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우 바오로 신부
연중 제33주간 금요일
요한 묵시록 10,8-11 루카 19,45-48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는 장면을 소개합니다.
루카 복음서에 따르면, 이 일화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바로 그날에 이루어집니다.
그만큼 성전 정화 사건은 예수님의 메시아 왕권을 재확인하는 중요한 기능을 담당합니다.
그런데 메시아 예수님의 왕권은 세속적 의미에서 가리키는 지배와 통치를 위한 ‘권력 쟁취’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분의 왕권은 오직 하느님 아버지를 올바르고 합당하게 섬기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물건을 파는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이 구절에서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은 이사야서 56장 7절의
인용입니다. 곧 성전의 본래 기능이 기도하기 위함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강도들의 소굴’은 예레미야서 7장 11절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 시대나 예수님 시대나 사람들이 성전의 본래 기능을 왜곡하여
잘못 사용하고 있다는 비판입니다.
마침내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라고 복음은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상인들을 꾸짖으신 일과 성전에서 가르치신 일이
유다교 지도자들에게는 ‘눈엣가시’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내용은 구약과 신약 시대의 이야기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도 ‘기도의 집’인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거나,
왜곡된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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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규 베네딕토 신부
연중 제33주간 금요일
요한 묵시록 10,8-11 루카 19,45-48
유다교에서 성전은 신앙생활의 중심이었습니다. 모든 제사의 의식은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제사는 하느님과 화해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여겨졌습니다.
구약 성경에 따르면 사제들은 조를 나누어 돌아가면서 성전에 머물며 봉사하였습니다
(1역대 24장 참조). 그렇다고 성전이 제사를 바치는 곳만은 아니었습니다.
성전은 하느님과 만나는 장소이자 기도의 장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루카 복음서에서 성전은 가르침의 장소로 표현됩니다.
이것은 비단 예수님만이 아니라 사도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전은 사도들과 신앙인들에게 기도의 장소였으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선포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장소였습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십자가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분의 행동은 성전만이 아니라 유다교의 제도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였기에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애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행동은 성전이 지닌 진정한 의미를 되찾는 것이고
하느님의 뜻에 맞게 되돌려 놓는 것입니다.
성전이 참의미를 잃고 수단과 도구로만 사용된다면 종교의 모든 제도는 하느님을 잊은 채
인간의 이익만을 위하여 남습니다.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삶의 태도와 생각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다만 나를 위한 도구가 된다면
신앙은 가치를 잃습니다.
그 가치를 되돌려 놓는 것이 정화의 참뜻입니다.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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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 바오로 신부
연중 제33주간 금요일
요한 묵시록 10,8-11 루카 19,45-48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우리는 성전의 본래 모습을 봅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루카 19,46)
예수님께서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해 성전의 본질을 일깨우십니다.
성전이 거래와 잇권의 장이 되면서 그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은 물건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는 거친 행동을 하시면서까지
성전의 성전다움을 되찾으려 하십니다.
이 일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 그리고 백성의 지도자들의 심기를 건드립니다.
지금의 성전 모습은 그들의 기득권이나 재산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루카 19,48)
하지만 예수님을 참 예언자 또는 메시아로 여기는 백성들이 그분 곁에 머무르고 있으니
적대세력들은 예수님을 붙잡을 기회를 좀처럼 얻기 어렵습니다.
말씀이신 분 곁에 모여든 백성들을 관상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인지요!
그분 입에서 흘러 나오는 진리의 가르침이 백성들의 영혼을 적시고 있습니다.
귀를 쫑긋 세우고 그분께 집중하고 있는 이들은 온 존재로 듣는 중입니다.
말씀이 예수님에게서 흘러나와 백성들 안으로 스며들며 공유됩니다.
과연 그들 모두는 말씀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성전이 성전다워집니다. 하느님의 거처인 기도의 집은 영혼들을 말씀으로 엮어 주는
안식처입니다. 성전이 이 본질을 지킬 때 세상 모든 사물도 자기 자리와 제 질서를 찾습니다.
피조물다움, 사람다움이 회복되는 것이지요.
제1독서에서는 요한 묵시록 저자의 놀라운 체험을 이야기합니다.
"나는 그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삼켰습니다.
과연 그것이 입에는 꿀같이 달았지만 먹고 나니 배가 쓰렸습니다."(묵시 10,10)
그는 천사가 명한 대로 두루마리를 받아 삼킵니다. 주님을, 말씀을 입으로 받아 먹은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은 입에는 달고 배는 쓰리게 합니다.
말씀은 힘 주어 전하는 이의 입을 즐겁게 하지만 육신은 고달프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너는 많은 백성과 민족과 언어와 임금들에 관하여 다시 예언해야 한다."(묵시 10,11)
말씀을 받아 먹은 그는 예언자의 소명을 이어가야 합니다.
그동안 충실해 해온 대로 듣고 본 말씀을 받아 적고,이를 전하는 일입니다.
그는 말씀을 받아 먹은 이, 말씀을 품은 이, 말씀을 전달하는 이입니다.
이미 그 자신이 성전입니다. 그를 살게 하고 움직이는 존재가 주님이신데,
그분이 곧 말씀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기도를 주님께 뭔가 졸라대고 간청하는 것으로 국한시켜 생각하지만,
기도는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주님 현존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그분을 듣고, 그분을 생각하고, 그분을 사랑하는 존재적 상태가 곧 기도입니다.
이처럼 말씀 안에 머무르는 이는 기도하는 사람이고, 성전입니다.
매일 다가오시는 말씀을 들으려 이곳을 찾으시는 벗님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여러분이 주님 곁에 머물러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관상하고 기도하는 동안,
우리의 성전다움이 차츰 회복됩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를 통해 공동체와 세상도 조금씩 더 자기다움을 회복해 가는 것이지요.
말씀이신 주님을 모시고 세파와 격랑을 헤치며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응원합니다.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성전이 되신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