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세랏의 새벽 일출은 잊지 못할 것 같다.
사방을 에워싼 톱니 모양의 바위 사이로 붉은 아침해가 떠올랐다.
아침 기도는 자유롭게 봉헌키로 했는데
어젯밤 낯선 라틴어 성무일도가 너무 어색해서
아예 아침 기도 대신 구름 사이에 붉은 해를 맞으며 주님을 찬미하기로 했다.
나와 같은 생각으로 수도원 정원을 느리게 걸으며
새벽 산책을 즐기던 언니들께 사진도 찍어주고
고즈넉한 수도원의 아침을 있는 그대로 즐겼다.
'언젠가 성탄 직전에 이곳을 왔을 때는
반짝이등들로 인해 참 화려해 보이는 식당이었는데
이번엔 그저 평범한 식당이라는 걸 알았다.
같은 장소도 방문시기나 꾸미기에 따라 너무나 다르고
늘 오지 않으니 기억속에 남은대로 장소를 규정하게 된다.
내겐 따뜻한 성탄의 기억으로 남아 있던 이곳이
평범하고 소박한 장소였구나 실망감이 들었다.
나이가 들고나서 이러니 내 눈으로 본 것도 확신을 하지 못하고
내 귀로 들은 것조차 절대 우기지 않는다.
내가 믿고 있는 가치만이 진리가 아닌 것은 당연하고
내 위주로 왜곡된 청각과 시각이
본의 아니게 거짓과 완고함을 갖게하는 이유임을 알게 되자
요즘은 누구라도 확신에 차서 큰 소리로 자신의 뜻을 주장하면
따뜻한 눈빛으로
"네 생각이 맞나 봐. 난 남의 말을 잘 들어.
철 드니 내눈으로 본 것도 들은 것도 자신이 없네."
하고 상대의 뜻을 지지해 준다.
소박한 수도원의 조식을 먹고 사라고사로 이동했다.
사라고사는 기원전 1세기 로마제국시대에 창건된 도시로 고대 로마 유적이 남아 있다고 하던데
8세기에 이슬람 세력에게 지배되다가 12세기 초반 가톨릭이 탈환한 아라곤제국의 수도였다.
사라고사는 이베리아인, 로마인, 무슬림인, 가톨릭인들이 차례로 지배하고 살아왔으니
유적이 수세기에 걸쳐 이어져 와서인지
성당 앞 광장에 서면 역사의 현장에 선 듯 장중한 무게감을 느끼게 된다.
성당 제대 옆에는 야고보가 예루살렘에서 가져왔다는 후기고딕 양식의 기둥위에
야고보성인에게 나타나신 성모님을 모신 성상이 있다.
엘 필라르라고 불리는 이 성상은 돌가둥위에 성모님이 현시하셔서
선교에 실패한 야고보 성인에게 힘과 용기를 주시고 믿음의 초석을 심어준 뜻깊은 곳이다.
'내 믿음의 초석은 무엇일까?'
순례를 오면 주님을 모신 어느 성당이라도 기도하고 묵상하게 되는데
어디서나 가족과 신부님들 이웃을 기억하며 기도를 한다.
스페인에서 가장 큰 바로크 양식의 성당이며 세계 10번째로 규모가 큰 필라르 성모성당.
스페인 내전때는 세 발의 포탄이 떨어졌지만
두 개가 불발탄이 되어 지금도 성당안에 전시되고 있는데
이것도 성모님의 기적이라고 믿고 있단다.
내가 의도치 않고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기적이라고 믿는 내 앞에서
이런 엄청난 일이 일어난다면 어땠을까?
성모님 발현지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할 곳일 것이니
내가 이곳을 방문해서 느끼는 마음조차 기적이 아니겠나 싶다.
먼 길을 달려 저녁 늦게 루르드에 도착했다.
스페인에서 프랑스로 넘어온 것이다.
유럽은 국경이 모호해서 그저 버스에서 저녁기도를 하고
한숨 눈을 붙이고 나면 국경를 넘어왔다고 한다.
루르드는 전에 와봤던 곳이니
조금은 머무르는 느낌으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문득문득 출발 전부터
"내가 산티아고 길을 잘 걸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났다.
자신이 없어 편한 운동화를 준비하며
하루 8km, 11km 를 꼭 걸어낼거라고 다짐을 해본다.
사실 이번 순례의 목적은 비록 짧은 일정이지만 산티아고를 맛보기로 걷는다해서
마음이 끌린 순례였다.
순례자들은 하루20km씩 40일을 걷는다던데
겨우 이틀을 걷는데 무조건 걸을거야 마음에 다짐을 하며
핢께 방을 쓰는 동생에게도
"넌 무조건 걸어야 돼.
잘할 수 있어 우리는!"
하고 강요를 하며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