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유산을 4대째 이어나가며
한 평생 나눔의 삶을 실천하신
기안성바오로성당 윤의순(88세, 바오로) 할아버지를 만났다. (배정애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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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소속되신 본당인 기안성바오로성당의 성전터를 봉헌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때 당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 생전에 우리 아버지께서 자선사업을 하셨어. 내가 그걸 보고 '아! 나도 아버지처럼 이웃을 위해 학교도 짓고, 성당도 짓고, 그렇게 살아야겠다.' 하고 생각했지.
성전터는, 고색동성당에서 지금의 성당(기안성바오로)으로 분가를 하게 됐는데, 마침 내 토지가 있는 기안리로 한다기에 '지금인가 보다.' 생각하고 봉헌하게 된 거야. 목장 할 때 옥수수를 심어 두었던 땅인데, 95년도에 성당을 짓기 시작해서 97년도에 봉헌식을 했어. 성당을 짓고 나니 아파트도 들어오고, 분가 당시에는 470여 명이었던 신자수가 지금은 2천 명도 넘어. 주님께서는 아파트가 들어올 걸 미리 알고 계셨나 봐. (웃음) 봉헌식 때 이용훈 주교님이 오셔서 같이 사진도 찍었어.
이 사진이야.(벽에 걸린 액자에 담긴 봉헌식 사진을 직접 보여주며)
- 혹시 성전터 봉헌 하실 때 자제분들의 반대는 없으셨나요? ▲ 사실 토지 명의가 아들 요한에게 넘겨졌을 때 봉헌한 건데, 아들이 흔쾌히 내 뜻을 따랐지. 만약 요한이에게 신심이 없었더라면, 성전터를 봉헌하지 못하게 말렸을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감사할 일이야.
공동체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주님의 섭리가 이루어진 성당
- 성당 지을 당시부터 봉헌되기까지 어려움은 없으셨는지요?
▲'성전이 이제 주님께 봉헌되는구나' 하고 생각하니까 난 너무 좋아서 잠도 제대로 못 잤어. 울타리 하나하나까지 손 안 간 곳이 없지. 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마을에 성당이 생기는 것을 아주 좋아했어. 그래서 원래 가건물에다 지으려고 공사 중이던 성당을 보고, '이왕 마을에 성당 짓는 거 제대로 건물을 올리는 게 좋지 않겠냐'며, 그들이 직접 신부님께 적극적으로 말씀 드리고 해서 가건물은 철수하고 벽돌 한 장 한 장을 새로 쌓아 올렸다니까. 부역도 나오고, 음식도 해서 나르고, 그렇게 마을 사람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지은 성당이라 의미가 더 크지. 빚도 하나 없었고, 큰 사고도 없었어. 성당 다 짓고 나니까 IMF가 터지더군. (웃음)
- 외인들이 성당 짓는 데 협조자가 되었다는 게 참 인상적입니다.
▲ 아마도 내가 마을 이장도 하고 공소회장도 하고 했을 때, 힘든 사람들도 많이 도와주고 서로 도우며 살았던 게 영향을 준 것 같아. 사람들이 성당 짓는 일도 마을의 큰일이라 생각했던 거지. 시대가 변한만큼 세대도 많이 바뀌었지만, 가족 같은 정이 아직 많이 남아 있어. 공소 시절 내가 했던 일들을 아들 요한이 지금껏 이어받아 하고 있고.
나눔은 좋은 종자를 뿌리는 일, 곧 ‘희망’
- 기안리 공소회장으로 계실 때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 당시에는 다 농사를 짓고 살았단 말이야. 농사지을 때 소가 사람 네 명 몫을 거뜬히 해냈거든. 그런 소가 없는 집들은 소를 빌려가 소 품삯으로 돈을 주고 그랬는데, 그때 나는 다른 사람들이 받는 품삯의 반 정도만 받거나, 어려운 사람들은 소를 그냥 빌려주기도 했지. 또 교리교사나 장의사 역할도 했지. 영세 받을 사람들에게 교리도 가르치고, 형편이 어려워 성상을 못 사는 사람들은 내가 사서 선물로 주기도 했어. 또, 당시에는 소위 마귀병에 걸렸다는 이도 아주 많아서 신자든 외인이든 집집마다 찾아가서 기도 해 주기도 했지. 장례가 있으면 내가 염도 하고 연도도 해 주고, 돈 없어 장례 못 치르면 장례도 치러 주고 그랬어. 그 덕에 직접 도움을 받거나 옆에서 지켜본 외인들이 스스로 입교를 많이 했지. 그 덕에 우리 마을에는 신자가 전체의 반을 넘었으니까, 자동 선교가 된 거야.
뿌리 깊은 신앙의 대물림
- 화성 기안리가 고향이신가요?
▲ 이곳에서 태어났지. 내가 살고 있는 이 집이 4대째 살고 있는 집이야. 나이 열 여덟에 내가 결혼 할 당시에 이 집을 지었고, 부모님 모시고 살면서 여기서 자식도 낳고 손자, 손녀들도 여기서 태어났어.
4대째 살고 있는 집 앞에 선 윤의순 옹▼
- 어떤 계기로 신앙을 갖게 되셨나요?
▲ 사실 내가 어릴 때 자주 아프고 해서 어머니가 무속 행위를 많이 하셨었지. 굿도 했으니까. 그때는 시대가 그랬어. 먹고 살기 힘든 때라 그런지, 애를 낳으면 그렇게 많이들 아팠고 우리집 뿐만 아니라 대부분 무속 신앙에 매달리던 때였어. 그런데 어머니는 언젠가 그것이 '참 부질 없다' 라는 생각이 드셨다더군. 마침 당시 이웃에 사제가 되기 위해 공부하는 친척을 둔 사람이 있었는데, 그분이 성당을 다니는 것을 보고 무속 신앙보다 낫다는 생각이 드셔서 그때부터 성당에 나가기 시작하셨어. 그때는 기안리 공소가 생기기 전이라 왕림성당으로 다니셨는데, 산도 넘고 아주 힘들게 걸어 다니셔야 했어. 공소가 생기고 나서도 일 년에 두 번, 성탄하고 부활 때는 꼭 왕림성당까지 다녀오시곤 하셨지.
- 그럼 부모님으로부터 신앙을 이어받으셨군요. 부모님께서는 신앙인으로 어떤 삶을 사셨나요?
▲ 사실 어머니만 생전에 세례를 받으셨고,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 대세를 받으셨지. 하지만 아버지는 세례는 안 받았어도, 신자인 어머니 영향 때문인지 자선 사업을 많이 하셨어. 어머니의 신앙에 대한 열정은 아주 대단하셨지. 어머니는 평소 다니시면서 묵주기도를 많이 하셨는데, 조그마한 나를 꼭 데리고 다니시곤 했어. 그래서 한번은 내가 "어머니, 나를 왜 데리고 다니세요?" 하고 물었더니, "너는 데리고 다녀도 장난도 안 치고 요렇게 손 모으고 기도도 잘 해서 데리고 다닌다." 고 하시던 말씀이 아주 기억에 생생해. 내 아들 요한이가 어렸을 때도 당신 무릎에 눕혀 놓고, "십계명을 꼭 지켜야 한다."며 옛날 이야기 들려주시듯 자주 말씀해 주시고는 했는데, 그래서인지 요한이가 십계명을 아주 철칙으로 하고 살았어.
한 때는 신앙 때문에 아주 위험한 고비도 있으셨지. 6.25 때는 천주교 신자들을 먼저 잡아갔단 말이야. 외인들이 신자들을 고발해서, 어머니가 잡혀가 처형당하기 바로 전날이었는데, 마침 인천상륙작전이 일어나 위기를 모면하시게 되었다더군. 그때, '아, 항상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구나!'하고 느끼셨대.
- 그러한 어머니의 신앙 체험처럼, 할아버지도 비슷한 경험이 있으신지요.
▲ 그런 극적인 체험이랄 건 없어. 그렇지만 항상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느끼지. 공소 시절부터 성전터 봉헌하고 성전이 봉헌되기까지도 그랬지만, 미사를 봉헌 할 때마다 성체성사 안에 있다 보면 성령이 임하심을 느낄 수 있지. 미사가 그만큼 좋은 거야.
- 신앙의 대물림이 마치 변치 않고 흐르는 강물처럼 느껴집니다. 자녀 분들도 어르신의 뜻을 이어가신다지요.
▲ 내가 부모님께서 살아오신 일생을 보고 '나도 부모님처럼 살아야겠다.' 라고 생각하고 그랬던 것처럼, 내 아들 요한이도 그런 것 같아. 내가 공소 시절 해 왔던 일들을 그대로 받아 했고, 지금은 레지오 활동을 통해 그 맥을 잇고 있으니 말이야. 우리 며느리도, 손녀들도 아주 열심이야. 손자는 성당 다니면서 좀 속상한 일이 있었던지, 지금은 제 색시를 따라 교회를 다니고 있긴 한데, 지금 기도하면서 기다리고 있어. 괜찮아, 곧 성당으로 다시 돌아올거야!
- 그러고 보니 바오로 사도와 인연이 참 깊으신 것 같습니다. 어르신의 세례명도 그렇지만, 어르신께서 성전터를 봉헌해 현재까지도 다니고 계시는 성당의 주보 성인도 바오로이시니 말입니다. 세례는 언제쯤 받으셨고, ‘바오로’라는 세례명은 누가 정해 주셨나요?
▲ 맞아, 우리 기안성당도 나랑 같은 바오로지.(웃음) 바오로 사도는 아주 열정이 대단하셨던 분이잖아. 이방인 선교도 많이 하시고, 아주 담대하고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해.
세례명은 기안리 공소 초대회장이었던 내 대부님이 정해주셨어. 세례 받기가 쉽지 않았던 때라 그랬는지, 세례는 좀 늦게 받았지. 열여덟 살에 혼인할 때, 지금 할멈이랑 같이 받았어.
- 높은 연세와 건강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신앙생활을 이어가신다고 들었습니다. 요즘 일상이 어떠신지요?
▲ 눈에 무슨 막이 생겼나 앞이 잘 안 보여서 안과를 다녀. 귀도 잘 안 들리고... 건강이 좋지 않아 미사 참례도 자주 못 하는데, 미사에 참례하더라도 삼분의 일밖에 안 들려. 하지만 그리 불편하지는 않아. 그래도 내가 다 알아듣고 오거든. 그것 말고는 집에서 내가 옛날부터 봐왔던 교리책도 보고 성경도 보고 그래. (오래된 교리서를 꺼내 보여주신다. 1960년1월 2일 초판 발행 ‘상해천주교요리祥解天主敎要理’[가톨릭출판사]다.) 봐도 봐도 참 좋은 교리서야.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신앙인들에게 한 말씀 해 주세요.
▲ 제대로 된 밀알 하나만 있어도 괜찮아. 신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와 같아서, 자칫하면 삶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있는 모습 그대로 순명하며 묵묵히 살아가다 보면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나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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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후,
“어르신의 모습에서 사도 바오로의 모습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고 전하자,
그저 ‘허허’ 웃으시는 윤의순 옹.
그의 신앙은 마치 삶 전체를 관통해 뿌리 내린 거목과 닮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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