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진 요한마리아비안네 신부
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
다니엘 12,1-3 히브리 10,11-14.18 마르코 13,24-32
지금 당장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2016년 ‘자비의 희년’을 폐막하며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지내도록
선포하셨습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우선 선택하여 모범을 보이신 스승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들과 연대하며 그들에게 형제적 사랑을 실천하기를 촉구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때,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지는 때에 앞서 큰 환난이 일어날 것입니다.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입니다”(마르 13,24-25).
다니엘서는 “네 백성의 보호자, 미카엘 대제후 천사가 나서리라. 또한 나라가 생긴 이래,
일찍이 없었던 재앙의 때가 오리라”(다니 12,1)고 말합니다.
재앙의 때 ‘책에 쓰인 이들’에게는 구원의 때이며, ‘현명한 이들’에게는 영광의 때입니다.
이때가 오면 하늘과 땅은 사라질 것입니다. 사람이 기댈 곳은 오직 말씀뿐입니다.
하늘과 땅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입니다. 이들을 만든 것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 심판의 때, 주님 재림의 때에는 하늘과 땅은 사라지고 오직 말씀만 남게 될 것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 한계를 지니지만 하느님 말씀은 영원하고 없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걸 간과한 채 살아갑니다. 자꾸 ‘나중에 하지’라는 말로 하느님 말씀을 따르는 삶을
지체합니다. 사람은 그때가 언제인지 모릅니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십니다”(마르 13,32 참조).
미루다 보면 그때를 결국 놓치고 말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에게 기회가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살아갈 기회가 아직 우리에게는 남아있습니다.
특별히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맞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행하기로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절대적 빈곤에 허덕이는 이들입니다. 기본적인 의식주조차 해결할 수 없어
거리를 떠돌며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이들입니다.
대부분 노력하지 않거나 게을러서 가난하게 살지 않습니다.
혹 그러더라도 인간이라는 이유로 최소한의 생계는 보장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가난한 이들을 먼저 돌보셨고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자비의 희년을 마치며 오늘을 세계 가난한 이의 날로 정하신 것도
이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향한 자비와 연대, 형제애 실천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이 자비를 사는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의 징조를 읽고 그때를 준비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은 내 곁에 계신 주님을 알아뵙고,
그때에 주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서 영원한 기쁨과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광주대교구 이호진 요한마리아비안네 신부
2024년 1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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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정호 바오로 신부
연중 제33주일 (세계 가난한 이의 날)
다니엘 12,1-3 히브리 10,11-14.18 마르코 13,24-32
지금, 여기에서
온 마음을 다해 노래를 부르는 가난한 무명가수, 간절함으로 뛰는 운동선수들의 땀의 진심이
사람들에게 전해집니다. 그 진심의 힘은 대단합니다. 나를 돌아보게 하고, 나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고 마음을 열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힘 있는 사람, 많이 가진 사람도 나를 움직이게 하고
나를 돌아보게 하지만 가진 것 없는 사람, 힘없는 사람, 작은 일에 변함없이 성실한 사람,
몸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남을 먼저 생각하는 이른바 날개 없는 천사,
얼굴 없는 천사들은 더 큰 힘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가슴을 열게 합니다.
대림절이 가까우면 교회는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복음, 자신의 삶의 흔적을 돌아보게 하는 복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복음을 들려줍니다.
오늘 복음처럼 세상 종말에 대한 이야기도 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메시지보다는 천재지변으로 불바다가 된 세상, 까무러칠 정도로
온통 혼란한 모습 같은 무서운 장면에 시선이 머물 수 있습니다. 그 시기를 누구도 알 수 없는
세상 종말의 끔찍한 상황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우리는 들으려 해야 합니다.
하느님만 아시는 세상 종말(마르 13,32 참조)의 순간은 언젠가는 분명히 올 겁니다.
세상 종말의 상황이 무섭고 두렵기도 하겠지만 다행스럽게도 끔찍한 세상 종말을 내 눈으로
목격하기 전에 나의 죽음, 나의 종말이 먼저 올 겁니다.
인자하신 하느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를 배려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되새겨야
할 것은 세상 종말보다 먼저 나에게 오는 나의 종말입니다. 교회는 순서 없이 다가오는
각자의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살아있는 나’에게 완전함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는
계속 주어지고 있다고, 매 순간 진심으로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다가올 미래에 대한 걱정보다 지금 그리고 여기가 중요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나의 말과 행동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내일로 그대로 이어집니다.
오늘 나의 말과 행동이 나도 모르게 쌓여가는 나의 습관입니다. 나의 습관이 나의 일상입니다.
나의 일상 안에 하느님이 계십니까? 우리 안에 하느님, 하느님의 자리가 있어야
우리는 성령의 도움으로 인해 완전함으로 갈 수 있습니다.
순간순간 선하게 하느님을 향해 가는 나의 노력과 실천은 계속 되어야 하고,
선하게 살아가려는 다짐도 지금 여기에서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아름다운 종말을 맞을 수 있을 겁니다.
부산교구 도정호 바오로 신부
2024년 1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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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수 프란치스코 신부
연중 제33주일 (세계 가난한 이의 날)
다니엘 12,1-3 히브리 10,11-14.18 마르코 13,24-32
주위 돌아보기
개인적으로 종종 축구와 관련된 영상을 찾아보곤 하는데 잘 못하는 선수들의 특징 중에
공통적인 부분이 있었습니다. 바로 주변의 선수들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잘하는 선수들은 공을 가지고 있지 않는 순간에도 수시로 주변의 선수들을 파악하고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공을 가지고 있을 때 다른 선수들을 보려고 하면, 어찌 되었든
공에 시선이 분산되어 잘 보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러기에 공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계속해서 다른 선수들의 움직임을
파악해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공을 가지고 있을 때에 빠르게 상황에 대처할 수도 있고,
패스도 더 잘 주고받을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들은 어쩌면 기적이라는 공을
받기만을 바라며, 다른 것들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주변의 이웃들과 상황들은 바라보지 못하고 오로지 공만 쫓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 한 순간만을 위해서 말이지요.
하지만 하느님 나라 완성이라는 ‘결승골’ 을 넣기 위해서는 모든 선수가 유기적으로 잘 움직여야만
그 골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백성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내 주변 이들을,
상황들을 수시로 바라보고 그들과 소통해 나가야지만 완성될 수 있습니다.
단 한 명도 배제되어서는 안 됩니다. 공 한 번 만져보겠다고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기 위해
움직여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마지막 날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 무렵……할 것이다.’ , ‘그때에……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날, 즉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기 위해서는 무화과나무를 통해서 여름이 가까이 온 줄을 알게 되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표징을 알아볼 수 있도록 깨어 행동해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전례력의 마지막을 향해가는 지금, 우리 주변의 모든 것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활동하고 계시는 주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도록, 알아들을 수 있도록 노력할 수 있는 시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주변 이들에게 늘 귀 기울이고
관심 가질 수 있는 신앙인 되도록 다시 한 번 결심할 수 있는 시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춘천교구 장윤수 프란치스코 신부
2024년 11월 17일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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