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마경훈목사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가서 2:8-14
(설교자: 마경훈목사, 비전교회)
https://www.youtube.com/watch?v=sotQkWu981c
‘아가서’는 솔로몬의 노래입니다. 솔로몬이 지은 1,005개의 노래 중에 유일하게 성경에 포함된 노래입니다. 솔로몬은 지혜가 매우 탁월했습니다. 그의 탁월한 지혜는 아가서를 통해서 약 21종의 식물과 15종류의 동물들의 이름과 호화스러운 궁중생활의 면모를 드러내 주며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영어성경에서는 아가서를 ‘노래 중의 노래’라는 의미의 ‘Song of Songs'라고 부릅니다. 아가서는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의 사랑을 노래합니다. 거기다가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랍비들은 아주 오랫동안 이 책을 남녀 간의 애정표현으로 보고 성경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주후 90년 얌니아 회의에서 비로소 정경으로 인정하였습니다.
유대교에서는 아가서와 에스겔서는 30세 이하의 젊은 사람들은 읽지 못하게 하였답니다. 아가서는 애정문제를 너무나 원색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고, 에스겔서는 상징과 환상이 많아 해석에 문제가 있다고 보아 장성한 후에 읽으라고 한 것입니다.
아가서는 오페라 형식입니다. 출연진은 솔로몬과 술람미, 그리고 예루살렘의 여성합창단입니다. 아가서의 기독교적 해석은 솔로몬은 하나님으로 술람미 여인은 성도로 봅니다. 아가서를 하나님과 성도간의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입니다.
아가서의 스토리는 이렇습니다. 솔로몬은 갈릴리 북단의 레바논 산 바알하몬에 포도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솔로몬은 이 포도원을 한 과부에게 소작으로 주었습니다. 그 과부에게는 여러 아들들과 술람미라는 딸이 있었습니다. 매일 같이 포도원에서 일하는 술람미는 오빠들에게 시달리면서 자기 얼굴을 가꿀 시간도 없이 힘들게 일했습니다. 술람미는 포도원 거친 일 때문에 얼굴이 게달의 장막처럼 검게 그을렸습니다. 어느 날 잘 생긴 도시 청년 솔로몬이 포도원에 방문하였습니다. 솔로몬은 술람미를 보자마자 한 눈에 반해서 사랑에 빠졌습니다. 솔로몬은 술람미의 사랑을 얻으려고 여러 번 포도원을 방문하였습니다. 마침내 두 사람은 사랑하게 되었고, 사랑은 더 깊어만 갔습니다. 두 사람의 사랑을 시기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들의 순수한 사랑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어느 날 솔로몬은 사랑을 고백하고 청혼한 후에 술람미 곁을 떠나갔습니다. 반드시 돌아와서 신부로 맞이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술람미의 오빠들은 못된 사기꾼에게 속았다고 동생을 나무랐고, 이때부터 동리의 많은 남자들의 유혹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도 술람미는 일편단심 솔로몬만 생각하고 기다렸습니다. 어느 날 화려한 가마를 앞세우고 많은 사람들이 술람미의 집으로 왔습니다. 솔로몬이 술람미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하여 신하들을 보낸 것입니다. 마침내 솔로몬과 술람미는 결혼하게 되었고, 두 사람은 사랑을 고백하면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수많은 예루살렘의 처녀들이 술람미를 시샘하면서 부러워하였습니다. 한 번은 솔로몬과 술람미 사이에도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술람미가 옷을 벗고 자고 있을 때에 솔로몬이 방문을 두드렸지만, 술람미가 옷을 벗었다고 하면서 일어나 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잠시 후에 인기척이 사라지면서 솔로몬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당황한 술람미는 예루살렘 거리를 헤매며 솔로몬을 찾았습니다. 예루살렘의 처녀들에게 사랑하는 솔로몬을 찾아달라고 애를 태우며 밤을 보냈습니다. 술람미는 마침내 솔로몬을 찾아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술람미는 솔로몬에게 왕궁의 화려함 보다는 힘들게 살았지만 자기의 고향 레바논 산들을 그리워한다고 말했습니다. 솔로몬은 술람미를 데리고 시골 술람미의 집으로 가서 술람미를 위로하며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사랑을 노래하였습니다. 아가서는 이런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본문은 술람미가 솔로몬이 가진 자기를 향한 사랑과 요청을 노래한 것입니다. 오늘 설교는 본문의 솔로몬의 술람미를 향한 사랑과 요청을 통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겠습니다.
1.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유대인들은 민족적인 절기에 읽는 5권의 성경이 있습니다. 아가, 룻기, 애가, 에스더, 전도서가 있는데, 그 중에 아가서는 이스라엘의 최대의 명절인 유월절에 읽어야 하는 성경입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노예에서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가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10절에서 솔로몬은 술람미에게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라고 했습니다. 13절에서도 솔로몬은 술람미에게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라고 했습니다.
아가서에 보면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라는 말이 13번이나 나옵니다. 사랑하면 상대방이 어여쁘게 보입니다. 사실 어여쁘다는 말은 사람이 사람에게 말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입니다. 예쁘다는 말은 최고의 칭찬이며 가장 우호적인 행위입니다. 좋아한다는 말보다도 예쁘다는 말이 더 진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나이든 사람에게는 예쁘다는 말을 사용하지 않지만 사실 우리 마음속에 원하는 것은 남들이 나를 예뻐해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나이도 학벌도, 국적도, 인종도, 재산의 정도도 다 극복합니다. 솔로몬은 왕이요, 술람미는 시골처녀인데 이들은 서로 사랑했습니다. 신분으로 보면 하늘과 땅 차이인데 사랑했습니다. 아 1:5입니다.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술람미는 야외에서 노동을 했기 때문에 피부가 까맣게 탔습니다. 외모가 아름답지 못했습니다. 게달의 장막과 같았습니다. 게달족속은 아브라함의 서자인 이스마엘의 차남의 후예들로 북아라비아 지방 등을 다니며 유목 생활을 했는데, 이들의 장막은 검정색 또는 암갈색의 염소 가죽이었습니다. 술람미의 얼굴이 게달의 장막 같다는 말은 피부가 시커멓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그러한 술람미를 사랑했습니다. 솔로몬은 사랑에 눈이 삐었습니다. 아 2:2입니다.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 솔로몬의 눈에는 게달의 장막 같은 술람미가 가시나무 사이의 백합화처럼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솔로몬은 사랑에 눈멀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비록 게달의 장막 같아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더럽고 추한 모습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주셨습니다. 우리가 보잘 것 없는 모습일지라도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낮아지셨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하니 술람미는 그 사랑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충분히 보답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지만 그 사랑을 그냥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그 사랑에 보답하는 것입니다.
습 3:17입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우리가 너무 어여뻐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셔서 우리를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십니다.
엘리자베스 바레트라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바레트는 심한 기관지염으로 6년이나 방안에 갇혀 쓸쓸하게 지내왔습니다. 친구라고는 오직 조그만 강아지뿐이었습니다. 그녀는 틈틈이 시를 썼습니다. 어느 날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남자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나는 당신의 시를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그리고 당신도 사랑합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편지를 읽은 바레트는 사랑의 눈이 뜨기 시작하며 절망과 고통과 독방의 고독으로부터 해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녀는 즉시 답장을 썼습니다. “진심으로 당신의 편지에 감사합니다...” 이렇게 해서 편지가 왕래하여 무려 573통의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결혼하였고 예쁜 아들도 낳았습니다. 그러나 끝내 바레트는 지병을 이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어가던 그녀는 이 시를 남겼습니다. “그대를 얼마나 사랑하느냐구요?/ 보여줄 방법을 알려주세요./ 나는 그대를 가장 깊게,/ 가장 높게./ 가장 넓게 사랑한답니다./ 숨 쉴 때마다,/ 눈물 흘릴 때마다/ 내 인생 모두를 바쳐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신의 선택이라면/ 죽어서도 당신을 사랑하오리다” 그녀는 남편을 향한 사랑을 보여주고 싶어서 사랑의 시를 남겼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을 십자가로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며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시며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라고 말씀하십니다.
2.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고 싶어 하십니다.
사랑하면 상대방과 함께 하고 싶어 합니다. 그것은 사랑의 본능입니다. 어떤 회사의 직원 선발시험 문제인데, 따로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생각을 점검해보는 문제입니다. 문제는 이렇습니다. “당신은 거센 폭풍우가 몰아치는 시골 밤길에 운전하고 있다. 버스 정류장을 지나치는데, 그곳에는 세 사람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죽어가고 있는 듯한 할머니, 당신의 생명을 구해준 적이 있는 의사, 당신이 꿈에 그리던 이상형, 당신 차는 2인승이기 때문에 단 한 명만 태울 수 있다. 당신은 이 세 사람 중 누구를 태우겠는가? 답을 쓰고 그 답에 대한 의견을 서술하라.” 여러분들 같으면 여러분들의 자동차에 누구를 태우시겠습니까? 죽어가는 할머니입니까? 아니면 나의 생명을 구해준 의사입니까? 아니면 내가 꿈에 그리던 이상형입니까? 누구를 태우시겠습니까? 최종적으로 채택된 답은 이렇습니다. “의사 선생님께 자동차 열쇠를 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의사는 할머니를 모시고 병원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 차에서 내려서 제가 꿈에 그리던 이상형과 함께 버스를 기다릴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교훈하는 것은 ‘포기하면 얻는다’입니다. 자신의 자동차를 포기하면 꿈에도 그리던 이상형의 여인과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다른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싶으셔서 하늘 보좌를 포기하시고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와 함게 하시고 싶으셔서 임마누엘 하신 것입니다.
본문 8,9절은 술람미와 함께 하고 싶어 하는 솔로몬의 모습을 노래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오는구나 9 내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솔로몬은 술람미가 보고 싶어서 노루와 사슴처럼 달려서 술람미의 집에 왔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이 노루와 사슴처럼 빨리 달려 산을 넘어 우리에게로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주님과 우리 사이는 창살로 막혀 있습니다. 그래서 10절에서 애절하게 노래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5:2을 보겠습니다.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을 열어 다오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주님은 우리를 만나기 위하여 밤새워 산 넘고 물 건너 달려오셨기에 머리에는 이슬이 가득하였고,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주님과 우리 사이에는 창살이 가로막고 있으며, 우리는 주님께 문을 열어주지 않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애절하게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14절입니다.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내가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전에는 창살로 주님을 가로막았는데, 이제는 깊은 낭떠러지에 숨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후에 하나님이 찾아오시자 나무 뒤에 숨은 것처럼 사람들은 주님을 피해서 숨고 있습니다. 주님은 사람들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시지만 사람들은 자꾸 주님을 피합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려면 먼저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계 3:20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주님은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십니다.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하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계 3:20을 그린 성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문 앞에 서 계신 그림입니다. 그 그림에는 바깥쪽에는 문고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문은 마음의 문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문은 안에서만 열 수가 있습니다. 스스로 열지 않으면 열리지 않고, 주님께서 안으로 들어가실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려면 죄악의 창살을 제거해야 합니다. 본문 9절을 보면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라고 말씀합니다. 솔로몬이 술람미의 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창살 틈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가려진 창살은 우리의 죄악입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가 주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습니다. 사 59:1,2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죄악의 철창이 주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기에 주님과 함께 하려면 죄를 자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주님을 보는 것입니다.
3. 주님은 우리에게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10절과 13절에서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말합니다. 술람미는 솔로몬과 함께 가기 위해서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 이 말씀이 주는 메시지는 우리에게 영적으로 깨어나라는 메시지입니다. 엡 5:14에서는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고 말씀합니다. 영적으로 나태하고 게으른 사람들은 영적으로 잠든 상태에 있습니다. 세상 문화에 깊이 빠진 사람들, 육체의 정욕과 쾌락에 빠져 헤매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잠들었고 영적 감각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영적으로 깨어나야 합니다. 일어나야 합니다.
남들은 다 은혜를 받는데 유독 은혜를 못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설교가 마음에 들려오지 않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립니다. 영적으로 잠든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설교를 하는데 한사람이 설교시간 내내 졸았습니다. 목사님이 설교 도중에 “하나님 편에 있는 자들은 다 일어나 보세요”라고 했는데 잠든 사람만 그대로 앉아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다시 “악마 편에 있는 자는 일어나 보세요”라고 했는데 잠들어 있던 사람은 일어나란 말만 듣고 벌떡 일어났습니다. 모두가 당황했습니다. 그는 일어나서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저는 이 세상 끝까지 목사님을 따를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목사님과 저만 같은 편입니다. 목사님과 저만 일어나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11-13절을 보면 술람미가 일어나야 할 이유, 깨어나야 할 이유를 말합니다.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12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13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봄이 왔으니 일어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주에는 하나님이 만드신 거대한 시계가 있습니다. 그 시계대로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옵니다. 꽃은 자기가 가진 생체시계에 맞게 핍니다. 개나리는 3월에 피고, 백일홍은 6월에 핍니다. 해바라기는 7월에 핍니다. 희한하게 꼭 그때 핍니다. 자연은 하나님이 만드신 정확한 시계에 따라 움직입니다. 사람에게도 생체시계가 있습니다. 밤이 되면 자야하고 아침이 되면 일어나야 합니다. 낮에도 늘 자는 사람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건강할 수 없습니다. 솔로몬은 술람미에게 겨울이 가고 봄이 되었으니 일어나라고 깨어나라고 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사람의 생체 시계를 가지고 영적인 면을 설명했습니다. 롬 13:11-14입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지금은 영적으로 깨어 있을 시간입니다.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일어나라는 말은 깨어나라는 말이고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마 26:41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주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기도하실 때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깨어서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에 듭니다. 깨어서 기도하지 않으면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고 육신에 굴복합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경고를 들었지만 깨어서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주님이 잡히시자 다 도망을 쳤고 베드로는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우리는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깨어서 기도하려면 반드시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깨어 기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4. 주님은 우리와 함께 가자고 하십니다.
10절에서 솔로몬은 술람미에게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하셨습니다. 13절에서 다시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우리와 어디를 함께 가자고 하시는 것일까요?
①사랑의 교제의 자리로 함께 가자.
한 젊은 목사님이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학생들과 함께 수련회에 갔습니다. 잠을 자고 난 후 아침에 학생이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간밤에 행복한 꿈 꾸셨나 봐요?” 그러자 목사님의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왜냐하면 목사님이 꿈 속에서 아내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여보! 사랑해.”라고 잠꼬대를 했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시치미를 뚝 떼고서 “잘 모르겠는 데”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이 의외의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정말 대단하세요. 어쩌면 주무시면서 까지도 예수님을 부르실 수 있죠?” 그 학생은 “여보! 사랑해.”를 “주님! 사랑합니다.”로 잘못 들은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과 깊은 사랑에 빠져서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마가복음 3:14에는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목적 때문에 열두제자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는 함께 있게 하시려는 목적이었고 또 하나는 사역하게 하시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순서입니다. 사역보다 함께 있는 것이 먼저입니다. 주님에게는 우리가 사역하는 것보다 주님과 교제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사역보다 사랑의 교제가 우선입니다.
14절입니다.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내가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주님은 우리의 얼굴을 보기 원하시고, 우리의 소리를 듣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한 사랑에 깊이 빠지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에게 우리의 소리는 부드럽게 들리고, 우리의 얼굴은 아름답게 보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주님에게 우리의 사랑을 고백하는 목소리를 들려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얼굴을 보여드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연인이 은밀한 사랑을 나누듯이 우리는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에서 주님과 깊은 사랑을 나눠야 합니다.
②생활의 자리로 함께 가자
“일어나서 함께 가자”는 말씀은 삶 속에서 주님과 함께 웃고 함께 울고 함께 일하고 함께 생활하자는 말입니다. 이 부분의 모델은 에녹입니다. 에녹은 평범하게 자녀를 낳고 생활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였습니다. 그는 금욕주의도 신비주의도 은둔주의도 아닌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이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중세의 수도사들은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 산이나 사막으로 갔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특별히 사랑해서 주님에게만 집중하고 싶어서 세상과 구별된 장소를 찾았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향한 그들의 열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바람직한 것은 교회에서는 주님을 만나 영적인 힘을 공급받고, 그 힘으로 세상에서 평범하게 살면서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산이나 사막의 소금과 빛이 아니라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자동차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 간직하려고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도로 위를 달리며 교통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만들어졌습니다. 자동차가 도로에 나가지 않는다면 자동차로서의 길을 포기한 것입니다. 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속으로 가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삶은 불가능합니다. 건강한 그리스도인은 교회에서는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영적인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 힘으로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주님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③사역의 자리로 함께 가자.
그리스도인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입니다. 영적인 백수가 돼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크든 작든 주님을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주어진 사역이 없으면 중보기도에 헌신하시고, 전도에 힘을 쓰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행 23:11입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바울이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로마로 갈 때 주님께서 바울과 함께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면 우리와 함께 해주십니다.
④십자가의 자리로 함께 가자.
마태복음 26:46입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사람들에게 잡히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함께 십자가의 자리로 가자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주를 위하여 죽음의 자리도 마다하지 말라는 말씀이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요 11:11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친구 나사로가 병들었으니 함께 유대로 가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때의 상황은 유대로 갈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얼마 전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다시 유대로 가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도마가 요 11:16에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도마는 주님과 함께 가면 죽을 수도 있지만 주님과 함께 가겠다고 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꽃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좁고 협착한 길을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 되도 예수님과 함께 가고, 잘못 되어도 예수님과 함께 가야 합니다. 풍부해도 예수님과 함께 가고, 궁핍해도 예수님과 함께 가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과 우리는 영적인 신랑과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사랑의 띠로 하나 된 부부와 같기 때문입니다.
⑤영원한 천국으로 함께 가자.
솔로몬이 술람미와 함께 가고 싶은 곳은 자신의 동산입니다. 12,13절에 보니 이 동산은 꽃이 피고 새와 비둘기가 노래하는 곳입니다. 그곳은 무화과나무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발합니다. 은혜의 동산, 축복의 동산이요. 기쁨의 동산이며, 에덴이며, 영원한 천국을 보여주는 동산입니다.
태평양의 황금새는 알래스카에서 부화되어 자랍니다. 다 자란 어미 새는 새끼를 부화하는데, 그 새끼가 날갯짓을 하게 되면 어미 새는 하와이로 날아갑니다. 알래스카에서 하와이까지는 2000마일이 넘습니다. 그런데 황금새는 며칠간 마시지도, 먹지도, 쉬지도, 자지도 못하면서 하와이까지 날아갑니다. 나침반도 없고 지도도 없고 안내자도 없는데, 정확하게 하와이에 도착하여 남은 생애를 거기에서 삽니다. 알래스카에서 자란 모든 황금새는 어미 새가 되면 그렇게 하와이로 갑니다. 그것이 황금 새의 코스입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 결국은 두 코스로 갑니다. 천국의 코스와 지옥의 코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천국의 코스고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의 코스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믿으므로 주님과 연합했으며,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주님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오늘은 술람미를 향한 솔로몬의 사랑과 요청을 살펴봤습니다. 주님은 솔로몬의 사랑과 요청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이 말씀이 주는 메시지는 이렇습니다.
1.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2.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고 싶어 하십니다. 사랑의 본능입니다. 우리는 주님에게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그리고 죄악의 창살을 제거해야 합니다.
3. 주님은 우리에게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으니 깨어나야 합니다. 자다가 깰 때가 되었습니다.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4. 주님은 우리와 함께 가자고 하십니다. 어디로 가지고 하십니까? ①사랑의 교제의 자리로 함께 가자. ②생활의 자리로 함께 가자 ③사역의 자리로 함께 가자. ④십자가의 자리로 함께 가자. ⑤영원한 천국으로 함께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