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플리트 장군 부자의 군인정신☆
생도시절 밴플리트 장군 동상을 보면서
'왜 외국 군인 동상만 있고 우리 선배 군인들의 동상은 없는지' 의문을 가진 적이 있다.
내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보면 육사 설립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의 했다(?)는 정도이다.
이제야 그 의문이 풀리는 것 같다.
밴플리트 장군은 6.25 전쟁 때 워커 장군의 뒤를 이어 駐韓 美 8軍司令官을 역임한 사람이다.
그는 미국 전사에서 전쟁영웅으로 추앙 받는 군인으로 제 1차 세계대전과 제 2차 세계대전에 참가하였으며,
유명한 발지전투를 지휘한 사단장이었고 프랑스에서 독일군을 몰아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군인이다.
그가 한국전선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8군사령부 참모 중에 한 장군이
" 한국전쟁은 희망이 없으니, 동경으로 철수하자."고 건의를 하자,
"나는 승리하기 위해 여기에 왔다. 나와 함께 일하기 싫다면 당장 집으로 보내 주겠다."라고 말해
한국전선에서 해이되어 가는 미군의 전투군기를 확립시켜 놓기도 하였다.
그는 뛰어난 전략가였으며, 이승만 대통령과 호흡을 맞춰 공산군을 물리치고
한국군을 현대화하는 일에 혼신의 정력을 ?았다.
특히 그의 아들은 B-26폭격기 조종사로써 1952년 4월 4일 새벽 3시경
북한의 순천지역에서 야간폭격 임무를 수행하던 중, 적의 대공포에 맞아 전사하였다.
밴플리트는 그날 오전 10시 30분경 공군사령관으로부터 아들의 전사소식을 들었지만,
아무런 동요도 없이 다음날 한국군 2군단 창설식에 참석했다고 한다.
그의 아들 "밴플리트 2세" 지미는 공군 중위였으며,
그리스에서 근무하다가 본국에 돌아와 있었다.
그는 해외 근무를 한 직후라 다시 해외근무를 할 자격이 없었지만 굳이 자원을 하여 한국 전선을 택했다.
그는 한국 전출 명령을 받자 어머니에게 이런 요지의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이 편지는 군인의 아내에게 바치는 편지입니다.
눈물이 이 편지를 적시지 않았으면 합니다만...저는 자원해서 전투비행훈련을 받았습니다.
저는 전투중에 B-26 폭격기를 조종할 것입니다.
저는 조종사이기 때문에 機首엔 폭격수, 옆에는 항법사, 後尾에는 기관총 사수와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야간비행을 할 것입니다.
아버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권리를 향유할 수 있도록 싸우고 있으며
드디어 저의 미력한 힘이나마 보탤 시기가 도래한 것 같습니다.
저를 위하여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에 미국이 위급한 상황에서 조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소집된 나의 승무원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그들 중에는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아내를 둔 사람도 있고,
아직 가정을 이뤄본 적도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저의 의무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아들 지미 올림>
이것은 그의 생애 마지막 편지였다. 이 얼마나 훌륭한 군인인가...
지미는 한국으로 부임하자 동료들을 데리고 미8군 사령부를 찾아가 아버지를 만났다.
1952년3월19일은 밴 플리트가 만60세 생일을 맞은 날이었다.
며칠 뒤 父子는 서울 북쪽의 갯벌로 기러기 사냥을 나가기도 했다.
4월2일 밴 플리트 장군은 아들과 통화를 했는데
아들은 그즈음 북한 지역으로 출격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1952년4월4일 오전 10시30분, 밴 플리트는 미 제5공군 사령관 제임스 에베레스트 장군으로부터
아들 지미가 야간 출격을 한 뒤 귀환하지 않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지미와 두 동료는 압록강 남쪽에 위치한 순천 지역을 폭격하기 위하여 출격했었다.
지미로서는 네번째 출격이자 최초의 단독 비행이었다.
새벽 1시5분에 이륙한 그는 새벽 3시 김포 비행단의 레이다와 접촉했다.
지미는 主표적이 구름에 가려져 있다면서 예비 표적을 요구했다.
예비표적을 향하여 날아가던 지미의 폭격기는 레이더에서 사라진 뒤 소식이 끊긴 것이었다.
그에 대한 구출작전이 진행되었다.
밴 플리트 장군은 아들에 대한 공군의 수색작업이 도를 넘지 않도록 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이제 구출 작전을 중지하라"고 명령한 것도 그였다.
그 후로도 그는 가끔 아들이 실종된 지역의 지도를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고 한다.
그해 부활절 밴 플리트는 한국 전선에서 실종된 군인 가족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저는 모든 부모님들이 저와 같은 심정이라고 믿습니다.
우리의 아들들은 나라에 대한 의무와 봉사를 다하고 있었습니다.
오래 전에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벗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내놓은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랑은 없습니다>
밴 플리트 장군의 아들은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
그 벗은 미국 국민이기도 할 것이고, 남침을 당한 한국인이기도 하다.
더구나 밴 플리트의 아들은 자원해서 한국에 왔다.
동포가 아닌 他國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던진 이 젊은이에게 살아 있는 한국인들은 모두가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이런 사연들을 접할 때 마다 우리는 미국인들의 우수성을 부러워 한다.
이러한 정신을 가지고 있기때문에 미국이 오늘날 세계를 좌지우지 하는 초강대국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미국사람들 전부는 아니겠지만, 거의 60년이 되어가는 한국전쟁에서 싸웠던 기억을 잊지않고
매년 한국을 찾아주는 많은 노병들이 있고,
전쟁 때 헐벗고 굶주리던 한국민을 위해 많은 지원을 아끼지않았던 독지가들도 많다.
밴플리트 장군만 해도 1953년 전역 후,
60년대에는 미국 경제계의 최고 경영자 그룹을 이끌고 와 한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자문했으며,
제주도에 목장을 개설하여 지금과 같은 제주목장을 이루는데 크게 기여하였고,
1972년에는 80세의 노구를 이끌고 한국을 찾았을 정도로 한국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졌던 사람이다.
6.25남침 때 미군이 우리를 돕기위해 참전하고 약 5만 명의 젊은이가 전사한 일을 우리는 너무 쉽게 생각한다.
특히 미군 철수를 외치는 철닥선이 없는 반미세력의 주축인 젊은이들의 일독을 권하고 싶다.
<출처: 회원 카페 운영자 메일에서 편집>
첫댓글 오랜만입니다. Van Fleet 장군에 관한 좋은 글 감사합니다.
새맘! 좋은글 감사하요. Cyber 상 이라도 접하니 반가워요.
새마음과 같은 의문을 품고 살아온 48년!, 오늘에야 확 풀렸습니다. 회고하면 부끄럽네요. 전직 카폐지기 다운 좋은 글 감사합니다. 카폐를 뒤져보면 새마음의 흔적이 유난히 빛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자료, 자주 올려 주시기를 부탁한다면 주제넘을까요?
과찬의 말씀 ~~부끄럽기도 하고... 앞으로 자주 들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작천님의 파발마 여백 란의 재치있고 맛갈스런 글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희생적인 봉사에 감사~~~
Van Fleet 장군과 워커 장군의 무게를 함께 느낍니다. 이 분들의 동상이 태능 육사와 용산 8군사령부 앞에 서게 되는 군요. 물론 밴플리트 장군의 동상은 이미 육사 내에 세워져 있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