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애리시(엘리스 해머드 샤프, A. H. Sharp, 史愛理施, 1871-1972)선교사는
캐나다 출신의 선교사로서
오하이오 주에서 교역자로 일하다가
1903년 31살 나이에 한국으로 선교하러 왔다.
그녀는 한국 이름인 사애리시에서,
‘역사적으로 예수의 사랑과 이치를 베풀자’라는 뜻에서 알 수 있듯이
‘사(史)부인’은 한국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선교사가 되었다.
천안과 공주, 강경, 연산, 은진, 노성을 순회하면서
영아 육아원과 학교(공주 영명여학교)를 세워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유관순, 이순길)에 그 씨앗을 뿌렸다.
그녀는 공주에 복음을 전한 스크랜톤, 스웨러, 맥길 선교사의 뒤를 이어서
공주 선교사역을 감당하였다.
과거 조선말 시대는 한양(서울)과 공주가 대도시에 속했다.
그래서 샤프 선교사 부부가 1904년 공주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하였다.
남편 샤프(로버트 아더 샤프) 선교사는 윤성렬을 교사로 하여
영선학당(영명 남학교)을 설립하였다.
그는 서울에서 황성 기독청년회에
호모 헐버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올리버 에비슨, 제임스 그카스 게일 등과 함께
초대 이사로 섬기며 크리스토교 청년 운동을 활발히 펼쳤다.
로버트 샤프의 아내 앨리스 해먼드 사프는 1904년
공주에서 결혼하여 최초의 서양식 벽돌 양옥집을 짓고 살며 선교를 시작하였다.
샤프 부인은 허조셉 전도부인을 교사로 하여
두 명의 학생을 가지고 명선여학당(영명여학교)설립하게 된다.
남편 샤프 선교사가 발진티푸스 감염으로 사망하자
1906년 우리암(W. E. C. Williams)선교사가 뒤를 이어
공주로 와서 영명학교(영명고등학교 전신)를 설립하며 인재를 양성하였다.
샤프 선교사는 유관순 열사를 수양딸로 삼아 영명학교에 입학시켰고
3.1운동을 일으키게 하였다. 공주제일교회는 충정지역 3.1운동의 진원지가 되었다.
1906년 11월 이후 스웨러 선교사 부부, 윌리엄즈 선교사 부부, 케이블 선교사 부부,
테일러 선교사 부부, 번스커스 의료 선교사 부부 등이 공주에 주재하면서
한국 선교의 중심지를 형성하였다.
이 공주가 한국 근대화의 명동(明洞), 선교본부가 되어 충청도의 선교 거점이 되게 하였다.
(왼쪽 상단 기준) 사애리시 선교사, (아래) 샤프 선교사, 유관순 열사 수형표(서대문구치소), 공주 영명학교
사애리시 선교사는 유관순, 이순애, 박인덕, 임영신, 노마리아, 전밀라 등
어려운 가정의 소녀들을 교육하였다.
샤프 선교사는 논산 읍내에 1909년 영화 여학교와 진광남학교를 설립하여 복음을 전했고, 그 후 1928년에는 예배당을 세웠다.
강경과 연산, 은진, 노성 지방을 순회하면서 사회복지 활동, 유치원을 설립하면서
그녀는 복음을 전하다가 중일 전쟁, 태평양 전쟁 때에
일제가 1939년 그녀를 강제 추방하여 미국에 돌아가게 되었다.
사애래시 선교사는 캘리포니아 파사데나 은퇴 선교사 요양원에서 지내다가
103세 장수하고 소천하였다.
샤프 선교사는 유관순을 양녀로 삼고 이화여학당에 유학을 시키면서
복음 전도자로서 키웠고 그 외에도 이순길 같은 독립 운동가를 키우며
한국 여성의 빛나는 누나로서,
또 ‘한국 독립의 어머니, 할머니’로서 아직도 한국인의 가슴에 남아있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으깨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다”
(유관순의 투옥 중 기록, 뉴욕타임스 3월 기사,
<유관순, 일제 통치에 저항한 독립운동가>).
샤프 선교사의 양녀 유관순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예수 사건을 알리는
3.1 운동의 아이콘이 되었다.
구약의 출애굽 사건과 신약의 십자가 사건이
인류 역사의 자유와 해방을 알리는 이정표가 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는 여러 민족과 나라의 자유와 해방의 이야기가 되고 있다.
[출처] 【박신배 박사】 유관순을 양녀 삼은 샤프 선교사와 사애리시 선교사|작성자 본헤럴드
한국 이름 사애리시(史愛理施). 미북감리회 소속으로
1900년 조선에 파송된 ‘앨리스 J 해먼드 샤프(Alice Hammond Sharp, 1871~1972)’ 선교사. 사람들은 그녀를 ‘사(史) 부인’으로 불렀다.
사 부인은 메리 스크랜턴 부인과 평일에는 이화학당 교사와 순회전도자로,
주일에는 상동교회 주일학교 교사로 사역했고,
1903년 정동제일교회와 배재학교에서 사역 중이던 남편 로버트 아서 샤프 선교사(Robert Arthur Sharp, 1872~1906)를 만나 결혼한 후
1904년부터 감리회 선교관할지역인 충남지역 선교를 맡았다.
1905년에는 충청지역 최초의 근대적 교육시설인 영명학교를 설립했다.
그러나 1906년 남편이 심방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장티푸스로 사망하자
사 부인은 영명학교 인근(현 영명동산)에 남편을 묻고 본국으로 일시 귀국했다.
1908년 한국에 다시 돌아와 1940년 일제에 의해 추방될 때까지 가마,
말, 자동차를 타고 대전·논산·강경·부여·보령·천안·안면도 등 충남 전역 구석구석을 누볐다.
공주 영명학교를 비롯해 영화여학교, 진광남학교 등 학교 20여 곳과 유치원 7곳을 설립했고,
독립운동가 유관순, 오익표, 감리교 최초의 여성목사 전밀라,
한국 최초의 여성 결찰서장 노마리아, 철도간호학교를 설립한 박한나 등 수많은 지도자를 배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