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을 생각하는 일이란 마음이 울렁거리는 일이다. 바람 불면 그곳이 어디든 따라나서고 싶고, 바람 들면 온몸이 저절로 살랑살랑 나부끼게 되고, 바람나면 불타는 두 눈에 세상 보이는 것 아마 없으리. 바람을 생각하는 일이란 사무치는 일이다.
빈자리를 어루만지는 부재와 상실, 추억과 그리움으로 가슴이 시리고 뼛속까지 시리리. 그리고 바람을 생각하는 일이란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다. 물처럼 세월처럼,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지나고 나면 흔적도 없으리.
삶이, 사랑이, 시(詩)의 말이 바람이라고 생각한 적 있다. 바람(願)이고 바람(風) 같아서 간절한 것들이다. 이 시를 읽노라면 간절하게 그리운 부재가 떠오르고, 간절하게 따뜻한 배려가 떠오른다. 몸을 떠나 영혼으로 떠돌며 사랑하는 사람 곁을 지키던 영화 「사랑과 영혼」, 그 애끓는 바람의 영혼도 떠오른다.
서로 떨어져 있어도 사랑의 괴로움과 사랑의 피로까지 함께하는 바람의 마음. 그렇게 따뜻한 바람이라면 “가끔”이 아니라 매일 매일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고 싶다. “목숨을 걸면 무엇이고/ 무섭고 아름답겠지./ 나도 목숨 건 사랑의/ 연한 피부를 쓰다듬고 싶”(「성년의 비밀」)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이 시는 조용필이 부른 「바람이 전하는 말」의 노랫말과 흡사하다. 1980년대에 발간한 시집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에 수록된 이 시가 5년쯤 먼저다. 의사이기도 한 마종기 시인은 고희를 앞두고도 여전히 젊고 댄디(dandy)하다.
어떤 선입관이나 고정관념이나 권위로부터 자유롭다. 동화 작가 마해송과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 무용가 박외선 사이에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서울에서 성장해 의과대학 재학 시절 시인으로 등단했으며,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40여 년간 방사선과 전문의로 지내며 시를 써 왔다.
그의 투명하면서도 울림이 깊은 시에 유난히 위로받고 행복해하는 마니아들이 많다. 오롯한 그리움과 따뜻한 진심이 느껴지기 때문이리라. 누군가 말했다. 그의 시는 ‘맹물’ 같다고. 어느 날 마시면 상쾌하고 시원하고, 어느 날은 목이 메고 어느 날은 아무 맛도 나지 않는다고.
“나는 이제 고국에서는/ 바람으로만 남겠네”(「산수유」)라는 최근 시의 구절이 떠오른다.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라는 이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과 함께 그는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의 시민임이 분명하다. 저 바람처럼.
-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1, 한국 대표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정끝별, 민음사, 2018)’
「바람이 전하는 말」은 가장 시적인 노랫말로 지금도 사람들의 폭 넓은 사랑을 받고 있다. 양인자 작사, 김희갑 작곡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노래의 화자는 ‘바람’이다. 지상을 떠난 한 영혼이 ‘바람’이 되어 지상의 남은 이에게 들려주는 사랑의 노래인 셈이다. 지상에는 여전히 “행복한 너”가 살고 있다. ‘너’는 ‘나’를 잊어가지만 어느 순간 갑작스레 찾아오는 “홀로인 듯한/쓸쓸함”을 맞을 것이고, ‘나’는 그때 불어오는 바람의 말에 귀기울여 보라는 말을 건넨다.
덧붙이자면 이 노래는 마종기 시인의 작품 「바람의 말」과의 유사성 때문에 여러 논의가 있었다고 한다.
광범위한 영향을 인정할 수 있고, 또 어떤 어휘는 정확하게 재현되고 있기도 하지만, 시인의 양해 하에 독립된 노래로 우리의 가슴 속에 남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쓸쓸한 저녁에 불어오는 ‘바람이 전하는 말’을 오랫동안 오롯이 들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