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인천 자유공원 안에 있는 맥아더 장군 동상 철거 논란이 일고 있다. 일부에는 역사 바로잡기 차원에서 동상을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맥아더는 100만여명의 민간인 학살의 책임자이며 26개의 핵폭탄을 북에 투하해야한다고 주장했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반대 편에서는 맥아더 장군이 공산화 위기의 남한을 지켜낸 것이 엄연한 사실이라며 끝까지 동상을 사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도 한 사람의 인천 시민으로서 이 사건에 대해 관심이 많아 지난 주말에 처음으로 자유공원에 가 보았다.
공원에 가보니 벌써 맥아더 장군 동상 철거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연단을 만들고 현수막도 걸어 놓을 것을 볼 수 있었다.
또 그 주변에는 경찰이 탄 대형 버스 한 대가 나와 있어서 긴장감을 높였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가 공원에 다녀온 다음 날 실제로 그 주변에소 시위가 일어나 분위기가 더욱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나는 오늘 맥아더 장군 동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저 이 논란을 계기로 자유공원을 돌아보면 자유공원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공원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돌이다. 이 돌에는 '한국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라는 말이 적혀있다.
실제로 인천에는 '우리나라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 경우가 많다. 19세기 말 우리나라가 개항을 시작했을 때 온갖 새로운 문물이 들어왔던 곳이 인천이기 때문이다.
자유공원은 1888년에 조성됐는데 서울의 탑골공원이 1897년에 만들어졌으니 탑골공원에 비해 9년이나 먼저 만들어진 것이니 한국 최초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그동안 자유공원의 이름은 각국공원, 서공원, 만국공원 등으로 바뀌어 불려졌다. 그러다 1957년 자유공원으로 이름이 정해져 지금에 이르렀다. 많은 시대의 변화를 겪음 만큼 이름도 다양한 것이다.
인천에는 '최초'도 많고 당시 한국에 들어왔던 서양과 동양의 흔적도 많이 남아 있다. 자유공원 옆에는 서구식 건물이 한 채 있는데 이 건물은 예전에 외국인들의 사교장인 제물포구락부로 사용되던 건물이다. 현재에는 인천광역시 중구문화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언뜻 봐도 서구식 건물을 흉내낸 듯한 모습이다. 독일인 사업가에 의해서 지어졌다고 알려진 이 건물은 일제 강점기에는 부립도서관으로 해방 후에는 인천박물관으로 사용됐다.
아울러 자유공원에서 언덕 아래를 바라보면 중국식 건물들이 보인다. 바로 중국인촌이다. 이 길목에는 사진과 같은 패루(牌樓·중국식 전통 대문으로 차이나타운의 상징물)가 서 있다.
개항 당시 일본인 못지 않게 많았던 사람들이 바로 중국인(청나라)이었다. 그들의 후예들이 오늘날에도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인천광역시 마련하고 있는 명맥을 잇고 있는 것이다.
최근 철거 논란에 휩싸인 자유공원내 맥아더 장군 동상의 모습이다. 맥아더 장군의 동상은 공원 내에서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는데 인천 앞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1957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해 세워진 이 동상은 시대의 변화와 맞물려 항상 논란의 대상이 돼왔다. 멕아더 장군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이뤄지면서 일부 시민들이 철거를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유공원 언덕에서 바라본 인천항의 모습이다. 크고 작은 배들이 들고나면서 내뿜는 기적소리가 끊이없이 들려온다. 인천항은 시대의 변화에 따른 갈등은 아량곳하지 않는다는 듯 여전히 아름답기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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