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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탄산수, 녹차 등을 많이 마신다. - 평소 무엇을 먹었을때도 배고픔을 느낀다면 소화 작용이 활발하여 내용물이 빨리 소화되어 그런 것이다. 이때 속을 채워주는 물과 탄산수, 차를 많이 마시면 상대적으로 공복이 해결된다. 단, 차의 경우 카페인을 조심하자. 참고로 물을 많이 마시면, 이뇨작용으로 인해 신체의 불필요한 나트륨 성분이나, 노폐물을 배출하게 되어 다이어트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이것도 과하면 독이 될 수 있으니 주의하자.[1]
야식을 먹고 싶을땐 양치를 하거나 은단을 먹는다. - 양치를 하면 입안이 개운해짐과 동시에, 치아를 자극하고 미각을 떨어뜨려 무언가를 먹고싶은 생각이 줄어든다. 은단도 비슷한 원리다. 거기다 미리 양치한게 아깝고 자기전에 또 양치해야된다는 귀찮음도 있다.
껌을 씹는다. - 껌을 씹으면 치아 활동이 활발해져, 뇌는 무언가를 섭취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식욕이 줄어든다.
음식을 먹을때 천천히 꼭꼭 씹어 먹어라 - 음식을 먹을때 천천히 꼭꼭 씹어 먹으면 위와 비슷한 이유로 식탐이 줄어든다. 천천히 꼭꼭 씹어 먹는 것은 위장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
다이어트 문서에도 어느 정도 언급되고 있다.
3. 정신병적 영역의 식탐
크게 신체적인 것(뇌기능 이상)과 심리적인 것이 있는데, 둘 다 있을 수도 있다. 심리적인 것도 일종의 강박증이라 볼 수 있는데 강박증도 어찌보면 뇌기능 이상과 관련 있으니 뇌기능과 아예 관련이 없다고 볼 수는 없긴 하다.
흔히 폭식증이라고 하는 섭식장애 증상으로 식탐이 일어나는 것은 보통 뇌기능 이상으로 인한 현상이다. 뇌하수체 호르몬 이상으로 인해 식욕조절이 되지 않는 증상이다. 이 증상으로 폭식을 할 경우, 평범한 사람은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엄청난 분량을 끊임없이 먹어댄다. 흔히 극심한 다이어트나 스트레스로 나타나는 폭식증이 일시적인 뇌하수체 호르몬 이상으로 생기는 것인데, 제대로 먹기 시작하거나 스트레스가 안정화되면 대개 곧 없어진다. 헌데 별다른 이유 없이 증상이 생겨서 만성화되기도 하며, 뇌질환이 대개 그렇듯 원인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어쨌든 폭식증이 심할 경우엔 병원을 가봐야 한다.
심리적인 것으론, 강박증에 가깝게 남이 음식 먹는 것을 싫어하는 증상이다. 단순히 많이 먹는 게 아니라, 음식을 남이 먹는 것이나 나누어 먹는 것을 불쾌해하며 함께 음식 먹는 사람의 것을 반드시 빼앗아 먹어야 직성이 풀리고, 맛있는 부분은 최대한 본인이 차지해야 직성이 풀리는, 정신병적 영역의 식탐도 있다. 이 식탐의 경우, 일행이 음식을 먹는 것을 보면 내 인생의 기회가 빼앗기는 기분이 들며, 남이 음식 먹는 것을 보면 내것을 부당하게 도둑질하고 약올리는 모습을 보듯이 괴로운 기분을 느낀다고 한다. 그래서 일부러 더럽게 굴어서 상대 입맛 떨어져서 못 먹게 하도록 하거나, 최대한 많이 뺏어먹어야 직성이 풀리고, 음식 나누기 싫어서 몰래 먹거나 일부러 분탕쳐서 못 먹게 하는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기도 한다. 문제는 이것이 가족, 연인, 부부, 자식이어도 마찬가지이며 오히려 그런 사이의 사람이 가장 피해를 본다는 거. 이 때문에 가족 인연 끊거나 연인이나 부부 사이에 이별/이혼하는 경우도 많다. 정신병적 영역이니 본인이 이렇다면 치료받으며 본능을 최대한 절제하며 상대를 배려해야 한다.
4. 죄악으로서 식탐
가톨릭에서는 7대 죄악 중 하나로 7대 주선의 절제와 반대 개념이며 글러트니(Gluttony)라고도 한다.
다만 7대 죄악으로서의 식탐은 조금 의미가 복잡하다. 7대 죄악에서는 단순히 음식에 대한 식욕만이 아니라, '음식과 재물에 대한 지나친 욕심으로 사회에 민폐를 주는 짓'의 의미로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먹어야만 하는 양을 넘어서서 필요 이상으로 많이 먹거나 재물에 대한 욕심이 지나친 것을 말한다. 넓게 보자면 특정 행위에 대한 중독도 여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즉 7대 죄악의 의미에서는 오히려 '탐욕'이 가장 적절한 번역이고, 그렇기에 가톨릭 교리서의 공식 한국어 번역에서는 라틴어 Gula를 한국어 '탐욕'으로 번역했다.
반면 흔히 대중들이 탐욕으로 번역하는 라틴어 Avaritia(영: Greed)의 경우 여기서는 '인색(吝嗇)'의 의미다. 이미 소유한 것을 베풀지 않는, 즉, 그 어떤 기부나 도움도 거부하는 행동이 'Greed'에 속하고, 우리가 흔히 아는 '탐욕'의 영역은 'Gluttony'의 영역에 해당한다. 당연히 교리서에서는 Avaritia가 인색으로 번역된다. 물론 라틴어 Gula는 1차적으로는 식탐을 뜻하니 만큼, 본래는 음식에 대한 규정에서 시작했다. 이것이 발전해서 음식과 소유물과 재물에 대한 지나친 욕심 금지로 발전된 것이다. 이것은 칠죄종과 대비되는 일곱 주선으로 보면 더 명확해지는데, Gula의 반대 선은 '절제' 이며, Avaritia 의 반대 선은 '자선' 이기 때문이다.
죄악으로서의 식탐은 과거의 시대 상황을 고려할 필요도 있다. 과거로 갈수록, 인구에 비해서 식량은 턱없이 부족했으며, 따라서 하루 밥 3공기가 적정량인 사람이 4공기를 먹는다는 것은, 누군가는 1공기를 굶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연히 이는 반사회적인 죄악일 수 밖에 없었다. 즉 식탐에 대한 경계는, 개인의 부당한 욕심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히는 짓에 대한 경계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식량을 화폐로 바꾼다면, '지나친 탐욕에 대한 경계'와 일맥상통하고 이는 현대에도 의미를 지니는 윤리이다. 때문에 위에서 적었다시피, 7대 죄악에서는 Gula를 '식탐'이 아닌 '탐욕'으로 번역한다.
그래도 이해가 안간다면 이렇게 생각해보자. 보통 '어쩌겠나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지'라는 표현을 쓸 때, 먹을 것 귀하던 전근대라면 모를까 현대의 사람들은 당연히 아사자가 되는 것을 염두에 두고 그런 말을 하지는 않는다. 즉 먹고 산다의 먹는다, 이것이 식탐에서 말하는 먹는다는 의미와 통하는 것이다.
종교가 대체적으로 타락과 방탕을 막기 위해 금욕과 절제를 강조하며,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은둔하며 수행하는 수도원 운동이 유행했다는 사회문화적인 면을 살펴보면 왜 이런 조항들이 나왔는지 알 수 있다. 이는 그리스도교 문화권 밖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동양에서도 수행을 할 시에 욕구를 억제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며 그 중에는 인간의 본질적 욕구 중 하나인 식욕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개중에 광야에서 극단적인 고행을 하는 수도자들의 경우에는 '정말 이러고도 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최소한의 영양 섭취만을 하며 살기도 했다. 근처에 있는 야생 식물을 캐먹거나, 음식을 빻고 갈아서 말린 다음 두고두고 먹거나, 죽에 재를 섞은 것만으로 버티는 등...
물론 단순히 자기만족만 얻자고 이런 짓을 한 건 아니고, 수도자들과 그레고리오 1세 교황은 탐식에 대해 다루면서 무엇보다 배고파하는 사람과 그들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내 입에 들어가는 것이 그들에게 돌리는 것 또 돌려주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실제로 수도자들은 구제하고 자선을 행하는 일을 수도의 길의 일환으로 삼고 힘썼다. 그들이 몸이 필요로 하는 것 이상 먹지 않는 것을 엄격하게 시행한 것은 자기 통제력을 키우기 위함도 있지만, 자기가 먹을 음식을 줄여서 빈핍으로 고통 받는 가난한 이웃을 위해 나눠주려는 목적 때문이기도 했다.
금식을 강조했을 때 금식은 이웃을 구제하고 자선을 베푸는 것을 연습하는 좋은 방안으로 그들이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먹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려는 의도와 목적으로 그만큼 자신의 것을 줄여보라는 것이다. 존 카시안은 "금식은 구제하고 나누는 법을 배우고 익히는 주요한 방법"이라고 가르쳤다. 그는 금식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다른 선한 일을 위한 것이 될 때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다. 아우구스티노도 "자기 자신이 먹을 것을 줄이고 또 금식하여서 그것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는 것이 하늘에 보물을 쌓은 것이고 그것은 굶주린 그리스도를 대접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금식을 구제를 행하는 것과 연결시켜 가르쳤다.[2]
최초는 유대교의 레위기 율법으로, 이에 따르면 율법에 어긋나는 음식을 먹지 말 것이며, 대식하고 폭음하지 말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에서 이 죄에 대해서 언급한 대표적인 인물은, 로마 교황제도를 후세에 근접하게 정립한 교황이었던 그레고리오 1세로, 신학적 의미에서 이 죄에 대해서 예를 들고 있다. 영문 위키피디아를 인용하면 그 죄의 예는 다음과 같다.[3]
미각의 만족을 위해 식사시간이 오지 않았는데도 먹는 행위 (Eating before the time of meals in order to satisfy the palate)
비천한 미각의 충족을 위해서 더 맛있고 더 좋은 음식을 원하는 행위 (Seeking delicacies and better quality of food to gratify the "vile sense of taste")
미각에 자극을 주기 위해서 양념과 소스를 추구하는 행위 (Seeking to stimulate the palate with sauces and seasonings)
필요한 양 이상의 음식을 먹는 행위 (Exceeding the necessary quantity of food)
음식이 사치스럽지 않고 양 자체도 적당할지라도, 음식을 먹는 것에 지나치게 열중하는 행위 (Taking food with too much eagerness, even when eating the proper amount, and even if the food is not luxurious)
토마스 아퀴나스도 이 죄에 대해서 5가지 예를 들고 있다.
Laute - 지나치게 사치스럽고, 이국적이고, 비싼 음식을 먹는 행위(eating food that is too luxurious, exotic, or costly)
Nimis - 음식을 과도하게 많이 먹는 행위(eating food that is excessive in quantity)
Studiose - 음식을 지나치게 까다롭게 먹거나 공들여서 준비하는 행위(eating food that is too daintily or elaborately prepared)
Praepropere - 지나치게 급하게 먹거나, 식사시간 이외의 시간에 먹는 행위(eating too soon, or at an inappropriate time)
Ardenter - 지나치게 게걸스럽게 먹는 행위(eating too eagerly).
다만 여기에 대해서 유의할 점이 있다. 가톨릭 교리에서는 이렇게 식탐죄의 다양한 유형을 정해놓았긴 하지만, 가톨릭에서도 일반적으로 사람이 남들보다 좀 더 많이 먹는 식습관을 가지고 있다거나 미식가라거나, 맛있는 음식 먹기를 취미처럼 즐겨하는 성향이 있다고 해서 이를 대죄(지옥에 갈 죄)라고까지 보지는 않는다. 사실 이런 유형을 제시한 토마스 아퀴나스 본인도 <신학대전> 등지에서, 음식에 대한 욕구 자체는 죄가 아니라고 정의하였고, 본디 음식을 먹는 것은 좋은 것인데 지나치게 먹는 것이 죄라고 하였다. 위에 언급된 여러가지 식탐의 행위들도 죄는 맞지만 바로 대죄가 된다고는 하지 않았다. 다만, 이런 식탐 추구가 지나쳐서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탐욕이 된다면 이는 대죄라고 규정하였다. 무슨 뜻이냐면,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나는 오로지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서 태어났다"라거나, 탐식이나 미식을 인생의 '최고 목표'로 삼고 "내 식욕 충족을 위해서는 구원이나 타인과의 나눔, 또는 가톨릭의 금식의무 같은 선행 및 교리도 아랑곳하지 않고 따르지 않겠다"는 식의 태도는 대죄라고 규정한 것이다. 이는 현대까지 가톨릭 신학의 정설이 된다.
물론 수도자의 경우는 수도회 규율준수와 봉헌생활의 극기를 위해 식사의 절제의무가 더 강하게 있고, 평신도의 경우에도 교회법에 규정된 금육과 단식의 의무 외에도 영적인 발전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강하게 하기 위한 식탐과 술, 담배 등의 생활적인 절제를 교회 차원에서 강력하게 권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부활절 이전의 사순시기에 이런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불교에서도 식탐이 많은 것을 좋게 보지 않는다. 스님들의 식사 예절인 발우공양에서는 먹을만큼만 덜어먹고 다 먹은 후에는 고춧가루 하나도 남기지 말아야 하며 정해진 식사시간 이외에 음식을 먹는 것을 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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