하고 있습니다. 황우석 박사의 능력과 기술을 인정한 아랍 에미리트는 황우석 박사를 초청하였고 낙타의 복제를 부탁하였습니다. 황우석 박사는 죽은 지 11년이 된 낙타의 체세포를 이용해서 낙타를 복제하였습니다. 복제된 낙타들이 우리에서 자라고 있었습니다. 황우석 박사는 죽은 개의 체세포를 이용해서 개를 복제하였습니다. 개의 주인은 복제된 개를 키우면서 황우석 박사에게 감사를 드렸고, 기뻐하였습니다. 황우석 박사는 러시아 시베리아의 한 얼음 동굴에서 죽은 매머드의 체세포를 채취하였습니다. 매머드 복제의 성공여부는 나오지 않았지만 황우석 박사의 동물 복제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습니다. 20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황우석 박사는 자신의 과욕을 솔직하게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질병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치료하고 싶은 마음은 변함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황우석 박사에 대한 다큐를 보면서 바오로 사도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주신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가신 희생입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미리 준비하셨다며 형제들을 용서했던 요셉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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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3. 연중 제14주일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요한 형님, 축하드립니다!”
-귀향歸鄕의 여정-
오늘 장례미사를 봉헌하는 이성철 사도 요한은 제 사촌 형님이 됩니다. 저는 불암산 기슭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에 살고 있는 이수철 프란치스코 수도사제입니다. 저는 2년전 2021년 10월 25일 여기 청담동 성당에서 윤여임 엘리사벳 사촌 형수님의 미사를 봉헌하며 강론했고, 2년후 오늘은 부군夫君인 요한 사촌 형님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며 강론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 형님은 지난 7월11일 저희 사부 성 베네딕도 아빠스 대축일날 선종하셨고 그날 오후 조카 글라라로부터 선종 소식을 들었습니다. 듣는 순간 “아, 형님은 우리 사부 성 베네딕도처럼 사셨구나!”하는 찬탄이 저절로 흘러나왔습니다. 형님은 정말 베네딕도 성인처럼 한결같이, 끊임없이, 노력하며 믿음으로 사셨습니다. 저는 떠나시는 형님의 모습이 다시 보고 싶어 어제 오전 장례식장을 찾아 문상할 때. 형님의 영정사진을 보며 저절로 나온 인사 말마디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요한 형님, 선종을 축하드립니다!”
상주인 조카들에게도 ‘축하드린다’고 ‘그동안 수고많으셨다’고 축하와 더불어 위로의 인사를 드렸습니다. 정말 장례식장에서 문상하면서도 “아, 정말 잘 살면 죽음도 기쁨의 축제가 될 수 있겠구나!” 크게 배웠고 깨달았습니다. 상주들도 찾는 조문객들도 다들 밝고 평화로운 미소 가득한 분위기였습니다. 저에겐 참으로 은혜로운 체험이었고 하느님께 많이 감사했습니다. 이렇게 문상하며 축하드린다 인사하기도 처음입니다.
참으로 후손들이나 후배들에게 참 좋은 최고의 선물이자 유산은 선종의 죽음일 것입니다. 요한 형님은 자녀들에게 우리 후배들에게 참 좋은 선종의 선물을 남겨 주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선종의 복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물음은 “어떻게 살 것인가?” 물음에 직결됩니다. 잘 살아야 잘 죽을 수 있는 은총입니다.
저는 삶을 “귀향歸鄕의 여정”이라 부르곤 합니다. 죽음은 바로 아버지의 집인 본향本鄕으로의 귀향이라는 것입니다. 긴듯해도 강물처럼 흐르는 짧은 인생입니다. 그래서 성 베네딕도는 규칙에서 제자들에게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두고 살라” 말씀하였습니다. 제가 늘 깨어 충실히 하루하루 삶에 비결을 나누고 싶습니다. 참으로 많이 나눈 예화입니다.
바로 일일일생一日一生, 오전 6시 일출과 더불어 오후 6시 일몰때까지 내 삶을 하루로 압축하여 내 현재 시점을 확인해 보는 겁니다. 저는 75세이니 오후 4시쯤 되는 것 같습니다. 또 일년사계一年四季, 봄-여름-가을-겨울로 압축해 보는 것입니다. 제 경우의 시점은 초겨울쯤 되는 듯 합니다. 바로 이렇게 삶을 압축해보면 내 삶의 시점이 확연히 드러나고, 하루하루가 참으로 하느님의 소중한 선물임을 깨닫게 되며, 삶의 환상이나 거품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바로 이에 근거한 제 좌우명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위 제 좌우명은 다음 라틴어 세 격언으로 요약됩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삶의 환상이나 거품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하는 말씀입니다.
1.Memento mori(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
2.Amor fati(아모로 파티:운명을 사랑하라)
3.Carpe diem(카르페 디엠:현재를 살라)
삶은, 행복은 은총이자 선택이요, 훈련이자 습관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주님을, 행복을, 희망을, 기쁨을, 평화를 선택하여 훈련하며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이래야 영혼 건강, 정신 건강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습니다. 참으로 우리 삶의 중심이신 주님께 하루히루 날마다 신뢰와 희망과 사랑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살 때, 주님은 우리 모두 하루하루 충실히 살 수 있는 은총을 주십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초대하시어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격려하십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활짝 열린 구원의 문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주님, 이성철 요한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에게 비추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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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3. 연중 제14주일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그리고 흙수저….
이 말의 의미는 이미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것은 태어날 때 그 뒷배가 무엇이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처음부터 출발선이 다름을 보여 주는 쓰디쓴 세상의 이치를 여실히 보여 주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그 격차를 두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또 그 간격을 역전시키려고 부단히 노력합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머물러 있다 보면 참으로 든든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제 뒤에 주님이 계심을 다시금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평화를 빌어주고 그곳이 평화를 누릴만한 곳이면 평화는 그곳에 머무를 것입니다. 그러나 평화가 머물만한 곳이 아니면 다시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시기할 일도, 질투할 일도 없습니다. 그저 평화만 빌어주면 됩니다. 그리고 나머지 일은 주님께서 결정하십니다.
파견된 제자들은 주님께서 그들 뒤에 있음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든든했을까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런 든든함을 느끼고 산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이런 든든함은 평화를 빌어주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이것을 명심하십시오.
저는 오늘 만나는 모든 분의 평화를 빌어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평화가 그들의 가정에 그대로 남아있기를 간절히 바랄 것입니다. 그렇게 저는 오늘도 주님 백으로 살아보려 합니다.
관계가 어려울 때는
선배 신부님께서
어느 날 제게 이런 말을 들려주셨습니다.
관계가 어려울 때는
사랑을 선택하십시오.
이 말을 곰곰이 곰곰이
오늘이라는 그릇에 넣고
천천히 천천히 들여다봅니다.
관계가 어려울 때는
사랑을 선택하십시오.
관계가 어려울 때는
사랑을 선택하십시오.
관계가 어려울 때는
사랑을 선택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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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3. 연중 제14주일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행복의 기원’을 쓴 서인국 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행복을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음식을 먹는 것.”
너무 간단한 것이 아닌가 싶지만, 행복임이 분명합니다. 좋은 사람과 함께 있는 것도 행복인데, 여기에 음식까지 같이 먹게 되는데 어떻게 행복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해보면 행복이 아닌 것이 있을까 싶습니다. 문제는 행복을 다른 곳에서만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상 안에서 쉽게 누릴 수 있는 행복은 당연히 가져야 할 삶으로 생각하고, 특별한 상황으로 얻게 될 것만이 진짜 행복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행복은 크기가 아니라 빈도’라는 어느 학자의 말이 떠올려집니다. 크기만을 생각하는 행복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자그마한 행복의 반복이 진정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해줍니다.
매 순간이 행복의 통로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서 불행하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자기가 체험하는 모든 것이 행복임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행복을 누리는 사람만이 어떤 상황도 슬기롭게 이겨내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행복을 주셨습니다. 행복이라는 것을 돈 받고 판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물교환하듯이 우리의 마음을 받고 행복을 주신 것도 아닙니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그냥 공짜로 행복을 주셨습니다. 늘 함께하시면서 행복의 삶을 계속 누릴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주님께서 주시는 행복을 거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남들에게는 거저 주지 않습니다. 보상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자기가 받을 것의 크기를 재면서 남에게 줄 행복을 줄여 나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세상에 파견하면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병자들을 고쳐 주고, 마귀를 쫓아내면서, 하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사람들이 체험할 수 있도록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중요한 일을 할 제자들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으십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말라고 하셨고,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늘 나라에 관한 일은 세상의 가치로 따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것을 가지고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세상의 것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뜻이 담긴 사랑으로만 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 공짜로 받았으니, 공짜로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사랑으로 하느님의 일에 동참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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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삶 그 자체다. 절대로 결과가 아니다(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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