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규-돌의 사상
-분야: 어문 > 수필 > 중수필/평론
-저작자: 고석규
-원문 제공: 한국저작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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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나를 녹이는 것은 신의 필연이며 내가 신의 열을 빼앗는 것은 나의 행위이다.―
만일 보편적인 허무관념에서 광물의 냉각과 같은 이마아쥬를 동의한다면 20세기를 노쇠한 벽으로 알았을 때 이 불안의 각부를 점유하고 있는 것은 역시 돌의 밀집한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폭파와 환원의 시간을 당하여도 그는 무형에의 강제를 거부하면서 있다. 찌푸린 산악의 표정과 균열된 도시의 한가한 폐허는 분산적인 실존의 위치에서 저마다 인간을 조소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공간의 마지막 대조는 높은 하늘의 구름과 저 무너진 돌담의 따뜻한 노을빛일런지도 모른다. 꽃이 피어나지 말게 할 것이며 소리도 일지 말게 할 것이며 한 점 그림자도 머물지 못할 것이다. 굳어져 가는 화석의 의지는 저 벽을 바라보는 우리들 마지막 진혼의 의지다. 결별의 의지다.
그러나 저 돌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였던가. 부족전체가 나서 건축하며 조각하던 이집트의 역사는 어디로 갔으며 앗시리아의 자연석 사원과 인도의 신비한 탑파(塔婆)는 어떻게 연멸한 것이가.
또한 시스텐 성당 앞에 세워진 입체상에 금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법왕의 비난을 들었을 때 미케란젤로는 어떻게 대답하였는가. 프로렌스의 마지막 천재인 그는 카루라라 산중에서 팔개월 동안이나 율리우스2세의 기념비를 위한 가장 완전한 대리석을 찾아 헤매었다. 그리고 다빗드의 머리 위에는 조각되지 않은 돌멩이 하나가 아직도 얹혀 있으니 그 돌은 가공되지 않은 카루라라 산의 돌빛을 그대로 전하고 있는 것이다.
어두운 돌 속에 새로운 〈총체의 비밀〉을 새기면서 르네상스의 거장들은 하나의 신념(神念)에 삶을 바쳤다. 바로스 산(産) 담홍(淡紅)빛 평면 위에 인간의 이해와 고민 정열의 호흡을 차츰 부어갈 때 생명의 투시와 비장의 발산을 위하여 돌은 이상한 정적에 그대로 취하는 것이었다. 돌은 미화되어 주랑(柱廊) 신전에서 새벽을 기다리는 정신의 침묵이였고 신앙의 눈부신 거울이었다. 그때야말로 돌의 사상에는 서로 정열과 진실의 방향을 인간에게 호소하는 치열한 므우브망이 잠재하였었다. 그들은 〈전이념(全理念)〉의 향기를 지키면서 윤곽과 색채를 종합한 약동하는 생명 그것으로 발현되었다. 20세기의 완전한 예술가 A.로당의 귀발(鬼拔)한 작품들은 이 풍요한 신성(神性)을 의연한 미래적 조형으로 재생시킨 것이었으며 로당의 〈창조〉를 지지한 R.M.릴케의 순수한 결벽도 또한 「돌속에 숨은 우주의 빛깔」을 투시할 수 있는 차원까지 스스로를 높이었다. 돌은 화려한 운명이었다. 모순의 쓸쓸한 빛깔에 젖은 돌은 무덤 위에 그늘을 늘인 채 우리들의 영원한 입술을 맞이한다. 정신의 맑은 양지에서 그의 신비는 빛나는 예지에 충만했고 그의 발산은 신의 장엄한 무게였다. 모든 인간성의 기념비였다. 존재의 환한 육체이며 질서였다. 바티깐에서, 루우블에서 볼리티유에서 그들은 멸하지 않는 영기(靈氣)에 싸인대로 영원히 고독하다.
그러나 다시 우리에게는 코린토스 성채(城砦)의 샘물을 하늘의 노여움보다 쉽게 택할 수 있었던 시지퍼스의 신화가 있다. 그러한 현실이 있다.
호멜로스는 시지퍼스의 사신(死神)에게 철쇄를 얽어놓은 제일인자라 한다. 명부(冥府)의 주신(主神) 하티스는 전쟁신을 급파하여 시지퍼스의 압제에서 사신을 해방시켰다. 이리하여 전쟁이 죽음을 해방시킨 뒤 시지퍼스가 당도한 지옥엔 형벌의 바위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이 역설은 오늘날 부조리의 설명으로 우리 앞에 내리온다. 밝은 해만(海灣)과 빛나는 언덕의 미소에 떠나간 시지퍼스의 운명은 그대로 체포된 죽음이었다. 신의 엄명은 그 거대한 바위를 몇 백 번 산의 절정까지 밀고 올리는 무익한 노동을 그에게 영원히 강요한 것이다. 시지퍼스의 검은 근육과 두드러진 핏줄과 얼룩이는 눈물이 보인다. 그것은 산적(山賊)과 같은 직업이었다.
이렇듯 환원을 거절하는 돌은 인간의 형벌을 위하여 상징된 것이다. 전쟁의 저편에서 미의식의 결핍에서 허다한 지성들이 이 비극의 신화를 읽고 듣고 공명한다. 『지하실의 수기』에서 도스또예프스끼이는 "불가능이란 돌의 장벽이다" 라고 외쳤고 그것은 인간의 결론이 아니라고 하였다. 또한 까뮤는 작품 『결혼』에서 아래와 같이 말한다.
돌에 동의하자. 부조리와 돌의 사상을 믿는 것은 심장의 공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확실히 돌을 멸망시킬 수는 없다. 사람들은 돌의 장소만을 옮길 뿐이다. 아무렇게나 돌은 스스로를 사역하는 사람들보다는 영구하리라. 말하자면 돌은 사람들의 행동의사를 지지하면서 그 무익한 노동을 사람들에게 대립해 준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노동의 수락은 사람들의 선택에 달린 것이다.
〈나〉를 빼앗아 가는 우주의 침략을 이해하며 작약과 유연에 휩쓸린 그의 형체 위에서 처량한 황혼 앞에 헐벗은 우리들 동려(同侶)가 모다 마지막으로 썼을 때, 과연 환원되지 않았던 그의 절망과 의지는 무자비한 내열로써 아직 끓고 있을 것이다.
돌은 피조물의 아우성이다. 스스로 지닌 욕망과 뜻, 그리고 영광과 고뇌를 멸하여 버린 자는 다시 울기 시작할 것이며 어느 듯 바위 위에선 꽃들이 피어날지도 모른다.
「무로 돌아가자!」 몇 천 년 동안 이 크나큰 부르짖음은 몇 백만의 인류를 선동하여 깊은 골짝으로 벌판으로 나오게 하였다. 허무는 절대보다 훨씬 도달하기 어려운 것이니, 다시 프로렌스 제신에게 버림받은 모든 우상들은 그 위대한 사원 속에서 흙 묻은 발로 서 있는 것이다.
아리안느의 돌! 동양의 산! 돌은 오래전부터 표상의 재료였는데 오늘엔 반사적 의의에서 다시 〈귀의적 실재〉로 변하여 간 것이다.
그 빛깔과 숨결이 짙어 숨은 돌의 울적을 우리가 대결해 인식하는 것은 일체의 무덤 위에 우리의 꽃과 눈물을 다시 바라볼 수 있는 역신(逆神)의 아름다운 정경을 믿는 것만이 아니다. 돌의 사상은 영원에의 묵묵한 추이(推移)인 것이다.
《1953. 10. 7. 초극》
<재편집: 오솔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