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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로 풀어보는 6.25 전쟁 OX 퀴즈로 풀어봅시다.
(맞으면 O, 틀리면 X를 선택하세요!)
1.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었다. (O / X)
2. 6.25전쟁은 1951년 6월 25일에 새벽4시에 시작되었다. (O / X)
3. 6.25전쟁은 북한이 먼저 남한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O / X)
4.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 중 "한강 다리 폭파" 명령을 내렸다. (O / X)
5. 6.25전쟁 당시 한국군과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전세를 뒤집었다. (O / X)
6. 6.25전쟁은 1955년에 끝났다. (O / X)
7. 휴전협정은 판문점에서 이루어졌다. (O / X)
8. UN은 6.25전쟁에서 대한민국을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O / X)
9. 미국은 UN군을 이끌며 6.25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O / X)
10. 6.25전쟁 이후 UN이 한국 경제 재건을 돕는 데 기여했다. (O / X)
11. 6.25 전쟁을 지원해준 국가는 22개국, 전투파병 16개국,의료지원 6개국이다. (O / X)
12. 6.25일 새벽3시반 침공한 수송선, 부산 가동 및 후방 교란을 목적으로 침투하던 600~1,000명 규모의 북한 무장 수송선을 백두산호가 격렬한 야간 교전 끝에 격침시켰다. (O / X)
✅ OX 퀴즈 정답
나머지는 다 맞고, 2번, 6번만 x 입니다. 2번의 정답 (1950년 6월 25일), 6번의 정답 (1953년 휴전)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6.25 전쟁은 단순한 남북 간의 충돌을 넘어, 전 세계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이 격돌한 국제전이자 우리 민족사 가장 큰 비극입니다. 3년 1개월간 이어진 6.25 전쟁의 핵심 전개 과정을 5단계로 명확하게 정리해 드립니다.
1단계: 북한의 기습 남침과 낙동강 방어선 (1950년 6월 ~ 8월)
배경: 미국이 동아시아 방위선에서 한반도를 제외한 '애치슨 선언(1950년 1월)'을 발표하자, 김일성은 소련 스탈린과 중국 마오쩌둥의 승인 및 지원을 받아 남침을 계획했습니다.
발발: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은 '폭풍'이라는 작전명 아래 38선 전역에서 전면 남침을 감행했습니다. (해상에서는 새벽 3시 반부터 대한해협 침투 시도가 있었습니다.)
초기 수세: 경계령 해제와 휴가 등으로 방비가 허술했던 국군은 소련제 T34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에 밀려 3일 만에 서울을 함락당했습니다.
낙동강 전선 고립: 정부는 부산으로 이전했고, 한 달 만에 낙동강 라인까지 영토가 축소되었습니다. 이때 일반 시민과 어린 학생들(학도병)까지 전장에 뛰어들어 다부동 전투 등에서 목숨을 걸고 방어선을 사수하며 반격의 시간을 벌었습니다.
2단계: 인천상륙작전과 극적인 북진 (1950년 9월 ~ 10월)
인천상륙작전 (9월 15일): 미국을 비롯한 16개국 유엔군이 참전했습니다.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조수간만의 차가 커서 성공 확률이 5,000분의 1이라던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며 적의 허리를 끊었습니다. (동해안에서는 학도병들이 장사상륙작전으로 적을 기만하며 힘을 보탰습니다.)
서울 수복과 북진: 9월 28일 수도 서울을 다시 되찾았고, 10월 1일 국군이 최초로 38선을 돌파하여 북진하기 시작했습니다(이날이 지금의 국군의 날입니다).
국경선 도달: 10월 19일 평양을 탈환한 국군과 유엔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마침내 압록강과 두만강 접경 지역까지 도달, 통일을 눈앞에 두게 되었습니다.
3단계: 중공군 개입과 1.4 후퇴 (1950년 10월 ~ 1951년 1월)
중공군 개입: 미국의 영향력이 중국 국경까지 다다르는 것에 위기감을 느낀 마오쩌둥이 30만 대군을 파병했습니다. 이들은 밤에만 이동하고 낮에 매복하며 우월한 숫자로 밀어붙이는 인해전술을 구사했습니다.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 갑작스러운 포위와 영하 30도가 넘는 혹한 속에서 미 해병대는 장진호에서 사투를 벌이며 후퇴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흥남부두에 고립된 군인들과 피난민 10만 명을 배로 구출한 흥남철수작전(크리스마스의 기적)이 단행되었습니다. 특히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무기를 버리고 14,000명의 피난민을 태워 기네스북에 등재되었습니다.
1.4 후퇴: 중공군의 기세에 밀려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삼팔선 이남으로 철수했고,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다시 적에게 내어주며 대전·대구 라인까지 밀려났습니다.
4단계: 전선의 고착화와 치열한 고지전 (1951년 1월 ~ 1953년 7월)
서울 재탈환: 새롭게 부임한 리즈웨이 장군이 군의 사기를 올리고 중공군의 약점(보급 부실)을 파고들어 반격을 시도했습니다. 밴플리트 장군의 압도적인 포격 전술(밴플리트 탄약량)과 파로호 전투 등의 승리로 1951년 3월 서울을 재탈환하고 전선을 지금의 휴전선 인근으로 복구했습니다.
휴전 회담의 시작: 미국은 전면전(제3차 세계대전) 확대를 우려했고, 중국은 막대한 전쟁 비용으로 경제적 한계에 부딪혀 1951년 7월부터 본격적인 휴전 회담에 들어갔습니다.
고지전의 비극: 회담이 진행되는 2년 동안, 휴전선 경계 플래카드가 걸릴 땅 한 뼘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백마고지 전투, 단장의 능선 전투 등 처절한 고지전이 계속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가장 많은 젊은 군인이 희생되었습니다.
5단계: 정전협정 체결과 한미상호방위조약 (1953년 7월 ~ 10월)
정전협정 (1953년 7월 27일): 포로 송환 방식(자유 송환 vs 자동 송환)과 영토 선정을 두고 지루하게 이어지던 회담은 스탈린의 사망 이후 급물살을 탔습니다. 결국 1953년 7월 27일 유엔군, 중공군, 북한군 간의 서명으로 정전협정이 체결되며 전쟁이 멈추었습니다. (분단과 정전을 반대하며 북진 통일을 주장했던 대한민국의 서명은 빠져 있습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1953년 10월): 이승만 대통령은 전후 안보 공백을 메우기 위해 미국을 압박(반공포로 석방 등)하여 강력한 군사동맹인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이끌어냈습니다. 이로써 주한미군이 주둔하게 되었고, 오늘날 대한민국 성장의 든든한 안보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6.25 전쟁이 남긴 상흔
3년 넘는 전쟁으로 남북한 통틀어 약 500만 명에 달하는 인명 피해(사상자 및 실종자)가 발생했고, 수십만 명의 전쟁고아와 천만 명의 이산가족이 생겼습니다. 전 국토의 산업 시설과 가옥이 잿더미가 되며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했으나, 우리 국민은 이 폐허 위에서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내며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었습니다.
6.25 전쟁의 배경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광복 직전으로 한번 가보겠습니다. 광복 직전에 소련군은 이미 한반도 북부로 밀고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소련은 일본군의 무장 해제와 우리나라의 치안 유지를 명분 삼아 한반도로 밀고 내려왔습니다. 이 상황에서 광복을 맞이한 것입니다. 그래서 광복과 동시에 북쪽은 소련군이 장악하게 됩니다. 미국이 이를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리가 없었죠. 그래서 미군도 한 달 뒤인 9월에 남한을 장악하게 됩니다. 그 이후로 우리나라는 약 3년간의 미·소 군정 시대를 맞이하게 되지요.
그리고 광복 3주년이 되는 1948년 8월 15일, 남쪽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됩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9일, 북쪽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러다가 이제 1950년 6월이 됩니다. 그전부터 38선 근처에서는 양측 간에 소규모 총격전 정도가 지속해서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비상 경계령을 내리고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북한의 평화 공세에 우리가 순간 방심을 하고 경계령을 해제한 것이 1950년 6월 25일이었습니다.
하필이면 주말을 맞아 많은 장병이 휴가를 나가 있는 틈을 타서 적들이 선제 기습 공격을 감행한 것입니다. 38선 전역에서 그들이 밀고 내려왔습니다. 우리는 탱크가 단 한 대도 없었지만, 그들은 소련제 탱크인 T-34를 몰고 수백 문의 자주포를 앞세워 밀고 내려오면서 우리를 유린해 갔습니다. 단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었고, 한 달여 만에 낙동강 라인 안으로 갇히게 되면서 우리 자유진영은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깜짝 놀란 것은 미국이었습니다. 미국은 즉각 UN 안전보장이사회를 개최하여 유엔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1950년 9월, 맥아더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미국을 위시한 16개국 UN 연합군이 우리를 돕기 위해 부산으로 오게 됩니다.
부산에 와서 전황을 본 맥아더 장군은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낙동강 전선에서 곧바로 밀고 올라가면 좋겠지만, 그렇게 하면 아군 측의 피해가 너무 클 것 같다. 그러니 적의 허를 찌르자"라고 생각한 것이죠. 서해안을 돌아서 허리인 인천으로 상륙하겠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렇게 적의 보급로를 끊고 밀고 올라가자는 것이 맥아더 장군의 작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장성들은 인천상륙작전을 결사반대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아시다시피 인천은 밀물과 썰물의 조수간만의 차가 너무 큽니다. 썰물 때는 상륙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간석지인 갯벌이 4km나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만약 거기에 군인들을 내려놓으면 4km나 되는 진흙탕에 빠져서 제대로 걷지도 못합니다. 상륙전으로서는 불가능한 조건이었습니다. 하지만 맥아더 장군은 되게 뚝심 있는 분이라 "하면 한다"라며 밀어붙였습니다.
그리하여 당시 일본 고베와 요코하마, 그리고 부산에서 동시에 군함들이 출발했습니다. 이들은 제주도 남부 해상에서 집결한 뒤, 삥 돌아가지고 9월 15일 인천으로 상륙하게 됩니다. 이 기적 같은 인천상륙작전은 대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이제 북한군의 경우는 보급로가 끊길 위험에 처해졌고 심리적인 충격이 엄청났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 국군과 유엔군이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앞으로 계속 밀고 올라갔지요. 인천에서 김포를 지나 서울로 들어오는 부대와 낙동강에서 밀고 올라간 우리 국군이 드디어 만나게 되었고, 9월 28일 서울을 다시 수복하게 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밀고 올라갑니다. 38도선을 돌파해 통과한 날이 바로 10월 1일이며, 이를 기념하여 국군의 날이 10월 1일이 된 것입니다. 이어 10월 19일에는 북한의 수도인 평양을 우리가 차지했고, 계속 밀고 올라가 마침내 압록강과 두만강 라인까지 도달했습니다. 완전히 우리가 통일을 이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중국이었습니다. 중국 공산당군, 즉 중공군이라 불리는 세력이 개입한 것입니다. 중국 입장에서는 코앞인 중국 국경까지 유엔군이 밀고 들어오니 거대한 위기감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상에, 엄청난 전투 병력을 파견하게 됩니다. 삼국지 등에서 나오는 뛰어난 지략 같은 것은 다 필요 없었습니다. 그들이 구사한 전술은 오직 하나, '인해전술'이었습니다. 군인 숫자가 얼마나 많았는지, 무기 숫자보다 군인 숫자가 더 많았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병사 한 명에게만 소총이 주어지고, 나머지 두 명에게는 피리와 꽹과리를 쥐여주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죠.
실제로 이들이 밀고 내려오는데, 낮에는 우리 유엔군이 제공권을 장악하여 조준 폭격을 가하니까 땅굴을 파고 그 안에 숨어 있었습니다. 당시 중공군이 판 땅굴의 총길이가 6,700km에 달해 만리장성의 길이와 맞먹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밤이 되면 피리를 불면서 기습 작전을 전개했습니다. 정말 무서운 기세였습니다.
당시 유엔군은 커다란 충격과 공포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영하 30도에 달하는 개마고원의 매서운 추위와, 밤마다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중공군의 피리 소리는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결국 우리는 속절없이 다시 후퇴를 하게 됩니다. 이때 적의 포탄이나 파편에 맞아 전사한 병사보다, 혹독한 추위에 온몸이 동상으로 썩어 들어가 죽어간 병사가 더 많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결국 우리는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다시 빼앗기게 되니 이것이 가슴 아픈 '1.4 후퇴'가 됩니다.
그런데 비극은 또 있었습니다. 중공군에게 퇴로를 차단당한 미 제10군단 같은 경우는 보시다시피 흥남부두에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을 배로 탈출시켜야만 했습니다. 미군 10만 명과 군수물자 35만 톤을 싣고 해상으로 탈출하려는 엄청나게 큰 작전을 세웠으니, 이것이 바로 '흥남철수작전'이었습니다.
이때 미군들의 눈앞에 너무나 놀라운 상황이 펼쳐집니다. 피난민 10만 명이 부두로 몰려든 것입니다. "우리도 제발 데려가 달라"라는 처절한 부르짖음이었습니다. 그들은 아군에게 끝까지 협조했던 사람들이라, 만약 북한군과 중공군이 다시 마을을 점령하게 되면 모두 학살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제발 우리를 버리지 말고 데려가 주세요"라고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미군은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이때 민간인들을 실은 마지막 배가 바로 '메러디스 빅토리호'라는 화물선이었습니다. 이 배의 원래 정원은 고작 60명에 불과했습니다. 게다가 선원만 47명이었기 때문에 법적으로 더 탈 수 있는 인원은 13명밖에 안 되는 배였습니다. 그때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의 고문이었던 현봉학 박사께서 장군과 레너드 라루 선장에게 눈물로 호소를 합니다. "장군님, 선장님, 제발 좀 도와주세요. 저 사람들을 여기에 두고 가면 다 학살당합니다. 저 사람들을 제발 배에 태워 주세요"라고 애원했습니다.
이에 감복한 선장은 결단을 내립니다. 군수품을 다 버리고 다 내려놓으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25만 톤에 달하는 무기와 군수품을 과감히 버리고, 그보다 백 배, 몇천 배 더 중요한 '인간의 생명'을 살리기로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그리하여 정원이 60명인 화물선에 무려 14,000명의 피난민이 탑승하게 됩니다. 피난민들이 모두 탑승한 뒤, 흥남부두와 공장 시설들이 적의 손에 들어가면 안 되기 때문에 부두를 완전히 폭파해 버립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이틀간 외롭고 처절한 항해를 시작합니다. 부산을 거쳐 최종 목적지인 거제도로 향하게 되는데요. 누울 수도, 제대로 앉을 수도 없는 비좁은 화물 칸 안에서 놀랍게도 새 생명이 5명이나 태어나게 됩니다. 이 아기들의 이름을 당시 미군들은 김치 1, 김치 2, 김치 3, 김치 4, 김치 5라고 붙였습니다. 아이들 다섯 명을 '김치 파이브'라고 불렀던 것이죠.
이틀 만인 크리스마스 날, 마침내 거제도에 도착을 했는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 14,000명의 피난민 중에 사망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배 안에서 인원이 5명 늘어 있었습니다. 이 위대한 기적으로 인해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단일 선박으로 가장 큰 규모의 구조 작전을 성공한 선박'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습니다.
자, 다시 전쟁 이야기로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1.4 후퇴로 태안반도 근처까지 밀렸던 우리 국군과 유엔군은 전열을 다시 가다듬어 밀고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지금의 38선 근처에서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되지요. 1951년 3월부터 6월까지 수개월 동안 이 일대에서 치열한 고지전을 벌이게 됩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중국이 자꾸 소련에 눈치를 주었습니다. "소련, 뒤에서 구경만 하지 말고 너희도 전쟁에 참여해서 도와달라"라고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당시 소련은 두만강 근처에서 간접적인 공중 지원 정도만 해주고 있었습니다. 소련이 생각하기에 전면적으로 전쟁에 참여했다가는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것 같았습니다. 안 되겠다 싶었던 소련은 결국 중재안을 내놓으며 휴전을 제의합니다. "북한과 중공도 그만하고, 한국과 유엔군도 이제 그만하자"라며 휴전을 제의한 것이 1951년 6월이었습니다.
만약 이때 곧바로 휴전이 성립되었다면 아군과 적군 모두 피해가 훨씬 덜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휴전 제의가 나온 뒤에도 무려 2년 동안이나 전쟁이 계속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휴전선을 어디에 그어야 할지, 그리고 포로 송환은 어떤 방식을 취할지 등의 치명적인 문제를 두고 양측이 합의를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지루한 회담이 이어지는 2년 동안, 애꿎은 우리 젊은이들의 목숨이 전선에서 끊임없이 사그라들었습니다. 결국 2년이 지난 1953년 7월 27일이 되어서야 마침내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휴전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휴전선이 그어지며 전쟁은 잠시 멈추었지만, 전쟁이 남긴 피해는 너무나도 심각했습니다. 양측 군인 사망자만 160만 명에 달했고, 민간인 사망자는 대한민국 집계로만 99만 명에 육박했습니다. 10만 명의 전쟁고아가 발생했고 수백만 명의 이산가족이 생겨났습니다. 당시 대한민국의 경제 규모는 전 세계 120개국 중에 119위로, 꼴찌에서 두 번째였습니다. 1950년대와 60년대의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못사는 나라였습니다. 국토는 온통 폐허였고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폐허 위에서 우리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들께서 피땀 흘려 일구어내신 눈물겨운 기적의 이야기가 이제부터 시작됩니다.
"폐허를 기적으로 바꾼 위대한 민족성"
전쟁 직후 한반도는 공장, 도로, 주택의 대다수가 파괴되어 "100년이 지나도 회복 불가능하다"는 전 세계의 비관적인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국민은 절망을 딛고 일어나 세계를 놀라게 한 '한강의 기적'을 일구었고,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세계 최초로 남을 돕는 '원조 공여국'으로 도약했습니다.
자랑스런 대한민국 국민의 긍지를 가지고, 날마다 우리의 최선을 다하여 아름다운 우리나라 자랑스런 조국을 만들어 갑시다.
https://youtu.be/E1bs1I2IJ3w?list=RDE1bs1I2IJ3w
https://youtu.be/K-O8fwp_61s?list=RDK-O8fwp_61s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