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훈 바오로 신부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요한 묵시록 4,1-11 루카 19,11ㄴ-28
한 미나를 받아 수건에 싸서 보관한 종의 잘못은 게으름에 있습니다. 이 본문과 병행 구절인
마태오 복음서는 이 종의 잘못이 어디에 있는지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알려 줍니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마태 25,26) 게으름은 아무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악덕입니다.
무엇이든 시도해야 그 안에서 하느님의 활동이 시작됩니다. 실패든 성공이든
주님께서는 당신 섭리로 이끄시고, 그 섭리 안에서 열매를 맺으십니다.
그러나 게으른 종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게으름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냉혹하시고 무서우신 분으로
여겼기에, 자신이 실패하였을 때 그것을 다그치실 하느님이 두려워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이 종의 또 다른 잘못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자신만의 성소(부르심)와 사명이 있습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미나를
맡긴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시며 사명을 맡기십니다.
나라는 사람은 유일하고, 주님께서는 그런 유일무이한 나에게 나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명을
맡기십니다. 이처럼 모든 이에게는 자신의 성소가 있으며, 그래서 성소의 수는 그리스도인의
수만큼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그 사명을 통해서 거룩함으로 나아가고 또 세상에 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두려움과 게으름으로 자신의 성소를 시작하지 못합니다.
두려움 없이 성소의 첫 발을 내디뎌야 합니다. 비록 실패처럼 보일지라도,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 안에서 언제나 어떤 열매든 맺으리라 믿으며,
담대하고 성실하게 성소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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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우 바오로 신부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요한 묵시록 4,1-11 루카 19,11ㄴ-28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재림과 연결하여 ‘미나의 비유’를 설명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올 때, 예수님께서 메시아 임금으로서 행하실 ‘심판’을 예고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다인들처럼 예수님의 제자들도 하느님의 나라가 급박하게 오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서의 저자는 섣부른 기대감과 조급함을 경계해야 한다고 전합니다.
곧 예수님의 재림 전까지 오랫동안 수행해야 할 사명이 제자들에게 부여되었다는 것입니다.
먼저 이 비유에서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길을 떠나는 주인은 종 열 사람에게 한 미나씩 나누어
줍니다. 유다 화폐 단위였던 미나는 백 데나리온이며, 한 미나는 노동자가 백 일 동안
모은 품삯입니다. 마침내 돌아온 임금은 종들을 불러 미나를 어떻게 관리하였는지 묻습니다.
한 미나를 받았던 첫째 종은 열 배로, 둘째 종은 다섯 배로 늘렸습니다.
주인은 작은 일에 충실하였던 종들에게 각각 고을을 맡깁니다.
그러나 다른 종은 “저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임금은 게으르고 악의에 찬 종의 견해대로 그에게 혹독한 판결을 내립니다.
물론 이 비유에서 마지막 종에 대한 임금의 처우가 부당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한 불충한 유다인들에게 내려질 엄중한 심판을
빗대어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을 ‘냉혹한 심판자’로만 여기지는 않는지 돌아봅니다.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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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요한 묵시록 4,1-11 루카 19,11ㄴ-28
“미나를 나누어주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겨울의 길목입니다. 바퀴를 달고 달아나는 가을의 뒷모습이 을씨년스럽고, 길가에 군데군데
몰아다 놓은 가을의 노고, 가을의 땀방울이 쓸쓸합니다. 그런데 잎이 떨어지고 꽃도 떨어지고
나면, 그 나무가 속이 꽉 찬 나무인지 속 텅 빈 나무인지가 훤히 드러나 보입니다.
이 늦가을 우리의 몸을 치장하고 있던 가식과 허영의 옷들을 벗어버리고,
우리의 속내를 들여다보아야 할 때입니다.
오늘 복음인 '미나의 비유'는 겉보기에는 마치 결과에 따라 평가받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사실 이를 주의해야 합니다. 곧 결과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결실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심을 많이 맺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결실을 내는 나무가 되는 데 있습니다. 곧 결실을 통해서 나무의 본질을 보는 데 있습니다.
결국 어떤 나무가 결실을 낼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매를 보고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따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이지 못한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루카 6,44-45)
그렇습니다. 열매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는 나무에 대한 비유입니다.
곧 ‘착한 종’은 선물과 선물을 주신 분에 대한 믿음으로 성실하여 열매를 맺게 되었지만,
‘악한 종은’ 주인에 대해서 “냉혹한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는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는 것을
거두어 가시는 분”(루카 19,23)으로 여겼기에, 결국 그에 따른 결과를 낳았음을 말해줍니다.
결국 믿는 이는 믿음의 열매를 맺을 것이요, 불신한 이는 불신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빛은 빛의 열매를 맺고 어둠은 어둠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우리의 마음을
가꾸어야 하고, 우리의 인격을 다듬어야 할 일입니다.
열매에 치중하다 자신을 그르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동시에 주인의 선물을 악용하지도
말아야 할 일입니다. 선물(미나)을 주신 분에 대한 감사와 믿음을 간직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
사실 이처럼 믿음은 능력이요, 불신은 무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믿음이 힘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할 일입니다. 자신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활동하신 분의
힘을 믿고 있는지 말입니다.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분을 주님으로 믿고 있는지 말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피서 4,13)아멘.
<오늘의 샘 기도>
주님!
당신께서는 신랑이 신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듯
사랑과 신의의 표시로 저에게 ‘미나’를 맡기셨습니다.
잘 간직하라고가 아니라 잘 열매 맺으라고 씨앗으로 선사하셨습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신의를 땅에 묻어버리고 제 신변 안전만
바라는 속 빈 강정이 되지 않게 하소서.
믿음과 사랑이 꽉 찬 열매를 들고 당신 앞에 나서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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