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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24일(토)
* 시작 기도
주님...
이 아침, 주님의 얼굴을 구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비쳐진 주의 얼굴빛을 내 마음 속에 온전히 비추소서.
내 어둡고 불안한 심령을 밝히 비추사 주의 빛으로 가득 채우소서.
주의 보혈로 나의 온 몸을 덮으사 나의 오염된 세포 하나하나, 핏방울 하나하나까지 씻어 정결케 하옵소서.
주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산 제물이 되기 원합니다.
죄를 향해 달려가고자 하는 나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자기주장의지도 함께 죽여주옵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오늘도 주의 영광의 광채가 나를 둘러 비치게 하시고 그 영광을 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마 1:18-25
제목 : 창세전부터 오시기로 약속된 아들이 때가되어 마침내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다.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고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4.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 나의 묵상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으로는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다.
그러나 그는 요셉과 마리아의 관계, 즉 부정모혈의 관계 속에서 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나셨다.
요셉은 마리아와 동침한 사실이 없는데 마리아가 임신을 했으므로 주변에 소문을 내지 않고 조용히 파혼을 하려고 하였다.
이 일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을 때 주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서 요셉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두려워 말라. 그는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다. 아기를 낳거든 예수라고 이름을 지어라. 그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다.”
이 모든 일은 이사야 선지자가 이사야 7:14절에서 이미 예언한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을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
요셉은 잠에서 깨어나자 천사의 지시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왔다.
그리고 동침하지 않다가 아들을 낳고서 그 이름을 예수라고 지었다.
성령으로 잉태되어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난 예수님은 이미 창세전에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아버지의 생명을 받아 말씀으로 태어나셨다.
(요 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으로 태어나신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의 품속에서 아버지와 연합하여 하나가 되셨다(요 1:18).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말씀이신 아들보다 크신 상위권위기에 또한 아들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존재이셨다.
(요 14:28)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요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이런 복종과 사랑의 존재법 안에서 사셨던 아들과 아버지께서는 창세전에 서로 언약 즉 약속을 맺으셨다.
그것은 사람을 지어 그들에게 영생을 주는 것이다.
(딛 1:2)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전(창세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이 약속을 하신 삼위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만드셨다.
만들어진 생명인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과 성자이신 아들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아서 하나님과 완전한 언약적 교제의 존재로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그는 영생을 얻지는 못하였다.
왜냐하면 영생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그 예수를 믿을 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벧전 1:20)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창세전부터 이 땅에 오시기로 약속된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야만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언약적 교제의 존재로 지음받은 아담이 아들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먼저 범죄하여 언약을 깨트리고 말았다.
그 결과 아담은 두려운 마음에 하나님의 품을 떠나 동산 나무 사이로 숨고 말았다.
하지만 사람은 불의하나 하나님은 불의하실 수가 없으시기에 ‘아이에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그를 부르시면서 친히 찾아 나서신 것이다.
(창 3: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 자신의 죄로 인하여 그는 하나님께 심판 곧 징계를 받았지만, 그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죄의 근원인 사탄의 표상 곧 뱀을 저주하면서 아담에게는 그것이 복음이 되었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이는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 그 자체인데 곧 존재로써의 복음이며 가죽옷은 메시야적 구속사건을 나타내는 메시야적 행위로써의 복음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했던 그 계명은 그대로 지켜졌다.
그것은 당장 죽는 육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적 교제의 존재로서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과의 아주 긴밀한 관계성이 단절되었고 결국 그의 육신의 수명이 다하는 날 육신도 죽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범죄한 아담도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제시된 여자의 후손인 그리스도와 그의 메시야적 행위인 십자가를 믿으면 구원을 받게 된다.
이렇게 복음으로 약속된 하나님의 아들은 유다 왕 아하스 시대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오실 것이 예언 된다.
아하스 왕 때 아람 왕과 북 이스라엘 왕이 연합하여 남 유다를 공격한다.
그로 인하여 아하스 왕은 크게 두려워한다.
그 때 이사야 선지자가 아하스 왕에게 가서 아람과 북 이스라엘 두 왕은 연기나는 두 부지깽이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이다.
그러므로 왕은 하나님께 한 징조를 구하라고 한다.
그러나 아하스 왕은 징조를 구하지 않는다.
이것은 겸손이 아니라 불신앙으로 인함이다.
결국 이사야는 그에게 한 징조를 선포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그리스도의 탄생 예언’이다.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 예언과 같이 때가 차매 하나님의 아들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요셉과 마리아의 가문에 태어나게 된다.
(갈 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 본문 마 1:21-23)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처럼 임마누엘 되신 예수님은 창세전부터 오시기로 약속되셨는데, 때가 되어 오셨고, 그 목적은 두 가지다.
첫째는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아담 안에 있는 생명으로 태어나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십자가의 죽음을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게 하려 하심이다.
둘째는 이 메시야적 행위로서의 구속사건을 믿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함이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것은 창세전의 일이지만, 죄사함의 문제는 아담의 범죄 이후에 약속된 일이다.
그래서 이 두 가지 복음의 약속을 창 3:15절과 21절에서 확증하신 것이다.
나는 모태신앙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어머니의 등에 업혀 교회에 나갔으며 교회가 나의 놀이터요 운동장이며 학교요 집이었다.
고등학교, 대학교 다닐 때는 거의 교회에서 먹고 자고 할 정도로 교회에서 살았다.
나의 인생은 교회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하나님의 뜻인 영생을 알지 못하였다.
영생의 의미를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으로 생각했던 나는 괜스리 아담을 향하여 불평하기도 했고(그가 죄를 짓지 않았으면 나도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또는 죽어서 가는 천국을 영생으로 알았기에 나는 늘 불안하였다.
내가 과연 천국에 갈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나를 짓누르기도 했다.
그래서 죄를 안 지으려고 노력도 했고, 죄를 지으면 당장 회개하기도 했다.
그런 나의 생각과 삶은 항상 만물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런 영생관은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많은 기독교인들이 동일하게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생을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으로 해석한 것은 헬라철학적 사고개념이다.
또한 죽어서 가는 천국이 영생이라는 의미는 불교식 개념이다.
이들은 이 땅에서는 어떻게 살든 죽어서는 반드시 극락에 가야한다고 믿기 때문에 온갖 자기주장의지로 선한 일들을 행하는 것이다.
나 또한 나에게 무슨 안 좋은 일이 일어나기라도 할라치면 나의 죄 때문이라고 판단하여 그 때문에 불안에 휩싸이기도 했다.
이와 같이 나는 철저히 만물 안에 갇혀서 살았으며, 내가 믿는 하나님도 내게 있어서는 만물 안에 갇힌 신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만물 안에 가둔다고 해서 갇혀 계실 하나님은 아니지만, 나의 사고의 범위 안에서 나는 믿었던 것이다.
이런 나는 그동안 철저히 하나님이라는 우상을 섬긴 자였다.
나이가 들면서 체험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기도 했지만, 나의 믿음의 지경이 크게 넓어지지는 않았다.
그런 와중에 어려서부터 율법적인 신앙교육과 주입식 교육은 혼자 독립하면서 나도 모르게 분출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내 안에 눌려 있던 신앙에 대한 반발심이었다.
그 결과 겉으로는 교회에 잘 나가는 신실한 신앙인이었지만, 속으로는 썩어 문드러진 영적 문둥병자였다.
나는 속과 겉이 다른 표리부동한 자요, 부모님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는 죄인 중의 괴수였다.
하나님의 성전인 몸을 함부로 굴렸고 내 맘과 육신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였다.
그러면서도 죄책감과 양심의 가책으로 인하여 내 영적 상태는 항상 우울모드였다.
이런 나를 주님은 심판하셨고 그 심판 앞에서 나는 몸부림쳤다.
왜 하필 나냐고,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시느냐고 하면서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신앙이 너무 관념적이었고 이중적이었기 때문에 온전할 리가 없었다.
해 아래 무슨 새 것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해 아래서 새 것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도구는 오직 복음밖에 없는데 나는 복음을 알지 못하였으며 무엇보다 영생의 실체를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성경이 말하는 통합복음을 알며 또한 이를 선포하기도 한다.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가 창세전부터 오시기로 작정되었다는 것이 관념이 아니라 실재가 되어 나에게 다가왔다.
때가 되어 그분이 육신을 입고 오셨고 나는 그를 나의 구주로 믿고 오늘 이 자리에 서 있다.
나의 육신의 눈은 떠 있었지만 영적 소경으로 살아왔다.
복음은 하나님의 심판을 통하여 그런 나의 영적 눈을 뜨게 했으며 참 복음으로 아들의 생명을 얻어 오늘도 영생을 누린다.
죄인으로 살아왔던 지난 날의 나의 모습은 주의 보혈로 다 덮어 주시고 이제 나의 육신이 아니라 오직 주의 가죽옷, 곧 그리스도의 옷으로 나를 입혀 주셨다.
그리고 이제 나는 예수님과 같이 연합하여 날마다 교제와 사귐으로 나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구원 받았지만 여전히 죄에 종노릇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주님의 일을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지만, 성령께서 감당케 하신다.
부족한 입술로 복음을 전하게 하시며, 내 몸을 쳐서 날마다 말씀 앞에 복종케 하시고, 그 말씀이 나의 일용할 양식이 되어 세상에서는 가난하나 예수로 부요한 자로 살아간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하셨던 말씀처럼 나는 오늘도 하나님 나라를 현재로 살며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서 창세전 오시기로 하신 약속과 또한 때가 되어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인함이다.
이 모든 영광을 주님께 올려드린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입니다.
죄인 중에 괴수였던 나를 죽음에서 건지시고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아들의 생명을 주셨으니 이것이 웬 은혜요 웬 사랑인지요?
도무지 자격 없는 이 죄인을 살려주시고 영생을 주셨으니 이제 이 몸은 주님의 것이요, 주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이 종을 통하여 마음껏 일하시옵소서.
이 종은 오직 주의 발치에 앉아 주의 말씀을 얻어먹겠습니다.
나의 남은 인생, 주를 위하여 살되 복음을 전하는 사도의 사명을 감당하며 살겠나이다.
날 위하여 하늘 보좌의 영광을 버리고 낮고 천한 이곳에 오신 주님은 나의 전부이오니 영광을 받으소서.
지금도 부활의 주가 되어 모든 권세와 통치권을 가지고 우리를 다스리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마지막 재림의 날 오셔서 심판하실 그 주님 앞에 경배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나의 주님, 나의 전부이신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 땅에 수많은 교회들이 여전히 하나님을 우상으로 섬기는 곳이 많사오니 그들에게 참된 복음이 전파되어 그들도 이 땅을 본향삼지 않고 날마다 하늘 본향을 사모하며 복음과 성령으로 새 생명을 얻어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하옵소서.
영육간에 연약한 이들을 긍휼히 여기사 그들에게 은혜를 주옵소서.
치유의 역사를 넘어 그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교제와 사귐이 있는 영생을 누리는 이들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