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우 바오로 신부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요한 묵시록 3,1-6.14-22 루카 19,1-10
오늘 복음 내용은 루카 복음서에만 등장하는 일화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여정 가운데 예리코에서 일어납니다. 등장인물은 예수님, 자캐오, 군중입니다.
자캐오는 로마 제국의 위임을 받아 국경 도시인 예리코의 세관 업무를 담당하던 세관장입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자캐오를 ‘민족의 반역자’, ‘동족의 고혈을 빨아먹는 자’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한편 자캐오는 예수님을 직접 뵙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키가 작아 군중에 가려 그분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에 오릅니다.
예수님께서 위를 쳐다보시고, 자캐오의 집에 머무르시기로 하십니다.
자캐오는 기쁨에 넘쳐 예수님을 맞이합니다. 군중은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며
투덜거립니다. 유다교 전통에 따르면, 죄인의 집에 들어가는 행위는 방문자도
부정하게 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자캐오는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다른 이의 재산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다고 말합니다. ‘네 곱절’은 구약의 율법이 명하는 것 이상의 배상일 뿐 아니라,
로마법도 명백한 절도 행위에만 ‘네 곱절’의 배상을 적용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캐오는 동족의 편견과 단죄에 마음을 쓰고 있습니다. 모든 상황을 지켜보시던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캐오의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자캐오의 회개 이야기로
‘예수님께서는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셨다.’라는 루카 복음서의 중심 주제가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하여 우리는 ‘죄인’이라고 단정한 이웃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죄인의 회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지 스스로 돌아볼 수 있습니다.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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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요한 묵시록 3,1-6.14-22 루카 19,1-10
구원, 열림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어제, 오늘 우리는 예리고에서 일어난 구원사건을 듣습니다.
눈먼 이가 보게 되면서 영혼이 구원에 이르는 얘기를 어제 들었고,
오늘은 자캐오가 구원을 받는 얘기들 듣는데
자캐오의 경우는 개인의 구원뿐 아니라 집안이 구원받는 얘깁니다.
헌데 구원받은 집이라면 구원받기 전에는 어떤 비구원 상태일까요?
추측컨대 세 가지로 비 구원의 상태였을 것입니다.
가족 간의 불통이 그 하나이고, 이웃과의 불통이 그 두 번째이며,
하느님과의 불통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집안의 불통과 비구원과 불행의 진원지는 자캐오였을 겁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유대가정에서 가장의 비중은 절대적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자캐오가 왜 그렇게 되었을까 소설을 쓴다면
그가 키가 작은 사람이었다는 것과 세관장이었다는 것에서부터
우리는 실마리를 풀어볼 수 있을 겁니다.
작은 키의 열등감을 그는 세속적인 성공으로 극복하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키 작은 자기를 무시할 수 없도록 그는 돈을 많이 벌기로 작정했을 겁니다.
그런데 돈을 버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듭니까?
어떤 때는 더러워도 참아야 하고 심지어 비굴하게 고개를 숙여야 합니다.
어떤 때는 내가 살아남기 위해 남을 짓밟아야만 합니다.
어떤 때는 돈을 벌기 위해 거짓말도 해야 하고, 사기도 쳐야 합니다.
어떤 때는 돈을 걷어들이기 위해 남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오직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이고,
이것이 자기가 해야만 하고,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쳐 집에 들어오면 그는 집안일에는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고,
내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으면 짜증을 부리고 막 화를 냈습니다.
그럴수록 아내와는 자주 다투고, 아이들은 무서워서 슬슬 피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아내와 아이들은 친하게 지내는데 자기만 점점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돈만이 이 세상에서 자기를 구원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가족들만이 유일한 사랑이고 의미였기에 거기서 위안을 받으려 했는데,
그래서 남을 짓밟고, 하느님마저 모르는 체 오직 가족을 위해 살았는데
가족이 이것을 몰라주니 너무 야속하고 삶의 회의가 왔습니다.
이 인생 최대의 위기에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마침 예수님께서 예리고에 오셨고
풍문으로 들은 것이 정말인지 예수님을 자기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키 작은 그가 군중에 가려 주님을 볼 수 없으매
주님이 지나가실 길을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에 오릅니다.”
그의 키 작음이 나무를 오르게 하고,
나무에 오르는 열망과 열성이 그를 주님 눈에 띄게 하였습니다.
작기 때문에 더 열심히 산 것, 어쩌면 이것이 그가 일생 살아온 거였습니다.
그런 그를 주님께서는 역시 무시하지 않고 올려다보실 뿐 아니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고까지 하십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아무도 허용치 않고, 아무도 드나들지 않던 문이 열립니다.
이렇게 한 번 문이 열리자 마음이 열리고, 곳간 문도 열립니다.
하늘로 향하는 문이 열리자 이웃으로 향하는 문도 열리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이렇게 꽝꽝 닫혔던 문이 활짝 열리는 것입니다.
오늘따라 성무일도 초대송 시편이 마음에서 메아리칩니다.
“성문들아 너희의 머리를 들라. 영원한 문들아 활짝 열려라.
영광의 임금님이 듭시려 하시나니.”
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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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규 베네딕토 신부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요한 묵시록 3,1-6.14-22 루카 19,1-10
자캐오는 세리이며 부자였습니다. 실제로 당시 세리들은 세금을 징수하면서 부당하게
이득을 얻기도 하였습니다. 로마는 세금을 효율적으로 거두어들이려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세금 징수원으로 고용하고 세금이 덜 걷히면 세리들이 물어내도록 하였습니다.
이런 제도는 자연스럽게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결과를 가져왔으나, 세리들은 사람들에게
외면받았고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있던 로마를 이롭게 하는
민족의 반역자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자캐오를 가리켜 죄인이라고 이야기하는 데에서 이미 그가 사람들에게
큰 죄인으로 여겨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큰 어려움 없이 살았을 그에게
예수님과의 만남은 인생의 전환점이 됩니다.
그의 집에 머무르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자캐오는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기쁨은 벌써 자캐오를 변화시킵니다.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자캐오가 변화되는 중심에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자캐오가 이전의 삶을
바꾸어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계기가 됩니다. 우리는 이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봅니다.
하느님 나라는 결국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기쁨에서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 기쁨은 이전의 것을
바꾸어 이웃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힘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현재에서 구원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일 것입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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