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 목 : “영적 장자여! 약함 때문에 도리어 강하라!”
+ 본 문 : 고린도후서 12장 7절 - 10절 (신약성경 298쪽)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곧 강함이라. 아멘!
서로 인사하겠습니다. / “잘 되고 있습니다.” “말씀대로 하면 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하면 잘 됩니다.” “믿고 기도한 대로 됩니다.”
김승이라는 분이 쓴 “살아 있음이 희망이다.” 라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많은 힘을 주는 책입니다.
이 책은 두 팔과 두 발이 없이 태어났으면서도 “약한 것이 오히려 강함” 이라고 말한 닉 부이치치라는 분의,
신앙 간증을 담은 은혜로운 책입니다. 이 닉 부이치치는 우리나라에 와서도 간증을 했던 분이기도 합니다.
두 팔과 두 다리가 없는 장애인인 닉 부이치치는 호주에서 목회하고 있는 목회자 자녀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 보리스와 두시카는 신실한 목회자 부부로서, 장애 아들 닉이 태어났을 때 혼돈에 빠졌습니다.
혼돈의 과정을 거치면서, 혹시 하나님이 우리 부부를 저주한 것은 아닌가라는 두려운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두시카는 아이의 엄마이면서도, 아이가 태어난 지 4개월이 지나도록 자신이 낳은 아이를 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차츰 그들 부부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훌륭하게 키우기로 헌신했습니다.
닉 부이치치는 두 팔과 두 다리가 없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이 다 정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두 팔이 없으니 손을 사용할 수가 없었고, 두 다리가 없으니 설 수도 없었습니다.
그가 여섯 살이 되어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을 때, 닉 부이치치는 비로소 자신의 장애를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를 놀리는 학생들이 싫었습니다. 죽고 싶어 부모 몰래 자살을 시도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지켜 주었습니다.
닉은 자신이 태어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알기 위해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닉은 “팔과 다리가 없다고 가족이나 하나님에게 화내기보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자!”
이렇게 닉은 자신의 믿음이 성장하면서,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해주는 사명의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닉 부이치치는 초등학교나 중학교, 그리고 교회에 나가 자신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전했습니다.
두 팔과 두 발이 없는 장애인인 닉 부이치치는 포장지와 선물의 비유를 들어 이야기합니다.
포장지를 뜯으면 그 속에 선물이 드러나는데, 겉 포장지보다는 그 속의 선물이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얼마 전, 닉 부이치치가 우리나라에 와서 간증하였을 때도 그가 간증한 내용의 결론은 이것이었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제 약함 때문입니다. 이 약함 때문에 저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이 약함으로 인하여, 오히려 저는 완전하신 주님의 도움을 받아 강한 사람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저의 몸은 온통 약함이라는 가시투성이입니다. 그런데 이 가시가 저를 살려주고 있습니다. 왜냐구요?
이 가시 때문에 저는 주님을 부를 수밖에 없고, 이 가시 때문에 저는 주님을 의지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참 행복합니다. 나의 약함이 곧 주님으로 인한 강함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아멘입니까?
참 역설적인 간증입니다. 세상은 자꾸만 강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그 강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자꾸만 닉 부이치치의 역설적인 말에 감동이 옵니다. “약한 것이 오히려 강함입니다.”
이 말이 참 위로가 됩니다. 마음도 약하고, 몸도 약하고, 모든 것이 약한 우리에게 “약함이 강함입니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들은 말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 고린도후서 12장의, 사도 바울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2장의 말씀을 중심으로 “영적 장자여! 약함 때문에 도리어 강하라!” 는 제목으로,
참으로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인 저와 여러분 모두, 함께 큰 위로를 받는 시간이 되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한 번 따라서 오늘 제목을 크게 외쳐 봅시다. / “영적 장자여! 약함 때문에 도리어 강하라!”
오늘 본문 앞에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본인의 뭔가를 자랑하겠다고 말을 꺼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참 사랑은 자랑하지 않는다.” 고 말했습니다.(고전 13:4)
그리고 자랑하는 사람을 책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사도 바울이 왜 자랑을 했을까요? (고전4장7절)
그러나 오늘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을 자랑할 의도가 전혀 없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14년 전에 삼층천에 올라간 간증을 조심스럽게 꺼내면서, 1인칭이 아닌 3인칭으로 소개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수사학적 기법이 아닌 “나의 체험” 을 말하는 것조차 두려웠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3층천은 ‘파라데이소스’ 에덴동산을 뜻하지만, 예수님과 하나님이 계신 곳을 말합니다.
이 놀라운 환상은 사실 그 동안 사도권으로 인해 힘들어했던 바울을, 지극히 큰 사도로 자칭하므로 인해,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기죽게 할 수도 있었지만, 바울은 그것을 감히 자랑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 지혜와 능력과 권세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신 계시와 환상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그에게 두려움과 떨림의 이유가 있는데, 이 특별한 체험 후에 하나님께서 그의 몸에,
큰 고통을 남기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고통이 정말로 큰 고통이었고, 아픔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가시” 혹은 “사탄의 사자” 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만큼 육체의 고통이 따르는 큰 가시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고통의 가시 때문에 너무 힘들어, 세 번씩이나 하나님께 기도했으나 응답되지 않았습니다.
애초부터 그에게 특별한 삼층천의 체험을 주시고, 그것 때문에 교만하지 못하도록 주신 가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 끝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은혜가 족하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바울은 이 주님의 응답을 감사와 아멘으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곧 강함이라.”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이 말씀에 절대 아멘입니다. “내가 약한 그 때에 곧 강함이라.” 아멘입니까?
사도 바울은 고통스러운 가시를 통해 어떤 은혜를 누렸기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요?
가시라는 육신의 고통이, 어떻게 그의 영적인 성장과 믿음의 고백으로까지 이어지게 했을까요?
첫째로, 육체의 가시가 자신을 겸손하게 만들었기에 “내가 약한 그 때에 곧 강함이라.” 고 고백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7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게 육체의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이력서를 써보신 적 있으십니까? 이력서에는 학력, 약력, 포상의 경험 등을 적게 됩니다.
만약에 사도 바울이 이력서를 썼다면, 아마도 한 장 가지고는 안 될 만큼 굉장히 화려했을 것입니다.
난지 팔일 만에 유대인으로서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의 베냐민지파, 자랑스러운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
요즘으로 하면 일류대학인 가말리엘 명문학파에서 수학했고, 길리기야 다소 출생에, 로마 시민권자입니다.
그리고 그는 고린도교회에 편지할 때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
“나는 누구보다도 더 많은 은사를 받은 사람이요. 방언을 많이 한 사람” 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였습니다.
이만하면 유대사회에서는 얼마든지 목이 곧을 수 있고, 얼굴이나 목소리, 표정이 달라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나이가 들면 들수록,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겸손했습니다.
이런 바울의 겸손함이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이 주신 육체의 가시라고 말합니다.
절제란? 멈추어야 할 때 멈출 줄 아는 것입니다. 절제란? 정도를 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힘은 조절된 힘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움직여지는 힘은, 바로 절제된 힘입니다.
가끔 엄청나게 큰 댐을 볼 때마다 “이 댐이 무너지면 어떻게 될까?” 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엄청난 사태가 벌어지겠지요? 그런데 이 엄청난 큰 댐의 물을 잘 조절하면, 엄청난 전기를 만들어 냅니다.
마찬가지로 내 마음에 큰 댐이 있어 절제를 잘 하게 되면, 우리에게는 자유함이 있고, 큰 힘을 발휘합니다.
음식을 절제하는 사람은 음식 앞에 자유롭습니다. 그러므로 그 절제의 힘으로 말미암아 건강을 잘 유지합니다.
욕망을 절제할 수 있는 사람은 욕망 앞에 자유롭습니다. 그 절제의 힘으로 그 어떤 유혹도 이겨 냅니다.
바울은 그의 복음 전도사역 1차, 2차, 3차, 4차를 경험하면서 철저하게 깨달았습니다.
절제되지 않는 힘은 오히려 문제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말을 절제하고 아끼라고 권합니다.
그리고 분을 아끼고 절제하여 쉽게 분내지 말라고 권하며, 물질에 대해서 절제하고 자족하라고 권합니다.
바울은 자신도 자신의 연약하고, 심히 고통스럽고 아프게 하는 가시를 통해서, 철저하게 절제를 배웠습니다.
복음사역을 하다가 사람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이해 할 수 없는 많은 일에도 절제를 몸에 배워갔습니다.
이렇게 절제를 배워가면서, 사도 바울은 자연스럽게 겸손이라는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 이 가시와 같은 연약함과 고통을 통해 겸손을 배웠다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이렇게 겸손한 자를 사랑하시고, 크게 들어 쓰십니다.
지금 육체의 질병으로 너무 아프고 고통스러운 분 계십니까? 인간관계 때문에 고통스러운 분 계십니까?
잘못된 부부관계로, 또는 자녀들 때문에, 물질 문제 등등, 이런저런 찌르는 가시로 인해 고통스럽습니까?
너무 아프고 고통스러워 참기 힘들어 괴로워했으나, 주님 안에서 겸손을 맛본 바울처럼 겸손을 배우십시오.
그리고 그 겸손의 그릇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충만히 담으시고, 땅의 축복도 풍성하게 담으십시오.
그리고 겸손함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임 받고, 헌신되어지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가십시오.
그래서 겸손한 자의 고백 “내가 약한 그 때에 곧 강함이라.” 고 크게 선포하시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둘째로, 육체의 가시가 자신을 기도하게 만들었기에 “내가 약한 그 때에 곧 강함이라” 고 고백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통스러운 자신의 가시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도의 무릎을 꿇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3번씩이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보통 한번 기도하면 40일씩 작정해서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3번 기도했다는 말은, 40일씩 3번이나 절박한 마음으로 금식기도를 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해결 받기 위해, 죽기 아니면 살기로 목숨을 건 40일 금식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식음을 전패한 40일의 금식기도, 그것도 세 번씩이나, 얼마나 간절했겠습니까?
이처럼 고통스럽게 나를 찌르는 가시는, 나를 하나님께 절박하게 기도하는 기도의 자리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내가 무릎 꿇은 그 기도의 자리가 바로 은혜의 자리요. 축복의 자리요. 사명의 자리가 되게 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찌르는 가시를 만나게 되면, 그것을 하나님 앞에 기도하라는 싸인으로 곧 깨닫습니다.
우리 예수님도 이 땅에서 육신의 연약함과 가시가 찾아 올 때마다, 새벽 미명 가운데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예비 된 마지막 사역인 십자가 사역을 앞에 놓고도, 겟세마네동산에서 밤을 새우며 기도했습니다.
기도해 본 사람들은 압니다. 언제 기도가 가장 길어지고, 언제 가장 깊어지고,
언제 가장 간절해지는가를 말입니다. 그것은 내 인생에 찌르는 고통스러운 가시가 찾아 왔을 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나 그 기도가 내게 복이 되고, 은혜임을 지나고 나면 간증하고 고백하게 됩니다.
저는 이런 경험을 하게 됩니다. 너무 큰 가시와 같은 아픔이 밀려 올 때에,
그 찌르는 가시의 아픔이 너무 커서 기도의 자리에 앉았으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만큼 아플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만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 그냥 아버지의 이름만 부르고 있는 내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기도하다 보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의 종으로 살아갈 초심 - 아비의 마음을 주십니다.
잘 알듯이 초심은 첫사랑이며, 처음 마음입니다. 초심은 배우는 자세이며, 배우는 사람은 늘 새롭습니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께서 나의 하프타임 - 내 인생에 남은 후반전을 더 바르게, 더 건강하게, 더 온전함으로,
달려 갈 수 있도록 새 힘을 주십니다. 그리고 가시의 아픔과 고통이 내게 은혜와 축복으로 안겨 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시가 지금은 나를 아프고 힘들게 하지만, 나를 기도의 자리로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찌르는 가시의 아픔과 고통이 여러분에게 있을 때, 무릎 꿇는 기도의 자리에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 여러분의 하프타임 - 여러분의 인생에 남은 후반전을 더 바르게, 더 건강하게, 더 온전함으로,
달려 갈 수 있도록 새 힘을 주십니다. 그리고 가시의 아픔과 고통이 내게 은혜와 축복으로 안겨 옵니다.
그러므로 버티지 마세요. 기도의 자리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그 고통스러운 가시는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가 자신을 기도하게 만들었기에 “내가 약한 그 때에 곧 강함이라” 고 고백한 것입니다.
셋째로, 육체의 가시가 자신을 능력있게 만들었기에 “내가 약한 그 때에 곧 강함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가 도리어 하나님의 능력을 담는 그릇이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선포한 것입니다. / “내가 약한 그 때에 곧 강함이라.” “내가 약한 그 때에 곧 강함이라.”
사도 바울은 신비적인 영적체험을 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가 자랑하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육체적인 연약함과 부족함을 드러내 놓고 자랑했습니다.
그 이유를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9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능력이 그 연약함속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것을 자랑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순간순간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느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겸손해지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으며,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진 가시는 분명 고통스럽습니다. 아픕니다. 힘이 듭니다. 우리의 삶에 지장을 줍니다.
우리가 그것 때문에 약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시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의 삶에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강한 그릇에 담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연약한 질그릇에 담겨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담기 위해서, 자꾸만 빛이 나는 금 그릇과 은그릇이 되어 잘 나 보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심은 금 그릇 은그릇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보잘것없는 질그릇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보잘것없는 질그릇에 은혜도 담고, 축복도 담고, 영원한 생명도 담고, 능력도 넘치도록 담아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의원이 필요한 병든 자를 위해서,
용서가 필요한 죄와 허물이 많은 자를 위해서, 질그릇과 같은 연약한 자를 위해서라고 말입니다. 믿습니까?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우리의 영육을 강건하게 치유하시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죄와 허물을 눈과 같이 희게, 양털 같이 희게 씻으시는, 용서의 주님이 절대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는 질그릇과 같이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를 강하게 하실, 주님의 능력이 절대 필요합니다. 아멘!
그런데 고맙게도 주님이 지금 우리를 치료하십니다. 주님이 지금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강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처럼 고백해야 합니다. “내가 약한 그 때에 곧 강함이라.” 아멘입니까? 아멘! 아멘!
그러므로 선포합니다. “지금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질병이 치유되고 강건하게 될지어다.”
“지금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모든 죄와 허물이 다 사함 받았음을 주님의 이름으로 선포하노라.”
“지금 이 시간 주님의 놀라운 능력이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강력하게 임할지어다.” 할렐루야! 아멘!
오늘 설교를 시작하면서 말씀드린 닉 부이치치는, 두 팔과 두 발이 없는 몸을 가졌습니다.
그의 인생은 그 어떤 것도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금방이라도 깨어질 것 같은 연약한 질그릇이었습니다.
그런 그의 인생에 하나님의 능력이 부어졌습니다. 금 그릇 은그릇은 깨졌지만, 그의 질그릇은 깨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합니다. “나는 참 행복합니다. 나의 약함이 곧 주님으로 인한 강함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깨질 것 같은 연약한 바울, 가시로 인해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있었던 바울,
그래서 더 겸손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절박한 40일 금식기도를 3번이나 무릎 기도로 드렸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 강력한 능력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고백합니다. 그리고 외쳐 선포합니다.
“내가 약한 그 때에 곧 강함이라.” 아멘! /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아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아멘!
사랑하는 우리 믿음의 가족 여러분! 그 어떤 것도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금방이라도 깨어질 것 같은,
연약한 질그릇 인생이십니까? 지금 찌르는 가시로 인해 여러분의 인생에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있습니까?
더 겸손해지십시오. 하나님 앞에 절박한 심정으로 무릎 기도를 드리십시오. 주님이 능력 부어주십니다.
그리고 크게 외쳐 고백하고 선포하십시오. “내가 약한 그 때에 곧 강함이라.” 아멘!
“지금 나의 연약함과 찌르는 가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아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아멘!
사랑하는 우리 믿음의 가족 여러분! 그 어떤 것도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금방이라도 깨어질 것 같은,
연약한 질그릇 인생이지만, 지금 찌르는 가시로 인해 견딜 수 없는 아픔과 고통이 있어 힘들지만,
주님 주시는 능력으로 크게 쓰임 받고, 승리하고, 많이 행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