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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님이 오십니다. 원문보기 글쓴이: 천국중개사
영계의 공의에 의하면 고차원은 저차원을 지배하고 다스리게 됩니다.
그래서, 하늘의 공간을 크게 3가지로 나뉜다면,
이 지구를 첫째하늘.
공중권세 잡은 악한 영들이 활개하는 저 공중을 둘째하늘.
주님이 계시는 천국의 공간을 셋째하늘이라고 보셔도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둘째하늘에 거하는 악한 영들은 첫째하늘에 거하는 사람들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첫째하늘 아래서 땅에 발을 디디며 살아가는 우리네 인간으로서는 어떻게 해야 악한 영들을 이길 수 있을까요?
바로, 우리의 심령안에 성령 하나님이 내주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셋째하늘의 주인이시기에 성령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안에 거주하시면,
영계의 공의에 의해 우리는 셋째하늘을 품은 사람이 되기에 둘째하늘의 악한 영들을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땅에서는 아무리 선하게 착하게 양심적으로 산다해도 그런 것들은 다 첫째하늘의 육에서 나온 것이므로 둘째하늘의 악한 영들을 이길 수가 없다라는 것입니다. 고로,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선하게 살면 구원받는다라는 것은 영적으로 공의에도 안맞고 무지한 소리라는 것입니다.
첫째하늘의 선한 공의를 갖고서는 둘째하늘의 악을 이길수가 없으며 셋째하늘의 선에도 들어가지 못한다라는 것입니다.
가령, 이런 것입니다. 곤충인 개미가 아무리 자기네 안에서 선하게 착하게 양심적으로 산다해도 고등동물인 호랑이를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미가 호랑이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호랑이보다 고등인 사람이 그 개미를 보호해준다면 보호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호랑이마저도 개미근처에 얼씬못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우리는 셋째하늘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므로써 그분이 주시는 성령이 마음안에 내주하니, 우리는 둘째하늘의 악한 영들이 사주하고 주관하는 죄와 악에 대해서 이길 수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많은 사람들이 자꾸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육신은 약하다>
여전히 많은 목사님들도 <우리 육신은 약하다>라는 말로 베드로를 예로 들면서 사람들을 위로하거나 죄에 대해서 명분화를 삼으려는 일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가뜩이나 세상이 좋고 죄짓는 것을 버리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아~ 그렇구나. 나 정도는 그렇게 나쁜 건 아니구나. 맞어 맞어. 우리 사람은 약해. 또 회개하고 가는거지 머. 우리 본성은 안바꿔. 이 세상에 죄 안짓는 사람 어딨어.
그럼 잠시 베드로를 봅시다. 베드로는 단순하고 명료한 기질의 소유자이자 다혈질의 성격을 갖은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그런 그가 한번은 예수님이 바다위를 걸어오시자 자신도 걸어보겠다고 고백을 합니다. 이에 그는 바다위를 걷습니다. 그러다가 풍랑을 보고 두려워 바닷속에 빠져버렸지요.
그런 그는, 예수님 앞에서는 목숨을 바치겠다고 결코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서도, 막상 주님이 잡혀가고 모진 고문과 수모를 당하는 모습앞에 주님을 몇번이나 부인을 합니다. 소위 수제자라고 인정받았던 사람이 말입니다.
이런 베드로는 스승이신 예수님이 그토록 애절히 눈물뿌려 땀이 핏방울이 되는것처럼 떨어지도록 기도를 하심에도 졸음을 이기지 못해 꾸벅꾸벅 조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나약하다라는 말씀을 하시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표현을 곧잘 써먹기도 하고 베드로를 예로 들면서 수제자인 베드로도 그런 인간적인 나약한 모습을 보였다면서 자신들의 나약함도 명분화 하려는 말들을 곧잘 하는 것을 보곤 합니다.
그럼 정말로 그렇게 사용하라고 주님께서 그런 말씀을 남기신 것인지 우리 한번 살펴볼까요?
베드로는 비록 풍랑이 두려워 바다속에 빠졌지만, 그는 바다위를 걸은 주님다음으로의 최초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중에 어느 누가 믿음을 갖고 바다위를 걸어본 사람 있습니까. 없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믿음이 결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마냥 약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우리는 과연 몇이나 주님앞에 충성과 순교를 결심할만큼 자신의 생명을 드리는 신앙을 합니까. 여전히 우리는 가난해지는 것을 싫어하고 욕먹는거 싫어하고 건강 잃어버리는 거 싫어하고 직장 그만두는거 두려워하고 외로운 것도 싫어하지 않습니까. 자기 가족에 대한 울타리사랑에만 극한하여 살아가는 분들도 꽤 많습니다. 그런 이들이 결코 주님앞에 충성과 생명을 결심 할수는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소유와 가족마저도 뒤로한채 목숨을 걸고 주님을 지키겠다고까지 고백한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을 받기전에도 이 정도의 믿음과 충성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을 받기전인지라 많은 허물과 변개를 보이기도 하였지만, 성령을 받고 난 뒤의 베드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정말로 물과 피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성령받기전의 베드로의 모습을 갖고서리 인간의 나약함과 죄에 대해 무너지는 것을 합리화 하려고 합니다. 또한 그렇게 가르치는 목사님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젠 눈뜨셔야 합니다. 성령받기전의 베드로의 모습보다는 성령받은 후의 베드로의 믿음생활을 우리는 더 눈여겨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사람들이 말하는 나약함이 정말로 나약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본문의 제목처럼 실제로는 영적으로 완고하고 완악한 것을 갖고서리 인간의 나약함이라고 착각들 하는 경우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셋째하늘의 주인이신 성령하나님을 마음에 모신 자녀들입니다. 그렇기에, 능히 둘째하늘의 악한 영들을 대적하고 파해버릴 수 있으며 또한 자신의 악한 마음도 할례해 갈수 있는 힘이 이미 주어져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주하신 성령하나님을 바라보기 보다는 여전히 악한영의 공격과 내 안의 나약함만을 바라보며 자멸하고 낙심하고 곤고해하니 어이 하는지요.
그럼 봅시다. 우리가 정말 나약한 것인지 완악한 것인지 말입니다.
성경 하루에 1장씩 읽습니까. 솔직히 1장은 너무 적습니다. 친구들이랑 이야기하는 시간은 1시간이고 두시간이고 아깝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영화 한편 볼라쳐도 두시간은 앉아서 집중하는데 과연 성경 읽으면서 1시간 정도 집중해서 읽으냐 이 말입니다.
이것 역시 나약해서 못읽는다 하실 것인지요. 아닙니다. 나약한 것이 아닙니다. 완고한 것입니다. 그렇게 읽으라고 해도 안읽습니다. 어떤 분들은 바뻐서 못읽는다고 합니다. 바뻐서 못읽는 것이 아니라 그런 분들은 안바뻐도 안읽습니다. 나약해서 안읽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완고한 육의 속성을 갖고 있으니 안읽는 것입니다.
기도하십니까. 이미 기도생활이 몸에 배어 영적으로 단련된 분들도 계시겠지만, 여전히 많은 분들이 기도생활을 어려워들 하십니다. 특히나 신학생들이라 하시는 분들조차도 기도를 하지않고 머릿속에 지식을 쌓는 것에 급급한 것을 볼때는 참으로 안타깝기도 합니다.
누구보다도 더 기도하고 성경보고 해야할 분들이 그런 것은 뒷전이고 시간나면 놀러다니고 세상 공부 잘 해서 이생의 자랑만 갖추려고 하니말입니다. 이것 또한 나약해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영적으로 매우 완고한 것입니다.
일전에 어느 지인은 시간이 없어서 성경을 못보고 기도를 못하니 저보도 기도 좀 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중보(도고)기도를 하는 것은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또한, 다른 이들에게도 기도를 부탁하는 것도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에게만 의존하는 것은 나약해서 그런 것일까요? 아닙니다. 영적으로 완악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 보십니다. 나약해서 못하는 것인지 영적으로 완고해서 안하는 것인지.
십일조 하라고 그렇게 외치고 외쳐도 안합니다.
많은 이들이 그럽디다. 인터넷 여기저기서 유럽이나 미국에서 신학을 하고 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우리나라만 십일조한다. 십일조로 인하여 교회가 물질타락된다. 목사 배만 불린다. 십일조는 구약산물이다. 율법은 끝났다. 십일조대신 차라리 구제나 선교헌금하자.
이런 이야기들을 논리적으로 줄기차게 풀어주는 글들을 접하고서는 나도 이젠 십일조 하지말아야지 결심하면서 지금껏 잘못된 신앙생활 했구나 한탄하시는 분들.
나약해서 어디 그럽디까. 아닙니다. 영적으로 완악한 것입니다.
교회에 상처받았거나 목사님이 마음에 안드는 것을 갖고서리 그렇게 표현하지는 못하고 그런 논리의 전개를 보고서는 마치 그것이 신앙의 길잡이를 해준것마냥 회피하는 것이지요.
십일조 내는거 아까워서 못하는 마음, 믿음 없어서 못하는 마음 드러나기는 싫으니 유럽이나 미국의 교회예를 들어가면서 거기는 십일조 안한다고 왜 우리나라만 이러냐고 소리 높이고 있는 것. 나약해서 그럽니까 . 아닙니다. 영적으로 완고한 것입니다.
심지어는 십일조는 율법이다. 신약성경에는 십일조 언급없다. 굳이 왜 하냐. 소리 높이고 싶으신 분들. 그 지식이 옳고 논리적으로 정연해서 십일조 안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물질에 매여있는 자신의 마음은 결코 나약한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완악함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의 본질은 마음의 할례를 이루어 주님 형상 회복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이야기하고 했건만... 여전히 자기발견은 안합니다. 마음의 할례를 할라치면 고통이 따릅니다. 우리가 군더더기 살가죽을 베어내는것도 무지 아프듯이, 마음의 할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마음안에 있는 더러운 육의 속성과 악한 속성을 베어내는 것도 마음이 무지 아픕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그런 마음의 할례보다는 당장 눈에 보이고 열매가 보이는 행함적인 충성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한, 그런 행함적인 충성은 금방 열매가 보이면서 남들에게도 인정을 받을 수 있고, 자신도 무언가 신앙생활 잘하는 대열에 들어간 것처럼 마음의 푸근함을 받을 수 있기도 하니까요.
저 외에도 많은 교회나 목사님들이 이제는 신앙의 참본질은 행함이나 어떤 의를 세우는 것에 있지 아니하고 정말로 마음을 할례하여 주님의 선한 형상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구나를 전하시는 분들이 있으십니다.
마르다마냥 분주히 옮겨다니는 신앙보다는 마리아처럼 주님말씀을 경청하며 자신을 믿고 맡겨드리는 신앙이 진정 신앙의 본질임을 말입니다.
일전에도 신앙독백(2)에서 말한 것처럼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어떤 행함을 갖고 분리하기를 좋아들 합니다. 카톨릭 머머. 달갈 머머.
한때 최목사라는 분의 지옥간증이 유명했드랬습니다.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 중에는 장례식때 예배 드린 사람. 헌화 한 사람. 묵념 한 사람들이 있었다하여서 이제는 장례식에서 그런것조차 다 폐하자는 움직임이 대단하였지요. 심지어는 제사음식 먹은 사람도 지옥에 가 있다고...
하여, 개중에는 장례식때 헌화했다고. 예배 드렸다고 나 이거 지옥가는거 아니냐고 불안해서 우리 목사 나쁜 늠이라고 하면서 교회를 떠나버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참 우스운 일들입니다. 정말로 나약해서 이런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완고하고 완악하니 이런 돌출행동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그런거에 있지 않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해도 영적으로 완악하니 여전히 자기 의를 세우고 진리의 자유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서에도 보시면, 성도들은 제사음식을 먹고 안먹고를 갖고서리 거룩함을 논하려고들 하니 사도바울은 단호히 말하는 것을 봅니다. 그런것이 신앙태도가 아님을 말입니다.
오늘날 인터넷에서는 정말로 믿음이 크고 주님을 사랑하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에 반해 카페들에는 여전히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마냥 의를 세우려 편을 가르고 지식적인 신앙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소리를 높이다보니 사도바울이 체험한 주님의 진리의 자유함과 소망보다는, 여전히 끝없는 족보싸움과 신화, 변론에 치우쳐서 변질된 복음을 전하며 여린 성도들을 더더욱 종교울타리에 가두는 일들을 보곤 합니다.
이 또한 약해서 그럽니까. 아닙니다. 영적으로 완악하고 완고하니 이러는 것입니다.
그럼 나약한 것과 영적으로 완고한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우리는 육을 입고 있기에 성령님이 안에 내주하셨어도 육에서 오는 한계가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도 송곳으로 몸을 찌르면 아프기 마련이듯이 말입니다. 아무리 예수님 사랑하는 사람이고 믿음이 크다해도 밥을 안먹으면 육은 배고파지기 마련이요, 굶주리면 힘이 없고 축 쳐지기 마련이듯이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파인들은 나약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완고했습니다.
사두개파들은 부활이 없다하여서 첫째형이 죽어서 그 아내를 여럿동생들이 취했는데, 과연 부활때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될 수 있겠느냐라는 논리로. 어느 누구도 자신들의 이러한 질문을 당해낼 수 없을 것이라 자부하기도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그들의 잘못된 지식과 논리를 깨우쳐주셨지만 그들은 그렇다면 아~ 그렇구나 뉘우치고 주님을 따랐어야 했는데 그러지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 역시 자신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법이 대단하다라고 자부하였지만, 주님은 너희들은 회칠한 무덤이라고 책망을 하였지요.
그러나, 그들은 영적으로 완악하고 완고하니 물과 피와 성령으로 거듭나는 속사람의 변화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결국은 자기 몸에 세우는 의와 종교행위에 열심인 사람들로 기억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눈감고 주님을 생각하며 기도해 보십시요. 정말로 내가 나약해서 이러는가. 영적으로 완악하고 완고해서 이러는가.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목사 고집은 하나님도 못꺽는다는. 정말 그렇습니다. 리더급이 한번 하나님 이름 걸고 넘어지면서 자기 하는 일을 높이 세울때는 가히 그 뜻을 꺾을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하여, 그 안에는 정말로 하나님의 뜻이 있었던 것들도 있지만, 많은 것들에서는 성도들 허리를 잘라내는 한 개인의 영적인 완악함으로 인하여 비롯된 일들도 많았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면 마음이 순해지는 것도 있지만, 단지 기도만 많이 해가지고서는 아니됩니다. 바른 기도를 해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터치하실 수 있는 기도를 하셔야 합니다. 이제는 내 뜻을 기도를 통해 이루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성령이 마음에서 운행하시고 마음은 순해지고 온유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온유해진다라는 것은 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우리가 또 잘 분별해야 합니다. 이것은 차후 나눌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아무쪼록 성령님께서 마음을 자주 터치해주실수록 성경지식적인 옳고 그름의 문제에서 벗어나 영적으로 완고함도 육적인 완악함도 서서히 풀어지고 깨어지고 변화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것이 옳다. 이것이 진리다라는 것으로 인하여 마음이 굳어지고 강퍅해지는 것을 조심 조심 또 조심해야 합니다.
부디, 나약함이 아닌 자신의 완고함임을 우리는 깨우쳐보아야 할 분야들이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