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규 베네딕토 신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에제키엘 47,1-2.8-9.12 요한 .2,13-22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사건은
모든 복음서에서 전할 만큼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입니다. 또 신학적으로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보여 주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당시 예수님의 행동은 성전을 중요하게 생각하던 많은 사람에게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성전 정화 사건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예수님의 행동과 가르침을 이해하는 열쇠가 됩니다.
성전 정화 사건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집이자 하느님께서 세상에 머물러 계시는 장소로 생각되던 성전은 더 이상 없습니다.
실제로 성전은 기원후 70년에 파괴되었고 그 이후 새로운 성전은 건립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성전을 대신하는 것은 예수님의 몸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가시적으로
드러내시고 하느님의 뜻을 전하십니다. 하느님과 세상 그리고 사람들 사이의 유일한
중개자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사람들은 하느님과 화해하게 됩니다.
이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사건 또한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을 뵙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허물어지지 않는 성전으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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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 바오로 신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에제키엘 47,1-2.8-9.12 요한 2,13-22
오늘 미사의 말씀은 성전의 진정한 의미를 알려 주십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요한 2,16)
예수님이 성전에서 사고파는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을 내쫓으시며 말씀하십니다.
제물로 바칠 짐승이나 돈을 성전 안에서 고르고 또 바꾸다 보니 장사치들의 존재는 일상적인 일이
되었지만, 예수님께서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하신 겁니다.
"아버지의 집"
아버지의 집은 외적으로 성전 건물을 가리키지만, 내적으로는 아버지께서 머무르시며
당신 백성과 통교를 나누시는 자리를 의미합니다. 외적인 예식과 제물도 중요하지만
하느님과 인간이 나누는 사랑의 침묵과 머무름도 간과할 수 없는 본질이지요.
아버지께 제물을 들이대기 전에 먼저 고요히 존재 대 존재로 마주하는 것이 우선일 겁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당신 몸을 성전이라 일컬으십니다. 사람들이 알아듣건 알아듣지 못하건,
죽으시고 사흘만에 살아나실 당신의 앞날을 이 말씀으로 계시하신 겁니다.
아버지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현존하시는 성전입니다.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환시로 봅니다.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에제키엘 예언서 47,9.12)
예언자는 천사에게 외적으로 이끌려 주님의 집 문지방 밑에서 물이 솟아 흐르는 장면을 봅니다.
그 물이 강으로 흘러가면서 온갖 생물을 살리고, 바다로 흘러가면 그 바닷물이 되살아납니다.
이 물이 지닌 힘은 그 원천인 성전의 생명력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해서 물과 피를 쏟으신 장면이 떠오릅니다. 성전이신 예수님의 몸에서
흘러나온 물과 피는 교회에 생명을 주는 성사입니다.
이 은총은 흘러가 닿는 곳마다 살리고 되살리며 거듭 생명을 줍니다.
또한 우리 자신도 예수님의 몸에서 흘러나와 세상에 보내어진 물이 아닐까 관상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과 사랑을 가득 채워 우리를 세상으로 흘려보내시니까요.
주님의 생명력으로 충만해진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는 아직도 죽음의 그늘 밑을 걷고 있는
이 세상에 은총의 도구가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파견되어 세상 구석구석으로 스며드는 물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 물을
흘려보내는 또 다른 성전이기도 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성령께서 현존하시는 성전이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성전 중의 성전인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을 지내며 또다른 성전인 우리 존재가 예수님의
바람과 기대에 맞게 잘 정돈되고 질서와 조화 가운데 주님을 모시고 있는지 살피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께서 머무르시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으로 세상 안에서
조용히 주님의 생명을 퍼뜨리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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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훈 토마스 신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에제키엘 47,1-2.8-9.12 요한 .2,13-22
유학 시절, 이웃 나라인 이탈리아의 로마를 처음으로 찾았습니다.
신학생으로서 로마의 4대 대성전은 방문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혼자서 로마를
돌아다녔습니다. 먼저 그 웅장함과 화려함에 놀랐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인 라테라노 대성전도 방문하였는데, 대성전보다 더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주었던
조그만 성당을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대성전 주변에 있는 ‘성 계단 성당’(Scala Sancta)입니다.
그곳에는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실 때 오르셨던 총독 관저의 대리석 계단이 있습니다.
나무 덮개로 씌워진 계단을 가득 채운 사람들이 한 계단, 한 계단 무릎으로 오르며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고 있었습니다.
계단을 덮어 씌운 나무판자는 움푹 파이고 낡아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계단을 올랐는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저 또한 판자 위에 무릎을 꿇고 이 계단을 오르셨던 가시관 쓰신
예수님을 그려 보았습니다.
예수님께 쏟아졌던 모욕과 조롱,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는 야유와 배신,
자기 안위만을 생각하며 도망친 비겁함과 침묵,
채찍 자국이 그대로 남아 피투성이가 된 예수님의 몸 …….
스물여덟 층의 계단에는 그렇게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 그리고 죽음이 묻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성전을 정화하시며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성전을 단순한 건축물로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희생되신 당신의 몸이며 못 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진 당신의 손이며
우리를 위해서 기꺼이 당신을 내어 주신 희생과 나눔이 바로 성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을 위하여 스스로 죽어 가는 삶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욕심을 버리고 희생하고 나누며 살아갈 때, 바로 그곳이 하느님을 만나는 성전이 됩니다.
영성체를 통하여 그 사랑의 몸을 받아 모신 우리는, 나를 통해서 다른 이들 또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성전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그분의 사랑 앞에 무릎을 꿇고 한 계단씩 오르는 사랑을 실천하면서
오늘 누군가의 성전이 되어 주십시오.
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가톨릭 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