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까짓 것쯤이야
어릴 적 엄마가 김치를 하려고
배추를 절이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속이 꽉 찬 배추를 그냥 반으로 쭉 갈라서
굵은 소금을 대충 술술 뿌려놓고 내버려 두면
저절로 숨이 죽어 달콤한 배추 속이 되는데
이보다 쉬운 일이 어디 있겠느냐고...
결혼을 하고 시어머니 앞에서
처음으로 배추 절이기를 명 받던 날도
나는 이까짓 것쯤이야 했다..
닥쳐 보기 전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들이 살아가며 어디
한두 가지랴
생각처럼 쉬 숨이 죽지 않는 배추를 한나절 주물 딱 거리며
소금을 쓰는 기술 아닌 기술이 김치 담기의 절반이라는 사실과
레시피도 없는 엄마의 손대중 눈대중이
그리 만만히 넘볼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짭짤하게 깨달았다.
장갑도 없이 맨 손으로 부엌일과 밭일을 해내시던
거친 엄마의 손에서
작달막한 다섯 손가락처럼
기막힌 조화를 갖추며 만들어지던 맛있는 밥상..
행복한 포만감에 늘 배부르던 기억과 함께
비 오는 날 더욱 그리운 엄마의 손 맛.
결혼 20여년차를 넘어서
먹던 맛을 기억 해 가며 음식을 만들고 내 아이를 먹이는 동안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고..또 그렇게
서툰 손등위로 세월의 흔적이 여러 겹 지나가면서
고무장갑을 끼는 것 보다 맨손이 성질에 맞아
화장품 냄새 대신 양념 냄새가 손끝에 꼼꼼 배어가자니
나의 밥상도 가을 끝 홍시처럼 익어갔다.
조금씩 끓여먹는 된장찌개도
배고플 때 먹으면 먹다 기절할 만큼 맛있게 할 수 있고
배추 절임이 어렵지 않을뿐더러
열 단씩 욕심껏 해대는 알타리김치는
눈 감고도 할 만큼 이제는 쉬워졌는데
내 삶의 바탕에 흐르고 있는 엄마의 모습은
그리운 손 맛과 함께
오랜 시간 엄마가 머물며
쓸고 닦고 기름질 하던 부엌의 그림 속에 떠오른다
낮에도 구석이 어둑하니 바닥이 깊고..
말랑한 엿이 담긴 갈색 바구니가
올려져 있던 문간의 시렁
수건을 머리에 두른 엄마가 허리를 구푸린 부뚜막에는
기름을 바르고 공들여 윤을 낸
붉은 수수대궁이며 콩대를 그대로 꺾어 넣고,
밭에서 서리해온 꿩 알이며
손마디 모양이 꾹꾹 드러난 옥수수 반죽을 넉넉히 쪄내
새참거리를 만들어 주던
반들반들 새 각시 낯빛처럼 어여쁜 가마솥..
아침마다 논에서 건져온 우렁이를 구워 내던
아른 아른 불꽃이 숨을 죽이던 커다란 아궁이
뒤 안을 향한 작은 쪽문으로 한 발 내디디면
눈부신 노란빛,
알싸한 야생 국화 향기 물씬 풍겨오던
엄마의 부엌
나는
별다른 수고 없이 화력 좋은 가스 불을 켜고
빛나는 스텐그릇을 쨍그랑거리며
대낮처럼 환한 형광등 밑에서 밥을 한다.
김치를 하는 날이면 온 집안에 가득한 갖가지 양념 냄새가
오케스트라의 조합처럼 기막힌 맛의 화음으로 어우러질 때
그 화려한 풍성함이 잔칫집 같다고 또 좋아한다.
하루 종일 광목 커튼을 만드느라 재봉틀에 엎드려 점심도 거르고
급하게 허기가 몰려와 손까지 떨리는 느즈막 한 오후
뚝딱 뚝딱 호박을 썰어 새우젓 간을 하고
청양고추 넣은 짭짤한 된장찌개에 저녁을 먹고 있자니
목젖을 밀고 넘어가는 익숙한 냄새… 오래 전 그…. 맛
엄마다..
엄마의 부엌이 시간의 저편으로 부 터
천천히 내게로 옮겨 왔다.
첫댓글 우리들의 문학 유산은 거의 다 농경 시대 농촌의 정서에 뿌리를 두고있다.
아무리 척박하고 비위생적이어도 구수한 내음으로 금새 가슴이 녹녹해진다.
아스팔트 문화속에서 때가 묻은 나도 귀향 할 곳이 있는 것 마냥 그저 그립고 훈훈한 것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북 이야기를 엄마에게서 들었기 때문일까?
이...밤....엄마의 부엌을 그리워하는 데이지 님의 표현이 아름답습니다....
단지님께 된장을 주문했더니 사과나무에서 따 온듯 예쁜 호박이 덤으로 왔었어요.^^
먹기에 아까운 호박을 이리보고 저리보다가 결국 배고픈 날 볶아먹으면서 엄마생각이 났었죠.
잠자고 있는 추억들을 일깨워준..아름다운 손길에 감사하며 잊어버리기전에 써놓고 싶은..
엄마의 이야기 한 편.. ^^*
아낙님의 온기를 마음으로 전해 받습니다.. 제일 먼저 읽어주시고
잘한다 칭찬해주셔서 으쓱 힘이나고요 , 늘 감사드려요..^^*
왜 이리 좋은 시를 보면 너무 좋아 감동먹어 눈물이 스멀거리는지...
짭짤하게 깨달았다... 가을끝 홍시처럼 익어갔다... 어쩜 이런 표현을
글로 나타낼수 있는건지.... 부엌이란 단어가 정겹습니다. 감사해요^^*
세상의 모든 딸들이 공감할수 있는 코드를..살짝 울려봤어요.
이런 저런 글들을 블로그에 모으는 중이랍니다. ^^* 나중에
제 딸이 엄마생각을 할때 가끔 들여다 보며 웃을수 있게 해주고 싶어서..
저도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한편의 수필 감명 깊게 잘 보았습니다.
저에게도 소중한 유년시절의 기억이 아주 많이 담겨 있는 엄마의 부엌이네요.
데이지님~ 감사합니다. *^^*
아스팔트 위에서 별다른 놀잇감도 없이 자라나는 아이들은 보면..
어렸을때 제가 살던 고향의 모든 추억들은.. 천국의 그림처럼 떠올라지네요 ㅎㅎ
조금은 몸이 고단했을지 몰라도.. 그 때가 참 좋았었지요.
2월이고 첫 날인데.. 마음까지 적셔주는 고마운 비가 내리네요.
다시금 엄마의 밥상이 그리워 집니다.^^* 감사 드려요 별꽃님.
따뜻하네요 부엌이..
평생을 일을 다니시며 그 큰 살림을 해내시던 어머니
늦은 저녁 일을 마치시고 오셔서 뚝딱 김치를 담으시고 겉절이에 갖은 나물들
어머니의 부엌이 아스라이 떠올라 미소짓게 합니다..좋은글 감동입니다
뚝딱 하고 만들어 내시는 겉절이의 상큼한 맛이 순간 입안에 느껴지네요.
잠시라도 어머니에 대한 행복한 추억을 데이지네 부엌을 구경하며
함께 떠올려 주셔서....참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