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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은 1902년(광무 6)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
유관순의 집안은 개신교 신자였던
할아버지 유윤기(柳閏基)와 숙부 유중무(柳重武)로 인해
일찍이 개신교 집안이 되었고, 유관순도 자연스럽게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은
사회개혁, 부녀자 계몽, 교육사업 등을 통해 자주독립의 길을 찾고자
흥호학교(興湖學校) 운영에 가담하여 인재 배출을 위해 노력한 것으로 보이며,
자녀 교육에도 적극적이었다.
이러한 노력 때문에 큰 아들 유우석(柳愚錫)은 공주 영명학교에서,
둘째 딸인 유관순은 서울 이화학당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유관순의 고향은 철도가 부설되기 전
서울과 충청남도 공주를 연결하는 교통로로서
선교사들이 집중적으로 개신교를 전파하던 곳이었고,
이에 따라 많은 교회가 생겨나게 되었다.
지령리에도 1901년경 이미 교회가 들어섰으나,
1907년 8월 국채보상운동에 이 교회가 동참하는 등 애국활동을 펼치자,
그 해 11월 일본군의 방화로 소실되었다.
유관순의 일가인 유빈기(柳斌基)는
케이블(E. M. Cable, 한국명 奇怡富) 선교사와 함께 고향에 개신교를 중흥시키고자,
1908년 조인원(趙仁元) 등과 함께 불타버린 지령리 교회를 다시 세웠다.
이후 숙부 유중무가 선교사로 교회를 이끌면서
유관순도 5∼6세를 전후하여 개신교를 접하게 되었다.
공주에서 영명학교를 다니던 유관순은 1915년경
공주에 감리교 여선교사로 있던 앨리스 제이 햄몬드(Alice J. Hammond Sharp)의 추천으로 사촌언니 유예도와 함께 이화학당 보통과 교비생(장학생)으로 입학하여
기숙사 생활을 하며 공부하였다.
앨리스는 1900년에 한국에 선교사로 와서
감리교 목사 로버트 아더 샤프(Robert Arthur Sharp)와 결혼하여
앨리스 햄몬드 샤프 부인이 되었으며,
한국이름으로 사애리시(史愛理施), 또는 ‘사부인’으로 불렸다.
샤프 여사는 여성교육에 열정이 많았기에
충남 지역 소녀들 여럿을 이화학당에 추천하여 공부하게 했었다.
이후 서명학(徐明學), 이정수(李禎洙), 유관순의 사촌 언니 유예도(柳禮道) 등과 함께
기숙사에서 생활하였다.
유관순은 1918년 3월 18일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1일 고등과 1학년에 진학하였다.
이화학당에서는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이문회(以文會)를 중심으로
오후 3시만 되면 모두 수업을 중단하고,
조국 독립을 기원하는 기도회와
시국토론회 및 외부인사 초청 시국강연회 등을 개최하고 있었는데,
유관순도 회원으로 활발히 활동하였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서거하자 학생들은 자진해서 상복을 입고,
휴교에 들어갔으며,
2월 28일에는 정기모임을 통해 전교생이 적극적으로 만세를 부르기로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이화학당 학생인 신특실(申特實), 노예달(盧禮達) 등은
파고다공원에서 벌어진 3 · 1 운동에 직접 참여하였고,
당시 고등과 1학년인 유관순은 서명학 · 김복순 · 김희자 · 국현숙 등과 함께
‘5인의 결사대’를 결성하여,
소복을 하고 기숙사를 빠져나와 대한문 앞에서 망곡(望哭)을 한 뒤,
남대문으로 향하는 시위 행렬에 합류하였다.
이후 3월 5일, 학생 연합 시위가 벌어졌는데,
이화학당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정보를 미리 알아낸 학교 측은 교문을 잠그고, 교사들로 하여금 교정 곳곳을 지키게 하였으나,
많은 학생들이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 중 신특실 · 유점선 · 노예달 등은 검거되었고, 교사 김독실(金篤實) 등은 투옥되었다.
유관순은 3월 5일 남대문역(현 서울역) 앞 학생단 시위 때도 참여했다가 붙잡혔다.
경무총감부에 구금되어 있던 중 이화학당 당국이 교섭하여 다른 학생들과 같이 풀려났다. 이후 학교가 휴교하자 3월 13일 사촌언니 유예도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튿날인 3월 14일 고향 동리에서 약 10㎞ 떨어진 목천공립보통학교에서
200여 학생들의 만세시위가 있었으나 곧 일본 헌병대에 의해 저지되었다.
고향 동리는 그때까지도 잠잠했다.
졸업반이었던 유관순의 사촌 언니 유예도는 선배들로부터 독립자금 모금 사명을 받았다.
가난한 시골 고향에는 돈이 없었다.
부형들은 차라리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아버지 유중권, 숙부 유중무, 이웃 조인원(조병옥 부친) 등이 나섰다.
이들은 4월 1일(3월 1일, 음력) 장날을 기해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했다.
이에 호응하여 머리에 수건을 쓰고 인근 지역을 돌며 유림대표와 큰 가문의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시위운동에 나설 것을 적극 설득하였다. 또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시위운동에 쓸 태극기를 만들었다.
3월 31일 밤에는 인근 각지의 지사들에게 다음날의 거사를 알리기 위해 집 뒤 매봉산에 올라가 횃불을 올렸다.
멀고 가까운 24군데 산봉우리에서 호응하는 횃불이 타올랐다.
1919년 4월 1일 오후 1시 병천 아우내 장마당에는 약 3천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병천면은 물론이고, 서쪽의 목천 북면 방면, 남쪽의 성남면 ・ 수신면 및 연기 방면,
동쪽의 이동면, 진천 등 각 방면에서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유관순은 1919년 4월 1일, 조인원 · 유중권 · 유중무 등과 함께 병천 시장에서
수천 명이 참여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이었다.
이날 유관순의 부모를 포함하여 19명이 시위 현장에서 순국하였으며, 30여 명이 큰 부상을 당하였다.
유관순은 주도자로 체포되어 공주교도소에 수감되었고,
이곳에서 공주영명학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구속된 친오빠 유우석을 만나기도 하였다.
5월 9일, 유관순은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언도받았고,
중형을 받은 사람들과 경성복심법원으로 넘겨져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언도받았다.
함께 재판 받은 사람들은 모두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일제의 재판권을 인정하지 않은 유관순은 상고하지 않았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은 이신애, 어윤희 등과 함께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를 기해 3 · 1운동 1주년 기념식을 갖고,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3천여 명의 수감자들이 크게 호응하여 만세 소리가 밖으로까지 퍼져나갔고,
만세를 외치는 함성에 형무소 주위로 인파가 몰려들어 전차 통행이 마비되고, 경찰 기마대가 출동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유관순은 물론, 많은 애국지사가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1920년 4월 28일 영친왕(英親王)의 결혼 기념 특사령으로 유관순의 형기도 1년 6개월로 단축되었으나,
오랫동안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유관순은 18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이화학당은 형무소 당국에 유관순 시신의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일제는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이화학당 교장 월터(Miss Jeanette Walter)는
이 사실을 미국 신문에 알려 세계 여론에 호소하겠다고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결국 일제는 해외 언론에 알리지 않고, 장례는 극히 조용히 치러야 한다는 조건을 붙여 시신을 인도하였다.
1920년 10월 12일, 유관순의 시신이 이화학당으로 돌아오자 학생들은 통곡으로 맞이하였다.
시신은 이화학당 수위실에 안치하였고, 세브란스 교의를 불러 수습하였다.
유관순의 직접적인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수형기록표의 사진을 통해서
심한 구타와 영양실조 등의 부작용에 따른 갑상선 기능저하증을 주된 원인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10월 14일 이화학당 측은 정동교회 김종우 목사의 주례로 이태원 공동묘지에서 조촐히 장례를 지냈다.
이후 일제가 이태원 공동묘지를 군용기지로 개발하면서,
유관순의 묘는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되었으나 실전(失傳) 되었고(없어졌고),
현재 유관순 생가의 뒷산인 매봉산에 초혼묘(招魂墓)가 봉안되어 있다.
충청남도 공주에 있는 영명학당에서 수학하다 1916년,
미국 여성 감리 교회 선교사 사애리시(史愛理施)부인의 권유로
서울의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교비생으로 편입학했다.
당시 이화학당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교였고,
집이 멀었던 유관순도 자연히 가족과 헤어져 기숙사에 살며 공부하게 되었다.
재학 중에는 교내 학생 자치 단체 이문회(以文會)에서 활동하며
하란사 선생의 지도를 받았다.
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의 친구로 알려졌던 남동순 할머니가 지난 3일
서울 강북구 자택에서 별세한 것으로 5일 밝혀졌다. 107세.
1903년 충남 천안에서 태어난 남 할머니는 6살 때 유관순 열사를 만나 소꿉친구로 자랐다.
유 열사와 함께 이화학당에 재학 중이던 1919년 남 할머니는 '3·1 운동'에 가담했다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해방후 6.25 전쟁 이후에는 약 1,000 명 가까이 되는 고아원을 운영 하기도 하였다.
전쟁 고아들과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과 찍은 사진도 있다.
유관순이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에 진급한 1919년, 3.1 운동이 시작되었다.
교장 룰루 프라이는 학생들의 안전을 염려하여 참가를 말렸지만,
학생들은 학당의 담을 뛰어넘어 기어이 전원이 참가했다.
이 여파로 1919년 3월 10일에 일제는 전국 모든 학교들에 강제로 휴교령을 내렸고,
함께 이화학당을 다니던 사촌언니 유예도와 함께
3.1 운동 중 ‘천안 아우내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
만세 운동 중 유관순의 부모가 모두 일본 경찰에게 살해당하였고,
이 과정에서 유관순도 일본 앞잡이 노릇을 한 친일파 조선인 정춘영에 의해 체포되어
공주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재판 당시 “다시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고 대일본제국 신민으로서 살아가게 될 것을 맹세할 것인가?” 하는
일본인 재판장의 질문에 유관순은
“나는 왜놈 따위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언젠가 네놈들은 반드시 천벌을 받고 반드시 망하게 되리라!”라며
재판장에게 의자를 던졌다.
이에 법정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징역 5년형이라는 중형이 내려졌다.
하지만 이는 법에 따른 정상적인 형량이 아니었고,
이에 유관순 열사는 지인들의 도움으로 항소하여
복심 법원에서 3년형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이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뒤 옥중에서도 대한 독립 만세를 불렀다.
이후 1920년 4월, 동경 이왕세자와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여왕의 결혼 기념 특사로
1년 6개월로 감형되었다.
그러나 유관순은 결국 1920년 9월 28일,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후유증 끝에
향년 17세의 어린 나이로 옥사하였다.
얼마나 고문이 참혹했던지 이화학당에서 시신을 반환할 것을 요구했을 당시
서대문형무소에서 거부할 지경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이화학당 교장 룰루 프라이는 유관순의 시신을 인도받아 장례를 치러 주었다.
결국 1920년 10월에 시신을 반환받아 10월 14일에 장례를 치르게 되는데,
유해는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러나 일본이 이후 이태원동 공동묘지를 군용기지로 사용함에 따라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할 예정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이미 부모가 전부 순국하고 오빠가 투옥되는 등
여러 사정들로 인해 무연고 묘역이 되어 버린 터라
파묘 이후 유실되었고,
정황상 다른 무연고자 유해들과 같이 합장묘로 옮겨졌을 것으로 보인다.
유관순은 묘(산소)가 없다.
2018년 이화여고 동창회와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 등의 주도 하에 합장묘 옆에 '유관순열사 분묘 합장 표지비'가 세워졌다.
어린 시절 활발하고 적극적인 '대장' 성격
소꿉친구 "여자인데도 커서 대장 된다고"
이화학당 장학생 편입 후 독립 활동 참여
고종 황제 서거 후 5인 결사대 조직 나서
3·1운동 이후 고향 돌아가 만세운동 주도
체포 후 7년 중형 언도..옥살이 끝에 순국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
유관순(1902~1920)은 3·1운동을 이끈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 꼽힌다.
비폭력주의의 만세 운동을 펼친 인물로서
우리 민족에겐 민주주의와 자유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이다.
유관순은 1902년 양력 12월16일 충청남도 목천에서 태어났다.
서구 열강들의 제국주의가 세계를 휩쓰는 가운데
일본은 '탈아론(脫亞論)'을 내세워 아시아 침략의 야망을 드러내던 시기였다.
한반도를 두고 러시아와 대립하던 일본이 영국과 동맹을 맺어
'조선 지배' 의지를 표명한 해가 바로 유관순이 태어난 1902년이다.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 사이에서
3남2녀의 둘째 딸로 자란 유관순은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었으며
어린 시절부터 총명했다.
누가 글을 가르쳐 주지 않아도 어깨 너머로 한글을 깨우쳐 성경을 외운 것과,
공부에 재능을 보여 이화학당에 장학생으로 들어간 일화는 유명하다.
유관순은 동무들과 놀 때 대장을 자처했고 부모의 말에 순종했다.
하지만 비단 어른의 말이라도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면
한사코 듣지 않는 뚜렷한 주관을 갖추고 있었다.
유관순의 소꿉친구 고(故) 남동순 열사는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여자인데도 커서 대장이 되겠다고 했다.
뭘 하면 열심히 하고 안하면 딱 안하는 성격"이라고 말한 바 있다.
1916년 지령리 교회의 샤프 선교사 추천으로
이화학당 보통과에 편입했으며
1918년 고등과로 진급한 유관순은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이화학당 학생들이 오후 3시께 꾸준히 가져왔던
조국 독립 기도회에 활발히 참여했다.
또 학생단체 '이문회(以文會)'의 일원으로 토론 활동을 하며
회의 조직력과 발언법 등에 대해서도 교육을 받았다.
고종 황제가 서거한 1919년 1월22일,
국민들이 흐느껴 울고 선배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유관순 역시 친한 동기들과 '5인 결사대'를 조직한다
. 이들은 나라를 위해 필요하다면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고 몸에 태극기를 지니고 다녔다.
1919년 3월1일. 이화학당 교문 앞에는
몰려나온 학생들과 프라이 이화학당 교장이 대치했다.
거리에 뛰어나가 만세를 외치기 위해 교문을 열어달라고 요구하는 학생들을
교장은 "연약한 학생들을 보호할 책임이 있다"며 막아섰다.
완강하게 두 팔을 벌린 교장과 맞서던 학생들은 밀치고 당기며 몸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프라이 교장의 방어선은 거센 물결 앞에서 절로 허물어졌다.
학생들은 서로 팔을 끌고 등을 타며 담을 넘었고 만세를 외치는 대열 속으로 파고들었다.
멈출 수 없는 군중의 행진 속에 유관순도 함께 하고 있었다.
대한독립 만세를 목이 터지게 부르며 유관순의 마음 속에
독립을 향한 강한 의지가 본격적으로 태동했다.
대한독립 운동에 눈을 뜬 유관순은 3월5일 학생단 시위에 참석했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혔으나 곧 석방됐고 3월13일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만세 운동의 소식을 고향 사람들에게 전하고 독립선언서를 내놓으며
충남 천안시 아우내 장터(병천시장)에서 벌일 운동 계획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유관순은 독립선언서를 구하기 위해 미리 서울까지 다녀왔으며
아픈 사촌 언니 몫까지 떠맡아 홀로 시위 연락을 담당했다.
후에 박인덕 이화학당 선생은 자서전을 통해
"유관순은 고향 마을 사람들과 주변 지역 사람들을 분기시키고,
태극기를 만들었으며, 장날 시위운동을 조직했다.
독립운동을 하자는 전갈을 전하기 위해 몇 십리 길 걷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며
영웅적 역할을 증언하기도 했다.
4월1일(음력 3월1일) 병천시장에서 열린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에서
유관순은 군중을 이끌며 만세 운동을 주동했다.
하지만 이날 일제 헌병의 총칼에 부모를 잃고 체포돼 징역 7년의 중형을 선고받게 된다.
전문가들은 일본이 재판장에서도 당당하게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밝힌
유관순에게 법정모독죄를 씌워 더 중형을 선고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유관순 열사의 수형자기록표 사진
하지만 유관순은 고등법원 상고조차 홀로 하지 않았다.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에서 출간한 책 '불꽃같은 삶, 영원한 빛 유관순'에 따르면
그는 주위 사람들의 설득에도 "삼천리 강산이 어디면 감옥이 아니겠느냐"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유관순은 서울 서대문형무소 8호 감방에 수감됐다.
가로 세로 1m의 방에서 머물다
지하감방의 취조실에서 취조를 받고 오는 생활을 반복했다.
학대 속에서도 유관순은 수시로 만세를 외치며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라는 독립선언서의 공약을 따랐다.
3·1운동이 1주년을 맞는 1920년 3월1일에는
감옥 안에서도 수감자들을 이끌어 함께 만세를 불렀고,
이에 3000여명의 수감자들이 호응해 바깥까지 그 소리가 퍼져나갔다.
형무소 주위로 인파가 몰려 경찰까지 출동했다.
유관순은 이를 주동했다는 이유로 심한 고문과 가혹한 매질을 당했다.
유관순의 형기는 영친왕 결혼에 따른 특별사면령으로 절반인 1년6개월로 감형됐다.
그러나 유관순은 감옥 안에서 지속적으로 받아온 학대와 영양실조로 인해
이화학당의 월터 선생과 오빠 유우석이 면회를 갔을 때 얼굴이 퉁퉁 붓고 전신이 퍼렇게
멍이 들 만큼 병이 들었다.
결국 유관순은 쇠창살 사이로 새어들어오던 빛을 온 몸으로 맞아보지 못하고
1920년 9월28일 18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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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엔 반절(한글)이라고 했겠다. 아무도 가르치지도 않은 그 반절을 혼자 익혀 성경을 읽더니 외워대지 않겠어요? 재주는 꽤 있었던 것 같아.”
유관순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당찬 아이였다. 친구들과 놀 때도 지기 싫어하고 고집스러운 면이 있었으나, 항상 예의바르게 행동하고 타인을 배려했다.
“내가 17살에 5~6가구밖에 살지 않는 이 마을에 시집을 왔을 때, 소녀 관순은 귀밑머리, 황새머리,조랑머리로 머리를 세 갈래로 닿고 사내처럼 동네를 휘젓고 다녔으니 5살 되었을거야.”
탑원리 등재마을 김원숙
“관순은 어려서부터 씩씩한 장난을 좋아하고, 장난을 하면 반드시 우두머리가 되었다.달 밝은 밤이면 완고한 어른들의 눈을 피해가면서 동네 아이들을 데리고 앞 냇가에 있는 모래사장에 달려가서 진쌈하기와 술래잡기를 하는데, 매양 대장 노릇을 하고, 줄넘기를 하면 제 길로 한 길은 쉽게 뛰어넘었다. 추운 겨울이라도 널뛰기는 물론이요, 남자처럼 얼음 지치기와 눈장난을 하고,방 안에 있을 때도 동무들과 같이 풍계묻이와 쌍륙을 치면서 큰 소리로 웃으며 유쾌하게 놀았다.
이 모양으로 관순은 여자라기보다 차라리 남자다운 기운이 있으므로 ‘장난꾼’이라는 별명을 들었다.그리고 동정심이 많아서 언제든 남을 도와주기를 좋아하며,심술궂게 싸우거나 부모의 말을 거슬러 근심을 끼치는 일은 도무지 없었다.부모가 시키는 일은 첫 마디에 순종하고, 비록 힘에 겨운 일이라도 거역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만일에 어른의 말이라도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면한사코 듣지 않고 제 마음대로 하기때문에 어른들도 능히 그 뜻을 굽히지 못하였다.”
유제한(유관순의 먼 조카)
유관순이 8살 되던 해, 일제의 식민통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일제는 1876년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을 시작으로 우리의 내정을 간섭하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승리함으로써, 노골적으로 침략의 야욕을 드러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외교권을 빼앗고, 1910년 국권을 강탈하며 헌병을 앞세운 감시와 탄압으로 이른 바 ‘무단통치’라는 탄압정책을 펼친다.
기울어가는 국운 앞에서도 어린 유관순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집안사정이 어려웠던 유관순은 사애리시 선교사(Alice H. Sharp)의 추천으로 1915년 이화학당 보통과에 교비생 자격으로 진학한다. 학업에 열중하며, 새로운 친구들과 우애를 쌓고, 근대 신식 교육을 받으며 꿈을 키워나갔다.
이화학당 시절 사진
ⓒ이화박물관
뜨개모자
유관순이 조카 유제경을 위해 손수 만들었다.
“관순이 성질은 몹시 외향적 성격이었고 퍽 남성적이었습니다. 또한 동정심이 풍부했습니다.관순이는 공부하다가도 얼떨결에 '만두나 호-야‘ 소리를 들으면 없는 부스럭 돈을 들추어내서라도 곧잘 그것을 팔아주곤 했습니다. 지금도 밤에 '야식'이나 '메밀묵'을 팔러 다니는 어린 학생들의 처량한 음성을 들을 때면, 가끔 관순이의 복스럽던 모습이 한 폭 그림이 되어 떠오릅니다. 정말 관순이는 복스럽게 생겼습니다.”
서명학(유관순의 친구)
이화학당에서 유관순은 규칙에 따라 아침 7시에 기상 종소리를 듣고 일어나 종일 수업을 듣고 8명이 쓰는 기숙사 방에서 사촌언니 유예도와 함께 생활했다. 일요일이 되면 유관순을 비롯한 전교생은 단정한 옷차림으로 정동교회로 향했다. 정동교회는 손정도 목사가 청년과 학생들ㄹ에게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심어주며 나라와 민족, 신앙을 위해 헌신할 수 있도록 의지를 불태워주었다. 1918년 6월까지 정동교회를 맡았으며, 이후 상해로 넘어가 이동녕의 뒤를 이어 제2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장에 선출된다. 손정도의 후임으로 부임한 이필주 목사는 훗날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을 활동한다.
3.1운동이 있기 전의 어느 날 밤, 유관순은 친구 이정수를 불러 강당으로 가자고 말한다. 그 곳에는 유관순이 사 온 종이와 빨강, 파랑 물감이 준비되어 있었다. 유관순과 이정수는 강당 한 구석에서 촛불을 켜고, 찬 손을 불어가며 태극기를 그렸다. 당시 태극기를 본 사람이 드물었기에, 태극은 밥공기를 엎어 그리고, 팔괘는 정확히 알 수 없어 흉내만 냈다. 이렇게 만든 태극기를 기숙사 36개 방마다 붙여 다음날 선생님과 학생들이 깜짝 놀라는 소동이 일었다.
보각스님
이정수, 유관순의 친구
“관순이는 괄괄한 성격에다 자존심이 강했어요. 3.1운동 때 옥사하지 않았더라면,해방 후 분단 조국의 현실을 그냥 바라보고만 있지 않았을 겁니다.”
이정수(보각스님, 유관순의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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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아산기추진위원회에서 기획해
김일환 순천향대학교 교수와 천경석 온양문화원향토문화연구소 위원이 취재·집필해
‘아산지역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을 위한 학술조사용역 결과 보고서’에 수록한 것을 일부 여약한 것이다.
김복희는 1902년생인 유관순보다 1살 위이며, 학년으로서는 이화학당 2년 선배
3월 31일을 시작으로 아산 일대에서 봉화시위가 들불처럼 퍼져 나갈 때
염치면 백암리(白岩里)에서도 마을 주민들이 봉화를 피우고 마을 뒷에 있는 방화산에서
산상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는 유관순과 같이 이화학당에 다녔던 김복희(金福熙)와
김복희가 이화학당에 가기 전에 가르침을 받았던 영신학교(永新學校) 여교사 한연순(韓連順)이 주도해 이루어졌다.
대부분의 만세시위는 주도자들의 자세한 이야기가 남아 있지 않아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다행히 김복희는 자신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겨 18세 어린 소녀가 어떻게 만세시위를 주도하게 됐는지 알 수 있게 됐다.
김복희의 이야기는 김복희 한 개인의 이야기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식민지 교육 체제 하에서 교육받은 당시의 김복희나 유관순 같은 십대 청소년들이
어떻게 식민지 교육에 물들지 않고 민족정신을 갖고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여
독립운동에 나서게 됐는지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이 때문에 구체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이화학당 학생 김복희와 백암리 만세시위
ⓒ 온양신문 |
김복희는
1901년 11월 30일(음력 10월 20일) 이순신의 고택과 현충사 인근 백암리 구미동에서
아버지 김윤필(金允弼)과 어머니 박씨 사이에 태어났다.
위로 오빠 김주영, 아래로 여동생 복례의 3남매 중 장녀였다.
약 50호 되는 구미동 마을은 대지주의 땅이 많았는데,
지주들은 현지에 ‘마름’이라 부르는 소작지 관리인을 두고
소작인들에게 가을에 수확물의 일정한 비율을 소작료로 거두어 들였다.
당시에는 대개 병작반수(竝作半收)라 해서 지주가 수확의 절반을 가져가나
악덕 지주들은 6~7할 이상을 가혹하게 거두는 경우도 있었다.
1901년경 지주 장지순의 소작지 마름으로 인천에서 최봉현이란 사람이 왔다.
마름 최봉현은 기독교 감리회 인천 내리교회의 독실한 신자였다.
최봉현은 아산 자신의 집에서 예배를 보며, 이웃들에게도 전도했다.
구미동 마을에는 불과 3개월 만에 70여 명의 신자가 생겼다.
소작을 주었다 빼앗았다 할 수 있는 마름의 권한 때문에 마름의 종교를 받아들인 면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당시 한국의 정치는 불안했고,
외세의 침략과 청·일간, 러·일간의 전쟁 또는 전쟁의 소문이 도는 등
국민들의 불안감이 매우 높았던지라,
생명보전과 안전을 위해 힘있는 서양 국가의 종교에 의지하려는 국민들이 많아
크리스토교가 급속히 확장됐던 때와 맞물려 있었다.
그 결과 얼마 후에는 구미동 이웃 마을에도 구미동만큼의 신자가 생겼다.
구미동에는 아산 최초 개신교 교회인 백암교회가 세워졌고,
백암교회 교인들은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해 다른 마을 사람들은 ‘예수교인 마을’이라 불렀고,
술 담배 못하는 사람을 보면, ‘구미동 사람’이라며 놀렸다.
김복희는 백암교회 안에 설립된 ‘영신학교’에서 공부했다.
당시 백암교회는 공주에서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끔 외국인 선교사들이 찾아오곤 했다.
그런 외국인 선교사 중에 이름이 앨리스 제이 햄몬드 샤프(Alice J. Hammond Sharp)이며
사람들이 사애리시(史愛理施), 또는 ‘사부인’이라 불렀던 여성 선교사가 있었다.
여성교육에 큰 관심과 열성을 가지고 있었던 샤프의 눈에 총명한 김복희가 띄었다.
샤프 여사는 김복희가 영신학교를 졸업하자 서울의 이화학당에 추천해 4년제 보통과의 4학년에 편입하게 했다.
보통과를 마친 김복희는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로 진학했다.
김복희는 1902년생인 유관순보다 1살 위이며, 학년으로서는 이화학당 2년 선배였다.
3ㆍ1운동 때 유관순이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1학년이었는데,
김복희는 졸업이 한 달도 못남은(1919년 3월 말에 졸업) 3학년이었다.
3ㆍ1운동이 일어난 것은 김복희가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3학년으로서 졸업식을 앞둔 시점이었다.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만세시위는 서울 4대문 안 전역에서 벌어졌다.
시위학생들은 덕수궁 뒤에 있는 이화학당 앞에 와서 이화학당 학생들의 참여를 촉구했다.
학생들이 교문으로 달려 나갔다.
시위가 격화되자 총독부는 휴교령을 내렸다.
기숙사에 있던 지방 학생들은 모두 고향으로 내려가야 했다.
3월 13일 김복희는 기차를 타고 천안역에 내려 고향 백암리로 돌아왔다.
김복희는 영신학교 교사인 한연순을 만나 서울에서 있었던 독립선언과 만세시위운동을 이야기하고,
백암리에서도 독립만세 시위를 일으킬 결심을 말했다.
이에 한연순 선생도 뜻을 같이 했다.
둘은 김상철 같은 동네유지들과 만나 만세운동을 의논했다. 3월 31일 밤으로 날을 정했다.
그날 밤 모든 동리민들이 횃불을 들고 동리에서 가장 높은 방화산 꼭대기에 모였다.
산상 봉화시위가 아산 일대에 퍼지던 때였다.
산정에 모인 약 50여명의 주민 중 여자는 김복희와 한연순 뿐이었다.
주민들은 봉화를 피워놓고 한 마음으로 “대한독립 만세!”를 목청껏 외쳤다.
시위소식이 알려지자 온양 온천리 헌병분견대 헌병들이 총을 쏘며 올라왔다.
주민 모두 헌병들에게 해산돼 대부분 잡혀 갔다.
시위를 주도했던 김복희와 한연순은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헌병을 피해 산을 타고 내려오다
낭떠러지 밑 돌밭에 떨어져 둘 다 큰 부상을 입었다.
김복희는 특히 얼굴을 다쳐 피투성이가 됐다.
한연순은 부상이 심해 서울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
헌병들은 만세시위의 주도자가 김복희와 한연순인 것을 알고,
두 사람의 상처가 아물기를 기다려 온양 헌병대분견소로 끌고 갔다.
두 사람은 온양헌병대에서 걸어서 천안역으로 압송됐다.
두 사람은 천안역에서 기차로 조치원에 도착해 헌병대 유치장에서 하루 밤을 지내고, 다음날 공주감옥에 수감됐다.
↑↑ ▲출옥 후에 발한 어떤 여학생의 편지 <신한민보 1919년 9월 25일> |
ⓒ 온양신문 |
김복희는 공주 감옥에서 유관순을 만났다.
아우내장터 시위 후 잡혀와 있었다.
김복희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공주감옥에 3.1만세시위로 잡혀온 여성은 10명이고 2명은 서울로 호송됐다 한다.
그중에 유관순도 있었다.
김복희는 미결수로서 2개월 보내고 재판을 통해 징역 2개월을,
한연순은 3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실제 미결수 기간까지 포함하면 김복희는 4개월, 한연순은 5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했다.
(김복희의 복역기간에는 이설이 있다.
‘우리 어머니-김복희 장로의 일생’은 김복희의 며느리 김광신이 정리한 책인데
여기서는 김복희가 1년감 복역한 것으로 기술돼 있다.
하지만 재판기록과 김복희 본인이 작성한 편지에는
2개월을 선고받고 2개월의 미결수 생활까지 4개월을 복역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한연순보다 한 달 먼저 출감한 김복희의 증언에 의하면 수감생활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일제당국의 가혹한 처우로 짐승이나 먹을 정도로 열악한 음식을 먹었고,
여자들에게는 감옥내 공창으로 데려가 삼을 삼게 하는 강제노역도 강요당했다.
김복희는 당시 백암리 봉화시위에 30여명의 남자들이 참여했지만
여성은 김복희 자신과 한연순 뿐인데 체포된 후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여성 두 사람이고
남자들은 헌병분견소에 가서 30~60도의 태형을 받았다고 한다.
ⓒ 온양신문 |
이것은 두 여성이 주동자로 파악된 결과였다.
한데 염치면 수형자가 명부가 실전돼 당시 태형 을 받은 남자들이 몇 명인지, 또 누구인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김복희는 4개월 수형 후 이화학당의 전문학교 보육과에 진학해 졸업하고,
사에리시 여사의 강경 황금정여학교 부속유치원 설립에 참여하고,
강경 만동여학교의 교사, 공주 대화정교회의 영명여학교 부속유치원 교사, 영명여학교 교사로 일하기도 했다.
1925년 전재풍 목사와 결혼하고,
전 목사의 목회지를 따라 강원도를 거쳐 1934년에는 경기도 화성군의 천곡교회에서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모델인 최용신의 뒤를 이어 강습소 교사로 일하기도 했다.
↑↑ ▲김복희(오른쪽 끝)의 가족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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