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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벽대전(赤壁大戰)
중국 삼국 시대인 208년에 오(吳)와 촉(蜀) 두 나라가 연합하여 조조(曹操) 휘하의 위(魏)나라 대군을 장강(長江) 유역의 적벽에서 대파한 전쟁을 말한다.
赤 : 붉을 적
壁 : 벽 벽
大 : 클 대
戰 : 싸움 전
(유의어)
적벽전(赤壁戰)
중국 후한(後漢) 말기에 조조(曹操)가 손권(孫權)과 유비(劉備)의 연합군과 싸웠던 전투이다. 원소(袁紹)를 무찌르고 화북(華北)을 평정한 조조는 형주목(荊州牧)을 지키고 있는 유표(劉表)를 정복하고 형주땅을 차지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였다.
유표의 급사로 손쉽게 형주를 차지한 조조는 강릉으로 달아나는 유비를 추격하였다. 조조군은 장강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였고 적벽에서 손권, 유비 연합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조군은 손권의 장수 황개(黃蓋)가 화공(火攻) 계략을 세워 전선(戰船)이 불타는 대패를 당하고 화북으로 후퇴했다. 이 결과 손권의 강남 지배가 확정되고 유비도 형주(荊州) 서부에 세력을 얻어 천하 3분의 형세가 확정되었다.
적벽대전을 두고서는 다양한 이견이 존재한다. 정사에 남은 기록이 짧고 모호하여 적벽대전의 전모를 정확하게 파악하기에는 힘들고 명나라 때의 인물인 나관중이 집필한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실제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지어낸 이야기가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그 때문에 당시에 장강 적벽에서 벌어진 전투를 두고 오해가 생기가 되었다.
적벽대전을 두고 삼국지연의의 내용과 이견을 보이는 점은, 첫 번째 적벽대전은 조조가 유비를 죽이기 위해 기병 5천으로 추격하다가 벌어진 소규모 전투에 불과했다. 두 번째 조조는 유비를 처치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손권을 치고 오나라를 차지하기 위해 벌인 전쟁이었다. 세 번째 실제 전투를 벌인 시간과 장소가 어디인지 정확하지 않다. 네 번째 조조의 군선에 불을 지른 사람이 누구인가? 이런 점들이 현재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이견이 존재하는 상태이다.
한편 일부 중국의 학자들은 적벽대전은 적벽이 아닌 후베이성 오림(烏林)에서 벌어진 오림대전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적벽보다는 오림이 당시의 전투들이 벌어지기에 더 알맞은 곳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적벽대전을 두고서 정사에서 기록한 내용도 매우 간단하기 때문에 당시의 전투 정황과 각 진영의 전략에 근거한 합리적인 추측은, 조조가 강릉으로 달아나는 유비를 추격하는 목적 이외에 손권을 공격하기 위해 진군하였으며, 군사는 100만 대군이 아니라, 10~20만 명의 군사였을 것이라는 점이 정설이다.
조조 진영의 참모였던 장간이라는 인물이 손권의 진영으로 왔다가 계략에 빠져 상황을 오판하게 되었다는 점도 사실이 아니다. 또한 짚풀을 실은 배를 보내 조조군의 화살을 모두 가져오게 했다는 점도 나관중이 만들어낸 소설에 불과하며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배송지(裴松之)가 주석을 단 강표전(江表傳)에 의하면 조조가 주유에게 보낸 편지에 군영에 전염병이 돌아 조조가 스스로 역병을 방지하기 위해 배에 불을 지른 것인데 주유가 화공으로 승리한 것으로 알려져 명예를 얻게 되었다고도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당시의 상황을 두고 다양한 기록들이 남아있어 혼란이 가중되었다.
당시 조조의 군대는 피로가 누적되었고 이미 질병에 걸린 사람들이 많아 전력이 약해진 상태였다는 점은 사실이다. 주유와 유비의 연합군과 첫 해전에서 패하여 물러나 강의 북쪽에 주둔하고 있었고 주유의 군대는 강의 남쪽에 주둔하였다. 이때 조조의 군대가 주둔하였던 강의 북쪽이 바로 오림인데, 그곳은 현재 후베이성 훙후(洪湖)이다.
해전에 약했던 조조는 배를 묶어서 정박했고 겨울 북풍이 세차게 불 때 주유의 군대가 화공을 펼쳐 조조의 전함과 군영에 불이나게 하였다. 오주전(吳主傳)에서는 조조가 퇴각하면서 남아 있는 배들을 모두 태워버리고 퇴각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우월한 전력과 배경을 가진 조조의 패배 원인은 상대를 무시하고 전쟁의 목표가 뚜렷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즉, 손권과 유비의 연합을 막아, 유비를 없애고 형주땅을 목표로 했다면 조조는 충분하게 승리할 수 있었다.
유럽이 하나의 대제국을 형성하고 로마의 통치를 받던 시절, 중국은 천하통일과 군웅할거가 반복되는 가운데 잦은 왕조교체를 보이고 수많은 전쟁을 치렀다. 그러나 중국의 전쟁에 관한 기록은 유럽에 비하면 너무 조잡하고 특히 군대의 특성과 전술의 발달을 이해하기에는 어려우며, 다만 유명한 장군들의 무용과 지략에 관한 이야기로 만족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중국 역사에서는 221년 후한(後漢)이 멸망하고 265년 서진(西晉)이 수립되어 천하를 통일했는데, 그 중간에 해당하는 44년은 위(魏), 촉(蜀), 오(吳) 나라 3국이 천하를 나누어 다스린 이른바 삼국시대였다. 삼국은 세력균형을 유지하기보다는 서로 천하를 장악하기 위한 살벌한 싸움을 벌임으로써 또 하나의 전국시대를 겪었다.
중국 원 나라 말기의 유명한 장편 역사소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바로 후한 말 동란 시대와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그 시대 영웅들의 싸움을 소설화한 것이다. 흔히 이 소설을 평할 때 실7허3, 즉 사실 70%, 허구 30%라고 하는데, 그만큼 사실에 가깝다고 보면 될 것 같다.
동란시절 군웅들이 즐비하게 나타나 각축전을 벌였는데, 그 가운데서도 두각을 나타낸 자들은 조조, 유비, 손권 등이었다. 중원의 패자가 된 조조는 중국 북부를 완전히 통일하고 이제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남부로 진격했다. 이에 유비는 그가 삼고지례(三顧之禮)를 다하여 맞아들인 제갈공명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으며 손권과 손을 잡고 조조의 군대에 대항하게 되었다.
관도의 전투에서 원소를 물리쳐 화북의 패권을 장악하고 중국 북부를 평정한 조조는 건안(建安) 13년(208) 7월, 목표를 남쪽으로 돌려 형주(荊州)와 강동(江東) 공략을 시작했다. 강동의 손권이 먼저 형주를 공격하여 차지하게 되면 천하의 판도를 예측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유비도 제갈량의 천하 삼분 계책을 받아들여 형주를 근거지로 확보하기 위해 형주의 상황을 관망하고 있었고, 손권도 노숙(魯肅)의 계책에 따라 세력을 확장하고 조조와 맞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형주를 장악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호시탐탐 형주를 노리고 있었다.
천하를 차지하기 위해 반드시 먼저 차지해야 하는 요충지 형주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렇게 군웅들이 하나같이 형주를 노린 주된 이유 중의 하나는 형주의 유표가 형주를 지킬 만한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해 8월, 유표가 죽고 그의 막내아들 유종이 그 뒤를 이었다. 조조의 백만 대군이 형주를 향해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유종은 비밀리에 사자를 보내 조조에게 항복해 버렸다. 순조롭게 형주를 접수한 조조는 내친김에 눈엣가시인 유비를 제거하기 위해 유비의 근거지인 신야(新野)로 말머리를 돌렸다. 당시 유비는 형주의 유표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늦게야 이 사실을 안 유비는 급히 강릉(江陵)으로 퇴각하였다. 강릉은 군사상의 요지이자 병력과 물자의 중요한 보급 기지였다. 유비가 강릉으로 퇴각한다는 사실을 안 조조는 5,000의 기병을 거느리고 하루낮 하룻밤 300리를 달려 유비의 뒤를 추격하여 장판파(長坂坡)에서 유비를 공격하였다. 유비는 대패하여 지름길을 따라 유표의 장남 유기(劉琦)가 주둔하고 있는 하구(夏口)로 도망했다.
한편, 조조의 백만 대군이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강동의 손권은 군사를 시상(柴桑)에 주둔시키고 정세 변화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으나, 뾰족한 수가 없어 우선 노숙을 파견하여 상황을 파악하도록 했다. 북으로 올라가던 노숙과 남으로 내려오던 유비가 당양에서 마주쳤다. 노숙은 유비에게 일단 하구로 가 손권의 군사와 연합하여 조조에게 대항할 것을 제안했다. 불감청 고소원이 아니었던가! 유비는 노숙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조조는 강릉을 점령한 후 유비를 치기 위해 다시 말머리를 하구로 돌렸다.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게 된 유비는 손권의 도움을 얻기 위해 제갈량을 파견했다. 제갈량은 노숙과 함께 손권이 주둔하고 있는 시상으로 건너갔고, 유비는 번구(樊口)에 주둔했다.
당시 손권의 강동 지역은 장소(張昭)를 주축으로 하는 주화파와, 주유(周瑜)와 노숙을 주축으로 하는 주전파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손권은 이 두 파의 사이에서 아직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이 전쟁은 엄밀히 따지면 조조와 유비 사이의 문제이지 손권의 문제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손권의 입장에서는 유비를 돕기도 애매하고, 유비를 돕지 않고 조조의 편에 붙는 것도 애매하며, 그렇다고 뒷짐 지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나 몰라라 하는 것은 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유비를 돕자니 그 불이 자기 옷까지 옮겨 붙을 수가 있고, 유비를 돕지 않아 유비가 망하면 그야말로 순망치한(脣亡齒寒)이 되며, 조조의 편에 섰다고 해서 조조가 손권을 가만히 놔둘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었다.
제갈량은 손권에게 세 가지를 들어 설득작업에 들어갔다. 첫째, 관망만 하고 있을 경우 결국 손권 스스로에게도 화가 미치게 된다. 둘째, 쌍방이 연합할 경우 반드시 승리한다. 셋째, 조조를 이긴 후에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정립(鼎立)의 형세를 만들자는 것이 그 주된 내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조가 손권에게 서신을 보내왔는데, 이 서신이 바로 적벽대전의 뇌관을 건드린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近者奉辭伐罪, 旄麾南指, 劉琮束手.
근자봉사벌죄, 모휘남지, 유종속수.
今治水軍八十衆, 方與將軍會獵於吳.
금치수군팔십중, 방여장군회렵어오.
이번에 황제의 명을 받들어 죄인들을 쳤노라. 나의 군기가 남방을 가리키니 유종이 투항을 했더라. 이제 80만 수군을 정비하여 오에서 장군과 함께 사냥을 할까 하노라.
명명백백한 도전장이었다. 형주를 점령하고 유비를 치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던 조조의 창끝이 다시 손권에게 향한 것이다. 이 서신에 대경실색한 중신들은 조조에게 투항하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신하들의 입장에서 보면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적에게 투항하는 것이 본인과 그 가족에게 더 안전한 법이다. 그러면 대개는 본인과 가족의 성명을 보존하고 본인은 자리를 그대로 지킬 수가 있으니까. 하지만 주군(主君)은 갈 곳이 없게 된다. 노숙은 바로 이 점을 들어 손권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이제 상황은 유비를 돕느냐 안 돕느냐의 문제에서, 조조에게 투항하느냐 대결하느냐의 문제로 옮겨졌고, 손권은 최종적으로 유비와 연합하여 조조와 싸우기로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오늘날의 호북, 호남성에 해당하는 형주와 사천성에 해당하는 익주(益州)는 당시 13개 주 중에서 가장 큰 주였으며, 천하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꼭 손에 넣어야 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한고조 유방도 익주를 발판으로 하여 일어나지 않았던가.
하여, 일찍이 유비가 제갈량을 맞으려고 삼고초려했을 때 제갈량은 유비에게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정족(鼎足)의 형세를 만들자는 계책을 올렸다. 정족이란 솥의 발을 말한다. 솥은 발이 세 개인데, 이는 물건을 안정되게 세울 수 있는 최소한의 숫자이다.
당시 제갈량의 천하 삼분 계책의 주체는 북방의 조조, 강동의 손권, 그리고 유비였다. 물론 유비가 형주와 익주를 차지한다는 전제하에서였다. 이것을 융중대(隆中對), 즉 융중의 대책이라고 한다.
그런데 융중대가 나오기 7년 전, 동오의 노숙이 이미 천하 삼분의 계책을 수립하여 손권에게 권한 적이 있었다. 노숙의 천하 삼분 계책의 주체는 북방의 조조, 동오의 손권, 그리고 형주의 유표였다. 때가 되면 먼저 형주를 손에 넣고, 이어 익주를 차지한 다음 북방의 조조와 대치하다가 북벌을 하여 천하를 통일한다는 원대한 계책이었다.
그 당시 손권의 나이 18세였고, 형 손책이 죽고 막 대권을 이은 상황이라서 추진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지금 조조가 손을 써 형주를 먼저 취했다는 사실은 손권과 노숙에게 큰 충격과 위협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두 개 이상의 물체가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지점을 점유하는 것을 이르러 충돌(衝突)이라고 하는데, 적벽대전은 이처럼 조조, 손권, 유비의 야심이 충돌한 일대 사건이었다.
조조와 싸우기로 결정을 했지만 아직 군사력에서 확신을 가질 수가 없어 여전히 주저하고 있는 손권에게 확신을 준 것은 주전파의 수장 격인 주유였다. 주유는 네 가지 이유를 들어 동오가 반드시 승리하고 조조는 반드시 패한다는 확신을 손권에게 심어 주었다.
本土未安, 後患未除, 貿然南下.
본토미안, 후환미제, 무연남하.
첫째, 조조는 내부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고, 후환이 아직 제거되지 않았는데 경솔하게 남하하여 진공을 했다.
조조는 당시 중국의 북부를 막 장악한 상황이긴 했지만 아직 내부가 안정되지 않았고, 서쪽으로는 마등(馬騰), 마초(馬超), 한수(韓遂), 장로(張魯) 등의 군벌이 여전히 활약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조가 손권을 치기 위해 남하한 것은 참으로 경솔한 행위였다.
放棄鞍馬, 使用艦船, 舍長就短.
방기안마, 사용함선, 사장취단.
둘째, 말을 버리고 배를 사용하자는 것은 장점을 버리고 단점을 취하는 일이다.
남선북마(南船北馬)라는 말이 있다. 물길이 많은 남쪽의 주요 교통수단은 배고, 산야가 많은 북쪽의 주요 교통수단은 말이라는 뜻이다. 자연히 북방에는 보병과 기병이 우세하고 남방에는 수군이 우세하다. 수전 경험이 없는 조조의 군사들이 물귀신인 남방의 수군을 어떻게 당하겠는가? 이것이 바로 주유가 주전론을 펼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天寒地凍, 馬無草料, 給養不足.
천한지동, 마무초요, 급양부족.
셋째, 날씨는 춥고 땅은 얼어붙어 말을 먹일 양초가 없고, 군량도 부족하다.
적벽대전이 일어난 것은 건안 13년(208)의 한겨울인 12월이다. 조조는 시기를 잘못 선택한 것이다.
勞師遠征, 水土不服, 必生疾病.
노사원정, 수토불복, 필생질병.
넷째, 피로한 군사를 이끌고 원정을 했으며, 풍토가 맞지 않아 반드시 질병에 걸리게 된다.
북쪽의 군벌들을 친 지 얼마 되지 않아 군사들이 지쳐 있었으며, 물과 땅이 낯선 남방의 땅에서 풍토가 맞지 않아 쉽게 질병에 걸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제갈량도 조조가 필패할 수밖에 없는 3가지 이유를 제시했는데 역시 주유의 주장과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勞師遠征(노사원정)
첫째, 피곤한 군사를 이끌고 원정을 했다.
舍長就短(사장취단)
둘째, 장점을 버리고 단점을 취했다.
人心不服(인심불복)
셋째, 민심이 불복한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주유의 주장과 동일하다. 세 번째의 뜻은, 조조가 비록 투항한 형주의 군대를 흡수하긴 했지만 군사들이 조조에게 충성을 다 바쳐 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유는 마지막으로 손권에게 조조의 군사를 비교적 정확하게 계산해 주었다. 당시 조조는 자신의 군사가 80만 대군이라고 주장했지만, 그건 겁을 주기 위한 허풍이었다. 실제로는 북방에서 이끌고 온 군사 15, 16만에, 형주의 유종에게서 흡수한 7, 8만을 합해 약 20만 정도였다.
주유의 주장과 분석을 들은 손권은 승리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공식적으로 조조와의 전쟁을 공포했다. 조조와 결전을 벌이기로 방침이 정해지자, 손권은 주유를 대도독으로 임명하고 3만의 군사를 주어 유비의 수상 부대와 공동 작전을 펴 조조의 군대와 대전하도록 했다. 유비의 군사 1만, 그리고 유기의 군사 1만을 더해도 5만밖에 안 되는 병력이었다. 5만의 병력으로 호왈 80만의 병사와 맞붙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실제는 20여 만이었지만.
한편, 적벽(赤壁)에 포진하고 있던 조조의 군사들은 모두 북방 출신으로 남방의 풍토에 적응하지 못해 병이 든 데다가 대부분 배를 타 본 일이 없어 배멀미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한겨울인 12월의 찬바람은 바다같이 넓은 장강에 드높은 파도를 일게 했으며, 이 파도에 배가 심하게 요동했기 때문이었다.
조조는 이의 해결책으로 배를 모두 쇠고리로 연결한 후,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한덩어리로 만들어 배가 파도에 요동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조조로 하여금 이렇게 배를 묶도록 만든 계책을 연환계(連環計)라고 하는데, 배를 한덩어리로 묶으면 화공에 취약하다는 것을 조조가 모를 리 없었지만, 당시는 서북풍이 부는 계절이었고, 조조는 북쪽에 포진해 있었으므로 화공을 당할 염려는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겨울철 초입에 서북풍이 강하게 이삼 일 분 다음 최소 하루나 이틀 이에 대한 역풍이 불고, 이것이 다시 약해진 다음 이삼 일쯤 있다가 서북풍이 강해진다는 기상관측 통계가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역풍이 바로 삼국연의(三國演義)에서 제갈량이 도술을 부려 일으켰다는 동남풍이다.
당시 장강에서 고기잡이하던 어부들도 다 알았을 법했던 이 기상 현상을 북방 출신인 조조와 그의 군사들이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렇다고 물어보지도 않는 일을 어부들이 스스로 찾아와 알려 줄 리도 만무할 것이고 말이다.
천시불여지리(天時不如地利)라고 하지 않던가? 아무리 때가 좋아도 현지의 지리적 여건을 모르면 당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렇게 보면 총명한 사람도 전혀 생소한 남의 동네에 가면 자칫 바보가 될 수도 있는 법이란 말이 우스갯소리만은 아닌가 보다.
주유와 유비의 연합군은 화공으로 나왔다. 먼저 황개(黃蓋)를 거짓으로 항복하도록 하여 몽충(蒙衝, 폭이 좁고 긴 배로 적선과 충돌하여 침몰시키는 배)과 투함(鬪艦, 전함)을 조조의 선단에 접근시킨 후, 화공을 퍼부었다.
때마침 불어오는 동남풍에 조조의 선단은 불길에 휩싸였고, 적벽 일대는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변하고 말았다. 불에 타 죽고, 불을 피해 강으로 뛰어든 사람은 물에 빠져 죽었다. 조조는 대패하여 자신의 근거지인 허창으로 되돌아갔다.
그동안 힘이 조조로 기울어 있었는데, 적벽의 싸움 이후 힘의 균형이 어느 정도 잡혔다. 후에 유비는 우여곡절 끝에 제갈량의 계책에 따라 형주와 익주를 차지하여 발판을 굳혔고, 손권은 강동을 굳게 지켜 동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이로써 삼국의 정립(鼎立) 형세가 틀을 잡게 된 것이다.
적벽의 싸움이 있은 지 8년 후인 216년에 조조가 위왕(魏王)에 올랐으며, 219년에 유비가 한중왕(漢中王)을 칭했고, 222년에 손권이 오나라를 건국하고 건업(建業)에 도읍을 정했다.
삼국연의(三國演義)에 흥미진진하게 그려진 적벽대전의 이야기들 중, 제갈량이 주유를 자극하기 위해 그의 부인 자매인 이교(二喬)를 판 이야기(▶ 하필성문 참조), 제갈량이 손권의 대신들과 설전을 벌여 대신들을 꼼짝 못 하게 만든 이야기, 방통이 조조로 하여금 배를 묶도록 연환계를 쓴 이야기, 주유가 장간(蔣干)을 이용해 반간계를 쓴 이야기, 주유가 병이 들자 제갈량이 동남풍이라는 약을 처방하여 낫게 한 이야기, 주유가 제갈량을 곤경에 몰아넣기 위해 열흘 안에 화살 10만 개를 만들라고 하자 안개가 가득한 밤에 제갈량이 배를 띄워 적군의 화살 10만 개를 벌어 온 이야기, 그리고 적벽대전의 하이라이트인 제갈량이 도술을 부려 동남풍을 일으킨 이야기, 그리고 대단원에 해당하는, 싸움에 패한 조조가 본국으로 도주하며 화용도를 통과하다가 매복하고 있던 관우를 만나 목숨을 구걸한 이야기 등등은 정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거나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던 일들로, 삼국연의를 통해 마치 역사적 사실인 양 우리에게 알려진 내용들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제갈량을 적벽대전의 기획과 연출, 주연까지 맡은 지모와 책략을 겸비한 불세출의 군사(軍師)로 그렸지만, 실제 적벽대전의 주인공은 주유와 조조이다. 제갈량은 당시 막 출사(出仕)한 27세의 백면서생으로, 단지 손권과 유비의 동맹 과정에서 일정 역할만 했을 뿐이다. 당시 손권과 제갈량은 27세, 주유는 34세, 노숙은 37세, 유비는 47세, 그리고 조조는 54세였다.
▶ 赤(적)은 회의문자로 큰 불(火)이 나서 땅(土)이 붉게 보인다는 뜻이 합(合)하여 붉다를 뜻한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붉을 단(丹), 붉을 홍(紅)이다. 용례로는 붉은 빛을 적색(赤色), 붉게 됨을 적화(赤化), 매우 극심한 흉년을 적흉(赤凶), 붉은 토양을 적양(赤壤), 붉은 털을 적모(赤毛), 플랑크톤이 번식(繁殖)하여 바닷물이 붉게 되는 현상을 적조(赤潮), 붉은 눈썹을 적미(赤眉), 환히 밝은 낮을 적일백천(赤日百千), 붉은 입과 독한 혀라는 적구독설(赤口毒舌),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발가벗은 상태라는 적나라(赤裸裸), 몹시 구차한 데다 의지할 데조차 없음을 적빈무의(赤貧無依), 가난하기가 마치 물로 씻은 듯하여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음 적빈여세(赤貧如洗), 맨손과 맨주먹을 적수공권(赤手空拳), 맨손과 홀몸을 적수단신(赤手單身), 아무 것도 없는 가난한 사람이 맨손으로 가산을 이룸을 적수성가(赤手成家), 성심으로써 나라에 충성을 다함을 적심보국(赤心報國), 갓난아이와 같은 마음이라는 적자지심(赤子之心) 등에 쓰인다.
▶ 壁(벽)은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흙토(土; 흙)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에 막다의 뜻을 나타내는 글자 辟(벽)으로 이루어졌다. 흙을 쌓아 올려 안과 밖을 구별하여 막다, 전(轉)하여 집의 벽을 가리킨다. 용례로는 여러 사람에게 알리는 기사를 적어 벽이나 게시판에 붙이는 종이를 벽보(壁報), 벽에 색칠을 하는 일을 벽채(壁彩), 벽에 바르는 흙을 벽토(壁土), 방안의 벽에다 아궁이를 내고 굴뚝에 벽 속으로 통하게 한 난로를 벽로(壁爐), 벽에 쓰거나 써 붙이는 글을 벽서(壁書), 바람벽을 뚫어 작은 문을 내고 그 안에 물건을 넣게 된 곳을 벽장(壁欌), 건물이나 무덤 따위의 벽에 그린 그림을 벽화(壁畫), 벽에 바르는 종이를 벽지(壁紙), 벽면과 천장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 무덤을 벽화고분(壁畵古墳) 등에 쓰인다.
▶ 大(대)는 상형문자로 亣(대)는 동자(同字)이다. 大(대)는 서 있는 사람을 정면으로 본 모양으로, 처음에는 옆에서 본 모양인 人(인)과 匕(비) 따위와 같이, 다만 인간을 나타내는 글자였으나 나중에 구분하여 훌륭한 사람, 훌륭하다, 크다의 뜻으로 쓰였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클 위(偉), 클 굉(宏), 클 거(巨),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작을 소(小), 가늘 세(細)이다. 용례로는 크게 어지러움을 대란(大亂), 큰 일을 대사(大事), 크게 구분함을 대구분(大區分), 일이 진행되는 결정적인 형세를 대세(大勢), 크게 길함을 대길(大吉), 조금 차이는 있을지라도 대체로 같음을 대동(大同), 같은 종류의 사물 중에서 큰 규격이나 규모를 대형(大型),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대기만성(大器晩成), 거의 같고 조금 다르다는 대동소이(大同小異), 바라던 것이 아주 허사가 되어 크게 실망함을 대실소망(大失所望), 큰 글자로 뚜렷이 드러나게 쓰다라는 대자특서(大字特書), 매우 밝은 세상이라는 대명천지(大明天地),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큰 도리나 정도에는 거칠 것이 없다는 대도무문(大道無門) 등에 쓰인다.
▶ 戰(전)은 형성문자로 戦(전)의 본자(本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창과(戈; 창, 무기)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單(단; 식구들을 위해 밭에서 홀로 열심히 일함, 전)이 합(合)하여 전쟁(戰爭)을 뜻한다. 戰(전)은 어떤 명사 다음에 붙어 전투의 뜻을 나타내는 말, 또는 어떤 명사 뒤에 붙어 시합 또는 경쟁의 뜻을 나타내는 말이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싸울 투(鬪),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화할 화(和)이다. 용례로는 전쟁으로 말미암은 난리를 전란(戰亂), 전투에서 적군으로부터 노획한 물품을 전리품(戰利品), 전쟁이 되어 가는 형편을 전세(戰勢), 싸움에서 이김을 전승(戰勝), 같은 전장에서 함께 전투에 종사한 동료를 전우(戰友), 전쟁(戰爭)이 벌어진 때를 전시(戰時), 싸우기는 쉬워도 지키기는 어려렵다는 전이수난(戰易守難), 어떤 위기감에 떠는 심정을 비유하는 전전긍긍(戰戰兢兢)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