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굴 / 박해람
아무리 入口의 몇 마리를 죽인들 살아서 저 깊은 어둠 속을 들어갈 수 있겠나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제 뿌리의 깊이만큼 그늘을 드리우고 살
어둠이 주는 캄캄함으로 한여름 나는 것들도 있다
어둠의 본성을 못 버리는 것들이
넓은 그늘을 만들고 있는 오전
개미굴 입구를 쑤석거린다.
작은 어둠들이 쉴 새 없이 기어 나오는 입
저 촘촘함들이 모여 만든 것들이 어둠이라면
그리 두렵지 않을 듯싶기도 하다만
발이며 손등으로 달라붙은 검은 어둠
한 생에도 슬슬 어둠이 묻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어둠에서 나오는 것들 그 서늘함이 잠깐 몸을 떨게 한다
아직 펄펄 끓는 목숨에
하나 둘 붙기 시작하는 이 서늘함들이라니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이 사실
전혀 모르는 것들이라는 것을 아는 때
나뭇가지만 죽어라 물어뜯는 목숨들
거대한 배후가 조롱하는 오전이 막 오후가 되듯
검은 그늘에 떨어지는 여름 나뭇잎들
그런다고 저 그 어둠이 줄어드나
검은 개미 한 마리도 물들이지 못하는 이 환함의 헛수고.
채널 38 / 박해람
정규방송 사이에 겨우 끼여 있는 채널 38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팔아야만 하는 채널 38번
시장판에서 소리치는 떨이의 무식한 상술쯤은
슬쩍 비웃으면서
고급화, 단단함, 세련됨 뭐 그런 것들을 적당히 강조하면서
팔아야 하는,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살수 없는.
짧은 생각들이 나열된 진열장
식욕, 성욕, 지식 같은 것들. 타인의 감정에 방문하여
정해진 방송시간 안에 팔아야 하는 것들
화려하게 부풀려진 내용 없는 포장 품
그러다 누군가 채널을 돌리면
한 생애를 잠시 쉬어야 하는
더 이상 팔 물건이 없어지면 사라지는 채널
내가 매진된 뒤에는 내가 사라지는 채널
팔고 간 사치의 품목들이
벼룩시장에 헐값에 나도는
낡아 가는 일만 남은 흔적이라는 물품들
한 채널을 부여받고
열심히 팔고 있는 이 生이라는 나날들
서른 여덟 살 먹은 남자의 일터 채널 38번
다양한 증정품도 없고
정규 채널 사이에 잠시 묻어 넘어가는
누군가 그의 채널에 걸려들어 아내가 되고 딸아이가 되고 부모가 되는
재방송 없는 정규프로그램 채널 38번
향기와 냄새 / 박해람
몸을 관통해 나가는 것들 다 목적지가 있다
그리고 다 냄새가 나는 것들이다
향나무를 자르고 그 속
삼분의 일쯤 되나 붉은 색 나무의 내장을 본다
원통형의 딱딱함을 뚫고 가려 했던 길이
고작 자신의 몸 안에서 끝이 나는 길이라니
새들이니 바람이니 하는 것들
그 어느 것 하나 동행하지 않는 길이라니
본래 나무는 한 가지 이상의 색깔을 갖고 있다. 푸른색이
버리고 간 것들도 알고 보면 다 썩은 것들 아닌가.
잔가지를 통해 바람이 빠져나가고 한여름과 가을이
빠져나가고 청춘이니 전성기니 하는 것들 다 빠져나가고
늙은 청춘으로 서 있는 것들 한 일생을 잘라놓고 그 속을
들여다보며 너나 나나 속과 겉이 다르게 산 것은 같다라는
자조.
향기를 채우는 일에 종사한 향나무와
냄새라는 악취를 채우고 있는 나나
땅에서 분리되어야 죽는 나무와
땅으로 들어가야 죽는 나나
일생을 서로 주고받는 사이라는 것이지
그리고 냄새는 지나간 것들에게서만 난다는 것이지
미확인 비행물체 / 박해람
李氏 喪家 마당에
아침부터 미확인비행물체가 조립중이다
이 마을 오랜 전통으로
세상과 세상을 오가는 비행물체
소금을 말에 싣고 설산과 협곡을 돌아 장사를 나가는
티벳의 마방들처럼
아주 슬픈 엔진소리를 내며
서서히 공중부양을 한다
하늘과 땅을 동시에 지나야만 갈 수 있는 그곳을 향해
다 풀고 가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승객의 조립된 이승이 저 안에서
서서히 풀리고 있을까
잠시 고였다 떨어지는 눈물 같은 승객의 일생,
그 염기가
남겨진 이들의 일상에 얼마 동안이나 간을 보탤지
슬픔도 그저 소음일 뿐인 승객에게
배웅 객들이 꽂아준 몇 장 지폐의 효력이 끝나는 곳에 그곳이 있다
가끔 나타났다 사라지는 비행물체
한 번도 승객은 걸어서 타고 걸어서 내린 적이 없다
사람의 뒤로만 왔다가
꼭 사람의 앞으로만 사라지는 승객들
왔다간 일이 소문으로만 남아 있을
지구의 지층이 되는 일만 남은
마을에서는 한 사람이 사라질 적마다
나타났다 사라지는 미확인 비행물체
잠시 내려앉았다 간 포도밭 한 귀퉁이에
새로 생긴 저승이 동그랗게 솟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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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람 시인
1968년 강원도 강릉출생
1998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나를 관통한 것들은 죄다 어디로 갔을까.
뚜렷이 갈 곳이 있어 왔고 또한 갈 곳이 정해져 있었을까.
겨드랑이를 들면 코를 쏘는 냄새, 속을 뒤집으면
얼마나 더 역겨울까.
새들과 바람이 동행하지 않은 자신 속의 길은 시작과
끝이 한 몸이리니 열꽃을 피우고 나무가 자라고
나무는 새를 불러 들였다.
푸른색이 버리고 간 것들, 잔가지를 흔들 때 바람이
빠져나가는 소리, 한여름과 가을이, 청춘이
빠져나간 그대는 이름 없는 성자,
물 간 고등어처럼 자조할 필요는 없다.
향기와 악취인 너와 나를 뒤집어 보자.
"아쉬운 듯 모자라게 살아라"는 법정 스님의 말씀을
읊조려 본다.
/ 황동섭 시인
* 법정 스님의 말씀( 2010년 3월 12일 중앙일보)
"내 장례식을 하지 마라. 관(棺)도 짜지 마라.
평소 입던 무명옷을 입혀라."
"내가 살던 강원도 오두막에 대나무로 만든 평상이 있다.
그 위에 내 몸을 올리고 다비해라.
그리고 재는 평소 가꾸던 오두막 뜰의 꽃밭에다 뿌려라."
"때로는 한밤중 소나기가 잠든 숲을 깨우며 지나가는
소리에 나도 잠결에서 깬다.
숲을 적시는 밤비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그것은 한밤중 적막의 극치다."
"사람의 문명은 직선이다.
그러나 자연은 곡선이다.
강물과 산맥, 해와 달을 보라. 다 곡선이다.
직선은 조급하고, 냉혹하고, 비정하다.
그러나 곡선은 여유와 인정과 운치가 있다.
곡선의 묘미에서 삶의 지혜를 터득할 수 있다.."
-2005년 10월 길상사 가을 법회에서
"차지하는 것과 쓸 줄 알고 볼 줄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쓸 줄 모르고 볼 줄도 모른다면 그는 살 줄도
모른다. 하나라도 더 차지해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는
탐욕의 노예인지도 모르겠다."
-2009년 '인연 이야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