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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절반- 프리드리히 횔덜린
노란 배와 거친
장미들이 가득 매달린,
호수로 향한 땅,
너희, 고결한 백조들,
입맞춤에 취한 채
성스럽게 담백한 물 속에
머리를 담근다.
슬프도다, 겨울이면, 나는
어디서 꽃을 얻게 될까? 또한
어디서 햇빛과
지상의 그림자를?
장벽은 말없이 냉혹하게
그냥 서 있고, 바람결에
풍향기 소리만 찢긴다.
"폭풍 중 가장 성스런 폭풍 가운데/ 나의 감옥의 벽 허물어지거라./ 하여 보다 찬란하고 자유롭게/ 내 영혼 미지의 나라로 물결쳐 가라." 횔덜린이 생전에 쓴 시 ‘운명’의 일부분인 이 시구는 횔덜린의 묘비에 새겨져 있다. 이 짧은 시구는 비극적 생애를 살다 간 횔덜린의 일생을 요약적으로 보여 준다. 시인이라는 소명을 투철하게 살다 간 시인 횔덜린. 젊은 시절 횔덜린의 둘레를 둘러싼 것은 고독과 좌절이었고, 반생(半生)을 산 이후 횔덜린을 포박한 것은 정신 질환이었다. 1770년 네카어 강변의 라우펜(Lauffen)에서 출생한 그는 1806년부터 정신병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병세가 악화되는 그를 최후까지 돌본 이는 횔덜린의 작품에 크게 감명받은 튀빙겐의 목수 에른스트 치머(Ernst Zimmer)였다. 횔덜린은 1843년 타계할 때까지 반구형의 옥탑방에서 치머 일가의 극진한 간호를 받았다. 그는 무려 38년 동안이나 정신 질환으로 인해 피할 수 없는 유폐 생활을 하면서도, 의식장애의 정신착란에 시달리면서도, 시간관념을 잃고 지내면서도 방문객들에게 짧은 시를 지어 헌정하는 등 시인의 직업을 끝까지 천직으로 알고 시의 붓을 내려놓지 않았다.
하이데거는 횔덜린이야말로 "시인의 시인"이라고 칭송했다. 횔덜린이 보여 준 시 쓰기에서의 엄밀성(한 평자는 "횔덜린의 시에는 '법칙적 계산'이 깔려 있고, 그에게 시는 공예와 같았으며, 매우 정밀한 구성을 자랑한다."라고 말했다.)을 고려할 때도 그러하지만 시인의 직분과 소명에 대해 횔덜린만큼 절박하게 고민한 시인은 일찍이 없었다는 찬사라 할 것이다. 가령, 횔덜린이 "나는 모르겠노라. 궁핍한 시대에 시인들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빵과 포도주’ 제7편)라고 썼을 때 이 질문에는 18세기 말 전제정치하에 놓여 있던 독일의 현실 사회를 매섭게 비판하는 시인의 절규, 그리고 그 사회를 개혁하려는 시인의 사명감이 동시에 녹아 있었다. 횔덜린은 물신주의와 속물 의식을 내몰고, "축복의 요람" 그리스의 정신과 프랑스 혁명의 자유‧평등‧박애주의를 자신이 살고 있는 땅에 구현하고자 "종종 울면서 분노"했다. 그것은 고귀하고 "다정한 정신"이며, "사악한 혼란의 죄를 다시금 씻어 주"는 "사랑스럽고 해맑은 평화"였다. 아울러 인간의 내면에 신성(神性)을 회복시키는 일이기도 했다. 그는 그의 조국을 향해 부르짖듯이 열렬히 노래했다. "어리석은 아이가 목마를 타고 앉아, 자신을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결코 아이를 비웃지 말라,/ 오 너희 선한 사람들이여! 또한 우리들 역시/ 행위는 부족하고, 사고는 풍부하구나!"('독일 사람들에게')라고.
이 시는 1803년 창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를 압도하는 정서는 비감(悲感)이다. 이 시의 창작 배경에는 횔덜린이 고결하게 사랑했던 여인, 주제테 곤타르트(Susette Gontard)의 죽음이 놓여 있다. 횔덜린은 주제테 곤타르트를 '디오티마(Diotima)'라고 불렀다. '디오티마'라는 작품을 통해서는 "그대의 노랫가락이/ 나의 감각을 점점 맑게 씻어 주어/ 내 음울한 꿈들은 달아나고/ 나 자신은 다른 사람이 되었노라."라고 썼다. 이런 대목은 횔덜린이 주제테 곤타르트에게서 그리스적인 아름다움과 이상을 발견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횔덜린에게 "아름다운 태양"이었으며 "찬란한 빛"이었던 이 여인이 이제 지상에 없다. 1연이 사랑의 시간을 보여 주는 것이라면 2연은 실연의 시간, 사지(死地)에 해당한다. 사랑의 화신, 사랑의 여사제의 죽음은 시적 화자에게 측량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가 연시로만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이 시에는 생성과 소멸, 행복과 불행, 지상적 삶과 천상적 삶이 대비되어 있으며, 그 양쪽의 차가운 경계를 바라보는 시적 화자의 애상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따라서 이 시는 일생의 후반부를 살아가야 할 시적 화자가 천상적인 존재 혹은 신성,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연의 힘에 의해 지상적 삶의 한계를 극복하고 구원받으려는 간절한 기도의 노래라고도 할 수 있겠다.
횔덜린의 작품들은 신과 자연과 인간의 조화와 합일을 노래했다. 그에게 자연은 신화화된 자연이었으며, 사랑의 가치를 가르쳐 주는 대상이었다. 그는 젊은 시인들을 향해 "만약 대가가 너희에게 두려움을 안겨 주면, / 위대한 자연에게 조언을 구하라!"('젊은 시인들에게')라고 권장했으며, "친밀한 정경이여! 복판으로/ 길이 평평하게 꿰뚫어 가고/ 창백한 달이 떠오르는 곳에/ 저녁 바람이 불어오며/ 자연은 간결하게 서 있고/ 산들이 숭고하게 서 있는 곳에/ 나는 끝내 집으로 돌아가네"('즐거운 삶')라고 노래했다. 자연의 광휘를 찬탄했으며 자연과 인간이 "하나의 무한한 전체"로 결합되는 것을 소원한 이가 바로 "시인의 시인" 횔덜린이었다.
(하이데거는 횔덜린(1770~ 1843)을 “시인의 시인”이라고 칭송했습니다. 이 시는 사랑의 있음과 사랑의 사라짐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직접적으로는 시인이 사모했던 여인, 주제테 곤타르트의 부재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시는 옥토와 박토, 애정과 반목, 행복과 불행, 빛과 어둠, 지상과 천상을 함께 바라보는 안목을 보여줍니다. 그 절반씩의 삶이 합쳐져 우리들의 일생을 만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횔덜린이 말한 대로 “모든 이의 가슴속에는 용기와 사랑”이 넘쳐나고, 또 “내면에서는 쾌적한 음(音)이 오랜 세월 동안 조용히 소리나”는 그런 더 나은 삶을 살았으면 합니다.
[불교신문3200호/2016년5월7일자])
프리드리히 횔덜린(Friedrich Hölderlin, 1770.3.20~1843.6.7)
1770년 슈바벤의 네카어강변 라우펜(Lauffen am Neckar)에서 수도원 관리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1784년 덴켄도르프(Denkendorf)의 수도원 학교, 마울브론 수도원 학교를 졸업하고 튀빙겐 대학 신학과에 들어갔으나, 어머니의 희망인 신학 공부보다는 고전 그리스어, 철학, 시작(詩作), 헤겔, 셸링 등의 학우들과의 교류에 열중하였다. 1789년 시인 슈토이들린, 슈바르트 등과 사귀면서 시를 발표하기 시작한다. 졸업 후 프리드리히 실러의 소개로 가정교사가 되었다. 1796년 프랑크푸르트의 은행가 곤타르트가(家)의 가정교사가 되었는데, 그의 부인 주제테와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디오티마(Diotima)라는 이름으로 서간체 소설 [히페리온] 및 그 밖의 많은 시편에 등장하였다. 3년 후 이별을 하고 함부르크, 고향, 슈투트가르트, 보르도 등지를 방랑하였는데, 이 시기 맹렬한 창작력이 발휘되어 위대한 시들이 쓰였다. 1802년 정신착란 증세가 생기고 1806년부터는 완전히 폐인이 되어 튀빙겐의 목수 치머 일가의 보호를 받으며 36년이라는 세월을 보내다가 죽었다. 그는 고전 그리스 운문 형식을 독일어에 성공적으로 이식시킨 전무후무한 시인으로서, 가장 위대한 독일 시인의 반열에 올라 있다. [엠페도클레스의 죽음], [디오티마], [하이델베르크], [빵과 포도주], [귀향], [라인강], [유일자], [파트모스] 등의 걸작이 있다.
글 문태준
1994년 <문예중앙>으로 등단했다.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그늘의 발달], 산문집 [느림보 마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