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까지’ 해야 한다!
‘다했는데 뭘 더 하냐’ 불만인 사람들
했다는 사실보다 문제해결 여부 살펴야
해법 찾으려 애쓰는 행위가 ‘일’이다
몇 년 전에 도우미를 고용한 적이 있다. 어머니 식사를 살피고 집 안을 청소하는 게 주 일과였는데 어느 날 그분이 일하는 걸 보게 됐다. 청소를 마친 직후인데 마룻바닥 여기저기에 얼룩이 그대로였다. 잠시 고민하다 알은 체를 했다. “얼룩이 안 지워졌네요.” 그러자 그분은 이렇게 말했다. “스팀청소기도 돌리고 다한 건데요.” 물론 그녀는 청소를 했고 나도 봐서 아는 터다. 문제는, 청소를 했음에도 얼룩이 그대로 남아 있어 깨끗하지 않다는 건데 그분은 청소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할 일을 다했는데 뭐가 문제냐는 투였다. 순간 머릿속에 생각이 어지러이 오갔다. ‘한 번 더 청소해 달라고 할까? 그랬다가 감정이 상해 그만두면 어쩌지? 당장 새 도우미를 구하기도 어려운데….’ 결국 재요구는 하지 못했고, 그날의 청소는 그걸로 끝이었다.
일터에서 보내는 하루하루는 대개 문제 해결의 연속이다. 해결해야 할 문제의 종류는 다 다르겠으나 해법을 찾는다는 면에선 본질적으로 비슷하다. 신제품을 기획하거나 기술을 개발하고 영업을 뛰며 고객에게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모두 해법으로서의 노력들이다. 중요한 건, 이런 노력들로 문제가 해결되었느냐이지 무언가를 했다는 자체가 아니다. 아, 오해는 하지 마시라. 결과만 중요하고 과정은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가 아니다. 애초에 그 일을 하는 목적에 부합한 결과가 나왔는지, 그 노력이 해법으로써 작동하고 있느냐를 따져봐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종종 ‘다했는데 뭘 더 하라는 거냐’라고 반응한다.
우리는 종종 가치관도, 기질도 다른 사람들과 파트너가 되거나 팀을 이뤄 함께 일한다. 한데, 유난히 합이 잘 맞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사람들이 만나야 좋은 ‘케미’가 나오는 걸까. 확실한 하나는 ‘어디까지 애쓸 것인가’의 수준이 비슷한 사람들이 만날 때가 아닐까 한다. 자, 여기 두 사람이 있다. A는 얼룩이 지워졌건 아니건 청소를 했으면 그걸로 됐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B는, 몇 번이고 다시 해서 깨끗해져야 할 일을 한 거라고 주장한다. 이 두 사람은 사이좋게 함께 일할 수 있을까? 만약 당신이 누구와 일할지 정하는 입장이라면 당신의 선택은 누구일까?
회사에 다닐 땐 회사 사람들과 주로 일했지만 퇴직하고 책방을 열고부턴 많은 일을 ‘따로 또 같이’의 방식으로 한다. 이 일은 A와, 저 일은 B와 해보면서 서로 잘 맞고 성과가 좋으면 계속 이어나가는 식이다. 책방이라는 새롭고도 낯선 일을 하면서, 그래서 죄다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면서 내가 어떤 기준으로 함께 일할 사람을 선택하는지를 알아차리며 혼자 재미있어 한 적이 있다. 유능하거나 유명한 사람이 아니었다. ‘어디까지 애쓸 것인가’와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수준’이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었다.
지금까지 사회생활을 하며 만나 본 사람들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뉘었다. 어떤 일을 새로 해보자고 이야기를 꺼냈을 때 재미있겠다며 눈을 반짝이는 사람들과 뭘 그렇게까지 하냐며 고개를 돌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두 번째 사람들과는 함께하지 않았다. 서로 맞지 않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내가 하자는 방식은 대체로 손이 많이 가고 귀찮으며 훨씬 더 품이 들었는데, 그런데도 굳이 그렇게 하는 것은 더 나은 해법이 되어서다.
일례로 우리 책방은 멤버십 북클럽을 운영하고 있다. 회원들께 매달 우리 책방이 책을 골라 보내드리는데 책만 보내지 않고 편지를 동봉한다. 수많은 책 가운데 왜 그 책을 골랐고 어떤 면에서 읽어볼 만한지를 쓴 책방마님의 편지다. 문제는, 여기에 들어가는 수고다. 우선 편지를 써야 하고 전문 출력소에 가 800통이 넘는 편지를 출력한 다음엔 책방 식구들이 모여 앉아 일일이 편지를 접어 봉투에 넣는다. 이 작업을 하는 날이면 책방은 거의 가내수공업장이 된다. 그런 후엔 물류로 편지를 부치고 물류에선 책마다 편지를 끼워 발송한다. 이런 수고 끝에 회원들이 책과 함께 편지를 받게 된다. 우리가 매달 이렇게 하는 것은 애초에 북클럽을 시작한 취지, 책과 독자를 잇는 가교 역할에 편지가 좋은 해법이 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일이란 실은, 해법을 찾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한데 이 중요한 사실을 잊을 때가 있다. 해법이 찾아지지 않았는데도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며 더 이상 애쓰려 하지 않는 경우 말이다. 작동하지 않는 문제는 여전히 해결 방법을 찾아야 하고 우리는 그 일을 하라고 그 자리에 있는 거다. 귀찮더라도 ‘그렇게까지’ 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일하는 사람의 ‘자세’가 아닐까.
최인아 객원논설위원·최인아책방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