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11
2월24일[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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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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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PI8tp8hGLtg (조영훈 스테파노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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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단식, 위로부터 오는 은총을 준비하는 작업!>
언젠가 깊은 속병이 들어, 본의 아니게 한 일주일 강제로 단식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 이틀은 그런대로 견딜 만했는데, 사흘이 지나가니 정말이지 돌아버리겠더군요. 가장 견디기 힘든 순간은 식사 시간보다는 야식(夜食) 시간이었습니다.
밤 9시 반만 되면, 이 병실 저 병실 분산되어 있던, 약간은 ‘날리리성’ 분위기가 풍기는 환자들이 속속 모여들었습니다. 뭔가 대단한 비밀 작전이라도 수행하는 듯, 의료진 몰래 둘러앉은 그들은 미리 준비해온 통닭이며 족발을 꺼내놓고 낄낄대며 뜯어대곤 했는데, 그 냄새 하며, 소리하며, 정말이지 견디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때 당시 제가 느꼈던 철저한 소외감과 고독함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발적 단식이라는 것, 정말이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식욕을 본인 스스로 억제한다는 것, 보통 의지로 해내기 힘든 일입니다.
교회 역사 안에 위대한 인물들은 대체로 단식을 했습니다.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예수님께서도 장장 40일간 단식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영도자 모세라든지 대 예언자 엘리야도 대단한 단식가였습니다.
세례자 요한 역시 단식과 관련해서 둘째가면 서러워할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밥 먹는 것 이상으로 단식을 자주 했습니다. 철저한 신앙인들이었던 바리사이들 역시 일주일에 두번 꼬박꼬박 단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식과 성덕은 늘 함께 가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단식을 많이 하는 사람은 그만큼 하느님 가까이 서 있는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단식은 영혼이 육체를 통제하고 지배함을 뜻합니다. 단식은 위로부터 오는 은총을 준비하는 작업입니다. 단식하는 동안 한 인간은 높은 곳으로부터 오는 은총에 민감해집니다. 단식을 통해 한 인간은 악과 유혹을 억누르고 영혼을 드높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대축일 전에 신자들을 단식에로 초대했습니다. 영성가들은 단식을 통해 자신의 육체를 단련시키고 영적으로 성장시키고자 노력했습니다.
이토록 단식이 영성 생활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단식과는 별로 상관없이 살아가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질문을 던집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마태오 복음 9장 14절)
예수님의 대답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대답, 너무나 뜻밖인 대답이었습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럼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오 복음 9장 15절)
예수님께서는 부차적인 측면, 비본질적인 내용들은 생략하시고, 곧바로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십니다. 서론을 생략하시고 곧바로 결론으로 들어가십니다.
예수님 당신이 지상에 머무시는 기간은 하느님과 인류가 혼인을 맺고 잔치를 벌이는 시간임을 선포하십니다. 혼인 잔치 기간에 어울리는 것은 음주나 가무, 노래와 축제이지, 단식이나 고행, 슬픔이나 곡소리는 해당하는 것이 아님을 알려주십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신랑이신데, 그 신랑이 지금 신부를 선정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신부의 이름은 ‘부름을 받고 선정된 이’라는 의미를 지닌 에끌레시아(Eclesia, 교회)인 것입니다.
신랑이신 예수님께서는 지상 교회를 신부로 맞이하시고, 이제 신부와 함께 혼인 잔치를 시작하시는데, 제자들과 신자들은 이 장엄한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손님들입니다.
따라서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손님들은 너무나도 당연히 즐겁고 유쾌해야 합니다. 갖은 인상을 다 쓰면서 단식할 것이 아니라, 더없이 행복한 얼굴로 먹고 마시고 즐겨야 할 것입니다.
다만 혼인 잔치가 끝난 다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로 가셔서 신부의 집을 마련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배로 선정된 교회는 아직 결정적으로 신랑의 집으로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교회는 강생과 종말 사이, 첫 번째 오심과 재림 사이에 끼어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는 기쁨과 슬픔, 획득과 미획득, 축제와 단식이 거듭 교차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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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바리사이들처럼 의무적이고 형식적인 단식 행위로는 부족합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 사회를 주름잡던 몇몇 부류가 있었습니다. 로마 황제의 식민 지배를 거부하며, 무장 투쟁까지 불사하던 혁명 당원들이 있었습니다.
사해 부근에 공동체를 건설했던 엣세네파도 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종교 행위를 인정하지 않고 유다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로마 제국의 압박에도 끝까지 율법을 준수하다가 몰락했습니다.
제사장이나 영주, 법률가, 거상 등 상류층 인사들로 구성된 귀족 그룹인 사두가이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 외의 것은 무조건 배척했습니다. 죽은 사람들의 부활, 영혼의 불멸, 메시아에 대한 믿음을 거부했습니다.
중류 계층 사람들이 주요 구성원이었으며, ‘구별되다’는 의미를 지닌 바리사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알지도 따르지도 않는 무식한 사람들과 자신들을 구별하였고, 철저하게 율법을 지켰으며, 자칭 거룩한 자신들끼리만 상종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안식일에 낳은 계란을 먹어도 되는가? 안되는가?’ 같은 일생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일에 목숨을 걸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구세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전까지 전국민적,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도 나름 하나의 큰 세력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다들 각자의 신념 안에 최선을 다해 신앙생활을 해왔던 사람들이었는데, 단식과 관련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리사이들과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었습니다.
하루는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단식과 관련된 질문을 던졌습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마태오 복음 9장 14절)
예수님 시대 단식과 관련해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참으로 놀랍고도 대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 율법의 규정에 따르면 일 년에 단 한 번 속죄의 날에만 단식이 의무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름 엄청 열심한 사람들이었던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일 년에 한번 속죄의 날 단식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틈만 나면 단식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여러 날들을 기억하고 애통해하며 단식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매주 두번, 월요일과 목요일에 단식했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명쾌하기 그지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메시아로 세상 사람들 사이에 현존하시는 이 구원의 시기를 혼인 잔치에 비유하면서, ‘단식을 무슨 얼어죽을 단식이냐?’며 반대로 기뻐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이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오 복음 9장 15절)
참으로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혼인 잔치에 손님으로 온 사람이 잔뜩 차려진 산해진미와 고급 포도주 앞에서 침통한 얼굴 하고 있으면 분위기 완전 망칩니다.혼인 잔치 손님으로서 취할 가장 적절한 태도는?
혼인 잔치의 주인공인 신랑과 함께 잔치를 즐기는 것입니다. 세상 가장 행복한 얼굴로 지금 이 순간을 만끽하는 것입니다. 잘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그러나 언젠가 하객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 즉 예수님께서 수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돌아가실 날, 그들은 단식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하고, 그분의 죽음에 참여하며, 그분이 재림하시는 날을 기다린다는 의미에서 단식을 실천합니다.
바리사이들처럼 의무적이고 형식적인 단식 행위로는 부족합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기꺼이 참여하고, 매일의 삶 속에서 그분과 함께 기쁘게 죽고자 하는 의지와 함께 이루어지는 단식이야말로 주님께서 기뻐하실 단식이며, 이번 사순시기에 필요한 단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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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단식할 줄 아는 사람만이 신랑을 차지한다>
영화 ‘노트북’(2020)은 니콜라스 스파크가 자신의 조부모의 사랑 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만들어진 멜로드라마 영화입니다.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0년대, 미국 남부 지방의 시골 마을에서 시작됩니다.
주인공인 노아는 전쟁 참전 중에 있던 형제를 잃고 군인으로 복귀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서 그의 아버지와 함께 나무를 베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그는 그녀와 마주치게 되는데, 이는 로즈라는 여성입니다. 그녀는 부유한 가문에서 자란 예쁜 소녀이며, 대학을 졸업한 뒤 지금은 자신의 일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둘은 서로에게 끌리게 되어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로즈의 부모님은 노아와 로즈의 결혼을 반대합니다. 로즈는 노아를 사랑하지만 부모님의 의사에 따르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노아에게 이별을 알리고, 도시로 떠나 버립니다. 노아는 로즈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고 결혼까지 약속했음을 알지만, 그래도 로즈에게 매일 편지를 보내고 로즈에게 지어주기로 약속한 집을 짓습니다.
그렇게 멋진 집을 지어 신문에 광고가 나게 되고 결혼을 준비하던 로즈는 이 사실을 알고 돌아옵니다. 하지만 여전히 가난한 노아와의 결혼은 망설여집니다. 이때 노아는 로즈에게 매일 편지를 썼고 그것을 어머니가 가로챘음을 알게 됩니다. 로즈는 매일 자신에게 쓴 노아의 편지를 읽으며 결국 노아와 결혼합니다.
그런데 노아는 또 로즈를 빼앗깁니다. 로즈가 치매가 들어 자신들의 러브스토리를 잊게 된 것입니다. 노아는 지난날의 자신들의 이야기를 노트북에 적어 그녀에게 매일 읽어줍니다. 그리고 잠시 기억이 돌아올 때 매우 행복해합니다. 이렇게 노아는 끊임없이 로즈를 무언가에게 빼앗기려 할 때 그녀를 되찾을 노력들을 하였습니다. 그 노력들의 결과가 마지막 순간 둘이 서로를 기억하며 함께 눈을 감는 축복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단식’에 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단식은 당신을 빼앗겼을 때 그것을 되찾아오려는 목적으로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누군가에게 빼앗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어디에 빼앗길까요? 성체를 영한다고 내 안에서 항상 살아계시는 것이 아니라 ‘못된 소작인의 비유’처럼 우리 안에서 그분을 빼앗고 죽이는 이들에게 납치를 당하게 방치될 수도 있습니다. 바로 탐욕과 육욕과 교만이라는 적에게 빼앗깁니다. 그때마다 우리가 그분을 되찾아오는 노력을 해야 하는데 이를 ‘단식’이라고 합니다.
노아가 로즈를 위해 집을 짓고 수리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단식이고 이미 결혼한 로즈를 위해 매일 편지를 쓰는 일이 단식이며 치매라는 병에 빼앗긴 로즈를 위해 지난 날의 이야기를 읽어주는 일도 단식입니다. 그러나 로즈가 돌아왔을 때는 단식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식의 목적은 잃어버린 상대를 되찾기 위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제가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목소리를 들을 때 저는 단식하고 있었습니다. 일주일을 하려고 했는데 고작 사흘째 되는 날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신랑을 되찾은 것입니다. 그러면 계속 단식해야 했을까요? 바로 내려가서 밥을 먹었습니다. 잃어버린 신랑을 되찾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저의 세속-육신-마귀에게 예수님을 빼앗길 때는 단식합니다. 왜냐하면 단식하여 받는 고통이 그분을 잃는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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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동창 신부님 중에 운동을 좋아하는 신부님이 있습니다. 처음 시작은 저와 비슷한데 시간이 지나면 신부님과 저는 실력에서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처음에 스키를 배울 때입니다. 저는 내려오는 법과 넘어지는 법을 배우고 바로 리프트를 탔습니다. 몇 번 넘어지는 일이 있었지만, 곧잘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십년이 지났지만 저는 늘 그 정도의 실력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동창 신부님은 강사에게 레슨을 받았습니다. 매번 스키장에 갈 때마다 레슨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실력이 비슷했는데 나중에 보니 신부님은 최고급 코스, 최고 난도 코스에서 쉽게 내려왔습니다. 저는 스노보드는 엄두도 못 내는데 신부님은 그것도 유연하게 타고 있습니다. 역시 레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테니스도 비슷합니다. 신학생 때 동료들의 어깨너머로 배웠습니다. 늘 B그룹에서 테니스를 쳤습니다. 신부님은 테니스도 레슨을 정확히 받았습니다. 그리고 당당하게 교구 사제 테니스 대회에 출전하였습니다. 독학으로 배우는 것도 좋겠지만 운동은 레슨을 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잘못된 습관을 고칠 수 있고,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속담에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본인도 잘 모르면서 남에게 충고하는 사람을 뜻하기도 합니다. 요즘은 구글 검색이 있어서 웬만한 선무당들은 명함을 내밀기 어렵습니다. 건강에 대해서도 잘못된 상식을 믿고 따라 했다가 오히려 건강을 해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쉽게 얻는 것은 쉽게 나간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노력하지 않고, 땀 흘리지 않고 그냥 얻어지는 것들은 마치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무당처럼 잘못된 길을 알려주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교만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들은 단식의 의미를 모르면서 단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하였습니다. 율법의 의미를 모르면서 율법을 따를 수 없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취급하였습니다. 봉헌의 의미를 모르면서 과부의 헌금을 조롱하였습니다. 안식일의 의미를 모르면서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예수님을 단죄하였습니다. 회칠한 무덤처럼 안에는 썩고 있으면서 겉만 화려하게 꾸미고 있었습니다. 스키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으면서 스키를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 가르치려 했던 저의 모습도 떠오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들의 가르침은 따르지만 저들의 행동은 배우지 마라.”
오늘 독서는 단식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단식은 율법과 규정에 따라서 지켜야 하는 행위입니다. 교회는 재의 수요일과 성금요일에 단식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굳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단식하다고 하면서 일꾼들을 다그치거나, 이웃과 다투고 못된 주먹질을 한다면 그것은 참된 단식이 아니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좋아하는 단식은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실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見月望指”라는 말이 있습니다. ‘달을 보라고 달 쪽을 향해 손짓했더니,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 끝만 본다.’라는 뜻입니다. 돌아가신 성철 스님께서 말씀하신 뒤로 여러 사람에게 알려졌습니다. 작은 일에 신경을 쓰다가 큰일을 잊는 다거나 본질을 잊고 곁가지에 한눈을 파는 경우를 이르는 말입니다.
교회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성전 건축에 쓰인 금액, 헌금의 액수, 신자 수 등을 먼저 보게 되는 경우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교회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봉사와 활동입니다. 본당의 예산은 찬조와 나눔을 위해서 쓰여야 합니다. 지역의 현안을 함께 고민하고, 지역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서 연대하는 것도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교회는 지금의 현실에 안주하려 하고, 외적인 성장에 집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단식이라는 그릇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그릇에 ‘무엇을 채우는가!’입니다. 나의 몸을 채우는 것이 ‘사랑, 자비, 희생, 나눔’이 될 때 우리는 진정한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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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일 아침 미사를 하기 전에 산보를 하였습니다. 잘 보이던 신호등이 흐릿하게 보였습니다. 제의실에서 제의를 입으면서 알았습니다. 안경을 집에 놓고 왔습니다. 경본도 흐릿하게 보였고, 성당에 계신 교우분들의 모습도 흐릿하게 보였습니다.
그날 제2 독서의 내용은 바오로 사도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였습니다.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만 생각하니 세상이 흐릿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안경을 놓고 온 것이었습니다. 미사 후에 숙소에 와서 안경을 다시 쓰니 세상이 다시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맞습니다. 세상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세상을 탓하고,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과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이것이 사순시기를 지내는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병에 걸린 사람들은 서로의 아픔과 마음을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목감기가 심해서 코로나 검사를 받았는데 양성반응이 나왔던 신부님이 쓴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제목은 ‘감염자’입니다. 신부님께서 더욱 건강한 모습으로 교우들과 함께 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나의 숨소리 나의 손길 나의 몸짓 흔적 모두가 위험과 기피의 대상, 불결한 바이러스에 오염되었으니 격리 정화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 나는 위험하니 가까이 오지 마세요. 외쳐대는 성서의 나병환자처럼 나 땜에 덩그러니 텅 비워버린 성당에서 Mea Culpa Mea Culpa(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난생처음 유배인지 격리인지 정화와 치유의 시간을 갖는다. 매일같이 정신없던 사제관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다. 쉴 새 없이 울리던 폰도 수없이 들락거리던 사람들도 이제 이집은 감염자의 집이라 주의 경계의 집이 되었다.
수없이 많은 이들의 병고와 고통 받는 이들의 사연을 들으면서 같이 아파하고 같이 나눈다면서도 남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될 수 없었는데 이렇게 내 몸뚱아리 아파보면 아! 아! 맞아! 이렇게 아팠고 이렇게 두려웠을 거야.
그 많은 이들이 참 어떻게 견디었을까? 그 아프고 힘든 시간들을... 삶은 그 자체로 어쩌면 영웅적이야 뭐 세상에 이름 내고 높은데 올라가 엄청난 일을 이루고 해서가 아니라 인생의 아픔 고통 병 헤어짐 속에 얼마나 엄청난 용기와 신앙을 필요로 하는지 코로나로 좀 더 나은 인간이 되려나."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단식(斷食)’의 의미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견월망지(見月望指)’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달을 보라고 달 쪽을 향해 손짓했는데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 끝만 본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에게 이와 같은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율법을 지켜야 하는 근본적인 의미,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하시면서 이야기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많은 비유의 말씀들은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지 말고, 참된 진리를 볼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고 계십니다.
단식이라는 ‘그릇’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그릇에 담는 것입니다. 나의 몸을 채우는 것이 ‘사랑, 자비, 희생, 나눔’이 될 때 우리는 진정한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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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9,14-15: 신랑을 빼앗길 그 때에 가서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단식한다고 거창한 말로 떠들어 대거나 창백한 얼굴로 뽐내며 지나치게 소문내고, 하느님의 눈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기 위해 단식한다면, 그런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기쁨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15절) 하신다.
예수님께서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은 당신의 제자들이 단식할 필요가 없다고 하신 것은, 그분이 함께 계실 때의 기쁨과 그분께서 계시는 동안, 즉 마음의 빛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동안에는 누구나 거룩한 양식을 누리는 것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의미하고 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모시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생명의 양식에 굶주리며 버려질 것이라는 말이다. 신랑을 누려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단식을 책망하셨던 것은 그들이 하는 단식행위 자체만으로도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하였고, 자신들 또한 ‘하느님께 이보다 더 무엇을 해드릴 수 있을까?’ 하면서 자위하는 교만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들의 이러한 행위를 오늘 독서에서 맹렬히 비난하고 있다. “제 머리를 골풀처럼 숙이고 자루 옷과 먼지를 깔고 눕는 것이냐? 너는 이것을 단식이라고, 주님이 반기는 날이라고 말하느냐?”(이사 58,5)
이 말씀은 오늘의 모든 위선자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이기도 하다. 이 말씀은 하나의 경고이며,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 모두에게, 그리고 지금 여기 있는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다운 단식이란 이런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우리가 성경 필사를 하면서, 성경을 읽으면서 무수히 들어온 말씀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무심히 지나쳤고 법조문만 지키는 율법주의자로 살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6-7).
이것이 진정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단식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적어도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같이 남에게 보이려는 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성경의 말씀과 같이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완성되는 단식을 할 수 있도록 하여 주님의 은총을 받는 우리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 적어도 우리의 단식과 금육재는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이러한 삶을 이 사순시기에 실천하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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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단식>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4-15)
1) 예수님은 우리를 굶기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먹이려고’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영적인 굶주림’만 걱정하신 것이 아니라, ‘육신의 배고픔’도 걱정하셨습니다.(마태 15,32) ‘빵의 기적’을 행하셔서 사람들에게 주신 빵은 분명히 육신을 배부르게 해 준 빵이었습니다.(마태 14,20)
2) 그리스도교는 ‘굶는 종교’가 아니라 ‘먹는 종교’입니다. <우리 교회의 중심에 있는 미사 전례는, ‘말씀’을 받아먹고, ‘성체’도 받아먹는 예식입니다.> 다른 종교들을 보면, 단식을 중요한 신심 행위로 여기고 실천하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 교회에서는 단식이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가 ‘먹는 종교’라고 해도, ‘함께’ 먹어야 한다는 것과 혼자서만 먹는 것은 죄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3)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생활이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생활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8,20) 또 어느 안식일에 사도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다가 바리사이들과 다툰 일도 있었습니다.(마태 12,1-2) 예수님과 사도들의 실제 생활은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더 많은, 아주 고달픈 생활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단식할 수도 없고, 단식이 무슨 의미 있는 신심 행위가 되지도 못합니다.
오늘날에도 지역에 따라, 또는 나라에 따라, 또는 개인 사정에 따라 정말로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림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정해진 날에는 단식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고, ‘사랑 없는’ 일입니다.
단식은 평소에 잘 먹으면서 사는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지, 모든 사람이 일률적으로 지킬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단식은 의무가 아니라 권고로 바꾸는 것이 옳습니다.
4) 우리 교회의 모든 신심 행위의 기본 정신은 ‘감사’입니다. 단식의 기본 정신도 ‘감사’입니다. 우리는 그냥 한 끼를 굶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극기와 절제로 남긴 음식을 굶주리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데, 그 ‘나눔’도 받은 은총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하는 일입니다. 감사하는 마음도 없고, 나눔을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굶기만 한다면, 그런 단식은 아무 의미도 가치도 없는 일입니다.
5)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실천한 단식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단식’이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요한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 즉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대부분의 바리사이들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구약시대의 단식은 하면 안 되는 일입니다. 메시아께서 이미 오셔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라는 말씀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여기서 표현은 ‘손님들’이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 뜻으로는, 신앙인은 손님들이 아니라 신랑과 함께 있는 신부입니다. 즉 ‘혼인 잔치’는 남의 잔치가 아니라 나의 잔치입니다. 신랑은 남의 신랑이 아니라 나의 신랑입니다.>
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단식에는 중요한 문제점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것은 사람들에게 신심을 과시하기 위한 단식이었다는 점입니다.(마태 6,16) 이야기 속에 있는 질문도 자기들의 신심을 과시하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단식을 철저히 실천하는 충실한 신앙인들이다. 그런데 당신들이 단식을 하지 않는 것을 보니 당신들은 사이비다.”>
6) 예수님 말씀의 ‘신랑을 빼앗길 날’이라는 말은, 좁은 뜻으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의 날을 가리키고, 넓은 뜻으로는 신앙인들이 죄를 짓고서 예수님에게서 멀어져 있는 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수난 때에 사도들은 너무 큰 충격과 슬픔에 사로잡혀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잠도 못 잤을 것입니다. <일부러 단식을 한 것 같지는 않지만, 단식을 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다음에는, 사도들과 신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날에 자기들이 비겁하게 행동했던 것을 뉘우치면서, 또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에 동참하기 위해서 단식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단식의 뜻에 ‘수난과 죽음’만이 아니라 ‘부활’도 포함해야 합니다.>
그리고 죄를 지어서 멀어졌든지, 아니면 마음이 풀어져서 멀어졌든지 간에, 예수님에게서 멀어져 있다가 예수님에게로 되돌아가려고 노력하는 경우에 단식은 효과적인 신심행위가 됩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작은아들은 굶주리게 된 다음에야 정신을 차렸지만(루카 15,14-17), 우리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단식을 합니다.
뚜렷이 표시 나게 예수님에게서 멀어진 것이 아니더라도, 좀 더 예수님 곁에 충실하게 남아 있으려고 노력할 때 단식은 효과적인 회개 방법이 됩니다. 그러나 단식만이 유일한 방법은 아니고, 여러 가지 방법의 하나일 뿐입니다.
사실 방법이나 형식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마태 22,37) 주님을 사랑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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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오늘 독서와 복음은 ‘단식’에 대하여 생각하도록 우리를 안내합니다. 오늘 제1독서의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좋아하는 단식의 의미를 풀이해 줍니다. 겉보기에만 그럴듯한 단식이 아니라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자신의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집 없이 떠도는 이들을 자기 집에 맞아들여 환대하고, 헐벗은 이에게 옷을 입혀 주는’ 기쁨의 단식을 하라고 말합니다(58,6-7 참조).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째서 단식하지 않느냐는 질문이 나옵니다. 단식은 많은 종교에서 공통된 신앙 실천 방식입니다. 이슬람교 신자들은 라마단 기간에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단식하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께서 무려 사십 일 동안 아무것도 드시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마태 4,1-11; 마르 1,12-13; 루카 4,1-13 참조).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과 똑같이 단식하라고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반면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의무적으로 단식해야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의 손님들(예수님의 제자들)이 신랑(예수님)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암시하는 표현입니다.
성경은 단식에 대하여 자주 언급합니다. 단식은 회개에 이르는 참회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사순시기에 할 수 있는 대로 단식하며,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단식하신 예수님을 본받을 수 있습니다. 먹지 않음으로써, 먹는 것을 포기함으로써 우리는 다른 더 좋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단식은 정신의 자유와 자신에 대한 통제와 현실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얻도록 해 줍니다. 더 나아가 먹을 것이 없어서 굶고 있는 가난한 이들과 우리 자신을 동일하게 만드는 좋은 방법입니다. 우리는 사순시기에 먹는 것을 단념하고(단식), 단념한 것을 내주며(자선), 우리에게 필요한 빵, 우리가 받아먹어야 할 더 좋은 것을 하느님께 청할 수 있습니다(기도). 무엇보다 우리는 단식함으로써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그분의 부활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내주고 다시 완전히 충만하게 되돌려 받는 생명의 상급에 대하여 묵상하기에 사순 시기는 참 좋은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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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강영구 루치오 신부님]
<참된 단식>
예수님, 당신은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로 물러나 40일간 단식하셨습니다. 당신은 40일간의 재계齋戒와 단식을 통해서 하늘의 소리를 듣고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자 하셨습니다.
단식과 재계齋戒는 비움과 낮춤이며 자기 포기입니다. 당신은 그 빈자리에서 하느님을 만났고 인간 본래의 모습을 꿰뚫어 견성하셨습니다.
광야에서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시정으로 내려오신 이후로 당신이 단식하셨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당신은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린다.”(루카 복음 7장 34절)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자주 단식하며 기도하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시아파 사람들은 세리와 창녀, 죄인들과 어울려서 먹고 마시며 즐기는 당신의 모습이 대단히 불경스럽고 못 마땅했습니다.(루카 복음 5장 33절-36절)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가 기뻐하는 단식은 바로 이런 것이다. ‘억울하게 묶인 이를 끌러주고 멍에를 풀어주는 것 압제받는 이를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내가 먹을 것을 굶주린 이에게 나눠 주는 것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 주며 제 골육을 모른 체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만 하면 너희의 빛이 새벽 동이 트듯 터져 나오리라.’”(이사야 예언서 52장 6절-8절)
예수님, 당신은 먹고 마시기를 즐긴 불한당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단식으로 세리와 창녀, 죄인들과 변두리 인생들에게 천국을 선물하셨습니다.
사순절을 지내면서 단식하는 저희들도 단식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를 마련하고 이웃과 형제들에게는 사랑을 나눠줄 수 있도록 축복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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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윗 임금은 가장 모범적인 임금이요 훌륭한 성군이었습니다. 그런 그도 인간적인 약점을 지녔습니다.
사무엘기 하권 7장에서 그는 나탄 예언자에게서 자신의 왕권이 영원할 것이라는 하느님의 말씀과 약속을 듣게 됩니다. 그 약속을 들은 다윗은 어떠하였을까요?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그러나 사무엘기 하권 11장에서는 자기 부하의 아내를 탐하고, 그것을 감추려고 이런저런 시도를 하다가 실패하여 결국에는 부하를 죽이고 맙니다.
오늘 우리가 화답송으로 만나는 시편은 이 이야기를 배경으로 합니다. 그래서 시편 51편의 머리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지휘자에게. 시편. 다윗. 그가 밧 세바와 정을 통한 뒤 예언자 나탄이 그에게 왔을 때”(시편 51[50],1-2) 이 시편에서 다윗 임금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죄를 뉘우치며 하느님께 용서와 자비를 구합니다.
하느님 자비에 호소합니다. 호소하는 가운데 그는 하느님을 향한 신뢰를 잃지 않습니다. “부서진 영.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께서 업신여기지 않으신다는 그 강한 믿음이 그를 다시 일으켜 줍니다.
다윗 임금이 위대한 이유는 그가 백성을 잘 통치하였거나 하느님께 한결같은 모습으로 충실하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이스라엘 백성의 위대한 임금이자 성군으로 기억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자신의 잘못을 빠르게 인정하여 그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참으로 많은 죄를 짓고 살아갑니다. 잘하는 것보다 부족함이 많아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와 부족함이 우리가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을 막아설 수는 없습니다.
다윗의 모습을 기억합시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번제가 아니라, 우리의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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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영적 삶의 길에 놓인 정류소들>
영혼이 올바른 판단을 내릴 능력을 갖게 되어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처지에 이르자 하느님께서는 영혼에게 당신의 계명을 내려주십니다. 이제 영혼은 하느님의 신비와 천상의 역사를 알 수 있는 능력을 서서히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욕망의 기념탑들’에 도달합니다. ‘욕망의 기념탑들'이란 무엇입니까? 이것은 바로 ‘욕망들’이 땅에 묻힌 곳, 모든 욕망들이 사라져 버린 장소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육체가 이제 더 이상 정신을 거슬러 일어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육체의 욕망이 함께 죽어 버린 것을 의미합니다(로마 7,4). 그 다음에 이들은 “하세롯”에 도달했습니다. 이 말은 완전한 농가 또는 복됨을 의미합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여정에 있는 영혼은 점점 더 진보하여 이제 질서정연한 상태에 이룬 것입니다. 우리가 육체의 욕망들을 땅에 묻고 죽음에게 내맡겨 버림으로써 이제 먹을 것이 풍부한 잘 정돈된 농가에 도달하게 되었고, 복된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육체의 욕망으로부터 고통을 당하지 않는 영혼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 다음에 진을 친 곳은 “리싸”입니다. 이 말은 눈으로 볼 수 있고 칭찬할 만한 유혹을 의미합니다. 영혼이 이렇게 큰 진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유혹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지 못한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여기서 사람들은 영혼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투쟁을 벌이는 것은 하나의 보호막을 치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크고 먹음직스런 고기라 할지라도 소금으로 절여 두지 않으면 이내 묽어지고 부패하고 말듯이, 유혹의 소금으로 단련하여 지속적으로 절여 두지 않는 영혼도 이내 나약해지고 부패하고 맙니다. 그래서 성서에 다음과 같은 말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드리는 곡식 예물에는 반드시 소금을 쳐야 한다”(레위 2,1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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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먹음과 먹힘>
마태오 9,14-15 (단식 논쟁-새것과 헌것)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먹음과 먹힘>
먹음으로써
사니
먹을 때는
기쁘게
먹힘으로써
살리니
먹힐 때는
기꺼이
먹지만
말고
먹었으면
먹히고
먹히지만
말고
먹혔으면
먹으니
먹음은
먹힘이요
먹힘은
먹음이라
먹음도
살림이요
먹힘도
살림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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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육적인 욕망을 끊어라>
저는 아침 식사를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늘 단식을 하는 것이고 따라서 재의 수요일이나 성금요일에 지켜야 하는 단식재를 별도로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진정한 절제와 희생, 그리고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보속의 마음으로 매일 아침을 먹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귀찮아서, 건강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먹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단식과는 거리가 멉니다.
어떤 분은 생일잔치에 초대받아서 가보니 금요일이고 고기국이 준비가 되어서 곤란했다고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심지어 마음에 걸려서 고기는 먹지 않고 국물만 마셨다고 하시며 고해성사를 보시는 분이 계시고, 모처럼 귀한 손님이 와서 음식점에 가서 불고기를 맛있게 먹고 보니 금요일이기에 성사 보러 왔다고 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이럴 때 고해성사를 봐야 하나요?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그것에 죄책감 갖지 않고 다른 날을 정해서 금육재를 지킵니다.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어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요행으로 몰라서 궐했으니 죄를 모면했다고 좋아하고 넘어가는 신자라면 미성숙한 신자입니다.(정하권) 진정 깨어 있는 사람은 그 법의 의미를 생각하고 알맹이를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마태9,14).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에서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야 슬퍼할 수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9,15) 하셨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은 혼인 잔치에 온 친구들이고 신랑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는 즐겁고 기쁘게 지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직면하게 될 때 단식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단식은 단순히 밥을 굶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지적합니다. “저희가 단식하는데 왜 보아주지 않으십니까? 저희가 고행하는데 왜 알아주지 않으십니까?”(이사58,3) 한다면 그것은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지 단식이 아닙니다.
주 하느님께서 좋아하는 단식은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 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사58,6-7).입니다.
그러므로 알맹이와 껍데기를 구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법의 내용을 지킬 수 있는 성숙함에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외적인 단식을 통하여 내면의 성숙을 가져와야 합니다.
마리아 사제운동에서는 “마음의 단식은 너희 자신과 재물과 피조물에 대한 무질서한 애착에 대해 마음을 닫아걸고 경계함을 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도 “빵과 물만 먹고 단식하기보다 혀를 억제 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하고 영적인 단식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육적인 단식을 통하여 영적인 성장을 가져오는 기쁨을 차지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단순히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육적인 욕망을 끊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단식의 생명은 자비로움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단식은 우리를 이웃을 향한 구체적인 사랑에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단식하는 이들은 그리스도님께서 광야에서 겪으신 배고픔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부터 배고픈 이에 대한 애정을 느끼며 온 정성을 기울여 가난한 이들을 돕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따라서 단식을 통하여 모아진 정성은 반드시 이웃에게 전달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열매 맺는 단식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기회를 놓치지 말고 많이많이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있을 때 잘해!” “우리는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오늘 하루종일 사랑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구엔반 투안)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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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네덜란드의 호로닝언 대학교의 폰터스 린더 교수는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습니다. 학생들에게 몹시 어려운 문제를 주고서, A그룹에는 이 문제를 풀기 전에 무관심한 표정을 짓는 사람의 사진을, B그룹에는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사람의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문제에 관한 결과는 어떠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어떤 그룹의 점수가 더 좋았을까요?
무관심한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본 그룹은 점수가 낮았고 문제를 푸는 데 들인 시간도 매우 짧았습니다. 무관심한 모습의 사진처럼, 무성의하게 응한 것입니다. 그에 반해 열심히 하는 사람의 사진을 본 사람은 열심히 문제를 오랫동안 풀었고 점수도 훨씬 높았습니다.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의지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험이었습니다.
만약 내 주변에 무기력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다면, 나도 그 모습을 따를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의지를 세워 열정적으로 행동한다면 어떨까요? 주변의 무기력함이 가득했지만, 나를 통해 그 무기력함에서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자기 자녀가 지금보다 더 열정적으로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는 분을 자주 만납니다. 꿈이 없는 것 같다고, 도대체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보기만 하면 답답해서 미치겠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지금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앞선 실험에서도 알 수 있듯이 누구보다도 자기가 먼저 열정적으로 사는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열정적인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으면서, 상대만 열정적으로 변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하나의 꿈에 불과합니다. 신앙인은 열정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열정적으로 일하시는 주님과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열정은 위선과는 다릅니다. 즉, 자기를 드러내기 위한 열정이 아닌, 주님을 드러내기 위한 열정을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이유로 주님께서는 단식한다고 거창한 말로 떠들어 대거나 창백한 얼굴로 뽐내며 지나치게 소문내고, 거룩한 분의 눈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들기 위해 단식한다면 하느님의 뜻에 어긋난다고 하십니다. 이런 열정은 하느님께서 절대로 좋아하시지 않는 것이 분명합니다. 열정을 간직하면서 사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남에게 보이기 위한 열정, 자기를 드러내는 열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숨은 것도 보시는 주님이시기에 우리의 참된 열정을 보시고 높이 평가해주실 것입니다. 그때 이사야 예언자께서 하셨던 말씀이 우리에게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이사 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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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된 단식, 참된 수행, 참된 종교>
-분별의 잣대는 사랑과 정의-
단식이 절대는 아닙니다. 단식할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습니다. 구원과는 무관한 단식입니다. 단식은 상대적이요 절대적인 것은 사랑입니다. 분별의 지혜가, 사랑이 절대적입니다. 예수님 마음, 하느님 마음이 분별의 잣대입니다. 사실 배고픈 이들은 단식이 아니라 먹어야 합니다. 참으로 영양과잉으로 비만한 이들이, 또 탐식하는 이들이 단식해야 합니다.
건강을 위한 단식이, 다이어트를 위한 악세사리같은 사치스런 단식이 아니라, 춥고 배고픈 이웃에 연민의 마음을 불러 일으켜 사랑과 정의를 실천할 때 비로소 단식은 가치가 있습니다. 닫힌 단식이 아니라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활짝 열린 자발적 기쁨의 단식 수행이요 이런 단식이야 말로 참 아름다운 회개의 표지가 됩니다.
침묵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침묵은 절대적 가치가 아니라 상대적입니다. 말많은 이들, 교사나 정치가, 법조인들, 방송인들 등 말많이 하는 이들이나 공동생활을 하는 이들은 정말 침묵해야 합니다. 혼자 외롭게 사는, 늘 침묵중에 지내는 대화에 굶주린 외로운 독거의 사람들은 침묵이 아니라 말해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와 복음은 단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단식뿐 아니라 우리의 수행 전반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전례와 삶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됩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이 분별의 지혜, 분별의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단식하면 늘 생각나는 “먹고 겸손한 것이 안먹고 교만한 것보다 낫다.” 옛 장상의 유머스런 진리가 함축된 말씀입니다. 단식하면서 잘 먹는 이웃을 판단하는 죄를 짓는 것보다는 아예 먹고 판단 않는 겸손이 좋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 성서를 찾아 보니 소주제가 “참된 단식”이었습니다.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새삼 참된 단식은 물론 참된 전례, 참된 종교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사랑과 정의의 삶이 결여된 단식이요 전례요 종교라면 참 위선적이요 공허할 것입니다.
왜 이렇게 단식의 수행에, 고행에 충실한데 왜 보아주지 않는가, 알아주지 않는가 하는 항의가 참 순진하고 유치해 보입니다. 이들에 대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한 주님의 말씀이 참으로 통쾌합니다. 그대로 하느님 마음, 예수님 마음의 반영입니다.
“내 백성에게 그들의 악행을, 죄악을 알려라. 그들은 마치 정의를 실천하고 공정을 저버리지 않는 민족인양, 날마다 나를 찾으며, 나의 길을 알기를 갈망한다. 그들은 나에게 의로운 법규를 물으며, 하느님께 가까이 있기를 갈망한다. 단식하는데 왜 보아주지 않는가, 고행하는데 왜 알아주지 않는가 항의한다.”
눈먼 열심입니다. 정의와 공정이, 사랑이 실종된 극단의 종교적 수행에 몰두하는 이들입니다. 전례와 삶이 유리된 삶입니다. 이어지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한 주님의 질책이 정곡을 찌릅니다.
“보라, 너희는 너희 단식일에 제 일만 찾고, 너희 일꾼들을 다그친다. 보라,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저 높은 곳에 너희 목소리를 들리게 하려거든, 지금처럼 단식해서는 안된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은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내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그때 네가 부르짖으면 주님께서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참된 단식, 참된 수행, 참된 종교는 어떠해야 하는지, 우리의 실상을 거울처럼 비춰주는, 참으로 우리 종교인들을 부끄럽게 하는 말씀입니다. 단식이나 고행, 전례의 거부가 아니라 이런 구체적 정의와 사랑의 실천이 결여된 헛된 단식, 헛된 전례, 헛된 종교에 대한 비판입니다. 세속화와 더불어 날로 부와 권력의 특권층이 되어 감으로 세상의 소금과 빛의 예언자적 사명을 잃어가는 작금의 일부 종교권력, 종교귀족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양극단은 위험합니다. 열심히 지나치다 보면 균형과 조화를 잃을 수 있고, 맹신이 광신이 될 수 있고, 분열과 갈등이 끊이지 않습니다. 교회 역사상 이단은 언제나 극단주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사야서 말씀은 전례나 종교 수행의 거부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치우친, 사랑과 정의가 실종된 종교에 대한 비판입니다. 참으로 이웃의 고통에 활짝 깨어 열려 있는, 균형과 조화의 전례나 종교 수행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단식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단식에도 분별의 지혜와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단식이 절대인양 단식의 잣대를 들이대며 왜 자기들처럼 단식을 많이 하지 않는가 예수님께 추궁합니다. 이들에 대한 주님의 답이 참 적절합니다.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단식할 것이다.”
시도 때도 없는 무질서한 눈먼 열심의 단식이 아니라 단식의 때가 되면 단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과 함께 있는 축제의 시기는 단식하지 않는 게 좋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분별의 지혜입니다. 무절제한 과잉의 눈먼 단식으로 축제인생을 고해인생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 생존시 그분의 제자들은 먹보요 술꾼인 예수님의 영향으로 자발적으로 단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한 다음부터 슬픔에 젖어 단식하기 시작했습니다. 100년 경에 쓰여진 디다케는 그리스도인들은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했다고 합니다.
단식은 절대적이 아닙니다. 단식에도 분별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한다면 감쪽같이 숨겨진 겸손한 단식을 하라는 주님의 말씀(마태6,17)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우울하게 어둡고 무겁게 지내는 단식과 고행의 사순시기가 아니라, 자발적 기쁨의 수행으로 부활축일을 기다리는 은총의 사순시기입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활짝 열린 자발적 기쁨의 숨겨진 겸손한 단식 수행이어야 하고, 절대로 누구에게 강요할 단식이 아닙니다. 단식뿐 아니라 모든 수행이 그러해야 합니다. 하느님 주신 축제인생을 고해인생으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자발적 기쁨의 수행으로 축제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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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마태9,14)
<마음의 단식!>
오늘 복음(마태9,14-15)은 '단식 논쟁'입니다. 단식을 잘하고 있었던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단식하지 않냐?'고 묻습니다.
단식은 말 그대로 입으로 들어가는 것을 끊는 것입니다.
요즘은 건강을 위해서 단식을 하기도 하지만, 믿는 이들은 '죄에 대한 보속과 결심과 예수님 수난과 죽음의 동참이라는 특별한 의미'를 두고 단식을 합니다. 그리고 그런 단식은 주로 '예수님 부활과 성탄을 준비하는 사순시기나 대림시기 때' 합니다.
요한의 제자들로부터 단식에 대한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이르십니다.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9,15)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과 함께 있는 시간을 혼인 잔치에, 그리고 당신을 혼인 잔치의 주인공인 신랑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신랑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는 축제 기간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당신과 대립각을 세웠던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과 논쟁 하실 때, 그 '논쟁의 핵심은 본질'이었습니다. 율법의 본질, 안식일의 본질, 단식의 본질 등 '본질에 대한 논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논쟁은 지금 여기에서 '미사의 본질, 기도의 본질, 성경 필사의 본질, 고통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논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단식은 끊는 것인데, 아래 언급하는 단식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단식의 본질, 단식의 참의미가 아닐까요?'
걱정과 이기심을 단식하는 것.
비관주의와 화를 단식하는 것.
슬픔과 스트레스를 단식하는 것.
남을 사냥하는 말을 단식하는 것.
쓰라림과 불평을 단식하는 것.
함께 시작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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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u45xSvTuir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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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마태 9, 15)
단식보다
축제가 더 좋은
우리들 삶입니다.
삶이란 결코
우리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마침내
오고야 말
이별의
시간입니다.
이별또한 인생의
아주 커다란
부분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품어주는 것이
단식의 본질입니다.
비워내지 않고서는
받아들일 수 없고
녹지않고서는
풀릴 수 없습니다.
아픔을 헤아리지
못하는 단식은
단식이 아닙니다.
신랑이신
주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단식의 핵심입니다.
차갑게 굳어버린
우리 마음을
뜨겁게 만드는
단식의 실천입니다.
주님과
분리될 수 없는
단식의 정신입니다.
빼앗기는 아픔을
맛본 사람 만이
함께하는 이시간이
얼마나 큰 감사인지를
압니다.
단식을 통해
주님 아닌 것을
떠나보내는 시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단식은 주님과
함께하는 이 삶을
깨닫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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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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