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하록
귀신
괴물
도깨비
시체
뭐가 됐든 놀러와 나는 쓸쓸하니까
악마는 영혼을 사주고 소원까지 들어준다지
어쩜
상냥하게도
땅이 나를 부른다 어지러울 정도로
어서 와 어서 와
열렬한 손짓
먼데서 내려다보다 감동하고 말아
그래 지금 갈게
지금 그리 갈게
새하얀 너를 만날 땐
나는 무엇보다 커다랄 거야
빛도 나만큼 화려하지 못할 거야
겨울처럼 강한 내가 달려들 거야
뭐가 됐든 놀러와
나는 기다리니까
---하록 시집, {설원과 마른 나무와 검은색에 가까운 녹색의}에서
헤라클레이토스는 호머와 그리스의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를 최하 천민으로 혹평을 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투쟁은 만물의 아버지’인데 그들은 모두가 다같이 전쟁을 혐오하고 평화만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전쟁과 평화, 선과 악은 둘이 아닌 하나이며, 따라서 ‘전쟁’에만 강조점을 둔 헤라클레이토스마저도 ‘성악설’에만 함몰된 판단력의 어릿광대라고 할 수가 있다.
낮에는 신사 역할을 할 수도 있고, 밤에는 건달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또한 낮에는 악마 역할을 할 수도 있고, 밤에는 천사 역할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나 이처럼 시간과 장소에 따라서 그 역할을 달리한다는 것은 아주 단순한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에 불과하고, 따라서 우리 인간들은 시간과 장소와 위치와 그 입장에 따라서 다양한 역할들을 소화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인생은 연극무대와도 같고, 우리 인간들은 모두가 다같이 일인다역의 주연배우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천사의 가면을 쓰고 악마의 역할을 할 수도 있고, 건달의 가면을 쓰고 신사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천사의 역할과 악마의 역할을 동시에 진행할 수도 있고, 신사의 역할과 건달의 역할, 또는 적과 동지의 역할도 동시에 진행할 수도 있다.
파우스트가 착하고 선한 것만도 아니고, 메피스토펠레스가 악하고 나쁜 것만도 아니다. 또한, 지킬 박사가 착하고 선한 것만도 아니고, 하이드가 악하고 나쁜 것만도 아니다. 신사와 건달, 천사와 악마는 사회적 동물로서의 우리 인간들이 자의적으로 구분하고 나눈 것이지, 애초부터 그 사람들이 따로따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도덕이 도덕인 것인 부도덕이 있기 때문이고, 법률이 법률인 것은 수많은 범죄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도덕의 존재 근거는 부도덕이고, 법률의 존재 근거는 불법이다. 왜냐하면 모두가 다같이 착하고 선량하면 도덕과 법률이 존재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하록 시인의 [초대]는 선악을 떠나 있으며, 무시무시한 익살극이자 너무나도 섬뜩하고 오싹한 잔혹극 놀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귀신/ 괴물/ 도깨비/ 시체” 등은 금기어이며, 대부분의 우리 인간들은 이러한 말만을 들어도 소름이 오싹 돋고 밥맛을 잃어버린다. 하록 시인은 왜, 무엇 때문에 그처럼 상냥하고 친절한 웃음으로 “귀신/ 괴물/ 도깨비/ 시체”들을 초대하고 그 무슨 잔혹극 놀이를 하고 싶어했던 것일까? 이 세상에서 가장 힘센 것은 꿈이고, 꿈이 있으면 그 어떤 고통과 굴욕도 다 참고 견딜 수가 있다. 황제의 목을 베기 전에 충성부터 맹세를 하지 않으면 안 되고, 꿈이 있으면 입으로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릴 수도 있다. 꿈은 ‘역발산기개세’, 즉, 모든 고귀하고 위대한 기적의 원천이 된다. 하지만, 그러나 인간은 이미 죽었고, 인간의 탈을 쓴 악마들----귀신/ 괴물/ 도깨비/ 시체들----만이 살아 남았다. 학문의 진보와 산업의 발달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본(악마)을 위한 것이었고, 그 최종 목표는 인간으로부터 인간성을 박탈하고 기계 인간을 만드는 것이었다. 인공지능, 로봇, 자율주행차, 사물인터넷, 빅데이터 등----. 이제는 인간의 꿈도 낭만도 다 사라졌고, 악마에게 영혼을 팔지 못한 파우스트, 혹은 지킬 박사의 후예들이 “악마는 영혼을 사주고 소원까지 들어준다지”라고, 그 악마들을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 상하이의 ‘스파트 팜’은 여의도 면적의 대여섯 배 크기이며, 파종에서부터 수확까지, 사시사철 농사를 짓고 최고의 이익을 뽑아낼 수 있는 최첨단 농업시설이며, 우리 인간들의 노동력이 거의 필요없다고 한다. 모든 일자리들을 기계가 다 빼앗고 우리 젊은이들은 할 일이 없다. 할 일이 없으니까 땅이 부르고, “어지러울 정도로/ 어서 와 어서 와/ 열렬한 손짓”을 한다.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채 꽃이 피기도 전에 “먼데서 내려다보다 감동하고 말아/ 그래 지금 갈게/ 지금 그리 갈게”라는 독백은 무시무시한 익살극이자 너무나도 섬뜩하고 오싹한 잔혹극 놀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어지러울 정도로 땅이 부른다는 것은 죽음의 유혹이자 손짓이고, “새하얀 너를 만날 땐/ 나는 무엇보다 커다랄 거야”는 살아 있는 내가 곧 만나게 될 ‘나의 유령’임을 뜻하게 된다. 유령은 해골바가지이고, 해골바가지는 하얗고, 그 어떤 빛도 해골바가지만큼 화려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 유령은 모든 삶의 공포와 죽음의 공포를 극복했다는 것을 뜻하고, 그 어떤 불모성의 겨울보다도 더 강하고 튼튼하다는 것을 뜻한다.
하록 시인의 [초대]는 “귀신/ 괴물/ 도깨비/ 시체”들의 무시무시한 익살극이며, “귀신/ 괴물/ 도깨비/ 시체/ 뭐가 됐든 놀러와 나는 쓸쓸하니까/ 악마는 영혼을 사주고 소원까지 들어준다지/ 어쩜/ 상냥하게도”라는 시구에서처럼, 그 모든 공포를 극복한 유령놀이로의 [초대]를 뜻한다.
인간은 이미 모두가 다 죽었고, 유령들만이 살아 남아, 무서운 잔혹극을 그 어떤 희극보다도 더 즐겁고 유쾌하게 연출해낸다. 괴테가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를 통해서, 또는 스티븐슨이 지킬 박사와 하이드를 통해서 그처럼 무서운 잔혹극 놀이를 했지만, 이제 하록 시인은 그 어떠한 대역도 없이 몸소 이처럼 무시무시한 익살극과 잔혹극 놀이를 연출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 세계는 유령들의 세계이며, 그 어떠한 악마의 역할도 다 허용되어 있는 것이다. 메피스토텔레스이든, 하이드이든, 파우스트이든, 지킬 박사이든, 흡혈귀이든, 진시황이든, 양귀비이든, 춘향이든, 이도령이든 “뭐가 됐든 놀러와 나는 쓸쓸하니까”----.
하록 시집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