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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4. 묵상글 ( 연중 제14주일 금요일. - 진정 조심하고 두려워할 것.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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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4. 연중 제14주일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진정 조심하고 두려워할 것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주의사항을 말씀하십니다.
복음을 선포하다 보면 반드시 박해받게 되는데 그것을 대비하라는 거지요.
그것은 마치 양이 이리 떼 가운데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하시며
그렇기에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뱀처럼 슬기롭다는 것은 어떤 슬기로움일까요? 좋은 의미일까요?
여기서 슬기로움은 박해상황에서의 슬기로움입니다.
그러니 죽음의 위험이 늘 있는 상황이고,
이런 상황에서 개죽음당하지 말라는 뜻일 겁니다.
개죽음이란 의미 없는 죽음이요 무가치한 죽음입니다.
예를 들어 물에 빠진 많은 사람을 살리고 죽는 것은 의미 있지만
조심치 않아 죽거나 치킨게임이나 러시안룰렛 게임 하다 죽는 것은 무의미하지요.
생명은 가장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내놓는 것은 그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위해 내놔야지만 가치 있습니다.
그런데 내 생명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사랑뿐이고 그것도 하느님 사랑뿐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선포하며 사람을 조심하라는 말씀은
이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일 사람인지 아니면 나를 물어뜯을 사람인지 식별하여,
아무에게나 복음을 전하다가 그로 인해 박해가 일어나지 않게 하라는 뜻입니다.
복음의 다른 곳에서 주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 6)
복음이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가 되거나
더 나아가 그들에게 짓밟히는 것이 되게 하지 말라는 거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런 개와 돼지와 같은 사람들을 조심하라고 하신 다음
그러나 그들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걱정하지는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조심은 하되 걱정하지는 말라는 말씀인데
그렇게 조심했는데도 어쩔 수 없이 그들 앞에 서게 되면 예를 들어,
밀고자를 그리 조심했는데도 박해자들 앞에 서게 되면 걱정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밀고자나 박해자는 조심하는 정도지 두려워할 정도는 아니라는 말씀이며
그들 앞에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걱정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선포하면서 조심은 하되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은
내가 박해받을까 두려워하고 걱정하고 조심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짓밟힐까 조심하라는 것이며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복음은 하느님의 말씀이지 내 말이 아닙니다.
복음은 하느님 말씀이고 나는 다만 전하는 사람이니
선포의 주체자는 하느님이지 내가 아니라는 말이고
어떻게 전할지는 내 걱정거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늘 우리의 믿음이어야 하고 마음 자세여야 합니다.
곧 어떤 일이 내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라면 그 일 걱정은 하느님께서 하시고,
나의 복음 선포가 내 말이 아니라 진정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면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도 하느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그러니 관건은 내가 하는 어떤 일이 내 일인지 하느님의 일인지,
내가 하는 말이 내 말인지 하느님의 말씀인지 그것이겠습니다.
그러니 조심하고 두려워해야 할 것도 남이 아니라 나이겠습니다.
내 일이나 하고 내 말이나 지껄이는 내가 아닌지 하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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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4. 연중 제14주일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오늘 <복음>도 여전히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특히 그들이 박해와 어려움을 당하게 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미리 무장시키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16)
여기서, 우리가 알아들어야 할 것은 먼저 제자들을 파견하는 것이 마치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보낸다.”는 사실입니다. 결코 이리 떼를 제거해주거나 쫓아주지 않고, 오히려 그들 가운데로 보낸다는 사실입니다. 곧 세상이라는 어장은 결코 환상적이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그 질곡과 어려움 속에 던져진 것입니다.
사실, 교회도 수도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코 환상적인 곳이 아닙니다. 때로는 서로가 이리가 되어 헐뜯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못된 곳에 온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러한 이곳이 우리의 파견지인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할 것은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 대처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러니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여기서, “슬기롭다”는 말의 성서에 따른 뜻은 “지혜롭다”는 말과 같습니다. “지혜롭다”는 것은 먼저 “하느님을 경외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10,19-20)
이는 “슬기로움”이 많이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슬기로움은 사랑 때문에 핍박과 박해를 받기도 하고, 끝내는 죽기까지 하는 것을 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 지혜이신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순박하다”는 말의 성경에 따른 뜻은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성품인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난 자의 성품과 덕입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이는 “순박함”이 그저 화를 내지 않고 온유한 성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강한 것을 말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순박함’은 끝까지 믿고 참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마지막까지 희망을 꺾지 않는 것입니다. 온갖 굴욕을 받기까지, 끝내는 배반 받고 죽기까지도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순박하게 되어라.”는 말씀은, 설혹 이리 떼에게 생명을 노략질 당한다하더라도 “죽기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이요, “끝까지 믿고 희망하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께서는 박해를 두고, 산상설교에서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마태 5,12)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11-12)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주님!
가슴 깊이 슬기로움을 가르치소서!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 슬기로움을 주소서.
목숨이 노략질 당하는 굴욕 속에서도 믿고 희망하는 순박함을 주소서.
십자가에서 지니신 그 순박함과 슬기로움을 가르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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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4. 연중 제14주일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항상 참아 주시는 분을 생각하라
우리는 살아가면서‘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는 말을 합니다. 인간이기에 한계를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사실, 참다 보면 병이 생깁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쌓아두지 말고 풀어버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군다나 주님의 이름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가족 간에도 마음이 갈라질 텐데 그때 참고 견디라고 하십니다. 서로의 뜻이 다르고 오해가 있을 때 참고 기다려 주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인내가 필요한 때이고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처신할 때입니다. 용수철을 누르듯이 참는 것은 인내가 아니라 벼르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뿌리를 깊게 내려야 합니다. 세상이 혼란할수록 신앙의 가치관을 확고히 해야 합니다.
강한 것은, 부러지고 부드러운 것은 휘어집니다. 그래서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깁니다. 그러니 어떠한 처지에서도 더욱이 주님을 드러내는 자리에서는 예수님께서 취하셨던 방법을 선택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이나 처지에 구애됨이 없이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묻고 행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지금 당장은 지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이깁니다. 주님께서 친히, 모욕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셨는데 어찌 십자가를 회피할 수 있겠습니까?
열왕기 하권 20장에 보면 히즈키야 왕이 병들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됩니다. 이때 히즈키야 왕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울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히즈키야 왕이 마주한 벽은 인간이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죽음의 벽입니다. 그러나 히즈키야 왕 자신의 한계상황을 하느님께 내어놓고 울며 기도했을 때 그 벽을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의 눈물을 보시고 세상에서의 생명을 15년 더 연장해 주셨습니다. 15년을 연장해 준 것이 대단한 의미가 있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에 회개하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였다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순간에 주님 앞에 성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벽이 참으로 많습니다. 인간적인 한계상황의 벽이 ‘산 넘어 산’입니다. 생로병사는 물론이고 고독, 미움과 분노, 죄가 한계상황으로 다가옵니다. 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견디는 것입니다. 특별히 일상 안에서 히즈키야 왕처럼 벽 앞에서 기도하며 주님 이름으로 말미암아 참고 견디면 반드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공격을 공격으로, 모욕을 모욕으로, 미움을 미움으로 되갚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혹 참을 수 없다면 잠시 하느님께서는 ‘나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항상 참아 주신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은 따지지 않고 참아 주시는 데 내가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서 되겠는가? 은혜를 입었으면 은혜를 베풀어야 함은 당연합니다. 그래도 참을 수 없다면 사랑으로 하느님께 앙갚음하십시오. 상황이 변화되길 바란다면“주님, 주님께서는 제가 무엇을 하길 바라십니까?”하고 마음속으로 묻기를 바랍니다.
참고 견뎌서 모두가 구원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모함이나 수군거리는 소리에 속상해하지 말고, 뒤에서 딴소리하는 사람 때문에 억울해 상처받지도 말고 오직 십자가로 승리를 거두신 주님의 이름 때문에 견디시길 바랍니다. 잠잠하게 참고 견디면 의심 없이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이 순간 다가오는 한계를 주님으로 말미암아 극복하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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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4. 연중 제14주일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부르클린 한인 공동체와 야외미사를 다녀왔습니다. 야외미사가 잘 진행되기 위해서 중요한 것들이 있는데 그 중에 ‘날씨’도 큰 몫을 합니다. 일주일 전부터 일기예보를 보았는데 ‘비’ 소식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일기예보의 예측대신에 화창한 날씨를 주셨습니다. 야외미사에 온 교우들도 모두 환한 모습으로 미사가 있는 공원으로 모였습니다. 작년에도 화창한 날씨를 주셨는데 올해에도 하느님께서는 좋은 날씨를 주셨습니다. 날씨가 좋으면 50%는 이미 성공한 셈입니다. 미사를 마친 후 각 구역별로 점심을 먹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우리는 LA갈비와 삼겹살로 모두가 풍족히 먹고도 남았습니다. 각 구역마다 전을 부치고, 맛있는 밑반찬을 준비해 왔습니다. 저는 구역마다 돌아다니면서 준비한 음식을 함께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모님을 청을 받아들여서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혼인잔치는 더욱 풍요로워졌습니다. 저는 소주에 맥주를 섞어서 ‘소맥’을 만들어 드렸습니다. 각 구역별로 신나는 노래잔치를 하였고, 야외미사의 꽃인 보물찾기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밭에 보물이 숨겨져 있는 것과 같다.’라고 하셨습니다. 교우들은 공원에 숨겨진 보물을 찾으면서 무척이나 기뻐하였습니다. 성당에서 마련한 기념품인 ‘수건과 우산’을 나눠드리고 야외미사는 내년을 기약하며 마무리되었습니다.
작년과 달리 이번 야외미사에는 10명이 넘는 청년들이 함께 하였습니다. 마침 그날이 생일인 친구가 있었고, 지난번 종신부제서품 축하식에 함께 했던 청년들이 이번에는 생일축하를 한다며 모였습니다. 이제 막 결혼한 청년도 왔고, 결혼을 앞둔 청년도 왔습니다. 고백성사를 청한 청년들에게 고백성사를 주었습니다. 먼 바다로 갔던 연어들이 다시 태어난 강으로 오듯이 대학과 직장생활로 바빠서 성당에 오지 못했던 청년들이 이제 다시 복사를 하고, 한국학교에 다녔던 성당으로 돌아오면 좋겠습니다. 주일학교 교사로 청년들의 어린 시절을 함께 하였던 종신부제님이 있으니 청년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주면 성당은 더욱 활기를 찾을 것 같습니다. 넓은 공원에 분명 보물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보물이 없다고 불평이 있었지만 열심히 찾는 사람들에게 보물은 있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야곱은 가족과 가축을 데리고 요셉이 있는 이집트로 출발하였습니다. 야곱과 그 가족들은 마치 이집트로 ‘야외미사’를 가는 것 같습니다. 사목위원들이 선발대로 가서 야외미사를 할 수 있도록 제대를 마련하고, 의자를 준비했던 것처럼 요셉은 선발대가 되어서 이집트에서 가족들이 머물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야곱을 축복하였고,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복약 안내서’를 써주는 한의사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의사는 색다른 복약 안내서를 작성했다고 합니다. 처방된 약이 어떻게 몸을 바꾸어 나갈 것인지, 앞으로 치료 계획은 어떻게 되는지, 몸이 달라지는 과정에서 어떤 증상이 나타날 것이며, 스스로 몸을 어떻게 관찰하면 좋을지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기도 했지만 복약 안내서를 읽고 기뻐하는 환자들이 있어서, 변화된 몸을 스스로 느끼는 환자들이 있어서 계속하고 있다고 합니다. 좋은 치료는 그저 약을 주는 것이 아니라, 환자와 끊임없이 소통하는 것이라는 한의사의 말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들이 채워진다고 해서 진정으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욕망을 다 채우기도 힘들지만, 그렇게 채워진 것들은 그것이 사라지게 되면 더욱 공허하기도 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합니다. 화려한 언변과 지식으로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입니다. 내가 원하는 만큼 상대방에게 해 주려는 태도입니다.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신앙은 만병통치약이 아닙니다. 신앙은 고통 중에서도, 절망 중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아 갈 수 있는 이정표입니다. 그렇게 끝까지 견디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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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4. 연중 제14주일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모두가 하느님의 은총이다
-늘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성령충만한 삶-
“주님만 바라고 선을 하라.
네 땅에 살면서 태평을 누리리라.
네 앞길 주께 맡기고 그를 믿어라.
몸소 당신이 해 주시리라.”(시편37;3,5)
어제 하루가 참 은혜로운 날이었습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섭리안에 펼쳐진 하루임에 감사했습니다. 모두의 축하를 받으며 세상을 떠난 요한 형님의 장례날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가족 모두가 평화롭고 감사로 가득한 분위기였습니다.
청담동 성당 오전 7시 장례미사 참석을 위한 차량봉사를 위해 밤 01:30분에 일어나 대전에서 02시에 출발한 조카 프란치스코가 수도원에 05시전에 도착하여 잠시 머물렀다가 청담동 성당에 여유있게 안내하여 주임신부님과 함께 만101세로 선종한 요한 형님의 조촐하고 아름다운 장례미사를 봉헌하니 얼마나 고맙던지요!
“요한 형님! 축하드립니다.”
라는 장례미사 강론 제목입니다. 정말 판란만장했던 세상살이 충실히 끝내고 아버지의 집에 귀향한 요한 형님입니다. 믿는 이들 모두가 귀향의 여정을 끝내면 아버지의 집에 귀향할 것이고 이렇게 축하를 받으며 떠날 이들이 얼마나 될런지요. 이어 수원교구의 안성 공원 묘지에서 잔잔히 내리는 우중의 하관식도 은혜로웠습니다. 마지막 기도문입니다.
“영원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시어, 요한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천국에 들게 하시며, 성인들과 함께 영원히 주님을 찬미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이미 지상에서의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삶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하관식까지 조용히 내리던 비가 마치 참았듯이 끝나자마자 억수같은 장대비가되어 쏟아지기 시작했고 오후 내내 많은 비가 내렸으니 이 또한 자비로운 하느님의 배려 은총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조카와 베로니카 형수님이 시종여일 충실히 함께 해주었고 오후 1시 수도원까지 잘 도착되니 얼마나 산뜻하고 기분 좋은 하루였던지요! 대전에 무사히 도착한 조카의 답신이었습니다.
“삼촌 신부님을 오랜만에 뵈니 좋네요! 저 대전집에 잘 도착하였습니다. 삼촌신부님과 숙모님 뵙고 많은 대화 나눌수 있어 좋았고, 유족분들에게 큰 위로를 주신 삼촌 신부님의 장례미사 강론과 하관식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편안한 저녁되세요. 고맙습니다. 저녁 밥맛이 꿀맛이네요.”
밤 01:30분에 기상하여 오후 6시 대전집에 도착하기 까지 온전히 하루를 하느님께 봉헌한 프란치스코 조카에게도 축복 가득한 하루였을 것입니다. 차중에서 나눈 조카의 아버지인 셋째 형님의 일화도 잊지 못합니다.
“학교에서 한문 선생님이 가훈을 써오라 했을 때 아버지는 ‘정직, 효도, 우애’ 세 단어를 써주셨습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중 수신제가修身齊家까지 해당되는 덕목입니다. 당시는 몰랐는데 나이들어 세월지나 갈수록 새록새록 생각납니다. 마음속에 심어졌다가 싹이 트고 계속 자라는 듯 합니다.”
성장과정에서 부모로부터 보고 배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또 셋째 형님이 얼마나 성실하고 충실했는지 조카인 3형제의 아들들을 보며 깨닫게 됩니다. 정말 평생 정직하고 성실하게 열정 넘치게 매사 최선을 다해 살면서 초등학교 교사로 정년 퇴직후 12년전에 돌아가신, 저를 가장 사랑해 줬던 바로 윗 형님입니다. 형님은 세상을 떠나셨어도 효성과 우애가 뛰어난 삼형제 아들들이 형님의 뒤를 잇고 있으니 하느님의 은혜로운 섭리에 감사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영원하십니다. 최민순 신부님이 번역한 시편 136장, 1절부터 26절까지 계속되는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후렴은 얼마나 은혜로운지 평생 부르며 살고 싶습니다. 오늘 제1독서 창세기에서 이스라엘로 개명된 야곱에 대한 하느님의 한결같은 자비도 은혜롭기 한이 없습니다. 청년시절 형 에사우의 보복이 두려워 피신하여 브에르 세바를 떠나던중 하느님을 만났던 야곱이 노년에 이집트의 요셉을 만나러 가던중 브에르 세바에서 제사를 드렸고 또 하느님을 만납니다.
“야곱아, 야곱아!”
“예, 여기있습니다.”
다정한 부름과 응답을 통해 하느님과 한결같은 사랑의 친교를 나눠 온 야곱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야곱뿐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가 주님과의 한결같은 친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 네 아버지의 하느님이다.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그곳에서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나도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가겠다. 그리고 내가 그곳에서 너를 다시 데리고 올라오겠다. 요셉의 손이 네 눈을 감겨 줄 것이다.”
마침내 하느님의 인도로 요셉을 만나 목을 껴안은채 우는 야곱의 고백입니다.
“내가 이렇게 너의 얼굴을 보고 네가 살아 있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는 기꺼이 죽을 수 있겠구나.”
평생 하느님과 함께 살아 온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요셉에게서 하느님 없는 삶은 상상불가입니다. 저 역시 하느님 없는, 예수님 없는 삶은 상상불가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처럼 주님과의 한결같은 끊임없는 신뢰와 사랑의 삶이었는지 반성하게 되고 심기일전 다시 각오를 새로이 하게 됩니다.
이들 이스라엘의 선조들처럼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도 당신과 제자들과의 친밀한 관계와 더불어 아버지의 영이 늘 함께 하심을 상기시킵니다.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세상 영적 전쟁터에서 치열한 영적전투의 삶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충고 말씀으로 큰 위로와 힘이, 격려가 됩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줄 것이니,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 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주님과의 한결같은, 끊임없는 친교의 나눔이, 지혜롭고 순박한 처신이, 끝까지 견뎌내어 인내로 구원을 받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바로 이 모두를 가능하게 해주는 아버지의 영, 성령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주님과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날로 깊게 해 주시며, 늘 성령충만한 찬미와 감사의 삶을 살게하십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하라.
영원히 남으리라.”(시편37,2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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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4. 연중 제14주일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두 문장의 말씀에 제 마음이 머무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하나는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입니다. 또 다른 문장은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입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인생길 위에서 많은 어려움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 어려움들은 늘 우리의 걱정으로 다가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일에 실패했을 때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혹은 ‘나는 이제 틀렸어.’라는 걱정이 우리를 일어서지 못하게 만듭니다.
또한 우리에게 병마가 다가왔을 때 우리의 마음과 육신은 두려움에 떨고 맙니다. 다시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돌아갈 수 없을까 봐 걱정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을까 봐 걱정합니다.
물론 이런 모습은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입니다. 실패와 좌절 앞에 걱정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병마와 싸울 때 우리의 몸과 마음을 어떻게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걱정하지 마라. 그리고 끝까지 견디어 내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견디어 낸 이에게 주님은 ‘구원’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목적은 무엇인가요? 실패 없는 영광과 권능입니까? 병마에 굴하지 않는 불사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목적은 구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다가오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실패와 좌절에 걱정하지 말고 병마에 주눅 들어 자신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 아버지께 의지하십시오. 그렇다면 우리는 그보다 더 큰 기쁨인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한정판
저 차는 전 세계에 10대밖에 없는 한정판이래
이 볼펜은 2000년 밀레니엄을 기념하여 1,000개만 만들어진 한정판이야.
이 백은 디자이너 100주년을 기념해서 100개만 만든 한정판이야.
한정판은 값지고 귀한 물건이다.
왜냐하면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같은 것을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그대는?
그대는 그해, 그날 하느님이 만드신
이 세상 단 하나의 한정판이다.
이 세상 어디에서 당신과 같은 작품은 없다.
그러니 당신은 얼마나 값진 한정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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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4. 연중 제14주일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과 비교합니다. 옆집 남편과 자기 남편을, 옆집 아내와 자기 아내를, 옆집 아이와 자기 아이를…. 이런 식으로 비교하고 있습니다. 특히 어느 자매는 이 비교가 더 심한 것 같습니다. 남편이 밖에서는 능력 있고 인정받는 사람이지만, 아내의 비교로 인해 세상에서 가장 무능한 남편이 되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아내는 이렇게 말합니다.
“옆집 남편은 퇴근하면 아이들과 놀아주는데, 우리 남편은 항상 늦게 들어와서 아이가 아빠 얼굴을 잊어버릴 정도입니다. 휴일에는 쉬어야 한다면서 하루 종일 잠만 자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습니다. 이러니 옆집 남편과 비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남편을 믿고 앞으로 남은 시간을 함께할 것을 생각하니 끔찍합니다.”
만약 사이코패스 흉악범이 옆집 남편이라면 이때도 비교할까요? 즉, 내 남편이 저런 흉악범이 아니라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실 이런 식의 비교는 하지 않습니다. 비교 대상을 넘어설 수 없는 존재처럼 만들면서, 가까운 나의 사람이 볼품없어지고 결국 자기 마음도 우울해집니다.
비교 대상과 나의 행복은 연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나를 불행하게 해줄 뿐입니다. 행복의 주체는 ‘나’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행복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아닌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으려 합니다. 남편, 아내, 자녀, 부모, 상황…. 그러다 보니 행복은 신기루처럼 집힐 듯 잡힐 듯하면서 잡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행복은 언제나 내 마음에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항상 주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조심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들은 제자들을 박해할 사람이지요. 지금은 그런 사람이 없을까요? 아닙니다. 여전히 있습니다. 아픔과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바로 조심해야 할 사람입니다. 조심한다고 해서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요? 그보다는 나의 마음을 똑바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걱정한다고 나의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을 굳게 믿고 함께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군대 갈 때가 생각납니다. 낯선 곳, 낯선 장소에 가는 것 자체가 얼마나 겁이 나고 두려웠는지 모릅니다. 커다란 장벽이 느껴졌고, 정말로 죽으러 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군대에서의 시간이 저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성장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주님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들, 내게 아픔과 상처를 주는 사람들에 대해 무조건 거부하고 피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우리와 함께하는 주님을 만나야 할 때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어려움 속에 있는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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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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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4. 연중 제14주일 금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 사는 세상>
사람이 사람에게
불신이 아니라
믿음인 세상
사람이 사람에게
절망이 아니라
희망인 세상
사람이 사람에게
미움이 아니라
사랑인 세상
사람이 사람에게
슬픔이 아니라
기쁨인 세상
사람이 사람에게
저주가 아니라
축복인 세상
사람이 사람에게
불의가 아니라
정의인 세상
사람이 사람에게
폭력이 아니라
평화인 세상
사람이 사람에게
죽임이 아니라
살림인 세상
하느님께서
당신 닮은 사람
지으심으로
첫걸음 내딛은
사람 사는 세상
하느님 닮은 사람이
하느님의 뜻
거스름으로
비틀거리는
사람 사는 세상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심으로
새롭게 나아가는
사람 사는 세상
사람 사는 세상
이루려는
사람인 사람으로
영글어 가는
사람 사는 세상
사람 사는 세상
거스르는
사람 아닌 사람으로
시들어 가는
사람 사는 세상
사람이 되신 하느님과
하느님 닮은 사람이
오롯이 하나 되어
마침내 활짝 피어날
사람 사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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