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12
2월25일[연중 제7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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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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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_6b4CL5Jduk (양우철 예수의 야고보 신부님 집전)
※사순시기 '단식재'과 '금육재'에 대한 이해 (강론글 맨 마지막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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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 계급과 신분 사이의 벽을 완전히 허무시는 예수님>
언젠가 지방 출장 강의를 갔다가, 동네 사우나를 갔었는데, 카운터에 앉아 계시는 자매님께서 제게 물었습니다. “협회 회원입니까?” “협회요? 저는 그런 사람 아닌데요.” “아, 네 잘 알겠습니다. 6천 원이고, 저리로 들어가세요.”
목욕탕 안으로 들어갔는데, 저는 화들짝 놀랐습니다. 협회라는 게 아마도 조직원들의 협회였던가 봅니다. 여기저기 등을 밀고 있는 사람들의 넓은 등짝에는 멋진 용 문신, 호랑이 문신이 가득 새겨져 있었습니다. 너무나 부담스러웠던 저는 대충대충 샤워만 하고 초스피드로 빠져나왔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레위를 당신 제자로 부르시는데, 예수님 시대 세리들은 오늘날 ‘그들’과 비슷했습니다. 각종 이권에 개입하고, 자릿세 받고, 고리대금업에 손도 대고, 과도한 이자 부과로 사람들 괴롭히고...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레위는 말단 세리가 아니라 중간 보스 정도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큰 형님’에게 거금을 상납해서 일정 담당 구역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그 담당구역을 돌며 마음껏 부를 축척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세리들의 악명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백성들을 그들을 두고 공공연하게 ‘도둑’이라고 칭했습니다. 상종하지 말아야 할 인간으로 첫손가락을 꼽았습니다. 얼마나 사람들을 들들 볶아대던지 ‘세리가 다가오면 집들이 공포에 떤다’는 말까지 돌았습니다.
더구나 유다 민족들은 징수된 세금이 식민지 지배자 로마로 흘러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세리들을 매국노, 배신자, 배교자로 칭했으며 재판에 증인으로 서는 것조차 금했습니다.
이런 세리의 두목인 레위였는데, 예수님께서는 레위를 당신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이 모습을 본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그야말로 ‘깜놀’이었습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어떻게 저 사람을 제자로 삼을 수가, 하며 혀를 내둘렀습니다.
참으로 파격적인 예수님,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예수님의 인선이었습니다. 갈 때 까지 간 세리, 공공연한 도둑, 매국노 레위에게 당신 구원 사업의 한 축을 담당하도록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참으로 큰 위안을 받습니다.
더 놀랄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세리라는 직업을 떠나 예수님의 제자가 된 레위를 위한 송별식이 벌어졌습니다. 그야말로 조폭들의 파티였습니다. 그 잔치에는 당대 내놓으라는 지하 세계 인생들은 다 모였습니다.
참으로 부담스런 자리, 너무나 껄끄러운 자리가 분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태연히 그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으십니다. 완벽하게 그들과 동화되십니다. 한 가족이 되시고, ‘절친’이 되십니다.
예수님의 말구유 탄생 때 보여주신 그 지극한 겸손이 예수님 생애 내내 계속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는 광경입니다.
계급과 신분 사이의 벽을 완전히 허무시는 예수님, 격식 따위는 안중에도 없으신 예수님, 우리의 죄와 허물보다는 미래와 가능성에 더 초점을 맞추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너무나 멋져 보이는 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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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참된 성덕은 자신의 죄와 나약함, 부족함과 비참함을 솔직히 인정하는데서 시작됩니다!>
당대 죄인 중의 대죄인, 인간 말종, 매국노로 공공연하게 손가락질 받던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시는 예수님의 선택이 참으로 감동적이며, 큰 위안으로 다가옵니다.
당시 직업상 세리는 돈과 더불어, 돈에 파묻혀 살아가고 있었기에, 당연히 영적 감각이나 윤리도덕적 삶과는 동떨어져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검은 돈 연결 고리의 하부 조직원으로서, 윗선에 상납을 하기 위한 부정과 속임수는 기본이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환전 등의 직무상, 이방인들과 자주 접촉하였기에 반종교적이고 이교적인 오염에도 크게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세리 레위를 제자로 선택하시고 그와 한 식탁에 앉으셨으니, 고고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심기가 크게 불편해졌던 것입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루카 5장 30절)
예수님 눈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참으로 가관이고 웃기는 존재들이었습니다. ‘바리사이’란 용어 자체부터 ‘분리된 자’입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세리나 창녀 같은 죄인들과는 완전 분리된 거룩한 존재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정녕 메시아요 큰 스승이시라면 세리 레위가 아니라, 깨끗하고 경건한 자신들을 선택해야 마땅한데, 그러지 않은 것 역시 크게 못마땅했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틈만 나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과 크게 대립하시며 질책하시는 이유는, 그들이 추구했던 바가 거짓된 성덕, 거짓된 거룩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전과 율법 안에서의 거룩함과 안락함만 추구했지, 교회 담 너머 사람들의 애환과 눈물, 고통과 상처에 대해서는 철저히 외면했습니다. 스스로를 거짓 거룩함 안에 가두고 만 것입니다.
그들의 치명적인 실수는 ‘자아 독선’에 빠진 것입니다. 자기들만 거룩한 존재로 여기고, 다른 사람들은 불경하고 불의한 자로 경멸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이미 완전하고 거룩한 존재들로 여겼기에, 회개나 성령, 하느님의 도움도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내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내려오신 메시아 예수님으로부터도 별로 배울 것이 없다고 여기며 배척했습니다.
참된 성덕은 자신의 죄와 나약함, 부족함과 비참함을 솔직히 인정하는데서 시작됩니다. 주님 도움에 힘입어 거기서 벗어나고자 노력하는 겸손함에서 출발합니다. 내 힘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위로부터의 도움을 갈구합니다.
영성생활 안에서 스스로 죄인임을 솔직히 인정하는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자신의 죄에 대한 인정과 부끄러움이 없으면 용서에 대한 감사함도 없습니다. 무거운 쇠사슬에 묶여 있어 본 사람만이 자유로움의 진가를 맛볼 수 있습니다.
깊은 지하 감옥의 어둠 속에 머물러 있어 본 사람만이 빛과 광명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수도자로서 생활, 참으로 멋지고 아름다운 생활입니다. 그러나 그 길을 걷는다고 해서 누구나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길을 가면서도 스스로를 높이거나 자만한다면 절대 성덕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제직, 참으로 존귀하고 위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대단하고 엄청나다고 믿는 사제가 있다면, 사실 그는 주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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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VzXAy6t1S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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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한 사람 주위엔 잔치가 벌어진다>
영화 ‘패터슨’(2016)은 미국 뉴저지의 패터슨 시에 사는 패터슨이라는 이름의 버스 운전수의 일주일 간의 일상을 그린 영화입니다. 패터슨은 버스 운전을 하며 일상의 작은 것들로 자기만의 비밀 노트에 시를 쓰는 취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일어나서 시리얼로 아침을 대신하고 출근합니다. 버스에서 수다를 떠는 사람들의 말들과 일상의 작은 변화들로 미소를 짓습니다. 돌아와서는 강아지와 산책하고 긴장을 풀기 위해 바에서 한 잔 마시기도 합니다. 이때 패터슨은 바 주인이 물어보는 말에 대답도 하고 실연 당한 남자와 옆자리에서 술을 마셔주기도 합니다. 아내가 비싼 기타를 사겠다고 하는 것도 잘 참아냅니다. 그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살지만 슬프지 않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내가 패터슨이 쓴 시를 출판해보자가 제안합니다. 선뜻 내키지 않았지만 그러자고 합니다. 둘이 함께 영화를 보고 돌아왔을 때 그들은 강아지에 의해 시가 담긴 노트가 산산조각 난 것을 발견합니다. 패터슨은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강아지가 밉습니다. 실연남을 길거리에서 다시 만났는데 위로해 줄 힘이 없습니다. 강아지 없이 산책하다가 벤치에 앉아 혼자 신세 한탄을 합니다. 이때 어떤 동양인이 와서 노트 한 권을 줍니다. 새로운 노트에 시를 써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상이 다시 시작됩니다.
패터슨에게 시를 쓰는 노트는 모든 일상을 감사로운 것으로 만드는 힘이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 이것 저것을 말씀드리면 모든 것이 감사한 일이 됩니다. 그러면 일상에서도 주위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자신도 행복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으로 돈을 벌려고 해서는 안 되듯이 패터슨은 시를 쓰는 것을 돈벌이로 여기려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일상을 감사가 아닌 돈을 버는 목적이 되게 합니다. 시선이 바뀌고 모든 것이 불만스럽게 여겨집니다. 그러니 주위 사람들도 위로할 수 없고 짜증만 납니다. 다시 자기만의 시를 쓸 수 있는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 이것을 회개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레위라는 세리는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라는 소리를 듣고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릅니다. 레위는 이것이 고마워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풉니다. 그러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그 잔치에 참석하였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이것에 분개합니다. 그리고 따집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죄를 짓지 않으려 갖은 노력을 하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레위와 같은 세리와 죄인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죄를 용서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 고마워 잔치를 베풉니다. 내어 놓을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 내어 놓을 줄 알게 되었기 때문에 덕분에 다른 이들도 그 잔치에 참여합니다.
한 죄인이 회개하면 이렇듯 가진 것을 내어 놓기 때문에 잔치가 벌어집니다. 회개한 죄인 주위에는 그래서 즐거움이 넘치고 하느님 나라가 형성됩니다. 회개는 다시 일상의 고마움을 찾게 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구원자로서 모든 일이 감사한 것이 되게 하십니다. 그럼으로써 회개한 사람은 자신도 행복하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잔치가 됩니다.
큰 가시 물고기의 사랑은 익히 잘 알려져 있습니다. 아빠 물고기가 새끼들이 부화할 때까지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지키고 산소를 공급하다가 결국엔 그 자리에서 죽습니다. 알에서 부화한 새끼들은 아빠의 살로 잔치를 벌입니다. 회개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빠, 엄마들은 자신들이 아빠 엄마가 되면서 자신들의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받은 사랑에 감사하여 자신들도 자녀들에게 그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합니다. 자녀들은 아버지, 어머니의 살과 피를 통해 잔치를 벌입니다. 즐겁게 웃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즐거우라고 그리스도께서도 회개하시어 당신 살과 피를 내어 놓으십니다. 당신 뜻이 아니라 아버지 뜻에 따라 죽으시는 것입니다. 이 잔치가 말씀과 성체의 미사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렇게 회개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우리 주위에는 잔치가 벌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 주위 사람들이 잔치를 벌이고 있다면 나는 회개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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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1)
동창 신부님들 중에 ‘도시빈민사목’을 하는 신부님들이 있습니다. 5년도 힘든데 어느덧 10년을 넘기고 20년째 하는 신부님들입니다. 봉천동, 삼양동, 금호동, 장위동에 건물을 얻어서 지내고 있습니다. 건물은 사제관이며, 미사를 봉헌하는 성당이며, 친교를 나누는 사랑방이며, 업무를 보는 사무실입니다. 주방을 맡아 주는 직원도 없고, 사무실을 맡아 보는 직원도 없습니다. 모든 업무는 신부님이 도맡아 합니다. 신부님들은 용산참사의 현장에서 거리미사를 집전하였고, 세월호 참사의 현장에서도 거리미사를 함께 하였습니다. 이태원 참사의 현장에서도 미사를 함께 하였습니다. 가을의 낙엽이 낮은 곳으로 떨어지듯이 신부님들은 그렇게 힘들고, 외로운 곳으로 가까이 갔습니다. 교도소에서 출소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동창 신부님도 있었습니다. 출소자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대출해주는 은행도 만들었습니다. 남들은 모두 꽃길을 원하는데 굳이 가시밭길을 찾아다니는 동창 신부님들입니다. 동창 신부님들이 있어서 자랑스러우면서도 낮은 곳을 찾아가지 못하는 저 자신이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중남미 과테말라에서 10년째 선교사로 사목하는 후배 신부님이 있습니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현지인들과 가족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저는 성소국장으로 있을 때 신부님이 사목하는 성당을 방문했습니다. 신부님은 신학생들이 현장체험을 할 수 있도록 기꺼이 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신학생들은 과테말라 현지에서 지내면서 신부님의 사목활동을 보았습니다. 앞으로 사제가 되면 선교사가 되겠다는 신학생도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편하게 지낼 수도 있지만 굳이 먼 타국에서 선교사로 지내는 후배 신부님을 보면 자랑스럽습니다. 기름진 밭에서 100배의 열매를 거두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가시밭길에서도, 돌밭에서도 땀 흘려 10배의 열매를 맺는 것은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입니다. 아이티에서 10년 넘게 선교사로 지내는 신부님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신부님께서 보내 주는 글을 읽으면 하루하루가 북새통입니다. 납치의 위험도 겪어야 했고, 총을 든 강도도 만났었고, 온 몸이 썩어가는 환자를 돌보아야 했습니다. 그렇게 10년을 지내고 있는 신부님이 진정한 사목자라는 생각입니다.
소록도에서 50년을 수도자로 지내던 수녀님들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평생 한센인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수녀님들은 이제 나이가 많아서 더 이상 봉사하기 힘들어졌습니다. 어느 날 편지 한 장 남기고 수녀님들의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선우경식 선생님은 요셉의원을 설립하셔서 평생 가난한 이들에게 인술을 베풀었습니다. 저의 부친께서도 선생님들 도와서 요셉의원에서 3년간 봉사하였습니다. 전국을 다니면서 한센인들의 ‘틀니’를 만들어 주신 강대건 선생님도 있습니다. 그동안 진료한 한센인들이 만 오천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소년, 소녀 가장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독고 노인들에게 명절 때면 떡을 드리던 형제님도 있었습니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도 모르게 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신 형제님입니다. 저는 그 선행을 면장님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밤하늘은 별들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낮은 곳으로 임하는 사목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선행의 빛을 비추는 신앙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교회가 2000년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훌륭한 제도와 화려한 성당이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낮은 곳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의로운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교회가 2000년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가난하고 병든 이들의 벗이 되어주었던 사목자와 신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023년 사순시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어두운 밤을 비추는 밝은 빛이 되면 좋겠습니다. 나의 말과 행동을 보면서 사람들이 나도 종교를 가지면 천주교를 선택하겠다는 말을 들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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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어 시간에 ‘가정법’을 배웠습니다. 가정법은 동기를 부여하고, 조건이 채워지면 보상이 주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우리는 가정법을 볼 수 있습니다.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본당 사목에서도 가정법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성경 필사를 하면 선물을 주기도 합니다. 예비자 교리에 개근을 하면 선물을 주기도 합니다. 복사들이 새벽 미사에 빠지지 않고 오면 스키장에 데려가기도 합니다. 선교를 많이 한 분에게도 선물을 주기도 합니다. 저도 경험이 있습니다.
중학교 때입니다. 반에서 10등 안에 들면 자전거를 사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정말 힘든 일이지만 기적처럼 10등 안에 들었고, 기분 좋게 자전거를 탈 수 있었습니다. 세상은 동기를 부여하고, 보상을 주는 방법을 많이 사용합니다.
실적이 오르면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 줍니다. 성과급을 주기도 하고, 승진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방법은 때로 부작용이 따르기도 합니다. 실적과 그에 따른 보상에 눈이 멀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결여되고, 정의를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인격과 가치를 보지 않고 실적이라는 숫자에 매달리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고, 실적순이 아닌데 우리는 마치 성적과 실적이 행복의 기준인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지구의 허파인 아마존의 숲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바다에 거대한 쓰레기 섬이 떠다니고 있습니다. 미세 먼지가 우리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살아가야하는 많은 생명이 터전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복음의 기쁨, 찬미 받으소서. 모든 형제들’이라는 문헌을 통해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연대와 협력, 공존과 화합의 삶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Even though, even if'라는 표현입니다. 동기에 대한 조건이 채워지지 않았어도 변함없이 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반했음에도 평화를 빌어 주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일곱 번 뿐만이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주겠다고 했던 자캐오를 칭찬하셨고, 자캐오의 가정이 구원받았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강도당한 이웃을 치료해주고, 여관으로 데리고 갔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가장 첫째가는 계명을 지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사건도, 하느님의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죽어야 했던 사건도 아무런 조건 없는 사랑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실적과 보상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은 조건 없는 나눔과 사랑입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하는 예수님이 못 마땅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것처럼 일등만 기억하는 세상을 원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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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5,27-32: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
예수께서는 레위라는 세리를 부르신다. 그는 돈 욕심이 사납고, 소유욕으로 가득 차, 자기 것이 아니라도 그것을 소유할 욕심에 정의 따위는 관심도 없는 자였다. 세리는 본디 그런 사람들이었다. 돈 외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던 그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구원을 받았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를 따라라.”(27절) 하셨기 때문이다.
이제 레위는 예수님을 마음으로 따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한때 어부들이 위험한 일터에서 땀 흘려 번 것을 강제로 빼앗던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남의 재산을 착취하던 직업을 버렸다. 수치스러운 자리를 떠나 마음을 다하여 주님이 가시는 길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그러고는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누구든지 주님을 자기 안의 집에 맞아들이는 사람은 가장 맛난 음식인 가장 큰 기쁨을 맛보게 되어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주님을 바리사이들이 비난하고 있다. 그들은 주님께서 죄인들과 어울림으로 율법을 어긴다고 비난했지만,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는 것에 대해 시샘하고 꼬투리를 잡으려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이 재판관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의사로 오셨음을 보여주신다. 그분은 치료받아야 할 사람들 가운데 계시면서 의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신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32절) 그분은 하느님의 의로움을 따르지 않고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려고 하는 자들(로마 10,3 참조)을 부르지 않으셨다는 말이다. 그분은 자신의 나약함을 알고 자기가 많은 잘못을 저질렀음을 고백하는(야고 3,2 참조) 사람들을 부르신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말은 그들 바리사이들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이다. 그분은 교만한 자들이 아니라 겸손한 자들을 부르신다. 그들은 끝까지 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께서 함께 해 주시지 않을 때 사람들은 굶주리며, 맛난 음식을 배불리 먹지 못한다. 참으로 자신의 덕행으로 즐거움을 맛볼 사람, 그리스도를 자기 집안에 모셔 들인 사람은 큰 잔치를 마련한다. 그 잔치는 선행들로 차린 영적인 잔치로, 교만한 사람들은 맨입으로 돌아가고 가난하고 겸손한 이들은 배부르게 먹는 그런 잔치이다. 레위는 잔치를 통해 자신의 기쁨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죄인들이 용서받을 희망을 품게 하시고자, 세리의 일을 하던 레위를 선택하시어 얼마나 의롭게 피어나도록 하셨는지를 생각하면, 나도 모르는 기쁨을 느낄 수 있다. 그가 일원이 된 사도단은 그가 어떤 사람으로 바뀌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은 인간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려고 오신 분이시다. 마땅히 우리의 마음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어, 그들을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함을 오늘 복음은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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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은 레위(마태오)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교황으로 선출되시고 나서 하신 어느 인터뷰에서 오늘 복음과 관련된 당신의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로마의 주교가 되기 전) 로마에 올 때마다 저는 스크로파(로마의 길 이름)에 머물렀습니다. 거기서 자주 성 루도비코(San Luigi dei Francesi) 성당을 방문하였습니다. 거기에 가면 늘 카라바조(Caravaggio)의 작품(‘성 마태오의 소명’[The Calling of St. Matthew])을 바라보며 묵상하였습니다. 그 그림에서 예수님의 손가락은 마태오를 가리킵니다. 그것은(세리 마태오가) 바로 저였습니다. 저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저는 마태오와 같습니다. 그림 한가운데 탁자 위에 놓인 돈을 움켜쥐고 있는 마태오의 손이 제 마음을 때렸습니다. 그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아닙니다. 이 돈은 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접니다. ‘저는 주님께서 당신의 (사랑의) 눈길로 돌아보신 죄인입니다’”(안토니오 스파다로, ‘프란치스코 교황과 인터뷰’, 2013년 8월 19일). 이 그림은 매우 유명한 작품으로 많은 사람이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한번 이 작품을 찾아 감상해 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를 만나러 오십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눈길을 느낄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활짝 열어 봅시다. 그분과의 만남을 가로막는 움켜쥔 손, 탁자 위의 동전들, 탁자에 돈을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과 앉아 있는 자세에서 오는 안락함,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비추는 환한 빛, 그리고 빛과 함께 나에게 오시는 예수님의 눈과 나를 가리키는 그분의 손, 그리고 그분께서 나에게 건네시는 말씀, “나를 따라라.”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순 시기 여정이 되었으면 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그분을 새롭게 만날 수 있도록 손을 펴고 바라보며 일어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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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복음 5장 27절-32절)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리인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과 레위의 집에서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루카 복음 5장 27절)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발의 움직임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발걸음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곧 앵무새처럼 입으로만 혹은 다람쥐처럼 몸짓으로만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삶의 자세와 태도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화답송>에서 말해주듯이, ‘진리 안에서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세상을 바라보는 눈, 가치관, 방식에 있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어떤 사람이냐를 보기에 앞서, 바로 그러한 그를 사랑하는 눈입니다. 사실,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상징입니다.
그것은 서로 기쁨과 사랑을 나누는 행위요, 한 가족임을 나타내는 행위입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보내는 신의요, 자비요, 호의입니다. 그들을 단죄한 것이 아니라 용서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속으로 들어와 그들을 당신의 가족으로 삼으십니다. 자신의 몸에 죄를 묻힘으로 죄인들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그것은 죄인을 ‘먼저’ 용서하십니다. 죄인들의 회개를 앞세우기보다, ‘먼저’ 자비를 베푸십니다. 흔히, 우리는 죄지은 이에게 ‘먼저’ 회개하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함께 식사를 하시며, 당신과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십니다.
‘먼저’ 죄인을 찾아오시고, ‘먼저’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보다 ‘먼저’ 죽으시고, 우리보다 ‘먼저’ 당신을 건네주시고 자비를 베푸십니다.
오늘 우리 주님께서는 오늘도 그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루카 복음 5장 27절).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복음 5장 32절)
이는 우리가 죄인인 까닭에 부르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죄를 짓지 않은 의인들인 것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야 하는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지 죄인인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받은 죄인인 까닭에, 용서해야 하는 일을 소명으로 받은 죄인들입니다.
곧 이미 사랑과 자비를 입었기에, 또한 그렇게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소명으로 받은 이들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를 따라라.”(루카 복음 5장 27절) 하심은 우리 역시 죄지은 형제에게 ‘먼저’ 다가가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자비를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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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루카 복음 5장 32절)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당신은 죄인인 까닭에 저를 부르셨습니다.
찾기도 전에 먼저 부르시고,
청하기도 전에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용서받았으니 용서하게 하소서.
먼저 찾아가고 먼저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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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는 예수님의 모습에 불편한 감정을 드러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투덜거리며 의문을 제기합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죄인의 회개가 바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의인이고 누가 죄인일까요?
에제키엘 예언서를 참고하면 구약에서 ‘의로운 인물’로 언급되는 이는 노아와 다니엘과 욥 세 명뿐이었습니다.(에제키엘 예언서 14장 14절.20절 참조) 구약 성경 전체에서 의인으로 칭송받은 인물이 이 세 명뿐이라면, 예수님 시대에도 의인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에서 죄인으로 주로 언급되는 세리와 창녀와 병자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의인이 아닌 죄인의 범주에 들어감을 알 수 있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을 세리, 죄인들과 철저하게 구별합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의인이며, 세리 같은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강한 자의식과 확신은 그들을 오만함으로 이끌어 예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불평과 불만을 일으키고, 결국에는 예수님을 죽음에 이르게 만듭니다. 그들이 오히려 죄인이 됩니다.
내가 누구보다 낫다는 교만한 판단으로 타인과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타인과 비교해서 좀 더 의로워 보이면 기분이야 좋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구원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구원의 보장은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몸과 마음을 돌리는 회개에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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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를 따르렴>
루카 5,27-32 (레위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함께 식탁에 앉았다.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투덜거렸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나를 따르렴>
난 그래
그래, 넌 그래
아니야,
그렇지 않단다
난 어쩔 수 없어
그래, 넌 어쩔 수 없어
아니야,
그렇지 않단다
난 할 수 없어
그래, 넌 할 수 없어
아니야,
그렇지 않단다
나에게 바라지 않아
그래, 너에게 바라지 않아
아니야,
그렇지 않단다
그런 것이 아니란다
내가 나에게
모두가 나에게
늘 그렇듯
그저 그렇게
실망하고 포기하고
그냥 내버려두는 그 때에
그분은
홀로라도
결코 실망하지 않고
새롭게 일어나라 말씀하시지
그분은
홀로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힘차게 나아가라 말씀하시지
그분은
홀로라도
결코 내버려두지 않고
참으로 살아라 말씀하시지
나를 따르렴
나를 따르고자 하잖니
나를 따르렴
나를 따를 수 있잖니
나를 따르렴
바로 내가 있잖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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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의인을 자처하는 죄인>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라” 하시며 레위라는 세리를 부르셨고, 레위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랐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삶의 자리에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도 온전히 따라야 합니다.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실패인 듯이 보일 수 있으나 믿음은 희망을 이루어 줍니다.
성 안또니오 아빠스는 어느 주일 성당에 들어갔을 때 우연히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르10,21)는 말씀을 듣고, 이 말씀대로 자신의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 준 다음 수도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한마디 말씀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우리도 매일 매일 주어지는 주님의 말씀에 순명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5,3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병자와 죄인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병자를 낫게 해주고 죄인을 구해준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인이 병자라고 알고 있는 환자가 있는가 하면, 병자임을 모르고 있는 병자가 있습니다. 본인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죄인이 있는가 하면,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죄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입는 사람은 자신이 병자요, 죄인임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은 본인이 병자이면서도 병자임을 인식하지 못했고, 죄인이면서도 죄인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결국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하고 말합니다. 자신들이 스스로 건강하며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까지는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무시하지는 않았으면 좋으련만 남을 우습게 여겼습니다. 사실은 그것이 죄입니다. 정작 주님의 도움을 받아야 할 죄인은 주님의 도움을 외면하고 여전히 의인을 자처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무시당하고 비난받으며 살았던 세리나 죄인들은 예수님을 만난 것이 큰 은총입니다. 더군다나 의인으로 자처하며 상종도 하지 않는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라” 하시며 음식을 함께 나눌 수 있게 안배하시니 얼마나 큰 기쁨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병자를, 죄인을 부르십니다. 병자요,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은 그분의 식탁에서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게 될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고서 자기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사람보다는 죄를 지었음을 깨닫고 뉘우친 죄인을 하느님께서는 더 사랑하십니다”(교부 사르마타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느님께 마음을 돌려야 합니다. 회심의 노력이나 기간은 죽는 순간까지 항구해야 합니다.
결코 일회적으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은총의 사순절에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는 마음의 할례를 받고 회개의 눈물로 다시 태어나는 행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부하게 내렸다.” 는 성경 말씀대로 하느님의 자비가 영원에서 영원까지 한결같음을 믿으며 하느님의 자비를 영원토록 노래해야 하겠습니다.(성 베르나르도) 고해소 앞에 길게 늘어서 있는 죄인들이여! 여러분은 죄의 용서에로 초대받았으니 기뻐하십시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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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저는 외국어를 잘 못합니다. 솔직히 언어에 재주가 없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매일 글을 쓰고 있는 것을 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노력 부족이었습니다. 그래도 한국말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더군요.
책을 읽다가 ‘홍소를 터뜨렸다’는 문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홍소’. ‘소’자야 웃음 소(笑)일 것 같은데, ‘홍’자는 한자로 무엇일지가 궁금해졌습니다. 넓을 홍(弘)일까요? 아니면 붉을 홍(紅)일까요? 그래서 사전을 보니 홍소(哄笑)에서 ‘홍’은 ‘떠들썩할 홍’이었습니다. 매우 크게 웃거나 떠들썩하게 웃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언제가 제 형제들과 함께 전주 한옥마을에 간 적이 있습니다. 이때 묵은 한옥팬션 이름이 ‘서로’였습니다. 짝을 이루거나 관계를 맺고 있는 상태인 ‘서로’라고 생각했는데, 한자로 ‘서로(徐路)’라고 쓰며 천천히 걷는 길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외국어를 잘 못해도 우리말은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우리말도 한참 부족했습니다. 이 역시 노력 부족입니다. 지레짐작으로 알 것이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알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문득 주님께 나아가는 길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분명 그 길은 어렵고 힘듭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주님께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그분을 알려고 온 힘을 기울일 때, 그 간격은 좁아질 것입니다. 혹시 그 좁아짐에 기뻐서 주님도 또 자기 자신도 ‘홍소’를 터뜨리지 않을까요?
레위라는 세리를 부르십니다. 당시에 세리의 직분은 ‘매국노’라는 소리를 듣는 큰 죄인이었습니다. 이런 소리를 들으니 세리는 더 돈 욕심을 세웠고, 정의 따위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세리도 부르십니다. 구원은 하느님의 손길에 달려 있는데, 하느님께서는 그 어떤 사람도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고 말씀하시면서, 죄인들 모두가 구원의 길로 이끄는 것이 당신의 사명임을 밝히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또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스스로 판단하고 단죄하면서 하느님의 일에 스스로 개입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가 없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이해되지 않는다며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에 기뻐서 ‘홍소’를 터뜨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살피고, 그 뜻에 맞춰서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모습에 주님께서도 ‘홍소’를 터뜨리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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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꼭 필요한 사람>
어제 저는 악행을 끊고 선행을 하고 욕망을 끊고 사랑을 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이라고 아주 짧은 강론을 한 바 있는데 오늘도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회개가 바로 사랑과 선행이라는 점에 대해서 그리고 단식의 결과는 반드시 사랑과 선행이어야 한다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오늘 독서와 복음이 고생하는 이를 흡족하게 하고, 병든 이들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함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지금 세계적으로는 전쟁과 지진이 발생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이 많고, 멀리 가지 않고 우리 주변만 해도 가난과 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분이 많은데 자기 건강이나 몸매를 위해 우리가 단식한다면 그것은 너무 한가한 짓이고, 주님을 위해 단식한다 해도 그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행위가 아니지요.
비근한 예로, 지금 형제가 가난하고 병까지 들었는데 그런 형제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부모에게 보약을 지어드린다면 그 돈으로 형제 도우라고 하시지 보약 드실 부모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보약이 필요 없고 우리의 사랑도 필요 없습니다. 보약이 필요하고 우리 사랑이 필요한 것은 가난하고 병든 이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지
하느님께 애정결핍이 있으시거나 그래서 우리 사랑이 필요하기 때문이 아니잖습니까?
하느님은 Self Sufficient God이라는 말이 있지요. 우리의 사랑이 필요할 정도로 부족함이 없으시고, 하느님 삼위 안에서 서로 사랑하시고 자체적으로 흡족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이사야서도 이웃을 흡족하게 하라고 하시고, 그러면 하느님께서 오히려 우리를 흡족하게 하실 거라고 가르칩니다.
“주님께서 늘 너를 이끌어 주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네 넋을 흡족하게 하시며 네 뼈마디를 튼튼하게 하시리라.”
우리는 불만이 많고 우리의 불만을 채워달라고 자주 징징대는 사람입니다. 어떤 때는 사람에게, 어떤 때는 하느님께.
그런데 이런 우리가 어떻게 남을 흡족하게 하냐고 또 징징댈 수 있는데 이런 우리에게 오늘 독서의 하느님과 복음의 주님은 이제 애 짓은 그만두라고, 언제까지 애처럼 젖 달라고 징징댈 것이냐고, 이제는 네 젖을 아기에게 물릴 어른이요, 엄마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너는 건강하다.
너는 사랑할 수 있다.
너는 꼭 필요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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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더불어(Together) 따름의 여정>
-끊임없는 회개-
“주님, 제게 당신의 길을 가르치소서. 제가 당신의 진리 안에서 걸으오리다.”(시편86,11ㄱㄴ)
어제의 감동적이고 인상적인 일화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10월초에 피정왔던 자매가 거의 5개월만에 다시 수도원을 찾았습니다. 그때는 20대 중반의 착한 아들을 잃고 왔는데 이번은 그 사이 60대 초반의 건강하고 착했던 남편을 잃고 답답하고 아픈 마음에 피정차 온 것입니다.
“죄가 너무 크고 잘못이 참 많습니다. 남편은 참 착하고 성실한 분이었고 끝까지 일하며 책임을 다했습니다. 저는 남편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그랬습니다. 이런 저에게 남편은 개의치 않고 충실했습니다. 나를 사랑했는데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동안 냉담했는데 작년 세상 떠나던 즈음 12월에는 열심했고 2개월 동안의 시골 노동현장에서도 매일 미사에 참석했다 합니다. 건강했던 분이 12월 그 추운날 눈이 많이 오던날 야외 화장실에서 변을 보던중 그대로 운명했습니다. 바로 그 전날 친구에게 보낸 카톡 내용입니다.
‘오늘 밤 저녁미사를 봤고 미사후에는 고백성사도 봤다. 너무 기분이 좋다. 밖에는 많은 눈이 내리고 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야외 화장실에서 그 추운날 용변을 보던중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착한 아들에 이어 이렇게 착하고 건강하던 남편을 잃었습니다. 죄가 너무 큽니다.”
즉시 답변을 드렸습니다.
“하루하루 보속하는 마음으로, 회개하는 마음으로 사십시오. 죽는 그날까지, 살아 있는 그날까지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저도 보속하는 마음, 대속하는 마음,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주님을 따라 살아갑니다. 주님은 늘 함께 하시면서 용서해주시고 치유해 주시고 힘을 주십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구원의 길은 이 길 하나뿐입니다.”
자매님은 편안한 마음으로 집무실을 떠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은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을 따르는 따름의 여정입니다. 길잃고 방황하거나 떠도는 삶이 아니라 죽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주님을 따르는 삶이요 여기에 동반하는 끊임없는 회개의 삶입니다. 따름의 여정은 동시에 회개의 여정이 됩니다. 그러면서 주님을 점차 닮아가면서 참내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 부름을 받고 주님을 따라나선 레위가 바로 우리 믿는 이들을 상징합니다. 주님과 세리 레위의 만남이 순전히 은총의 선물입니다. 세리의 주님을 찾는 내적 갈망과 순수를 한눈에 알아채신 주님이심이 분명합니다. 다음 장면이 극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밖에 나가셨다가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짧은 대목이지만 참으로 중요한 상징적인 장면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주님을 따라 나섬으로 이제 길을 찾았고 주님을 따르는 따름의 여정에 오르게 됐다는 것입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평생 살아야 할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의미, 삶의 중심이신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여기서 주석을 잠시 인용합니다.
‘루카는 마르코나 마태오와는 달리 그리스 말의 “따르다”를 단순 과거가 아니라 반과거로 쓴다. 이로써 그는 “따름” 곧 “제자됨”이 점진적이면서 항구적인 일임을 가리킨다. 루카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서는 레위의 행동을 회개의 본보기로 제시한다.’
한두번의 따름이 아니라 날마다 일어나서 다시 새롭게 주님을 따르는 따름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레위를 부르신 다음 당신 제자들 공동체 합류시킨후 함께 식사합니다. 말그대로 회개한 죄인들의 공동체입니다. 이젠 혼자가 아닌 공동체의 회개한 죄인들인 도반들과 더불어(Together) 주님을 따르게 된 레위입니다. 그러니 더불어 따름의 여정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주님 말씀이 복음의 절정이자 요약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과연 여기에 해당되지 않을자 누가 있겠는지요! 우리 모두가 정도의 차이일뿐 모두가 병자요 죄인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치료받아야 할 환자로 여기시고, 당신 자신을 의사에 비유하십니다. 죄인이자 동시에 병자인 우리들입니다. 회개를 통한 치유요, 이것은 평생과정입니다. 그러니 따름의 여정은 회개의 여정임과 동시에 치유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바로 여기서 평생 최고의 명의가 되시는 우리 주님이십니다.
회개할 것 없는 의인이 아니라 끊임없는 회개를 필요로 하는 회개한 죄인들의 교회 공동체에 속한 우리들입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회개해야 부패하지 않습니다. 끊임없는 회개와 더불어 주님을 따를 때 악취나는 부패인생이 아니라 향기로운 발효인생이 됩니다. 인생 부패를 막아주면서 발효 인생으로 만들어 주는 결정적 효소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회개 은총입니다.
이래서 따름의 평생 여정에 끊임없는 회개를 습관화 해주는 평생 성사인 성체성서와 고백성사가 그렇게 고마운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평생 회개의 일상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회개의 시스템 같은, 기도와 노동과 공부가 균형과 조화를 이룬, 중심과 질서가 확실한 하루의 일과표입니다. 이런 구체적 일과표에 따른 삶이 따름의 여정, 회개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끊임없는 쇄신과 내적혁명이 회개입니다. 바로 이런 분투의 노력의 훈련에 충실한 자들이 성인입니다. 제가 옛 한국 위인들의 평전을 읽으며 새삼 감동하는 것도 끊임없는 쇄신의 노력을 다하는 회개의 모습입니다. 이율곡 선생이 그렇고 성군이라 칭하는 세종대왕이 그렇습니다. 평생 휴식이 없는 고군분투의 모습들이요 심신이 소진될때까지 최선을 다하며 책임을 다한 모습들이 정말 감동적입니다.
옛 훌륭한 선비들이나 임금들에 비하면 오늘의 지도자나 고위 정치가들의 수준이 난쟁이 같고 너무 미흡함을 느낍니다. 옛 조선 선비들은 인격적으로나 실력으로도 진짜 엘리트였습니다. 이런 선비사상이나 전통이 사라진 천박한 오늘의 현실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막연한 회개가 아니라 빛나는 실천을 통해 입증되는 회개의 진정성입니다. 바로 이사야서가 어제에 이어 참된 단식의 정신을, 참된 수행, 참된 회개, 참된 종교의 본질을 보여 줍니다. 너무 고무적인 신바람 나는 내용이라 전문을 인용합니다. 끊임없는 회개의 실천과 분발을 촉구하는 명문名文입니다.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 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주님께서 늘 너를 이끌어 주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네 넋을 흡족하게 하시며, 네 뼈마디를 튼튼하게 하시리라.
그러면 너는 물이 풍부한 정원처럼, 물이 끊이지 않는 샘터처럼 되리라.”
참 회개 실천의 은총이 이렇습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끊임없는 개선과 쇄신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너는 오래된 폐허를 재건하고, 대대로 버려졌던 기초를 세워 일으키리라. 너는 갈라진 성벽을 고쳐 쌓는 이, 사람이 살도록 거리를 복구하는 이라 일컬어 지리라.”
참으로 이렇게 참된 회개의 실천을 위해 분투의 노력을 다할 때 우리는 주님 안에서 기쁨을 얻고, 세상 높은 것 위로 달리게 될 것이라니 얼마나 멋진 삶인지요! 최고의 명의이시자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더불어의 따름의 여정, 회개의 여정, 치유의 구원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끝으로 제 좌우명시 한연으로 강론을 끝맺습니다.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강이 상징하는바 한결같은 회개의 여정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緩慢)하게 또 격류(激流)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맑게 흐르는 '하느님 사랑의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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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5,32)
<예수님, 감사!>
오늘 복음(루카5,27-32)은 '예수님께서 레위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레위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드십니다. 이는 당시 율법 규정에 얽매여 있었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볼 때, 참으로 놀랄만한 큰 사건입니다. 그들은 로마의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일을 했던 레위와 세리를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죄인 취급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투덜거리며 말합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루카5,30)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루카5,31-32)
'예수님, 감사!'
이 세상 안에 죄가 없었다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죄 때문에, 우리 안에 죄가 많기 때문에 오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죄인인 나를 위해 오신 것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로부터 철저한 소외를 받았던, 레위와 세리들의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 그들이 체험한 참자유와 해방의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
"나를 따라라."(루카5,27)
예수님께서 죄인을 부르십니다. 죄인인 레위는 그 부르심에 응답합니다.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릅니다.
이것이 나자렛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는 이들의 '신앙생활'이며, '참자유와 해방의 기쁨'이 있는 '부활에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흙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이사58,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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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k6QUtF7Cry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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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 32)
무엇이
사랑인지를
예수님에게서
다시 배웁니다.
죄인을 먼저
선택하시고
죄인을 다시
축복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의인인양
착각하는
우리들을
꾸짖으십니다.
죄인이라는
이 사실을
너무 쉽게
잊어버리고
삽니다.
더는 의인인양
의인의 흉내를
내지 않겠습니다.
죄인에게서
사랑을
찾아내시는
구원의
주님이십니다.
조각난 삶을
맞추어 주십니다.
사람이 사람을
의인으로
만들기도 하고
죄인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여기에 있는
우리모두는
회개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공동체의
특별한 비밀은
우리자신의
참된
회개입니다.
죄인은 죄인으로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죄인인 우리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사람을 만들어
놓으신 하느님의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죄인들의
회개하는
공동체를
이 땅에서
건설하십니다.
회개 속에서
더욱 빛나는
죄인들이
사순의 길을
걸어갑니다.
희망은
부정할 수 없는
치유자이신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병든 삶을
치유시켜 주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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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 32)
주님의 사랑을
결코 우리가
이길 순 없습니다.
죄인을 부르시고
죄인을
기다려주시고
죄인을
항복시키십니다.
회개로 이끄시는
놀라운
사랑입니다.
죄인의 눈물을
닦아주시며 다시
빛을 보게 하십니다.
죄인의 길은
언제나 회개의
길에 있습니다.
회개를 통해
깨어나게 합니다.
믿음을 잃은
우리들에게
믿음을
되찾아주십니다.
진정
사랑한다는 건
서로를 건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삶이란 주님과
함께 만들어가는
여정입니다.
회개는 모두를
살리는
희망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사랑아닌 것이
없음을 보게 됩니다.
사랑 앞에서
우리는
죄인입니다.
사랑 때문에
병든 죄인을
사랑으로 다시
온전하게 하십니다.
사랑을
되찾아주시는
주님을 따릅시다.
무조건 사랑이고
무조건
회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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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식재과 금육재》
1. 사순 시기는 재의 수요일부터 파스카 성삼일(주님 만찬 성목요일~주님 부활 대축일) 전까지이며, 재의 수요일과 성 금요일에는 이를 지켜야 할 신자들은
◇단식재 : 하루 식사 두 끼를 하는데, 한 번은 식사량을 반으로 합니다.
◇금육재 : 육식을 하지 않습니다. 생선 같은 수산물, 계란, 우유는 예외입니다.
1) 단식은 어떻게 지키는 것입니까?
- 단식은 그날 점심만 먹는 것이지만, 간단한 아침/저녁 요기 정도는 해도 됩니다.
2) 금육은 어떻게 지키는 것입니까?
- 금육은 육찬과 육수를 금하는 것인데, 계란과 물고기 종류와 짐승의 기름으로 만든 음식은 먹어도 됩니다.
3) 단식은 누가 지킬 의무가 있습니까?
- 단식은 만 18세부터 60세 까지 건강한 모든 신자들입니다.
4) 금육은 몇 살부터 지킬 본분이 있습니까?
- 금육은 만 14세부터 죽을 때 까지 입니다.
5) 단식이나 금육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경우가 있습니까?
- 단식이나 금육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경우는, 환자들과, 산모들, 여행 중에 있는 이들, 그리고 기숙사 같은 곳에서 단체로 음식을 먹는 이들입니다.
*천주교, 유다교, 이스람교, 정교회 등은 단식과 금육 규정이 있습니다. 사순 시기는 회개와 속죄로써 우리 삶을 쇄신하는 때입니다. 부활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나는 준비를 하게 됩니다.
■금육과 단식은 꼭 지켜야 하는가?
연중 모든 금요일에는 대축일 중의 어느 날과 겹치지 아니하는 한 육식 또는 주교회의의 규정에 따른 다른 음식을 자제하는 금육재가 지켜져야 한다.
재의 수요일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난하시고 죽으신 성금요일에는 금육재와 금식재가 지켜져야 한다(교회법 제1251조).
14세를 만료한 자들은 금육재의 법률을 지켜야 하고 모든 성년자들은 60세의 시초까지 금식재의 법률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영혼의 목자들과 부모들은 미성년자들이기 때문에 금식재와 금육재를 지킬 의무가 없는 이들도 참된 고행의 참 의미를 깨닫도록 보살펴야 한다.(교회법 제1252조)
고해성사를 집전하다 보면은 가끔 이렇게 고백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신부님 소재와 대재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소재는 금육재이고 대재는 금식재 혹은 단식재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금육재와 금식재를 지켜야하고 또 언제가 금육과 단식을 하는 날인가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무슨 이유로,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단식과 금육을 하여야 하는가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금육과 단식을 지켜야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우리를 위하여 수난하시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여 그분의 고통에 동참하는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고통과 수난은 하느님과 이웃 사랑의 결정체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금육재와 금식재를 지키면서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헌신의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의 아픔과 고통에 동참하고, 이들을 돕는 따뜻한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즉, 그리스도 신자들이 어떤 날을 정하여 참회하고 고행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생각하고, 하느님 앞에 자신이 피조물임을 인식하면서 구원에 유익이 되도록 하기 위한 공동 신심의 한 행위입니다. 이러한 참회 고행의 날에는 그리스도 신자들이 특별한 방식으로 기도에 전념하고 신심행위와 애덕을 실천합니다. 또한 자신이 맡은 고유한 임무를 충실히 완수하며 교회법에 정해진 단식재와 금육재를 지키면서 극기하게 됩니다.
따라서 금요일에 고기를 먹으면 죄를 짓는 것이고 고해성사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단식과 금육을 명하는 것은 육신적 희생과 절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류 구원을 위한 수난에 동참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올바른 마음가짐을 갖고 나눔과 희생 정신 그리고 절약과 극기하는 마음을 위해서입니다.
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 제136조에 의하면 금식재와 금육재는 “모든 신자는 인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고 자신과 이웃들의 각종 죄악을 보속하는 정신으로 금식재와 금육재를 지켜야 한다.
매주 금요일에는 금육재를 지키고 재의 수요일과 성금요일에는 금식재와 금육재를 함께 지켜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금식재와 금육재를 지킴으로 절약된 몫은 자선 사업에 사용하도록 하며, 금육재는 만 14세부터 죽을 때까지, 금식재는 만 18세부터 만 60세 전날까지 지켜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지키는 금육재란 육식 고기류의 음식을 금하는 것입니다. 금요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날이므로 그분의 고통받으심과 죽음을 생각하며 맛있고 영양가 있는 고기를 먹지 않음으로써 그분이 당하신 수난과 죽음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이러한 정신으로 초대 교회 때부터 금요일에 금육하는 것을 지켜왔습니다.
현행 교회법에 따르면 대축일의 어느 날과 겹치지 않는 한 모든 금요일에 금육재를 지키도록 하고 있으며, 만 14세부터 죽을 때까지 지켜야 합니다. 금육의 날에는 모든 육식을 금하지만 계란과 우유 그리고 육류 기름으로 된 양념은 먹을 수 있습니다. 대축일은 기쁜 날이므로 금육의 의무에 메이지 않고 경축하며 지내라는 것입니다.
단식재는 그날 한끼의 식사를 완전히 하지 않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생각하고 자신의 죄와 욕정을 끊고 그리스도께 온전히 봉헌하려는 뜻으로 사순절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과 예수께서 돌아가신 성금요일에 의무적으로 지키도록 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의 단식재는 구약의 관습에서 유래합니다. 단식은 하느님의 은혜를 받거나 자신을 속죄하기 위해(레위 16, 2) 시행했으며, 속죄복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목욕도 하지 않으며 부부간의 동침도 금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속죄자들과 세례를 준비하는 이들에게 단식을 하도록 했습니다. 현대에 와서는 사회 생활이 복잡해짐 따라 단식재를 지키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교황 바오로 6세는 1966년에 교황헌장 Paenitemini에서 “단식은 그날 점심 한끼만 충분하게 하고 아침과 저녁에는 그 지방의 관습에 따라 음식의 양과 질을 조절할 수 있다”고 하며, 자세한 규정은 각국 주교 회의의 결정에 맡기도록 하고 있습니다. 단식의 의무는 만 18세부터 만 60세 이하의 모든 신자들이 지켜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금육재와 단식재를 지키는 것은 우리를 위하여 수난하시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여 그분의 고통에 동참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었으므로, 금육재와 단식재를 지키면서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헌신의 마음을 찾고,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의 아픔과 고통에 동참하면서 그들을 돕는 따뜻한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금육과 단식을 통해 모여진 음식이나 돈을 통해 가난한 이들을 돕거나 교회에 바쳐 그들을 돕고자 하는 것이 바로 단식과 금육의 본래적인 의미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금요일이라 육식을 금하므로 비싼 생선음식을 먹는다면 이것은 바리사이파와 같은 형태의 신앙이라 할 것입니다.
단식과 금육의 의무가 면제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즉, 노약자나 병자, 중노동자, 출산을 앞둔 임산부, 군인, 그리고 어떤 특별한 일을 준비하기 위해 교회 장상으로부터 허락을 받은 자, 여행 중이거나 외출하여 음식을 사먹게 되는 경우와 초대를 받았을 때에는 단식과 금육의 의무에서 면제됩니다.
이웃에게 사랑을 전달하고, 절약을 통하여 남을 돕고자 하는 뜻에서 만들어진 금육일 이기에 다른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일이 있다면 오히려 금육재를 안 지키는 것만도 못할 것입니다. 단지 금요일에 고기를 먹었다고 하여서 고해성사를 보는 것으로 내 죄는 용서받았다고 할 것이 아니라, 올바른 희생과 극기 그리고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단식재와 금육재의 진정한 뜻을 실천하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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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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