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상선 바오로 신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즈카르야 2,14-17 마태오 12,46-50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고찰하게 해 줍니다.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마태 12,46)
예수님이 집 안에서 군중들에게 말씀을 들려주고 계실 때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집앞에
다다른 것 같습니다. 어느 친절한 이가 예수님께 이를 알리지요.
보통 사람이라면 가족이 우선일 테니까요.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49-50)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 곁에 있는 제자들을 가리키며 어머니고 형제라 하십니다.
육신과 인간 사회의 질서 안에서 태어나 자라셨지만 동시에 하느님과 같은 분이신 예수님은
영의 질서 안에서 모든 것을 포괄하고 또 초월하는 분이십니다.
"안"과 "밖"을 관상합니다. 예수님 말씀을 듣자 하니, 우리와 예수님과의 관계가 제도나 신분,
육적 관계나 물질적 기여도, 관습만으로 좌우되기는 어려워 보이네요.
이런 "밖"의 조건들에서 넉근히 우위를 차지한들, 그것들만으로는 자신이 있는 "밖"으로
예수님을 불러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과 진정으로 관계 있는 존재가 되려면 우리가 예수님 곁으로 가야 합니다.
속된 말로 계급장 다 떼고 가면도 다 벗어버리고, 영혼의 민낯과 알몸으로 그분이 계신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거기서 그분과 맺는 관계를 통해 우리는 주님의 어머니고 형제가 됩니다.
먼저 우리는 예수님이 계신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거기서 말씀을 듣습니다.
그분의 말씀이 우리를 그분과 강하게 결속시킵니다.
그리고 듣고 품은 말씀을 실행해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 행동을 통해 세상에 탄생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통해 육화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예수님의 어머니고 형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영혼의 태 안에 그토록 귀하신 말씀을 잉태해 품고 세상에 낳아주었으니 말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시온에 당신의 현존을 약속하시는 주님의 밝은 음성이 울려퍼집니다.
"딸 시온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즈카 2,14)
주님께서 우리 한가운데에 몸소 들어와 머무르시겠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그분 계신 곳에
들어갈 수 없으니 그분께서 친히 움직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게 되면 우리가 있는 곳이 더 이상 "밖"이 아니라 "안"입니다.
"모든 인간은 주님 앞에서 조용히 하여라."(즈카 2,17)
그분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구원의 때에 모든 인간은 삼가고 경외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분이 들어오시니 모든 분심과 소음은 잠잠해져야 합니다.
말 많고 탈 많은 이 세상에, 우리 존재에 하느님께서 친히 개입하시는 그때,
온갖 인간의 말과 인간의 행위는 그만 숨을 죽이고 그쳐야 합니다.
말씀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셔야 하고, 움직이시는 분도 오직 그분이셔야 합니다.
그분의 시간이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복음 속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와의 육친관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리아께서
육적으로만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가장 가까운 관계임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마리아 안에 들어 오실 때 마리아는 순종과 침묵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귀한 열매를
품으신 것이니까요. 마리아의 순종은 이 세상에 하느님의 현존을 가능케 했습니다.
구원이 들어와 거처를 삼으신 것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성모님의 봉헌을 기리며, 침묵과 순종 안에 구원의 말씀을 품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말씀을 품고 살아가며 실천으로 열매 맺는 우리는 이미 주님의 어머니고 형제랍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은 행복하여라."(복음 환호송)
문 밖에서 서성대지 말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예수님 곁으로 다가갑시다.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하시고자 우리에게로 마중나오시고 성체로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합시다.
그렇게 그분과 하나되어 살아가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허규 베네딕토 신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즈카르야 2,14-17 마태오 12,46-50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라는 표현 때문에
혼란스러워합니다. 마리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에 의구심을 가지기도 하고
다양한 해석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를 소개한다면 당시에 ‘형제’라는 표현이
지금보다는 넓은 의미로 이해되었고 사촌들에게도 적용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이 강조하는 것은 새로운 관계입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을 형제자매로 생각합니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시는 것을 보여 주고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죄인으로 여겨지던 이들과 함께 어울리시고 그들을 용서하시고 받아들이십니다.
이것 때문에 종교 지도자들과 마찰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과 과부들도 돌보시고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공동체에서
소외된 이들을 공동체 안으로 돌려보내십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기존의 관계에서 벗어나시어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 가십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의 관계도 이런 새로운 관계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새로운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인이 가지는 새로운 정체성입니다.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
***********
김상우 바오로 신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즈카르야 2,14-17 마태오 12,46-50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에 대한 신심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에 대한 단서를 발견합니다.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실 때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방문합니다.
고대 근동 지방과 성경 전통에서 “형제”라는 말은 한 어머니의 자식들뿐 아니라 가까운
친족까지 포괄합니다. 이어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라고 서술하는데, 직역하면
‘그러고서는 당신의 제자들 위로 당신의 손을 뻗으시며 또 이르셨다.’가 됩니다.
아울러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행동과 말씀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습니까?
이는 제자 공동체가 스승 예수님의 새로운 가정 공동체라는 신학적 의미로 풀이됩니다.
이 구절에서 ‘하느님’ 대신 ‘아버지’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제자 공동체가 지닌 가정으로서의
새로운 신원과 정체성이 드러납니다. 혈육으로 이루어진 가정 공동체의 중요성만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새로이 구성된 가정 공동체의 중요성이 부각됩니다.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포함한 친족에게 면박을 주시기보다 새로운 교회 공동체의 사명을
더욱 강조하시려는 의도로 해석됩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이며 그분의 가정 공동체에 속합니다. 이 공동체의 본질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며, 이것이 곧 존재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성모님처럼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고,
그 뜻을 삶에서 실천하도록 초대받은 복된 사람들입니다.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