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올려도 되나요? 앞에 보니까 세크매트 님이 '크리스마스의 유령'올리셨던데... 그래서 나머지도...
안되는 거면 삭제할게요.
어디서 펐는지는 기억이 안나네여. 그냥 한글에 담아놨던 거라서... 죄송함다.
퇴마록 외전 등교 1
오전 열 시.
공부에 시달리는 중고생들의 바쁜 등교시간에 뒤이어 직장인들의 밀고당기는 출근 행렬마저도 어느 덧 사그라지고 거리는 다시 한적함을 되찾았다. 가을날씨에 걸맞게 높게 솟아 뜬 햇볕은 화창했고 살랑살랑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함께 어울려 아주 돌아다니기에 좋은 날씨를 만들 어내고 있었다. 그런 속에서 낙엽이 부스스 흩날리는 거리의 얼룩덜룩한 나무 그림자를 등에 이고 가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때 이르게 회색의 긴 코트를 걸친 매우 커다란 체구의 장년 남자였고 또 한 사람은 흰 한복 저고리를 걸치고 있는 아주 작은 체구의 아이였다. 아이는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얼굴에 함박 웃음을 머금고 있었는데 목과손이 가늘고 호리호리 한데다가 키마저도 작아 그 아이가 손을 잡은 남자의허벅지 정도 밖에는 오지 않았고 살결은 하얀게 꼭 여자아이 같아 보였지만소매가 유달리 긴 한복저고리를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는 남자 아이였다.
얼굴은 희고 꽤 길게 치렁거리는 머리는 원래 복식대로라면 댕기를틀어야 했겠지만 지금은 그냥 옆으로 아무렇게나 살짝 묶어 뒤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걷고 있는 남자는 오십 정도 되어보이는 매우 온화한 얼굴을 하고 두꺼운 뿔테 안경을 끼고 있었는데 무엇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둘은 걸음을 옮겨 길모퉁이를 돌아서자 저만치에 평범해 보이는 학교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학교건물이 보이자 키 큰남자는 잠시 하던 생각을 멈추고 자기의 손을 잡고 따라오는 아이 쪽으로따스하지만 어딘지 걱정되는 듯한 눈길을 돌렸다. 그 사람은 천천히 걷는다고 걷고 있었지만 워낙 키 차이가 많이 나는 터라 보폭이 작은 아이는 반쯤은 달음질 치듯이 걷고 있었고 그러면서도 연신 즐겁다는 듯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들떠 있는 표정이 역력했다. 남자는 걸음을 멈추고는 다시 한 번 그아이의 위 아래를 훑어 보다가 나직하고 온화한 음성으로 말했다.
"준후야... 다른 아이들처럼 옷을 입고 가는 것이 어떻겠니? 지금이라도늦지 않았단다. 어떠냐?"
그러자 준후라고 불린 아이는 갑자기 명랑한 태도가 사그라들면서 우울하고 처량한 눈빛으로 한참이나 고개를 들어서 그 남자를 올려다 보고는 조그맣게 고개를 저었다.
"요즘 그런 옷을 입고 다니는 아이는 없단다. 다른 아이들과 같이 어울리 기 힘들지도 모르는데..."
"다른 옷은 못 입겠어요.. 너무 답답하고... 가렵고... 뭐가 막 나요... 박신부님... 그냥 갈께요. 네?"
그 말을 듣고는 박신부는 후 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며칠 전부터 보통 아이들이 입는 옷들을 사다가 준후를 보통 아이처럼 보이게 꾸미려고 많은 고생을 했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짧으나마 평생을 무명이나 삼베만 입어보아서 그런지 조금만 화학섬유가 닿으면 몸에 두드러기가 났고, 옷차림이 거북하다고 어느새 옷을 다 벗어던지고는 쪼르르 어딘가로 숨어버리기 일쑤였고 결국은 학교의 문턱에 이르러서까지도 박신부는 준후에게 한복을 입힌 차림 그대로로 학교에 데리고 올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박신부는잠시 회상에 잠겼다. 해동밀교라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큰 종교교파가역시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겁난에 휘말려서 한 사람의 생존자도 남지 않게된 지금, 그 당시 현장에 있었던 박신부는 이 의지할 곳 없는 아이를 데리고 올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좋은 고아원에 보내거나 입양을 하려고도 생각했었으나 이 아이는 보통의 아이들과는 전혀 달랐다. 해동밀교내에서 갖은 주술적인 힘을 부여받았고 상상할수도 없는 잠재력을 지닌 아이를 보통 사람들에게 맡길 수는 없었다. 또 이 아이는 사람들이 믿어주지않는 일들을 해결하는데에 일생을 바치기로 마음 먹은 박신부의 앞날에 커다란 힘을 보태 줄 수도 있는 귀중한 아이이기도 했지만 박신부는 그 아이를 자신이 하고 있는 험한 일에 끌어 넣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다만 그 아이가 자신이 배우고 익혔던 모든 것들을 잊고 보통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만들 작정이었다. 스스로 택한 길이 얼마나 험한 것인지 아는 박신부로서는다른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힘을 가지고 있는 아이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그 아이를 데리고 있는 사람도 그런 힘을 이해하고 있어야만했고 그래서 신부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박신부는 이 아이, 준후를 떠맡아 기를 수 밖에 없었다.
'모두가 운명이었었는지도 모르지...'
박신부는 다시 한 번 준후를 내려다 보았다. 준후는 박신부가 내키지 않는'옷갈아입기'를 다시 한 번 권하자 눈에 눈물이 글썽해서는 박신부의 코트자락을 꼭 붙잡고 사정하는 듯한 처량한 눈매로 박신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의 눈은 조금 눈꼬리가 올라가기는 했으나 아래로 축 처진 듯한 눈썹과 어울려 묘한 분위기를 이루고 있었고 그 눈 속의 검은 눈동 자는 너무나 맑았다. 박신부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꼬마의 어깨를 가만히 다독거려 주었다.
그러자 그 아이는 다시 생긋 미소를 지으며 박신부를 올려다 보면서 맑게 웃었다. 그 미소를 보자 박신부는 주변까지 다환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정말 착하고 마음씨 고운 아이야... 그러나 학교에 가서 자신을 숨기고
처음 준후를 데리고 나왔을 때, 준후는 모든 것을 굉장히 신기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겨우 아홉살인 이 아이는 해동밀교의 닫혀진 사원 내에서만 자랐고, 바깥 출입을 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준후가 그래도 세상일에 어느정도 적응하기 까지에는 (물론 아이는 무척이나 총명하여 사막에 물이 빨려 들어가듯이 빠른 속도로 모든 것에 익숙해져 갔지만) 이미 넉 달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였다. 이 호기심 많은 아이가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은맨 처음에는 당연히 텔레비전 이었고 며칠을 그 앞에 붙어 살던 준후는 학교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당연한 바램일수도 있었다.
해동밀교 내에 어린 아이는 하나도 없었고 준후는 내내 자신은 뭔가 남과는 다른, 가장 조그맣고 모르는 것이 많은 왜소한 버림받은 존재라고까지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아이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과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모여 여러가지 일들을 배우는 학교라는 곳이 있다면 본능적으로 어 떤 아이라도 그곳에 가고 싶어 할 것이었다. 그러나 이 아이에게는 호적도없었고 주민등록도 없었다.
더우기 사람들이 모르는 주술이나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도통했다 싶을 정도로 많이 알았지만, 정작 보통 사람들이 알고 익힌 것들은 하나도 알지 못했다. 한복 이외의 옷을 입는 것을 준후는철저히 거부했다. 그리고 어떤 종류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육류나 생선 등의 '비린 것'을 먹는 일에는 거의 기절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
국그릇에들어 있는 멸치만 보아도 자기 방에 틀어 박혀서 가엾다고 울고 극락왕생을빌곤 하는 웃지 못할 일까지도 종종 있었다. 하물며 그 멸치가 반으로 잘라 져 있는 것을 본다면 구토까지도 불사할 정도였다. 물론 지금은 어느정도나아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살생'에 관련 된 것에는 대단히 심각한 반응을나타냈다.
더구나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아이의 능력이었다. 영을 불러내거나 주술적인 힘을 끌어다가 쓰는 등의, 보통 사람이 보기에는 이해될 수 없는 그런 힘을 지니고 있는 아이. 그리고 아직 어리고 분별이 없는 준후가 과연 자신을 잘 감추고 보통 아이들처럼 학교 생활을 해 나갈 수 있을것인가? 이런 면들이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박신부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결국은 준후가 빨리 세상 일에 적응하게 하려면 학교에 보내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라고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준후도 이제부터는 세상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살아갈 수 밖에 없고, 그러자면 싫든 좋든 세상 속에서 사는 법을 배워야만 했다.
그것은 누가 가르쳐 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준후 스스로 깨닫고 익혀야 하는 것이라고 박 신부는 생각했다. 그래서 조금 위험부담이 있다고 하더라도 준후를 학교에보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마도 별다른 일을 저지르거나 하지는 않겠지. 총명한 아이니까...'
막 교문 안으로 들어서기 전에 박신부는 설레임과 기대에 들떠서 교문 안으로 막 뛰어 들려고 하는 준후를 세우고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준후의 얼굴을 똑바로 보고 미소를 지으면서 다시 한 번 당부했다.
"준후야. 아마 학교에서 다른 아이들이 네 옷 모습이나 네 행동을 보고 비웃거나 놀리는 일이 있을지도 몰라. 그래도 화내거나 하면 안된단다."
준후는 눈을 크게 뜨고 박신부를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알고 있어요. 저도 다른 애들이 이상하게 보이는 걸요. 그런데... 모습이달라 보인다고 놀리는 것은 나쁜 일 아닌가요? 저는 그러지 않을테지만...그런데 다른 애들이 정말 저에게 그럴까요?"
박신부는 씁쓸하게 미소만을 띄워 보였다. 그리고 준후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그 애들이 나빠서 그런 것은 아닐거야. 다만 장난을 조금 치는 것 뿐이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그 애들을 이해해 주렴. 알겠니?"
"알았어요. 옳지 않은 행동이라면 남들이 다 한다해도 나부터 하지 말아야겠죠. 그런 내용을 경전에서 많이 보았어요."
"그래그래.. 착하구나.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네가 지닌 주술을 쓰면안된단다. 알겠니?"
"주술요? 술법들 말이지요?"
"그래.. 여러 번 이야기 했다만, 세상에서는 그런 것을 쓸 필요가 없단다.특히 여러 사람이 모인 학교같은 곳에서 그런 것을 쓰면 안된단다. 사람들을 놀라게 하면 안되니까 말이야.."
"그런 것 때문에 사람들이 놀라나요? 이상하다..."
"놀라지. 그리고 더군다나 사람들은 뭐든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보면 그것을 배척하려고 하기가 쉽단다."
"그래도..."
"어쨌거나 그러지 말렴. 알겠지?"
"네..."
이런 식으로 몇 가지의 가장 걱정되는 면들만 다짐을 받아두고 나서 박신부는 준후와 함께 학교 안으로 들어섰다.
다행히 이 학교의 교장선생은 자신과 대학 동기였고 어느 정도의 친분도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곳의 교장선생이 자신의 일을 어느정도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1년쯤 전에 이 학교에서 벌어졌던 괴사건을 자신이 해결해 준 일이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가능한 것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 덕분에 서류를제대로 갖추지 않은 준후일지라도 적당히 처리하여 받아 들여주기로 약속을받아 놓은 터였다. 박신부는 교장실에 들어가기 직전, 다시 한 번 준후를조금 걱정이 되는 눈빛으로 내려다보고는 교장실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여러분에게 새로운 친구를 소개하겠어요."
준후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키가 커서 고개를 돋우지 않고는 볼 수 없는, 아니 위로 올려다 볼 염두를 내지 못했던 여선생의 목소리가 남의 귀를 통해 울리는 것처럼 공허하게 울려왔다.
준후는 앞을 보고는 있었지만 차마 눈을 아이들 쪽으로 향할 수는 없었다. 수없이 모여있는 아이들... 다른 자기 또래의 아이들도 여태껏 몇 만나보지 못한 처지에 이렇게 많은 아이들이 한 데 모여있는 곳에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그 수많은눈동자들을 직접 대할 자신이 없어서 준후는 저만치 위에 걸려있는 그림들과 사진들 쪽으로 눈을 돌리고 있었다. 이미 등골과 겨드랑이는 긴장되어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입에서는 왠지 단내같은 것이 나는 것 같았다. 무척먼 거리를 쉬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하여 달음질 치고난 다음 같은 기분이었다.
"새 친구의 이름은 장준후라고 해요."
'장준후... 내 이름과 같구나.'
준후는 멍하니 생각하다가 그 이름이 다른 이름이 아니라 자기의 이름인것을 깨달았다. 이 많은 아이들 앞에서 내 이름이 불리워지다니... 갑자기준후는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 많은 아이들이 준후에게 적의나 적대감을 지니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과는 달리 왠지 은근한 무서움과 두려움이 전신을 휩싸는 것은 막을 수가없었다.
'신부님한테 돌아가고 싶은데...'
신부님은 교장실이라고 하는 곳에 있을 것이었다. 얼마 되지 않았으니 아직까지 거기에 있을 것이었다. 신부님의 커다랗고 따뜻한 손을 잡고 교장실로 들어가자 왠 대머리의 아저씨가 있었다.
준후는 빛나는 머리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합장을 해 보였다. 해동밀교에서 자라서 깎은 머리 를 많이 본데서 비롯된 반사적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 아저씨는 그런 준후를 그냥 미소로 맞이해 주었었다. 그리고 준후의 이름을 물었고 준후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스님의 법명은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다....
그 아저씨가 왜 얼굴이 조금 긴장되는지 준후는 알지 못했지만 그런 그 아저씨의 뒷켠에 신부님의 집에 걸려있던 것과 같은 십자가들과 어느 아름다운 여인의 조각이 있는 것을 보고 막연하게 자신이 무언가 잘못한 것 같다는 느낌만을 받았을 뿐이었다.
뭐 신부님과 어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준후의귀에 하나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이야기 하지 않는 말소 리들, 즉 자기자신에게 거는 말 이외의 말들을 준후는 듣지 않았다. 머리위쪽으로 지나쳐가는 여러가지 말들을 준후는 하나도 잡아내지 못했고 다만어떻게 하면 실수하지 않고 지나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할 뿐이었다.
잠시 시간이 지나고 또 다른 화려한 색깔의 옷이 준후 앞에 와서 섰다. 치마 를 입은 것을 보아 여자인 것 같은데... 그 여자는 준후의 손을 잡고 교장실을 나섰다. 신부님의 손보다 작고 부드러운 손이었지만(그래도 준후의 손보다는 훨씬 컸다.) 그만큼 따뜻하지는 않았다.
그 여자 - 여선생님은 준후에게 친절한 듯한 소리로 뭐라고 말을 했지만 준후는 멍해서 잘 알아듣지 못했다. 그냥 예.예.. 하고 건성으로 대답했을 뿐이었다. 지나가는 길은 화양했다. 해동밀교처럼 단청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친숙한 천왕상이나 탱화들이 그려져 있지도 않았다.
회록색
의 밋밋한 벽. 간혹가다가 흐린 분홍으로 변할 뿐인 멋없는 벽. 추녀끝같이 멋지게 휘어진 곳도 없는 오로지 직선 의 나열. 창밖으로 언뜻보이는 넓은 도량(道場 - 운동장)에는 석탑은 고사하고 비석하나 보이지 않았다. 황량해보이고 너무도 다른 환경. 너무도 다르고 많이도 다른 환경.
그리고 한번도 만나지 못했던, 그러나 한 번에 너무도 많이 만나게 된 아이들.
"준후야? 아이들이 기다리잖니?"
여선생님의 말에 준후는 다시 퍼뜩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여선생의 미소띈, 그러나 무엇인가를 재촉하는 듯한 얼굴이 보였다. 안경을 끼었고 좌우간 절에서 보았던 화상들보다는 곱게 생겨 보였다.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준후의 굳어진 말투에 아이들이 모두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이건 절대국민학교 3학년아이들의 말투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아까 처음들어올 때부터 아이들은 수군거리면서 킥킥거리곤 했었다. 남자 아이라는데머리는 길게 길러서 묶어 뒤로 따내리고, 옷은 헐렁한 한복같은 새로운 패 션을 소개해 주고 있는 처지였으니. 더구나 그 말투란...
아이들은 순수한의도로 웃은 것이지만 쩡작 당사자인 준후는 얼굴이 자신도 모르게 빨갛게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준후는 아이들 하나하나의 눈을 똑바로바라볼 용기는 없었다.
"네 소개를 하라고 했잖아. 모두들 기다리는데."
선생님의 말이 다시 한 번 떨어지자 준후는 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그랬었지. 비록 아이들이 웃기는 했지만 준후는 나름대로 위엄을 지켜볼 생각이었다.
"통성명을 하라는 말씀이시군요. 알겠습니다."
다시 한 번 퍼져간 웃음의 물결을 준후는 잠시동안 눈을 꼭 감고 넘겼다.왜들 웃는걸까? 나는 이렇게 정중하려고 애쓰는 중인데. 이렇게 참고 노력하고 있는데. 그리고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선생님은 애써서 웃음의 물결을 유연히 가라앉히려 애쓰고 있었지만 준후는 신경쓰지 않고 뒤로 돌아섰다.
뒤에 검은색의 판과 흰막대기들이 보였다. 텔레비전을 보아두었던 덕에 준후는 그것이 임시로 글자를 쓰는 도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당당하게 흑판을 사용할 줄 아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마음 뿌듯한 생각까지 들었다.
잠시 후, 약간의 수근거리는 소리가 웃음을 누르고 교실 안에 울려퍼졌다.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요 조그마한 아이는 분필을 집어들더니 휙휙 소매자락 소리가 나게 칠판에 자신의 이름을 한자로 적은 것이다. 그것도 초서체의 한문, 아이들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달필로. 선생님만이 간신히 그 글자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준후군.. 서예 배웠나요?"
아이들 중에서도 서예를 배우는 아이들은 있었지만 거의 먹 가지고 장난이나 치는 정도였을 것이다.
우연히 그 여선생은 14년 동안 서예를 배워온 사람이라 비록 칠판의 백묵 글씨였기는 하지만 준후의 필체에 뭔가 다른 것이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준후의 대답 은 뜻밖이었다.
"특별히 배운 적은 없습니다."
"초서로 쓰면 아이들은 모를텐데.."
그러자 준후는 다시 얼굴을 붉히고는 칠판을 소매로 슥슥 문질러 지웠다.
그것을 보고 다시 웃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아까보다는 그 수가 적었다. 그리고 준후는 이번에는 해서체의 또박또박한 정자로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여선생은 그 필체 또한 거의 달필인 것을 보고 놀랐다.
"참 잘 쓰네요."
"감사합니다."
준후는 기분이 좋아졌다.
해동밀교 내에서도 신동소리를 듣고 글씨에 힘이있다고 수없이 칭찬을 받던 터였는데 그런 것을 알아주는 선생님이 고마워졌다.
시나 경문이라도 한 수 적어볼까 준후는 생각했지만 선생은 준후가백목을 놓지 않는 것을 보고는 무언가 약간의 위기감을 느낀 듯, 준후를 호 명하여 자리를 알려 주었다.
"저어기. 은경이 옆자리에 앉아요. 자. 다른 친구들도 새친구를 환영하는 뜻에서 박수를..."
말이 떨어지자 준후에게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물론 꼭 준후를 반갑게 여기는 것만은 아니었고 무의식적으로 치는 아이들도 많았지만 준후는 이유도모르고 마음이 설레고 쀼듯할 뿐이었다.
준후는 얌전하고 기품을 잃지 않도록 뚜벅뚜벅 걸어서 자신의 자리로 갔다. 그 옆자리에는 귀여워 보이는 여 자이이가 웃으며 준후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아이다.'
준후는 생각했다. 직감적으로 알았다고 해도 좋았다. 생전처음으로 가까이에서 보는 여자아이였다. 어딘지 모르게 남자들과는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그러나...
"잠시 옆에 앉겠습니다."
준후가 꾸벅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자 아이들은 이번만은 더 참지 못하고큰소리로 웃었다. 선생님도 우스웠지만 참 인사성도 밝다고 돌려 말했다.그러나 준후 옆자리의 은정이의 마음은 그리 편하지 않았다.
처음 온 아이가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될 뿐이었다. 그래서 뾰루퉁하게 준후의 옆 얼굴을 노려보았지만 준후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준후의얼굴은 촌뜨기치고는 몹시 하얗고 갸날퍼 보였다. 그리고 같은 아이의 입장에서도 몹시 귀엽고 예뻐 보였다. 그러나 그런 준후의 고운 얼굴에 이유모르게 의젓하고 뭔가 범할 수 없는 기운 같이 것이 느껴져서 은정이는 속으로 깜짝 놀라면서 다시 시선을 휙 돌렸다.
박신부는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면서 현암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셋이 만나서 함께 행동하기로 마음을 정한 이후로 현암은 준후와 더불어 박신부의 은신처(?)에 함께 살기로 했으므로 현암이 집 안에 있는 것이특별히 놀라울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현암을 보고 박신부는 의외라는 빛 을 띄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암은 이틀전에 수행을 나간다고 퍼뜩 밖으로나가서 며칠 걸려야 돌아올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네, 어쩐 일인가?"
박신부가 묻자 현암이 입을 열었다.
"그냥 왔습니다. 준후는 어디 있지요?"
"학교에 갔다네."
그 말에 현암은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학교요?"
"그래. 준후도 학교에는 가야 할 것이 아닌가. 지금 보내놓고 오는 중이네."
"준후는 주민등록번호도 없고 그리고 또..."
"내가 좀 아는 동창이 교장으로 있는 학교네. 전후사정 묻지 말고 받아 달라고 했지..."
현암은 그 말을 듣고나서 예의 무뚝뚝한 표정으로 돌아와서는 잠시 말없이앉아 있었다. 박신부는 현암이 별다른 말이 없자 눈에 띄어 보이지 않으려고 입었던 외출복을 몸에 익숙한 사제복으로 갈아입으러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박신부가 사제복을 입고 다시 마루로 나왔을 때에도 현암은 아까의 자세 그냥 그대로 앉아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표정이었다.
"왜 그러나? 불안해 보이는군."
현암은 박신부의 말에 힐끗 박신부를 올려다 보고 대답했다.
"신부님도 안색이 편안치만은 않으시군요."
박신부는 그 말을 듣고는 역시 찔끔했다. 사실 준후를 학교에 놓고 온 것이 불안하기는 했다. 아직 세상물정도 알지 못하는데다가 남 모르는 큰 힘을 지닌 아이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원래가 똑똑한 데다가 꽤 오랫동안 교육을 시켜온 터라 별다른 일이야 없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일말의 불안과 걱정은 가시지 않았다. 박신부는 현암과 꼭같은 얼굴표정이되어서는 현암의 옆에 앉았다.
"별 일 없을까요?"
"하긴 나도 걱정은 되네만...."
"좀 성급했던 것은 아닐지요..."
현암은 박신부가 얼굴에 불안해하는 빛을 띄우자 드디어 자기의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준후는 아직 아홉살입니다. 물론 나이에 비해 놀랄만큼 똑똑하고 의젓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이일 뿐이에요. 더구나 그 애가 가진 능력을 다른 사람들이 알기라도 한다면..."
그러나 박신부는 고개를 저었다.
"그 애는 절대 주술을 함부로 쓰지 않을걸세."
"물론 그렇습니다. 준후는 그전까지 자기가 아버지라 믿고 있었던 서교주를 자신의 손으로 공격했어요. 그리고 돌아온 이후에도 밤마다 며칠간을 울고 괴로워했는지 모릅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네. 그리고 그 애가 맹세하는 것을 나는 들었지. 본의아니게 엿들은 셈이 되었지만 그 애는 절대 사람에게는 주술을 쓰지 않는다고 속으로 다짐하는 것 같았네."
"그러나... 화가 나는 일이 생기면 어떨까요? 누군가가 급한 지경에 빠진것을 보게 되면요?" 현암은 자신의 오른손을 펴서 그 손에 뭐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한참동안들여다보며 말했다.
"제가 어렸을 때... 저는 몹시 몸이 약했습니다. 운동신경도 둔하고 한달이면 반은 병으로 앓아 누웠었죠. 그래서 중학교때부터 기공선원에 나갔고기계체조를 배우고 했습니다. 그러나..."
현암은 피식 웃었다.
"너무 재능이 없다고 1년만에 거의 쫓겨나다시피 했죠. 그때 제가 한 생각이 뭔지 아십니까? 힘이 생기면 모두 다 코를 납작하게 해주겠다고 저는 다짐했었습니다. 그때 제 나이는 열 네살이었어요."
박신부는 아무 대답 없이 묵묵히 현암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현암은다시 오른손을 꼭 쥐어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결국 그러다가 열 여섯에 양친을 잃고... 스무살이 넘어서 동생마저 잃었죠.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지금의 힘을 얻었습니다. 하하... 제가 어떻게지내온지 아십니까? 자세히 이야기 한 적이 없었죠?"
박신부는 거의 건성에 가깝게 보이도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현암의이야기를 건성으로 듣는 것은 아니었다. 옆자리에 앉아있다 보니 고개를 돌리기도 뭣하고 해서 그러는 것 뿐이었다.
남의 과거를 듣는 것은 신부의 중요 일과중의 하나였지만 박신부는 현암의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처럼 들을수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척 휘두르고 다녔습니다. 이 주먹... 이 힘... 물론 옳은 일에 써야 한다고 다짐하고 있었고, 실제로도 그런다고 생각하고 다닌 거죠. 눈에 보이는 옳지 않은 일들은 모조리 주먹으로 바로 잡으려고 했었습니다. 폭력배한 무리를 모조리 시궁창에 쳐 넣어 버린 일도 있고 몇사람은 병원에 입원시킨 적도 있습니다.
아직도 어느 지방에 가면 저를 주먹패의 전설적인 존재로 떠들고 있는 데도 있을 겁니다. 하하.... 하지만 결국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이런 힘을 인간사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을 깨닫게는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러기까지에는 몇 년이 더 걸렸습니다.
스무살이 훨씬 넘어 가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거죠... 그리고 스무살이넘으면서까지도 옆에서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것에 현혹되어 움직인 일이 수도없이 많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동물원 원숭이가 되는 거죠. 특이하면 할수록,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런 보이지 않는 불행도 커지는 거라고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저는 준후가 저보다는 훨씬 똑똑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아직 어리고 사람을 대해본 경험이 없어요. 아이들이 모여 있는 학교에 간다면 어떨까요? 좀 두서없었습니다만 저는 그것이 불안한 겁니다."
박신부도 현암의 말을 들으면서 계속 불안한 듯한 표정이 짙어져 갔다. 그러나 박신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현암은 길게 이야기를 했는데도 박신부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신부님... 저는 준후가 불쌍합니다. 그리고 그 애를 더 불행하게 만드는것은 원하지 않아요. 그 나이 또래의 아이가 친구를 찾고 학교에 가는 것은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준후가 더욱 불행해질까봐 저는 두렵습니다."
"나도 그런 건 원하지 않네. 하지만..."
박신부가 조용히 입을 열자 현암은 말을 끊고 박신부의 이야기를 진지하게경청했다. 박신부는 퍽 마음이 무거운 것 같았다.
"준후가 정말 불행해 질지 아닐지는 모르는 일이네. 그건 그 애에게 달린일이야. 글쎄. 자네 말은 다 맞는 말이야. 그러나 그건 하나의 가능성 아닌가? 정말 그 애가 학교에 적응할 지 못할지는 모르는 일일세."
"구십구 퍼센트 힘들겁니다."
"그러나 나머지 일 퍼센트도 생각해야지. 나도 사실 그런 걱정을 했었고,지금도 하고 있네. 그러나 그건 준후가 결정할 문제야. 아무리 어리고, 아무리 경험이 없어도 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하네."
"그러면.. 혹시 신부님은 준후가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일부러 보내신 것은 아닌가요?"
"그런 마음이 없다고 할 수도 없네만, 또 그렇다고 볼수만도 없네. 생각해보게. 준후는 어리지만 착하고도 마음이 강한 아이네. 그리고 똑똑하고. 그런 아이에게 우리가 생각한 세상만을 보여줄 수는 없다고 나는 생각해.
아무리 우리가 그 애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려고 해도, 역시 우리는 그 애의 입장에서 그럴 수는 없네. 그 애가 세상을 보게 해 줘야 하고, 그 애가 판단을 내리게 해야 하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학교에 보내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고..."
박신부는 잠시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준후가 이대로 계속 학교에 다니면서 보통 아이로 변해준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지. 그러나 준후가 학교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다니기 싫어한다면그것 또한 할 수 없는 일이네. 조금 잔혹한 일이라고는 생각되지만 그 애는남모르는 힘을 지니고 있네.
그 힘에 짓눌리지 않으려면 그 애는 그에 따른 책임을 배워야 하네. 그것도 자기 스스로 말이지... 준후가 더 괴로워하고더 힘들어질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우리의 보호 속에 묶어 놓으려고만 한다면 언젠가 세월이 지나고 시간이 흐르면 반드시 폭발하게 될걸세.
당장 괴롭고 힘들더라도 스스로 선택하게 만들어 주세."
그러나 현암은 고개를 저었다.
"분명 옳으신 말씀입니다만 저는 동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뼈가 부러지고 나면 더 튼튼하게 붙는다지만, 그렇다고 뼈를 일부러 부러트릴 수는없는 것 아닙니까.
준후 스스로 학교에 가고 싶어는 했지만, 좀 더 시간이지난 다음에 해야 했습니다. 어쨌거나 아직 준후는 너무 어립니다."
"자신이 어리다고 생각하는 어린아이는 없네. 하물며 우리는 그 애의 부모도 아니야. 언제까지 얽어둘텐가? 모든 부모들의 잘못이 자식을 생각해 준다는 명분에서 비롯되는 것을 모르는가?"
현암은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쉬면서 입을 다물었다.
박신부도 사실괴로워하는 것 같아서였다. 박신부늬 마음을 현암은 이제는 잘 이해할 수있었다.
그러나 현암 스스로가 선택을 했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마음 속에 응어리처럼 남아있었다. 그러나 지금 뭐라고 할 만큼 자기의 생각이 옳은 것 같지도 않았다.
"우리 지켜보세. 준후의 반응을 보고 그때 다시 결정을 내려도 늦지는 않을걸세. 일단은 그 애 스스로의 선택에 맡기도록 하세..."
"알겠습니다. 기다려 보죠..."
현암과 박신부는 나란히 앉아서 저마다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조용히 복잡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퇴마록 외전 수업1-
준후가 처음으로 맞이한 수업, 그 첫째 시간은 산수 시간이었다.
산수라고한다면 준후와는 전혀 연관이 없는 과목이었으니 맨 첨은 근사하게 자신의소개를 했던 준후로서는 상당히 불행한 일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까지는 상상한 일이 없을 정도로 많은 아이들 사이에 파 묻혀 있는준후는 그저 얼떨떨하다는 느낌밖에는 없었고 산수책을 꺼내라는 말에도 채반응을 하지 못하고 그냥 멍하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준후 군은 아직 책 준비가 안되었을테니 옆의 은정이랑 같이 책을 보세요. 그리고 여러분, 모르는 것이 있으면 꼭 질문을 하시기 바래요."
여선생의 친절한 듯한 말에 뒤이어 옆의 여자아이가 책을 펴서 슥 앞으로내미는 것이 준후의 눈에 들어왔다. 그와 더불어 소근거리는 듯한 소리가들려왔다. 그때까지 멍하니 , 구름 위를 둥둥 떠 다니는 듯한 기분으로 앉아 있던 준후는 그 소리를 듣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넌 왜 그런 옷을 입었니?"
준후는 조금 의아해 했다. 역시 옷 이야기구나... 신부님도 그랬었는데...왜 남이 옷입은 것에 관심을 가질까...
"편해서."
준후는 그냥 짧게 대답하면서 책쪽으로 눈을 돌리다가 다음 순간 눈살을찌푸렸다.준후도 한문도 잘 알고 있기는 했지만 한글에 대해서도 이미 익힌지 오래되어 읽지 못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준후가 본 책에는 생전 처음 보는 이상한 것들이 그려져 있었다. + 나 = , X 같은 것들은 준후로서는 난생처음보는 기호요 표식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이게 뭐지?"
준후는 옆의 은정이에게 더하기 표시를 짚으며 물었다.
"책."
은정이는 준후가 더하기 표시를 가리킨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말했다.준후는 다소 황당했지만 다소 창피한 기분도 들고 해서 더 말을 잇지는 못했다.
사실 항상 신동 소리만 들어온 준후로서는 자신이 하나도 모르는 것만이 가득 적힌 책을 눈 앞에 놓았을 때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하물며 주변의 다른 아이들은 당연히 그 내용을 알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준후는 선생님의 설명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준후로서는 섭섭할 정도로자세히 설명을 해주고 있는 것 같았지만 막상 그 근본이 되는 단어들을 하나도 알지 못하니 전반적인 윤곽을 도대체 잡을 수가 없었다.
파이 라는 것 은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 하는 것이며 퍼센트라는 것은 대체 또 무어란 말인가?
솔직한 이야기로 준후는 아라비아 숫자에도 별로 익숙하지 못해서 보고 조금 생각을 하여야 이것이 7이 七을 의미하는 것이고 8이 八을 뜻한다는 것을 알 정도였으니 말이다... 준후에게 있어서 이것은 하나의 충격이었고 비록 준후가 자만심이 많은 아이였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동안 가져왔던자부심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준후는 잠시 입술을 깨물다가 손을 번쩍 들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질문하라고 했으니...'
설명을 한참 진행중이던 선생님은 준후가 손을 들자 설명을 잠시 멈추고미소를 지으며 준후를 바라보았다.
"네? 준후군?"
"자세히 설명 해 주시겠습니까?"
준후의 아이답지 않은 말투에 다른 아이들이 다시 킥킥 웃어댔다. 그러자선생님은 주변을 조용히 시킨 다음 다시 설명을 시작하려 했다. 그러나 준후가 이번에는 손도 들지 않고 말했다.
"그것말고 말입니다. 선생님. 설명하시는 부호들에 대한 설명을 좀 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부호요?"
"네. 선생님. 파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이번에는 아이들이 더 참지 못하고 와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준후는 심각한 얼굴이었고 아이들이 왜 웃는지조차 알지 못했지만 아이들로서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요즈음은 일학년들도원주율인 파이에 대해서는알고 있으니 아이들은 설마 준후가 그것을 모르고 있을 것이라고는 아무도생각하지 않았고 다만 준후가 뻔뻔스럽게도 엉뚱한 질문을하여 선생님에게장난을 거는 것으로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리고 준후에게도 불행한 것은 선생님도 그렇게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만약 준후가 애초에 한자로 이름을 쓰거나 하지 않았다면 준후가 정말 몰랐다고도 생각할수 있었을 테지만 준후가 보통 지능을 가진 아이가 아니라고 미리 선입관을가지고 있는 상태에서는 준후의 행동을 자연스러운 것이라 생각할 수가 없었다.
좌우간 아이들이 웃음을 터트리고 선생님도 잠시 망연자실하여 서 있는 사이 아까 처음 준후가 들어왔을 때부터 준후를 곱지않은 눈으로 쏘아보던 구석의 한 남자아이가 깔깔 거리며 소리쳤다.
"파이는 빵의 일종이야. 깔깔.."
"조용히 하세요!"
선생님은 이번에는 화난 듯한 목소리로 소리치고는 준후에게 물었다.
"준후군. 정말 몰라서 묻나요?"
"네... 그리고 퍼센트나 플러스 라는 부호에 대해서도 알려주셨으면..."아이들은 더더욱 크게 웃었다. 속으로는 통쾌하게 느꼈는지도 모른다. 준후라는 전학생은 보기보다 엄청난 말썽장이이거나 막되어 먹은 고집쟁이가분명하다고 다들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좌우간 그 순간과 그 다음에 일어난 사태에 대해 준후는 조금도 그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왜 선생님이 자신을 앞으로 나오게하여 험한 얼굴로 야단을 치는지, 왜 구석을 보고 서 있으라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질문을 하라고 그랬으면서!더더욱 나쁜 것은 준후가 앞으로 나가서 구석을 보고 서 있는 동안에 일어났다.
선생님이 설명을 하면서 칠판에 필기를 하려고 뒤로 돌아섰을 때, 교실에 앉아 있던 몇몇 악동들은 종이를 꾸기거나 지우개를 토막내거나 쉬는시간에 주워두었던 백묵조각을 꺼내거나하여 그것을 준후의 뒤로 돌아선 머리를 향해 휙휙 던졌다.
준후는 그냥 비통한 심경으로 뒤로 돌아서 있었는데 무언가가 자꾸 탁탁 뒤로 날아와 맞는데에 신경이 자꾸 거슬려졌다. 준후는 뒤를 돌아보았는데 그러자 몇 아이들은 선생님이 뒤로 돌아서 있는 틈을 타 아예 노골적으로 혓바닥을 뱀처럼 낼름거려 보이면서 뭔가를 자꾸 던져댔다.
그러나 다음순간 선생님이 필기를 마치고 뒤로 돌아서려 하자 아이들은 마파람에 게 눈이 쏙 들어가듯 무섭게 빠른 속도로 후다닥 원위치로돌아갔다. 선생님은 뒤로 돌아서다가 준후가 시킨대로 벽 쪽을 보고 있지않고 아이들 쪽을 보고 있는 것만을 보았다.
그래서 선생님은 다소 화가 난듯한 어조로 말했다.
"준후군. 벽 보고 서 있으라고 하지 않았나요?"
"서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고 있지 않잖아요?"
"아이들이 자꾸 뭘 던져서요. 죄송합니다."
준후의 말이 떨어진 순간 교실 내에는 처연한 기분이 감돌았다.
물론 준후는 자신이 잘못한 것은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어린 아이들의 사이에서 친구들의 작은 장난을 선생님에게 바로 이야기 한다는 것은 일종의 고자질로서 용서받기 힘든 죄악이라 할 수 있었다. 특히 남자아이들 사이에서는 더하다. 여자아이가 그러는 것도 용남이 잘 되지 않는데 하물며 남자아이가 친구의 장난을 바로 선생님께 이른다는 것은 일종의 배신행위로 자연스럽게 인식되고 있었다.
그때까지의 일종의 장난스러운 기분이 갑자기 증오의 기운으로 바뀌는 것을 눈치빠른 준후는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왜 그렇게 분위기가 바뀌어가는지에 대한 인식은 불행히도 아직도 준후에게는 없었다.그러는 사이, 선생님은 정말 준후의 말을 듣고는 땅바닥을 살펴보았다. 준후의 말의 증거는 숱하게 있었다.
노트를 찢어낸 휴지조각들과 백묵조각,지우개 조각등등이 준후의 발 밑에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다.
그것을 보고선생님은 친구들을 자연스럽게 이르는 준후의 말에도 약간의 작은 반발심은느꼈지만 그보다는 전체 아이들에 대해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준후군은 잠시 복도에 나가 있어요!"
준후는 도대체 이 모든 일에 대한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것이당연한 일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준후가 복도로 나가서 망연히 밖을 보는동안 교실 안에서는 선생님이 화난 목소리로 긴 훈시를 하고 있었다. 새로들어온 친구에게 잘 대해 주라고 말했는데 그것이 고작 이런 것이냐는, 그동안 여러분에게 말하고 가르친 것을 이런 식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냐는등의 따가운 말투가 한참동안 이어졌다. 아무리 선생님이 타이르는 것이라고 할 지언정 꾸중을 듣는 것이 아이들에게 기분 좋을 리는 없었다.
더군다나 그것을 선생님의 관심이라고 잘못 오인할 경우에는 더 큰 오해를 살 소지도 많은 법이다. 하물며 사실 준후는 잘 알지 못했지만 그 선생님의 반에는 두석이라고 하는 말썽꾸러기가 있어서 문제가 많았었는데 그 두석이가창 밖의 준후를 심술궂은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복도 밖의 준후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