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 없이 일터에서 밀려나는 가장들에 대한 뉴스가 가슴을 짓누르는 요즈음,한국 사회의 거울이 될만한 고전을 고르라면 나는 서슴없이 이 작품을 말한다.
50년 전 영국 런던에서 처음 공연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은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한 가장의 사랑 이야기다.
주인공 윌리 로먼은 햄릿처럼 왕자도 아니고 맥아더처럼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장군도 아니다.그의 이름 Loman(low man=하층계급의 사람)이 암시하듯 사회조직의 말단에서 평생 일만 하다 비참하게 삶을 마감한 소시민이다.
그의 일생은 그가 세일즈를 하며 길바닥에서 보낸 날들의 총계다.그런데 36년 영업사원 생활의 결과는 막 월부금을 완납하고 그의 소유가 된 집 한 채뿐이었다.쉽게 말하면 ‘내집’ 장만에 평생을 써버린 셈이다.미국인 윌리의 삶이 생소한 듯하면서도 오늘 너무도 가깝게 느껴지는 까닭은 그가 바로 가족을 위해 개미처럼 일하는 한국의 필부와 똑같은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윌리의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형이 복잡한 도시를 벗어나 알래스카에서 일확천금의 꿈을 이루자고 했을 때 윌리는 듣지 않는다.그의 인생목표는 84세에도 사무실에서 전국의 바이어와 전화상담을 하는 데이브 싱글맨처럼 유능한 세일즈맨이 되는 것이다.
그는 아들 비프에게 성실히 공부하고 노력하라고 말하기보다는 의리와 인정을 쌓아 인기 있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세일즈맨의 넉넉한 인품이 조직과 효율을 바탕으로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산업사회에 기여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윌리는 세계의 변화에 발맞춰 새 지식을 배우거나 자기계발의 노력을 하지도 않는다.창업주의 2세 사장 하워드가 조작하는 녹음기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그를 보면 후기산업사회에서 정보통신의 발달에 적응하지 못해 쩔쩔매는 직장인들이 생각난다.
예순살이 넘은 그가 적은 급료를 각오하고 사무실 근무를 원했을 때 하워드는 “돌멩이에서 피를 뽑을 수는 없다”고 냉정하게 거절한다.자신은 ‘약간 피곤할 뿐’인데 끝내 그만 두라고 하는 하워드에게 윌리는 “오렌지처럼 알맹이는 먹고 껍질만 던져버릴 순 없어.사람은 과일이 아니야”라고 소리친다.그러나 그의 부인은 그를 “항구를 찾는 조각배”라고 불러,그가 심신 모두 탈진상태에 있음을 정확하게 진단한다.
미국 전역의 세일즈맨들이 윌리가 팔러 다닌 물건이 무엇이냐고 물어왔을 때 작가는 ‘그자신’이라고 답변한다.
윌리는 단지 직장에서 쫓겨난 것이 분해 생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경제적 타격보다 정신의 고갈 상태에서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울만한 희망의 빛이 없었기 때문이다.
윌리의 가장 큰 실망은 두 아들이 서른이 넘도록 정착하지 못하고 건달이 돼버린 것이다.어려서 학업에 태만하고 남의 물건을 훔치는 등 문제아의 길을 걸어온 그들에게는 냉혹한 조직사회에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자신을 소모하려는 의지가 없다.그렇다고 남다른 재주나 뛰어난 실력을 갖춘 것도 아니다.그러니 실적 제일주의 사회에 속하지 못하고 부초처럼 여기저기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다.
아버지는 여전히 “네 인생의 문은 활짝 열려 있다”고 격려하지만 비프는 “저는 10전에 한타스짜리 인간이에요.그리고 아버지도 마찬가지죠”라고 냉소적으로 받아친다.아버지의 도덕적 결함을 모든 실패의 원인으로 돌리며 직장을 잃고 방황하는 아버지에 대해 연민을 보이기는 커녕 ‘미쳤다’고 놀린다.그들은 매일같이 낯선 사람들을 만나는 세일즈맨에게 때때로 엄습하는 깨끗한 정장과 밝은 미소 뒤의 고독감을 짐작조차 못한다.윌리 가족의 병은 식구들 사이의 진정한 대화와 이해의 결핍에서 온 것이다.
윌리는 우리 모두의 아버지며,‘세일즈맨’은 우리 모두의 가족을 다룬 비극이다.비극은 현실을 은근히 비꼬거나 웃음으로 비껴가지 않는다.눈 앞의 고난을 온몸으로 부딪쳐 살아내는 대결정신으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비극이 긍정적이며 낙관적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윌리의 숭고한 희생은 우리가 이 세상에 혼자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그리고 쓰러진 이들에게 다시 일어나 전진하라고 용기를 준다.
아서 애셔 밀러(영어: Arthur Asher Miller, 1915년 10월 17일 ~ 2005년 2월 10일)는 미국의 극작가이다. 미국의 양심을 대표하는 극작가로서 국제펜클럽 회장을 지냈다.
생애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미시간 대학에서 연극과를 전공했으며 졸업 후 극작에 전념하였다. 그는 테네시 윌리엄스와 함께 미국의 연극계를 대표하는 작가이다. 그는 전쟁을 비판한 심리극 <모두 내 아들>로 평론가상을, <세일즈맨의 죽음>으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1944년 《행운의 사나이》로 브로드웨이로 진출을 했다. 1947년에는 《모두 내 아들》이 히트하면서 관심을 모았다. 1949년 《세일즈맨의 죽음》이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되어 성공을 거두었다. 이로써 아서 밀러는 극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고, 테네시 윌리엄스와 함께 미국 현대 희곡의 기수로 나서게 되었다.
1956년 마릴린 먼로와 결혼했지만 1961년에 이혼했다. 1962년 매그넘 사진가로 활약하고 있던 사진 작가 디트로이트 모라스와 재혼했다. 두 사람 사이의 딸 레베카 밀러는 배우이자 극작가, 영화 감독이되어, 대니얼 데이 루이스와 결혼했다.
2005년 89세의 나이로 코네티컷주 자택에서 암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작품
사회악과 인간악과의 대결이 그로 하여금 희곡작품을 쓰게 하고 있으나, 인간성이 의존하는 곳과 죄의 자기발견을 철저하게 추구하고 있다. 그의 극작의 근저는 분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분노가 불타오를 때 그는 이를 철학적으로 처리하여 밀고 나가는 성격과 필력을 갖고 있다. 아래의 작품은 모두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행운을 잡은 사나이》(The Man Who Had All the Luck, 1944) 《모두 내 아들》(All My Sons, 1947) 《세일즈맨의 죽음》(Death of a Salesman, 1949) 《시련》 (The Crucible, 1953) 《다리에서의 조망》(A View From The Bridge, 1955) 그 후 잠시 쉰 다음 링컨 센터의 연극활동이 개시되자, 이곳에서 1964년 1월과 가을에 자전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아래의 작품을 상연했다.
《전락 이후》(After the Fall) 《비시에서 생긴 일》 (Incident at Vichy) 《비시에서 생긴 일》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의 나치의 잔혹상을 묘사한 극이다.
1968년 봄에는 《프라이스》(The Price)가, 1972년 가을에는 《천지창조와 다른 일들》 (The Creation of the World and Other Business)가 상연되었지만 호평을 받지는 못하였다.
유산
아서 밀러는 작가로서 70년을 보냈으며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희곡 작가 중 하나로 손꼽힌다. 그의 임종 후 많은 배우, 감독, 제작자들은 그를 미국 연극계의 전문가로 인정했으며 브로드웨이의 극장들은 그를 추모하며 한동안 전등을 키지 않았다. 아서 밀러의 모교인 미시간 대학은 생전 그의 소망대로 2007년 3월, 아서 밀러 극장을 열었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