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우유를 마시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제 어머니가 나를 10년 동안 기도하고, 41세에 낳았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섬길 그런 일꾼으로 키운다 해서 우리 어머니 말씀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귀한 종에게 소젖을 먹이다니, 그건 안 돼지’ 그래서 어머니는 병약하면서, 시간 맞춰서 모유만 먹였답니다. 그래서 저는 남보다 위가 좀 작습니다. 과식은 못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우유를 소화 못합니다.
미국에 공부하러 가서 보니까, 미국은 우유 못 먹으면 먹을 게 없어요. 더구나 아침에 기숙사 식당에 가서 보면, 미국 학생들은 찬 냉우유를 두 컵씩 가져다가 쭈욱 마십니다. 아 그거 참 먹고 싶어요. 시원하고 좋은데, 저는 우유를 소화시키지 못하니까 못 마십니다. 여러 번 시도해 보았지만 배탈만 났습니다. 한 번은 의사가 제게 이렇게 조언했습니다. ‘목사님은 배속에 우유를 소화하는 효소가 없으니까, 아예 일생동안 우유를 마시지 마세요.’ 그래서 우유를 안 마시고 삽니다.
그러면서 저는 우스갯소리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나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여러분은 아직 젖이나 먹고 살 것입니까?’
그래서 저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는 구절이 나올때마다, 우유가 떠오릅니다.
본문은 사랑장입니다 사랑의 본질과 사랑의 능력 세세히 설교하는 중에
고전13장 마지막 부분에 와서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무슨 말인가 하면, 사랑받는 존재에서, 사랑하는 존재로
사랑받는 행복을 알고 사는데서, 사랑 주는 행복을 아는 존재로
그런 모으는 취득이라는 기쁨보다, 베푸는 기쁨
내가 먹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먹이면서, 섬기면서 느끼는 그 높은 기쁨
어머니들이 자기는 못 먹으면서도, 자식에게 먹이고 아이들이 맛있게 먹는 것을 보고 좋아하는 그런 행복 말입니다.
이렇게 성숙한 성장한 사랑, 그것이 바로 사랑의 극치요, 인격의 완성입니다.
그것을 사도바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의일을 버렸노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심리학의 권위자인 아들러의 <행복해질 용기> 라는 책에서
그는 행복의 요소를 3가지로 말합니다.
하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일 없이 사는 것은,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든지 할 일이 있어야 되고,
둘째는, 할 일을 즐겨야 됩니다. 일을 할 때, 억지로 하고, 죽지 못해서 하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일을 하는 것은, 불행합니다. 그 일 자체에 의미가 있어서, 그 일 하는 것을 즐기고 행복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동시에 일은 혼자 하는 게 아닙니다. 더불어 하는 행복, 나도 하고, 다른 사람도 하고, 함께 하고.. 더불어 하는 그런 일과 사역, 그 속에 성숙한 인격이 있습니다.
대개 보면 자기 혼자서는 잘 하는데, 다른 사람과 함께 하면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수준이 낮은 거죠. 나도 일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일 하게 하고, 일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함께 일 하는, 함께 사역하는 이것이 높은 수준의 인격입니다.
교제의 영역이 넓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어찌 반가운 사람만 사랑하겠습니까. 어디 좋은 사람만 만나겠습니까. 살다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 받고 사랑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사랑해서 사랑받는거죠.
교제의 영역이 넓은 사람, 이런 사람도 사랑하고, 저런 사람과도 교제하고, 여러 종류의 사람을 함께 아울러서, 그렇게 넓게, 깊게, 높게 사랑하게 될 때,
그런 교제의 세계가 넓어질 때, 내 존재의 영역이 그만큼 커지고, 내 삶의 가치가 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와제 입니다.
인격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얼마나 사랑하느냐, 어디까지 사랑하느냐, 누구까지 사랑하느냐..
그리고 얼마나 행복하느냐.. 그것이 그 인격의 완성이라고 이렇게 심리학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하시면서, 아주 간단하게 3가지로 요약해서 말씀합니다.
어린아이들은,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어린아이의 말이 따로 있습니다. 애들은 거침 없이, 생각없이 말합니다. 제가 오래 전에 인천에서 목회할 때,
박학천 목사님이라고 계셨는데, 연세도 많으시지만, 지병으로 아무 일도 못하고 집에서 쉬고 계셨습니다. 내외분이 두분이 사시는데 너무 외롭고 적적해서 외손자를 하나 데려다 키웠는데, 이 놈이 재롱을 떨고 귀엽습니다. 참 볼때마다 좋은데, 언젠가 한 번 심방을 가서 보니, 그 어린아이가 3~4살인데, 밖에 나가 놀다가 집에 들어왔어요. 그러더니 할아버지를 ‘이 새끼’ 그러면서 발길로 찹니다. 세상에 손님들 앞에 무슨 망신입니까. 손자 녀석이 할아버지를 발길로 차면서 막말을 합니다. 손님들은 기가 차서 웃으니까, 자기가 잘 하는 줄 알고, 더 열심히 합니다. 그래도 노인 목사님이 손자를 끌어안고, 기뻐합니다. 제가 ‘이 천하에 못된 놈을, 왜 이렇게 사랑하는 겁니까?’ 했더니
목사님은 ‘몰라서 그러는 건데 뭐, 얘가 할아버지가 뭔지, 새끼가 뭔지 아나? 몰라서 하는 거니까, 나무랄 수가 없어요.’
애들은 말하는 것이 거침없습니다. 여러분, 잘못했다가는 큰 망신합니다. 애들은 앞뒤가 가림 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막 쏟아냅니다. 오늘 본문에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고전13:11
유치한 사람은, 말이 유치합니다.
말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어요. 어떤 교양있는 말을 하나, 생각이 있는 말을 하나, 얼마나 어리석은 말을 하나, 가만히 보세요. 말은 마음의 창문이라고 합니ᅟᅡᆮ. 10분만 딱 들으면 알 수 있어요. 더 볼 것도 없어요. 그 사람의 인격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어요. 그런데 어린아이는 유치해서, 말 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유치합니다.
또 하는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아이들은 언제나 부분만 봅니다. 전체를 못 봅니다. 현재만 봅니다.
미래는 못 봅니다.
지금 당장 내게 주어지는 요것만 보고 생각합니다.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자기 중심적입니다. 자기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발달심리학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왜 어머니가 젖이 두 개냐, 하나는 내가 먹으라는 거고, 하나는 가지고 놀라는 거다.
아버지는 돈벌어오는 사람이다. 오빠는 내가 타고 노는 존재다.
온 우주의 중심은 나다. 나는 왕이다. 아이가 자랄 때는 그런 생각을 한답니다.
바로 유치한 거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어린아이처럼 그렇게 미련하고, 자기 중심적이고, 물질적이고, 현재적입니다.
장성한 사람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또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
여러분 어려서 부르던 노래 생각납니까?\
내가 예쁜 운동화를 사서 신었어요. 운동화를 신고 벌쩍 뛰니까
하늘까지 올라갈 것 같다. 그런 노래가 있어요. 동화적인 노래죠.
아니 운동화 하나 신었다고 하늘까지 올라갑니까> 그러나 애들은 그렇게 생각하는거죠. 정말 하늘까지 닿을 것 같고, 못할 게 없는 것 같습니다. 이게 바로 어린아이의 생각이란 말입니다. 환상적이고, 동화적이고, 꿈과 현실을 혼동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어린아이입니다.
그러면서도 또 물질적입니다. 먹는 것 좋아하고, 자기 손에 쥐는 것, 보이는 것 좋아하고, 가치관이 유치합니다. 생각하는 것이 유치합니다. 깊이 생각하지 못합니다. 공자의 말씀에, 사람은 세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사색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경험해 보지 못하고도 아는 사람,
결혼해 보지 않고 여자와 가정을 알고, 부자가 되지 못해도 부자를 알고, 내가 경험해보지 못하고도 생각속에서 충분히 알고 즉 성숙한 사람입니다 어찌 다 경험하고 알겠습니까. 더구나 우리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죽음. 그것은 경험하고 알 수 있는 문제가 아니거든요. 그러나 적어도 성숙한 인격은, 다른 사람이 죽는 것을 보면서 깨닫습니ᅟᅡᆮ. 자기가 늙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깨닫습니다. 그러니까 경험하지 않고도 아는 그가 바로 성숙한 인격입니다.
그런가 하면, 모방적 인간이 있다고 했습니다.
남을 그저 모방하고 따라가고 흉내 냅니다. 이것은 쉽지만 아주 위험하다고 그랬습니다.
세 번째는 많은 경험을 통해서 아는 사람
자기가 실제로 경험해 보고 압니다. 만져보고 알고, 경험한 다음에야 깨닫습니다.
제 아이들이 어렸을 때, 그때 방안에 추우니까 연탄난로를 설치했습니다.
어떤 때 우리 교인이 와서 보고 깜짝 놀라면서, 아니 어린아이들이 둘이나 있는데, 어떻게 연탄난로를 그냥 놓았습니다. 여기에다 울타리를 쳐야지요.
그래서 제가 ‘아닙니다. 우리 아이들은 절대로 연탄난로에 데지 않습니다.’ ‘어째서요?’ ‘연탄난로가 살살 데워지기 시작할 때, 아이들이 다 한 번씩 손을 데었거든요. 그래서 다시는 가까이 안 갑니다 차라리 울타리 만들어놓으면 애들이 올라가서 떨어집니다.’ 여러분, 작으나 크나 경험을 통해서 깨닫습니다. 만져보고 알고, 당해보고 알고, 병들어보고 알고, 실패해보고 알고, 많은 경험을 통해서 깨닫는데, 이것은 소중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대가를 많이 치러야 합니다. 상처가 나야되고, 어려움을 겪어야 합니다. 이렇게 공자는 말합니다.
엡4:14절이나 고전14:20절, 또 고전3:1~3절에보면,
사도바울을 어린아이에 대해서 깊은 이해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자기 중심적이다.
이기적이다.
그래서 분쟁을 한다.
뒤집어 말하면, 분쟁하면 어린아이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렇게 보았습니다.
너희에게 분쟁이 있다하니, 어찌 어린아이가 아니리요?
얼마나 유치합니까.
분쟁하면 저만 망하는게 아니라 나도 망하고 함께 망합니다.
그래도 분쟁한다면, 어리석으며, 어린아이죠.
분쟁하면 곧 어린아이다. 라고 사도바울은 정의합니다.
여러분, 어느 때나 가만히 보세요, 다툼이 있습니다. 유치한 것입니다.
부부싸움을 합니다. 어린아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 부부싸움 하는 것을 보았는데, 애들이 옆방에 있었는데 한 30분 있다가 큰 아이가 둘째 아이보고 이러더랍니다. 야 옷 입어라, 이제 외출할 때가 되었다. 왜냐하면 아버지 어머니가 싸우지 않느냐, 저렇게 싸워놓고 또 화해한다고 외식하러 나갈 것이다 옷 입고 미리 외출 준비하고 있자.
싸워봤자 이슈가 별거 아니고, 싸워놓고 화해하느라고 또 외식까지 해야 됩니다.
여러분, 언제까지 유치한 지을 할 것입니까.
싸우면 유치한 것입니다.
성숙의 높은 경지는 사랑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믿고,
사랑하기 때문에 행복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피곤을 모릅니다.
여러분, 어른이 되면 기다릴 줄 압니다. 어른이 되면 용서할 줄 압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하나님이여, 이들의죄를 사하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예수님은 높은 성숙함을 가지고, 이 불쌍한 죄인들을 내려다보면서 용서하고 계십니다. 성숙의 극치입니다.
그래서 알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그래서 빌3: 에 내가 옛날에 좋아하던 것을 분토와 같이 다 버렸노라. 오직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만 가지고 살아가노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언제까지 이렇게 어린아이로 유치하게 살아야 합니다. 보다 멀리 바라보십시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우리 마음을 뜨겁게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5:48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에 까지, 높은 수준으로 성장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 성장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기도하면서 이루어지고, 깨달아서 이루어지고, 사랑받으면서 이루어지고 공부해서 생각하면서도 이루어지지만
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많은 시련을 통해서, 많은 고난의 사건을 통해서 성장합니다.
저는 종종 이런 기사를 볼 때, 마음 아프게 생각합니다.
그게 뭐냐면, 가난하게 사는 집의 아이들에게서는 효자가 나오고
부잣집 아이들에게는 효자가 나오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집은, 그 부모들이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아이들이 깊은 사랑을 느낍니다. 사랑을 느껴서 성숙한 인격으로 자라는데,
부잣집 아이들, 넉넉하게 자라고 고생해본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받고도, 고맙다는 마음도 못 가집니다 여러분 요즘 우리 마음을 어지럽히는게 있습니다 부잣집 아들 딸들 하나 같이 다 이혼합니다. 제대로 사는 가정이 없습니다. 왜냐면 사랑이 없습니다. 그 사랑이 왜 없습니까? 사랑은 가난하고 어려운 시련속에서 꽃 피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여유 많고 넉넉하게 되면, 사랑하기도 힘들고, 사랑받기도 힘들고 사랑으로 깨달아 수용하기도 힘들어요. 여러분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ᅟᅡᆮ. 인격의 성숙, 신앙의 극치는 사랑입니다. 아가페입니다. 사도바울은 높은 사랑의 수준에서 우리에게 교훈합니다.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여러분, 내 사랑을 한 번 진단해 보세요. 어디까지 왔습니까,
어느 수준입니까? 높고 어른의 사랑, 장성한 믿음의 사랑, 그런 사랑으로 나를 보고 세상을 보고, 이웃을 볼 때, 여기에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