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를 나오든, 중학교를 나오든 우리의 꿈은 첫 봉급을 받아서 부모님께 빨간 내복을 사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운이 좋아, 부모 잘 만나 좋은 머리 유전 받고 더하여 억세게 운이 좋아 잘 사는 부모 덕에 끼니 걱정 않고 학비를 낼 형편만 되면, 학교에서 돌아오는 대로 교복을 벗고 들이나 점방에 나가 부모님 일을 거들고 밤이면 작은 가슴에 초생달 같은 희망을 품고 희미한 호롱불 아래서 부지런히 책을 읽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깜박 졸다가 머리 이쪽 저쪽에서 숱하게 달걀 껍질 태우는 냄새를 피우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하여 용케 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되면, 천하를 얻은 듯 어깨를 활짝 폈습니다. 부모님은 큰 맘 먹고 꿀보다 달콤한 짜장면을 곱빼기로 사 주셨습니다. 그 날은 위인전의 위인들이 그리 멀게만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득한 배를 쓰다듬으며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면 별들이 유난히 낮게 떠서 유난히 밝게 웃으며 손만 뻗으면 잡힐 듯 손짓했습니다.
그 시절에는 상고와 공고의 교복도 멀리서부터 빛을 발했습니다. 고픈 배를 움켜잡고 주판알을 번개같이 오르내리고 개성상인 못지 않게 빈틈없이 부기를 배우고 익히거나 손때로 반들반들해진 공구를 들고 책에서 배운 선반을 뚫어지게 쳐다보았습니다. 3년, 불과 3년이면 은행 또는 공장에 당당히 취직되어 하이칼라로서 또는 엔지니어로서 온 집안 식구를 먹여 살릴 수 있었으니까요. 동생들을 데려다가 교육시키고 부모님께 용돈도 주고 소도 사 주고 논도 사 줄 수 있었으니까요. 시골에서 쌀을 한 말 들고 김치를 담가서 자취방을 찾아오신 어머니를 보고는 영화에 나오는 서양 아이들처럼 부둥켜안고 뽀뽀해 주진 못해도 여드름 듬성듬성한 얼굴에 내내 복사꽃보다 더 환한 미소를 띠고 두런두런 얘기꽃을 피웠습니다. 어머니가 오랜만에 끓여 주는 구수한 된장과 어머니가 오랜만에 절이고 양념하여 폭 삭혀 온 시큼한 김치는 30년 후 또는 40년 후 으리으리한 롯데 호텔의 뷔페가 차마 낯을 들지 못할 만큼 맛있었습니다.
인문계에 다니는 고등학생들은 비록 3류일지언정 한 번쯤 상아탑에 오르는 꿈을 꾸지 않은 학생이 없었습니다. 더러 술도 배우고 담배도 꼬나 물었지만, 가슴속에는 누구나 나폴레옹의 야망이 활화산처럼 들끓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충효가 용광로처럼 불타올랐습니다. 날마다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며 가슴에 손을 얹지 않은 학생이 없었습니다. 한 달에 소설 한두 권, 시집 한두 권, 팝송 한두 곡, 클래식 한두 곡, 전시회 한두 번, 가까이 해 보지 않은 학생이 드물었습니다. 라디오로 흑백 TV로 우르르 한 집에 모여서 고교야구나 고교축구 중계를 듣거나 보면서 심장이 멎을 듯 열광했습니다. 모교가 서울에서 준결승전이나 결승전에 오르면 며칠 간 수업을 못했습니다. 열차를 타거나 시절이 좋아진 후에는 고속버스를 타고 우르르 삐까번쩍하는 서울에 올라가서 목이 쉬어라 교가를 부르며 어깨동무를 하고 힘차게 발을 굴렀습니다.
일류 고등학교 학생들은 대부분 대학으로 진학했지만, 3류 고등학교 학생들은 추풍낙엽처럼 대학 문 앞에서 우수수 떨어져 나뒹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이내 벌떡 일어나 스스로 힘으로 공무원이 되고 경찰이 되고 사원이 되고 점원이 되고 기업가가 되었습니다. 어디든 취직할 자리가 있었고 누구든 열심히 일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땅만 파먹던 나라에서 어찌 된 셈인지 별의별 일자리가 다 생겨 열심히만 하면 나날이 살림이 펴졌습니다. 집집마다 명절이나 할아버지 할머니 생신에 식구들이 모이면 기쁨의 웃음꽃과 희망의 얘기꽃이 활짝 피어났습니다.
열에 한 명, 스물에 한 명 대학을 나온 사람들은 세상에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오대양이 기회의 바다로 육대주가 희망의 땅으로 손에 잡힐 듯 성큼 다가왔습니다. 60년대만 해도 전국 대학을 다 합해야 몇 장 되지도 않던 졸업장을 거들떠보는 데가 별로 없었지만, 70년대에 접어들면서 빛나는 졸업장이 대학 문에서 햇살처럼 쏟아져 나왔지만, 이것만 쥐면 여기저기서 상전으로 모시고 가기 바빴습니다. 틈새를 비집고 대학생을 사칭하는 제비족이 하루도 빠짐없이 신문 사회면을 장식했습니다. 특히 공대생들은 인기가 짱이었습니다. KIST에는 미국에 살던 박사들도 우르르 몰려오고 대기업에는 4년 내내 술만 마시고 젓가락 장단이나 두드리고 여자 꽁무니만 따라다니거나 데모만 일삼던 대학생들도 일류대 출신 삼류대 출신 가리지 않고 서로 모셔 가려고 자기들끼리 멱살을 잡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중소기업은 대학생 한 명 모셔 가는 것이 꿈에도 소원이었습니다.
도서관에서든 고전음악 다방에서든 하숙집에서든 책을 펼치던 "뺏지(badge)"만이 아니라 먹고 마시고 고함 지르며 제 멋대로 산 엉터리 사각모도 일단 취직만 하면 긴 머리를 싹둑 자르고 말쑥한 신사복을 입거나 단정한 작업복을 입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좁은 한국 땅을 벗어나 드넓은 세계로 가방 하나 달랑 메고 검은 머리를 휘날리고 검은 눈을 반짝거리며 어디든 달려가서 일개미로 소문난 일본인보다 더 열심히 일했습니다. 어딜 가든 조국을 잊지 않고 어딜 가든 민족을 잊지 않고 어딜 가든 고향을 잊지 않고 어딜 가든 가족을 잊지 않고 아랍에까지 그 이름을 떨친 고려 이래로 조선을 거치고 일제를 거쳐 600년이나 억눌렸던 야성을 마음껏 펼쳤습니다. 삼천리 금수강산의 정기를, 하다 못해 그 논두렁 정기라도 안 이어 받은 사람이 없다는 단군 할아버지 후손의 자랑스런 아이큐를 마음껏 뽐냈습니다.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어디 있든 어딜 가든 정말 칭찬 많이 받았습니다.
어느새 우리 조국은 넓은 고속도로와 거대한 공장과 울창한 아파트 숲으로 뒤덮였습니다. 소달구지는 경운기로 바뀌고 완행버스는 고속버스로 바뀌고 비둘기호는 새마을호로 바뀌었습니다. 자전거는 자가용으로 바뀌었습니다. 나무꾼의 한길이 훤히 드러나던 민둥산은 오솔길 하나 찾을 수 없는 푸르디푸른 산으로 바뀌었습니다. 얼굴만 봐도 즐거운 친목계를 얼키설키 다섯 개 열 개 안 가진 사람이 없었습니다. 동갑계, 향우회, 사촌계, 형제계, 국민학교 동창계, 중학교 동창계, 고등학교 동창계, 대학 동창계, 입사 동기회, 입대 동기회, 산악회, 조기 축구회 ... 어딜 가나 먹을 게 넘치고 어딜 가나 관광버스가 넘쳐 났습니다. 웃음이 넘쳐 났습니다. 걸쭉한 농담들이 섬광처럼 빛났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어느 날부터 우리의 후배들이 우리의 사랑하는 아들딸들이 우리의 조카들이 우리의 손자손녀들이 우리를 보고도 건성으로 인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밥도 같이 안 먹으러 하고 놀러도 같이 안 가려 했습니다. 대화하자며 간신히 밥상머리에 앉혀 소주를 한 잔 따라 주면, 소주는 못 먹으니 맥주나 양주를 달라고 합니다. 허허 웃으며 레스토랑에 데려가서 폭탄주를 한 잔씩 든 후에 일장연설을 늘어놓습니다. 침을 튀기며 고저와 장단과 완급을 조절하며 웅변을 토하고, 이만하면 크게 감동 받았으리라 생각하고 고개를 슬쩍 드는 순간 꾸벅꾸벅 코를 골며 졸고 있는 녀석들을 보게 됩니다.
어느 순간 우리의 말은 민둥산에서 홀로 지르는 소리요, 우리의 호통은 우리끼리 바다에 던지는 조약돌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일제히 모여서 우리를 향해 소리를 지릅니다. 이들을 구름같이 몰고 다니는 우리 또래 큰 두목 작은 두목도 우리를 향해 호통을 칩니다.
친구님들, 선배님들, 우리는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습니다. 우린 할아버지 세대에 비하면 아버지 세대에 비하면 겁날 정도로 할 말 다하면서, 투표소에 들어가 소신껏 여야당에 붓두껍을 누르면서 더러 데모도 하면서 때로는 새우깡에 깡소주를 마시며 독재에 대해 울분을 토하면서 살았습니다. 그 정도로는 아무도 잡혀가지 않고 잘 살았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이면 훌훌 털고 나날이 살림이 늘어나고 나날이 회사가 커지고 나날이 조국이 부강해지는 것을 가슴 뿌듯하게 생각하며 잘 살았습니다. 지나고 보니, 우리는 그 때 정말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저들이 하는 말이 무언지 우린 잘 모릅니다. KBS에서 MBS에서 SBS에서 날마다 되풀이하는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우린 잘 모릅니다. 그건 라디오 주파수를 잘못 돌리다가 어쩌다 듣던 섬칫한 바로 그 소리니까요. 그건 두 외세를 끌어다가 전쟁을 일으켜 동족을 3백만이나 죽인 김일성이가 하던 소리니까요. 대를 이어 공산봉건독재를 일삼다가 3백만을 굶어 죽인 김정일이가 하는 소리니까요. 설마 저 소리를 우리의 피와 우리의 땀으로 먹고사는 우리의 사랑하는 후배들, 우리의 사랑하는 아들딸들, 우리의 사랑하는 조카들, 우리의 사랑하는 손자손녀들이 할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날마다 들립니다. 이제 어딜 가나 들립니다.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굽어보소서. 우리는 그저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이 나라를 굽어보소서. 일만 열심히 하고 돈만 열심히 벌어 주고 후세들에게 교육을 제대로 못 시킨 이 못난 자식을 이 못난 손자를 용서하소서. 보고 싶은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첫댓글 읽고 나니 부모님 생각 나서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누구보다 열심히 사셨고 누구보다 순수한 마음으로 나라 걱정 하시는 분들이 아닙니까...방금 집에 안부 전화 드렸습니다.
어르신들 힘내세요....... 그래도 여기 이 곳에는 옳바른 정신을가진 젊은 청년들이 많이 있습니다. 희망을 가지십시다........
정말 우리 선배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저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점심 시간에 도시락 싸오지 못하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 때 미국에서 원조해 준 강냉이 빵 쪄서 주었지요.조금이라도 더 큰걸로 먹으려고 눈치 모기도 하고 . 정말 우리는 그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