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호랑이 처녀의 비련
호랑이 이야기가 많기로는 우리나라가 으뜸이라고 한다. 그래서 최남선은 일찍이 범 이야기만을 모아서 천일야화, 태평광기, 데카메론과 같은 책을 꾸밀 나라는, 세계가 넓다 해도 오직 조선이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또 중국의 대문호인 루쉰(魯迅)도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호랑이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것은 호랑이가 우리 삶에 그만큼 큰 영향을 끼쳤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민족 신화인 단군신화에 호랑이가 등장하고, 민족의 대표설화인 해님달님 이야기에 호랑이가 등장하는 것만 봐도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호랑이 이야기는 매우 다양하고 풍부하다. 사람 잡아먹는 무서운 호랑이가 있는가 하면, 착한 일을 하여 신이한 도움을 주는 호랑이도 있다. 또 약은 토끼에게 속아 넘어가는 어리석은 모습에 웃음을 사는 호랑이가 있는가 하면, 인간의 선악을 가려 징벌을 내리는 신령스러운 호랑이도 있다.
이처럼 무섭기도 하고 영험스럽기도 한 한국의 호랑이는, 마침내 산신령이 되어 산신각에 모셔졌다.
딸네 집에 베를 매어 주고 오는 어머니에게 묵 한 함지박 주면 안 잡아먹겠다고 하고, 또 한 고개 넘었더니 저고리 벗어 주면 안 잡아먹지 하면서, 속이고 속이다가 결국 어머니를 잡아먹고 집에서 어머니를 애타게 기다리던 오누이마저 해치려는 호랑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어린 시절 얼마나 무서워했던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였으면,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을 차리라는 속담까지 일상화되었을까?
이처럼 호랑이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 가운데, 가장 감동을 주는 것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삼국유사 김현감호(金現感虎)조에 실려 있는 호랑이 처녀의 이야기는 그런 이야기 중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일연은 김현감호 즉 ‘김현이 호랑이를 감동시키다’란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야기를 적고 있다.
신라 풍속에 2월이 되면 8일부터 15일까지, 도성 사람들이 모여 흥륜사의 탑을 돌면서 소원을 비는 복회(福會)가 열렸다.
원성왕 때에 김현이라는 총각도 이에 참여하여, 밤이 깊도록 쉬지 않고 탑을 돌았다. 그때 함께 도는 한 처녀를 만나서 서로 눈이 맞아, 탑돌이가 끝난 후 한적한 곳에서 정을 통했다. 처녀가 돌아가려 하자 김현은 거절하는 처녀를 억지로 따라가니, 처녀는 서산 기슭의 한 초가집으로 들어갔다.
그 어머니인 노파가 김현을 보더니, 같이 온 사람이 누구냐고 딸에게 물었다. 처녀가 사실 얘기를 모두 들려주니 노파는,
“비록 좋은 일이긴 하지만 없었던 일만 못하다. 그러나 이미 저지른 일을 어쩌겠느냐? 다만 너의 형제들이 오면 해칠 것이 두렵다.”
고 말하고, 김현을 깊숙한 곳에 숨겼다.
얼마 후 3마리의 호랑이가 소리치며 나타나더니, 사람의 말로 말하기를,
“집안에 비린내가 나니 요기할 수 있어 다행이다.”
라고 말했다.
이에 노파와 딸이,
“너희들 코가 잘못된 것이 아니냐?”
고 하면서 그들을 꾸짖었다.
이때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너희들은 생명을 많이 해쳤기 때문에, 너희 중에 한 놈을 죽여 징계하겠다.”고 했다.
이에 세 호랑이가 두려워하니, 처녀가 나서서 말하기를,
“오빠들이 멀리 가서 스스로 뉘우치고 경계한다면 내가 그 벌을 대신 받겠다.”
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세 호랑이는 머리를 숙이며 꼬리를 늘어뜨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처녀는 곧 김현에게 들어와 말하기를,
“저는 비록 사람이 아니지만, 하룻밤의 즐거움으로 부부의 인연을 맺었으니 그 의리는 참으로 중합니다. 세 오빠의 악은 하늘이 이미 미워하니, 우리 가정의 재앙을 저 혼자 감당하려 합니다. 다른 사람의 손에 죽는 것보다 낭군의 손에 죽어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더없는 행복이겠습니다. 내일 제가 시중에 나타나 행패를 부리면 사람들이 나를 처치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왕은 반드시 큰 벼슬을 주겠다는 상을 걸고 호랑이를 잡으라 할 것이니, 그때 낭군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성 북쪽의 숲 속으로 저를 쫓아오시면, 제가 거기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김현은
“사람과 동물이 인연을 맺은 것은 정상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것은 천행이었다. 그런데 어찌 아내를 팔아 죽여서 벼슬을 얻겠는가?”
라고 말하며 거부했다. 그러자 처녀는,
“그런 말 마십시오. 저의 명은 본래 짧습니다. 또한 이것은 하늘의 명령이고, 제가 소원한 바이며, 낭군님의 경사이고, 우리 족속의 복이며, 나라 사람들이 기뻐하는 다섯 가지 이익이 있으니 어찌 피하겠습니까? 다만 소원은 절을 지어서 저의 명복을 빌어주면, 낭군님의 은혜는 그 위에 더할 것이 없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들은 마침내 서로 울면서 헤어졌다.
이튿날 과연 거리에 맹호가 나타나 행패를 부리니, 왕이 이급(二級) 벼슬을 상으로 내걸고 호랑이를 잡게 했다. 이에 김현이 대궐에 나아가 자신이 호랑이를 잡겠다고 아뢰고, 처녀가 시킨 대로 칼을 들고 성 북쪽 숲 속으로 가니, 호랑이는 사람으로 변하여 웃으면서 말했다.
“어젯밤 낭군과 함께 나눈 사랑을 부디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오늘 제 발톱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모두 흥륜사의 간장을 바르고 절의 나발 소리를 들으면 모두 나을 것입니다.”
그러고는 김현이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목을 찔러 자결했다. 이렇게 하여 김현은 호랑이를 잡았음을 알렸고, 호랑이에게 물린 사람들에게 치료법을 일러 주었다. 그 상으로 관직을 얻은 다음, 서천 변에 절을 지어 호원사(虎願寺)라 했다. 그리고 항상 범망경을 외워 호랑이의 명복을 빌고, 자기에게 베풀어 준 은혜에 감사했다.
김현은 이 일을 숨기고 있다가, 죽을 무렵에 이를 전(傳)으로 꾸며 논호림(論虎林)이라 이름하니 지금도 그렇게 일컬어 온다.
두 번째 이야기는 정원(貞元) 9년(793)의 일이다. 중국 당나라 신도징(申曆澄)이 야인(野人)으로서 한주습방현위(漢州什方縣尉)에 임명되어 진부현(眞符縣)의 동쪽 10리 가량 되는 곳에 이르렀을 때였다. 눈보라와 심한 추위를 만나 말이 앞을 나가지 못하므로 길옆의 초가에 들어가니, 그 안에 불이 피워져 있어 몹시 따뜻했다.
등불 밑에 나아가 보니, 늙은 부모와 처녀가 화로를 둘러싸고 앉아 있는데, 처녀는 나이가 겨우 14, 5세쯤 되어 보였다. 비록 헝클어진 머리와 때 묻은 옷을 입었으나, 눈처럼 흰 살결에 꽃 같은 얼굴로써 자태가 아름다웠다.
그 부모는 신도징(申屠澄)이 온 것을 보자 급히 일어나서 말했다.
“손님은 차가운 눈을 무릅쓰고 오셨으니 앞에 와서 불을 쪼이시오.”
신도징이 한참 앉아 있으니, 날은 이미 저물었는데 눈보라는 그치지 않았다.
신도징이,
“서쪽으로 현에 가려면 아직 머니 여기서 좀 자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니 그 부모는,
“초가집을 누추하다고 여기지만 않으신다면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신도징이 마침내 안장을 풀고 침구를 펴니, 그 처녀는 손님이 유숙하는 것을 보자, 얼굴을 밝히고 곱게 단장하여 장막 사이에서 나오는데, 단정하고 우아한 자태가 처음 볼 때보다 훨씬 나았다.
신도징이 그 부모에게,
“아가씨는 총명하고 슬기로움이 남보다 훨씬 뛰어났습니다. 아직 미혼이면 감히 혼인하기를 청하오니 어떻습니까?”
하니 그 아버지는,
“뜻밖에 귀한 손님께서 거두어 주신다면 어찌 정한 연분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신도징은 마침내 사위의 예를 행하고, 타고 온 말에 여자를 태우고 길을 떠났다. 임지에 와 보니 봉록이 너무 적었으나, 아내가 힘써 살림살이를 돌보았으므로 모두가 마음에 즐거운 일뿐이었다.
그 후 임기가 차서 돌아가려 할 때는 벌써 1남1녀를 낳았는데, 자식들 또한 매우 총명하고 슬기로워 신도징은 아내를 더욱 공경하고 사랑했다. 그는 일찍이 아내에게 주는 시를 지었는데 이러했다.
한 번 벼슬하니 매복(梅福)에게 부끄럽고
3년이 지나니, 맹광(孟光)에게 부끄럽다.
이 정을 어디다 비길까
냇물 위에 원앙새 한 쌍이 떠 있구나.
✼ 매복: 한나라 때의 명신
✼ 맹광: 후한 때의 어진 아내 이름
그의 아내는 종일 그 시를 읊었는데, 속으로 화답할 듯하였으나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신도징이 벼슬을 그만둔 후 가족을 데리고 본집에 돌아가려 하니, 그 아내는 문득 슬퍼하면서,
“전번에 주신 시에 화답한 것이 있습니다.”
하며 시를 읊었다.
부부의 정이 중하기야 하지만,
산림에 마음 둠이 매양 깊었소
시절이 변할까 근심했다오
행여나 백년해로 저버릴까 싶어서.
드디어 함께 그 여자의 집에 갔더니 사람이라고는 없었다. 아내는 사모하는 마음이 너무 심하여 종일 울고 있더니, 문득 벽 모퉁이에 한 장의 호피(虎皮)가 있는 것을 보자 크게 웃으며,
“이 물건이 아직도 여기 있었구나.”
하면서 그것을 집어 덮어쓰더니, 곧 범으로 변하여 으르렁거리며 할퀴고는 문을 박차고 달아나 버렸다. 신도징은 놀라 피했다가 두 자식을 데리고, 그녀가 떠난 그 길을 찾아서 산림을 바라보고 며칠을 크게 울었으나, 끝내 간 곳을 알지 못했다.
일연은 이 이야기 끝에 그 소회를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아! 신도징과 김현 두 사람이 짐승과 접했을 때, 호랑이가 변하여 사람의 아내가 된 것은 똑같다. 그러나 신도징의 범은 사람을 배반하는 시를 지어 주고는, 으르렁거리고 할퀴면서 달아난 것이 김현의 범과 다르다. 김현의 범은 부득이 사람을 상하게 했지만, 좋은 약방문을 가르쳐 줌으로써 사람들을 구했다. 짐승도 어질기가 그와 같은데, 지금 사람으로서도 짐승만 못한 자가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그렇다. 짐승보다 못한 인간이 얼마나 많은가. 일연은 신도징의 범에 비해 김현의 범이 착하다 했지만, 신도징의 범도 여느 사람보다는 훨씬 착하다. 신도징의 범도 신도징에게 추위와 눈을 피하게 해 주었고, 결혼해서는 박봉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살림살이를 잘 꾸려 나갔을 뿐만 아니라, 총명한 자식들까지 낳아 주었다. 베풀 것은 다 베풀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녀도 단번에 생각 없이 달아난 것이 아니라, 시에 나타난 바와 같이 백년해로를 하기 위해 부단히 고뇌하였으나 끝내 본성을 이기지 못하였을 뿐이니, 크게 배반했다고는 할 수 없다.
오늘날 세태를 보면, 갈라서면서 갖은 꾀로 상대방의 재물을 손상시키고, 나아가 그를 죽이기까지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에 비하면, 신도징의 범은 본성에 대한 인내가 극에 달하여 비록 뛰쳐나가긴 했지만, 상대방을 크게 해코지하지는 않았다. 추잡한 인간 세상에 비하면 얼마나 순한가.
김현의 범은 말할 것도 없이, 한 인간을 위해 자신을 바쳤다. 복회를 마친 후, 김현은 일방적으로 자기의 욕정을 채우기 위하여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가 통정하였는데, 호랑이 처녀는 그것을 큰 은혜로 받아들이고 자기를 희생하였다. 게다가 김현이 한 번 사양은 했다 하지만, 칼을 쥐고 약속한 숲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에서 우리는 약아빠진 한 인간의 모습을 본다. 칼을 잡았다는 것은, 벌써 벼슬을 얻기 위해 호랑이를 죽이고자 결심한 것이다. 입장이 바뀌어 김현이 그러한 처지에 이르렀다면, 호랑이 처녀도 과연 김현처럼 칼을 쥐고 찾아 갔을까? 아마도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현이나 신도징 두 사람 다, 호랑이 처녀가 마음에 들자 일방적인 요구로 정을 통하였다. 인간이 취한 행동은 그것뿐이다. 인간은 결코 호랑이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 아니다. 일연은 김현감호 즉 ‘김현이 호랑이를 감동시키다’라고 글의 제목을 달았지만, 사실 김현이 호랑이를 감동시킨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호랑이가 김현을 감동시켰다.
신도징의 호랑이도 마찬가지다. 신도징이 일방적으로 마음에 드는 처녀를 끌어 밤을 보낸 것이 전부다. 그러나 호랑이는 오랜 기간 신도징을 위해 정성을 다했다.
우리 설화에 나무꾼과 구미호라는 것이 있다. 나무를 해서 팔아 끼니를 이어가는 가난한 나무꾼이, 어느 날 산 속에서 예쁜 처녀를 만나 결혼하기를 간청하여 일이 성사되었다. 사실 그 처녀는 구미호였다. 사람을 잡아먹고 싶은 유혹을 참고 견디어 구슬을 하나씩 모아 99개를 가진 여우였다. 한 개만 더 채우면 이제 사람이 되는 암 여우였다.
그녀는 남편을 지극정성으로 섬기며 부지런히 일하여, 그 덕분으로 살림이 넉넉하게 되었다. 그러자 남편은 점차 게으름을 피우더니 마침내는 노름판을 드나들게 되었다. 드디어 살림을 거덜 낸 남편은 아내한테 노름 밑천을 내 놓으라고 윽박질렀다. 아내는 남편의 청을 거절할 수 없어 몸속에 지니고 있는 구슬을 하나씩 꺼내 주었다. 그것을 꺼낼 때는 한없는 고통을 겪어야 했으나 오직 남편을 위하여 그것을 참았다. 노름에 미친 남편은 그것도 모르고 계속 구슬을 요구하였다. 남편이 구슬을 계속 가져오자 이상한 낌새를 느낀 노름꾼들은 나무꾼에게, 아마도 당신 아내는 요망한 구미호일 것이라는 말을 건넸다. 이 말을 들은 나무꾼은 구슬을 줄 때는 절대로 자기 방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했던 아내와의 약속을 어기고 문구멍으로 들여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아내는 구미호로 변하여 처참한 모습으로 고통에 시달리며 구슬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러자 이 어리석고 매정한 나무꾼은 동네 사람들과 작당하여 몽둥이로 구미호를 쳐 죽이고 말았다.
짐승 중에 가장 악한 짐승은 머리 검은 짐승이라 한다. 은혜를 배신으로 갚는 것은 인간뿐이라 한다. 이렇게 못된 인간을 위해 정성을 다 바친 호랑이 처녀와 구미호 이야기를 통해, 우리 조상들은 늘 인간성 상실을 염려하면서 윤리적인 격률을 지키려 노력하고, 스스로를 경계했던 것이다.
호랑이 처녀야, 구미호 처녀야. 아무렴 저승에서 받은 인연 다하거든, 부디 다음 세상에는 사람으로 태어나, 짐승보다 못한 인간들을 꾸짖어 주었으면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