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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25일(주)
* 시작 기도
주님...
이 종의 우매함을 불쌍히 여기사 주님의 깊으신 지혜와 계시의 영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불안과 초조함으로 점철된 불투명한 미래가 나로 하여금 심히 근심하게 하나이다.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하게 하고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다 하셨사오니 내가 염려하는 것은 나의 이성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인함임을 아나이다.
모든 지각 곧 이성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줄 믿고 담대함으로 나아가게 하옵소서.
이런 불신앙의 죄를 주님의 보혈로 씻어 정하게 하시고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주명하사 말쓰믜 빛을 비추소서.
오늘 성탄의 아침에 생명으로 오신 주님을 맞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마 2:1-12
제목 : 성탄, 생명의 양식을 주러 떡집의 구유에서 나시다.
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3.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5.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7.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8.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9.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10.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12.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 나의 묵상
오늘은 성탄절이다.
창세전 말씀(로고스)으로 존재하시던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아기로 태어나신 날을 기념하여 지키는 절기이다.
물론 12월25일이 정확히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은 아니다.
게다가 기독교 안에서도 각 정파별로 그 지키는 날이 다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이 반드시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이라고 못 박을 수는 없지만, 대부분 이 날을 기쁘고 즐거운 성탄절로 기키는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의 나심이 왜 우리에게 기쁨이 되는가?
세상 사람들이야 예수님이 아닌 산타클로스를 주인공 삼아 크리스마스라는 절기와 함께 눈이 오는 연말연시라는 특수를 노려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독특한 재미를 누리기도 한다.
아무리 그런 크리스마스가 기쁘고 즐거워도 그 날만 지나면 마치 콜라나 사이다를 마신 것처럼 다시금 목이 마르고 마는 것이 이런 세상의 기쁨이요 즐거움(fun)이다.
주님이 오신 목적이 이런 목마른 즐거움을 주시려고 오신 것은 분명 아닐 게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왜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는가?
한 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 오셨다.
주님이 태어나신 동네의 이름은 베들레헴이다.
‘베들레헴’이라는 이름의 뜻은 ‘베이트’와 ‘레헴’의 합성어로서 베이트는 집, 레헴은 떡이라는 말이며 이 둘을 합하면 떡집이 된다.
예수님은 바로 떡집에서 태어나신 것이다.
또한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구유에서 태어나셨다.
(눅 2: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구유는 다름 아닌 짐승의 밥통, 밥그릇이다.
밥통에 담긴 것은 먹는 양식이다.
그것도 짐승의 밥통에 담긴 것은 짐승의 양식인 것이다.
예수님은 짐승의 먹이요 짐승의 양식으로 오셨다.
이것이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천사들이 나타나서 아기 예수님의 나심을 전한 표적이었다.
당시 목자라 함은 양을 치는 자들로써 양을 소유한 주인이 직접 양을 치는 것이 아니라 삯을 받고 주인의 양을 쳐주는 그런 직업적인 목자들이었다.
그런데 이런 목자들은 유대 사회에서 가장 천한 직업군의 하나였다.
이들의 직업이 얼마나 비천한지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무슨 소송 사건이 나면 두 사람의 증인을 세울 수가 있는데 이 목자들은 소송의 증인으로도 인정받지 못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그야말로 인생 자체가 비참하기 그지없는 자들이란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남들의 신임도 얻지 못하지만, 그들 역시 남들의 말을 잘 믿지도 않는다.
그런데 천사가 갑자기 나타나서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 곧 복음을 너희에게 전한다고 하면서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 곧 그리스도가 나셨다”고 말하니 그것을 어떻게 믿겠는가?
아마도 그들은 눈만 멀뚱멀뚱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천사들이 한 가지 표적을 이야기하는데 그 아기 예수가 구유에 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자들은 서둘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러 달려가서 아기 예수를 보고 천사들이 자기들에게 말한 그대로 된 것을 확인한 후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돌아갔다.
표적은 예나 지금이나 모두가 보고 싶어 하고 또한 좋아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도 표적, 즉 기적적으로 병 낫기를 원하고, 귀신이 쫓겨나가는 기적을 원하기도 한다.
이런 표적은 유대인들도 정말 좋아하였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기만 하면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하였다.
(요 2:18-21)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3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또 유대인들 중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표적을 보여달라고 한다.
(마 12:38-40) 그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예수님께서 유대인과 서기관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신 두 가지 표적, 즉 자신의 성전된 육체와 요나의 표적을 말씀하신 것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죽음이며 나아가 무덤이다.
예수님께서 표적을 보여달라고 조르는 이들에게 왜 두렵고 무서운 죽음과 무덤에 대한 표적을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다름 아니라 무덤을 통해서만 생명이 나오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무덤이 아니고서는 어느 누구도 생명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생명과 전혀 상관없이 그저 감각적인 쾌락과 육신의 만족을 얻으려는 죽어 있는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당신의 죽음과 무덤을 통하여 생명을 주시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기 예수로 오시되 베들레헴 떡집, 그것도 구유에서 나신 것이다.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구유는 짐승의 밥통이다.
짐승의 밥통에 뉘어 있다는 것은 짐승의 밥으로 오셨음을 의미한다.
그러면 짐승은 도대체 누구를 의미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실 때 생물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다.
(창 1:20-21)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24절에도 동일하게 ‘생물’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여기서 말하는 생물은 히브리어로 ‘네페쉬 하야’라고 한다.
그런데 창 2:7절에서는 우리 사람을 창조하신다.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여기서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할 때 생령 역시 히브리어로 ‘네페쉬 하야’로서 생물과 동일한 의미이다.
단지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존재였다는 것이다(창 1:26-28).
창세전 말씀으로 계셨던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아기 예수로 태어날 때 구유에 태어나셨다는 것은 이와 같이 짐승의 밥으로 오셨는데 이 짐승은 단순한 짐승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해야만 하는 자들의 밥 곧 양식으로 오신 것이다.
그래서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져 불의한 자가 되어버린 이 땅의 죽어 있는 모든 자들이 그 예수님을 양식으로 먹고 살아서 다시금 하나님과 연합하여 의를 이루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자신을 생명의 떡이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라고 하신다.
(요 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6:55저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요 6: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주님은 이 땅에 오실 때 자기의 뜻을 행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오셨다.
(요 6: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그렇다면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가?
(요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이처럼 아버지의 뜻은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함께하시던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그를 보고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영생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것은 무엇인가?
(요 6: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요 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이 두 구절은 병행구를 이룬다.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
다시 말하면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아들을 믿어야 하며 아들을 믿는 것은 곧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믿는 것은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며 이런 자가 영생을 얻는다.
그러면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요 6:56-58)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은 곧 내가 주님 안에 주님이 내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내가 주님의 구속사건 안에 들어가 그와 함께 연합하는 것을 말한다.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기 원하시는 것은 당신의 살과 피인 생명의 양식이다.
그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은 내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이 내 안에 거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내가 주님의 구속사건 안에서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을 말한다.
이런 생명의 양식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영생을 얻어 누리게 하시고자 베들레헴 곧 떡집에 그것도 구유에 나신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살과 피 곧 우리가 먹어야 할 양식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다.
나는 성탄의 의미도 모르고 우리가 먹어야 할 살과 피 곧 생명의 양식도 모르며 그저 시류를 좇아 세상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던 그런 자였다.
어려서는 아무 것도 모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어른이 되어서도 복음을 모르니 그저 어려서부터 지켜왔던 전통적인 성탄절이 단지 기쁨의 절기라는 그것으로 서로 선물을 주고받으면서 즐거워하였던 것이다.
이런 나는 모태로부터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과 분리된 영적으로 죽은 자였다.
(고전 15:22a)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하나님 아버지는 아담이 범죄하기 이전에 그와 함께 가졌던 기쁨의 교제를 추억하신다.
그리고 그 기쁨의 교제를 다시 회복하기를 그토록 원하셨다.
그래서 그냥 죽도록 내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복음을 주셔서 그 교제의 기쁨을 회복하시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창세기 3:15절과 21절의 여인의 후손이요 또한 가죽옷이다.
창세전 약속대로 우리에게 아들을 보내주시므로 영생을 얻게 하시되,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므로 메시야적 행위로써의 복음을 통하여 그를 보고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이다.
나는 이런 생명의 복음을 몰랐다.
그래서 그저 관념적으로만 믿어왔고, 영생도 죽어서 가는 천국으로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교회에 나갔으니 천국은 당연히 맡아 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죽어서 가는 천국을 영생이라고 믿었던 나의 삶은 널뛰기 인생 그 자체였으며, 그로 인하여 삶의 현기증을 견딜 수가 없었다.
하루하루가 삶의 고난 속에서 평안이 없었다.
좀 잘 되면 살 것 같고, 내 생각대로 안 되면 죽을 것 같은 인생은 환난과 곤고 그 자체였다.
그것은 목사가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목사가 영생을 알아야 성도들에게 바르게 가르치고 바른 길로 인도할 텐데 영적 지도자인 목사가 영생을 모르니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여 둘 다 구덩이에 빠지는 꼴이 되고 말았다.
나와 마찬가지로 예수를 믿는다는 성도들도 예수를 이용해서 이 땅에서 잘 되는 것을 구하는 자들이었다.
그런 나에게 주님은 복음을 들려주셨고 이제는 그 복음으로 영생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영생을 어떻게 얻으며 누리는지 알게 하셨다.
아직 많은 성도들이 그 영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정말 안타깝지만, 그러나 나는 그들이 영생을 알고 누릴 수 있도록 나에게 주어진 이 복음을 전하는데 최선을 다 할 뿐이다.
내가 영생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영생은 복음을 듣고 아들을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구주께서 탄생하신 날, 곧 성탄의 아침에 복음과 생명의 말씀을 묵상하며 하루를 시작할 수 있음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내게 주신 이 생명은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요 주님의 생명이기에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린 것처럼 나도 나의 생명을 드려 주님의 죽으심과 장사됨에 연합하여 날마다 아들의 생명 안에서 살며 영생을 누리다가 주님의 다시 오심을 대망하는 하루하루가 되기를 소망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내 안에 감춰진 죄가 드러나는 것은 주님의 은혜요 섭리임을 믿습니다.
감춰진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마 10:26).
아들이 육신으로 탄생하실 때 나타난 그 별도 사라진 순간 이 세상의 추한 음모와 살인 그리고 냉대를 그대로 드러내셨나이다.
성탄의 빛이 비추이는 이 아침에 나의 숨겨진 죄가 드러나게 하시고 그 자리에 당신의 생명으로 온전히 채워지게 하옵소서.
나는 죽고 오직 예수로 사는 주의 소유가 되기를 원하나이다.
영광을 받으소서.
높임을 받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