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갑옷을 입자
(로마서 13 : 11-14)
크리스천을 대상으로 한 여론 조사에 “당신은 왜 교회에 다니고 신앙생활을 하십니까?”라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이 질문에 응답자의 약 40%에 해당하는 사람이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라고 응답했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도 어느 정도는 불안감을 갖고 있으며, 마음의 평안을 간절히 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불안은 사실 모든 인간의 실존입니다. 그 시작은 인간이 에덴에서 추방당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에덴에서 추방된 인간은 진리의 빛을 잃었습니다. 갈 길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벼랑끝과 같은 세상을 살게 되었습니다. 낭떠러지에 선 사람이 불안을 느끼는 건 당연합니다. 그런사람은 다른 사람을 밀어내고서라도 자신이 살고자 합니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정죄하고 공격하면서까지 자신이 옳음을 증명하려 합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불안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을 칩니다
우리는 불안을, 빛이신 주님께 나아가는 수단으로 삼아야 합니다.
빛이신 주님 앞에 가기 전까지 인간의 문제는 해결될 수 없음을 알아
야 합니다. 마치 어머니 배 속에 있다가 갓 태어난 아기가 앞이 보이지 않아 불안해하며 우는 것처렴, 예수님을 만나기 전 세상은 온통 어둠과 불안뿐입니다. 인간은 빛이신 주님과 연결될 때에만 평안할 수 있습니다.
군인은 군복을 입고, 경찰관을 경찰복을 입습니다.
소방관은 소방관의 옷을 입고, 발레리나는 발레복을 입고 야구선수는 야구복을 입습니다.
어떤 옷을 입었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무엇을 하고 있는 지 표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떤 옷을 입어야 할까요?
예수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영적 성장이 있나요?
예수님의 구원의 감동과 감격이 있으며 예배와 기도 생활을 하고 있나요?
어두움을 물리치고 빛가운데 생활하고 있나요?
육의 일이 아니라 영의 일을 잘하고 있나요?
오늘 본문에서 이런 질문을 나올수 있는 것은 사울바울의 종말론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종말론적 각성이야말로 우리신앙의 생명력을 주고 있습니다. 종말론적인 삶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요?
1. 자다가 깰 때입니다.(11절)
오늘 본문에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가가 깰 때가 벌써 되었더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왜 이 시기를 알고 깨라고 했습니까? 왜냐하면 이 시기는 단순한 세월을 보내는 시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을 연상시키는 시기입니다. 종말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세월을 함부로 보내지 않습니다. 깨어서 사명을 감당합니다.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보면 믿음으로 구원받은 시간이 있습니다.
이것은 과거에 구원받았다고 말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생활이 달라지는 오늘의 구원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보다도 성경을 배우고, 성경을 듣고, 기도하면서, 날마다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성경대로 살아가는 삶의 변화가 있습니다. 이것을 ‘성화(聖化)의 구원(救援)’이라고 말합니다. 구원받아 성화의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이제 미래의 구원이 있습니다.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영육 간에 구원 받아서 천국의 축복을 누리게 될 영화榮化)의 구원이 남아 있습니다. 그때는 우리가 시공간(視空間)의 제한을 받는 몸을 다 벗어버리고 변화된 몸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 죽음도 한숨도 걱정도 없는 그 나라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누리게 될 영광스러운 영화의 구원이 우리를 위해서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구원에서 미래의 구원을 받아야 하기에 깰때입니다.
어거스틴은 옛사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발버둥을 쳤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되지를 않았습니다. 어느 날 정원을 거닐고 있을 때에 이웃집에서 소년인지 소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집어 들고 읽어라! 들어서 읽어라!”하는 노래가 계속해서 반복되어 나옵니다.
그는 방에 들어가서 성경을 들고 폈더니 오늘의 본문말씀이 자기의 눈 안으로 빨려들어 왔습니다. 가슴속에 막 와 닿았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고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 말씀이 그의 가슴속에 막 와 닿는 순간에, 들어오는 순간에 그는 깊은 잠에서 깨어 날 수가 있었습니다. 어두움이 물러갔습니다.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끊고 싶었지만 끊지 못했던 과거의 옛 습관들이 깨끗이 끊어지고 지워졌습니다. 드디어 성 어거스틴이 되었습니다.
자다가 깰 때가 되었습니다. 깨어야 됩니다. 잠에서 깨어나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됩니다. 어거스틴을 변화시킨 이 말씀을 통하여서 나를 변화시켜 달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합니다.
에베소서 5장 8절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어둠이란 뭐에요. 갈 바를 알 수 없는 것이죠. 빛이란 뭐에요. 보인다는 것이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어둠속에 살다가 예수님을 만나 빛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이라는 약점이 있었고 키가 작다는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 약점 때문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약점 때문에 자존심을 내려 놓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약점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 삶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자기만 알았던 삭개오가 나누어 주기 시작하였습니다.
저주의 사람이 아니라 축복의 사람으로 바꾸었습니다.
어두웠던 인생이 빛이 넘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잃어버린자를 구원하려 오셨습니다.
2. 방탕하지 말아야 합니다.(13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어두움의 옷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어두움의 일을 벗는 것이 뭡니까? 13절에 나오는 6가지의 생활입니다.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게 바로 어두움의 옷을 벗는 것입니다.
<방탕과 술 취하지 말라>. 방탕이 뭡니까? 무질서입니다. 육체의 정욕이 원하는 대로 아무 제재 없이 내맡기고 방향감각이 전혀 없는 삶, 먹고 마시고 소리 지르면서 돌아다니는 삶을 방탕이라고 합니다. 이 방탕의 원인이 뭡니까? 술 취한데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탕과 술 취함을 하나로 묶고 있습니다.
방탕하거나 술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음란과 호색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성적(性的)인 범죄입니다.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소주나 맥주에 취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새술 성령에 취해야 합니다.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십니다.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였습니다. 성령으로 새술에 취하여야 합니다.
미국 오클라호마의 한 대형 슈퍼마켓에서 생긴 일입니다. 금요일 저녁이라 많은 사람들이 슈퍼마켓을 찾았고 모든 계산대에도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카운터에서 문제가 생겼다. 한 여성이 정부의 복지프로그램을 이용해 결제를 시도했는데 뭐가 잘못됐는지 자꾸 오류가 생겼다. 뒤에서 기다리던 이들이 불평을 쏟아냈지만 현금이 없는지 여성은 어쩔 줄을 몰라했고 결국 마트 직원들에게 항의하는 고객들까지 생겼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캐셔 테이트는 ❝이 여성을 도우라❞는 성령의 감동을 느끼고는 정중히 양해를 구하고 대신 계산을 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여성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버려진 아이 3명을 입양해 키우는 상황이었습니다. 나중에 사연을 알게 된 테이트는 그때 자신이 느꼈던 감동이 성령의 음성이 확실했다고 고백하며 오히려 도움을 받은 여성에게 감사를 전했다. ❛성령의 주파수❜에 맞추면 주의 마음을 알고 철이 듭니다.
3. 예수그리스도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14절)
어두움의 옷을 벗어버리고 대신에 빛의 갑옷을 입자고 했습니다. 빛의 갑옷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빛의 갑옷이 뭐냐,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빛의 갑옷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갑옷은 언제 입습니까? 전쟁할 때 입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어두움의 세력 속에서 살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은 전쟁터에 있는 삶입니다. 우리는 영적(靈的)인 군사들입니다.
전쟁에 나가는 사람은 완전무장을 해야 합니다. 방탕과 술 취하지 않으려고 갑옷을 입고 이것과 더불어 싸워야만 여기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사람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은 사람입니다. 성령의 검과 구원의 투구와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었기에 우리를 새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 …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컴퓨터로 유명한 인텔사에는 “미친 사람들만이 살아남는다.”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Only the paranoids survive.”)
피카소는 그림에 미쳤기에 세계 최고의 화가가 될 수 있었고
빌게이츠는 컴퓨터에 미쳤기에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미친 것 같은 열정만이 최고가 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 …”(고후5:13) 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저 사람 예수에 미쳤나봐’라고 말할 정도로 열정적으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를 믿는 사람은 예수그리스도로 옷입고 기쁨과 치료가 됩니다.
형통과 축복으로 채우집니다. 영생 복락과 부활과 천국으로 가득찹니다.
용서와 의로 승리합니다. 천국과 성령으로 만족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미치고, 성령충만으로 미치고,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을 알고 주 예수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고 빛으로 빛나고 승리하는 성도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