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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맛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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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리마인드(자유게시판) 스크랩 친구 / 고은
빈의자 추천 0 조회 201 16.05.16 13:37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여보게
자네가
파놓은 흙으로
내가
부처를 만들었네
비가 와
그 부처
다시
흙으로 돌아 갔다네

부질없기는
비 온 뒤
갠 하늘이라니

ㅡ고은, 친구ㅡ



시인 고은. 우리는 그를 노벨문학상 후보라든지 한국의 대표적인 참여 작가라고 부른다.

하지만 시인은 그냥 시인일 뿐, 그 앞에 붙이는 수식어가 화려할수록 진가는 되레 바랜다.



‘20세기 세계문학사상 최대의 기획’이라는 [만인보(萬人譜)]의 고은. 1958년 등단한 이래 53년간 시, 소설, 평론 등의 저서를 150권 이상 세상에 내놓았고, 국내외 문학상 15개, 훈장 2개를 수상했으며, 세계 25개 국어로 번역서가 출간된 작가.

하지만 시인 고은의 청춘은 절망에 가까웠다. 수차례의 자살 시도가 있었고, 10년간 승려의 삶을 살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는 소년 시절 품었던 꿈을 놓지 않았고, 시대의 언어가 되고자 소망한 대로 어느덧 세계의 시인이 되었다. 고은은 팔순의 나이에도 뜨거운 심장을 가진 청춘이라고 고백하며 ‘그래도 품어야 할 우리의 희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내가 10대 후반이었는데, 너무나 많은 죽음을 봤어요. 좌익이 점령했을 때는 우익이 죽었고, 우익이 돌아오자 좌익이 죽었죠.내 고향에서만도 이 죽음의 재앙이 세 번 되풀이되었어요. 군인들이 와서 시체를 파내서 옮기라고 했는데, 그 작업을 하고 나면 보름 동안 씻고 또 씻어도 시체 냄새가 몸에서 없어지지 않았어요. 살아남아 기쁜 게 아니라 죽음이 내게 눌어붙어 있었지요.

죽음이라는 게 뭡니까? 삶이 없어지는 허무 아닙니까. 나의 초기 세계를 허무주의라고 이야기하는데, 유럽의 허무주의나 노장사상의 허무같이 대단한 게 아니에요. 삶에서 그냥 무(無)와 만난 거지요. 같이 뛰놀던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어느 날 갑자기 없어지고, 세상의 의미 있는 것들이 전부 의미를 잃는 것. 거기에 시인의 꿈같은 게 차지할 자리가 있을 리 없었어요.

곧이어 정신착란이 왔고, 집을 뛰쳐나갔다가 잡혀오고 또 떠나고 그랬어요. 그러는 중에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지요."





"승려가 되겠다고 결심한 게 아니었어요. 길을 나섰다가 만난 떠돌이 스님을 따라간 것뿐이었어요. 한 쇠붙이가 자석에 들러붙은 셈이지. 시간이 흐른 뒤 그 스님의 스승인 효봉 스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스님은 나를 보자마자 "밥 안 먹었지? 배고프겠다." 그러시고는 밥을 주시더니 "문자가 너무 많다. 버려야 한다." 하셨죠. 그때부터 선(禪)을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전쟁과 고향의 비극이 만든 외상(外傷)이 전부는 아니었지만 서서히 치유되어갔어요.

그렇다고 그 기간 동안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과 같은 지혜를 얻은 건 아니에요. 내 생각에는 원래부터 존재하는 지혜는 이 우주 안에 없습니다. 저기 높은 곳에 지혜가 있고 나는 어리석으니까 그 지혜를 섭취해야 한다, 이따위 지혜를 나는 인정하지 않아요.

우리가 후회하고 시행착오를 일으키고 오류를 범하면서 지혜를 만들어 내는 거지요. 살아가면서 지혜가 하나씩 들러붙는 거예요. 오랜 세월이 흘러 조가비에 진주가 만들어지듯이, 지혜는 후회에요. 우리의 어리석음으로 인한 후회와 잘못에서 나오는 성찰이지요. 그래서 나는 어리석은 쪽을 택하고 싶고, 어리석은 쪽이 훨씬 진실하다고 생각해요."


"승려 생활을 하면서 시를 조금씩 썼는데, 그 가운데 ‘폐결핵’이라는 시를 친구가 막 생겨난 시인협회에 보냈어요. 그 시가 조지훈의 천거를 받게 되어 1958년 등단했지요. 지금은 시인의 길과 종교의 길을 충분히 함께 갈 수 있지만, 그때는 그게 허용이 안 될 때였어요. 강화도 마니산에 올라가 밤을 새며 고민하며 통곡을 했지요. 그러다 아침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면서 예술의 길을 가야겠다고 마음을 정했어요.

예전에 효봉 스님이 나를 보면서 '너는 여기 오래 못 있겠다."고 얘기한 적이 있어요. 스님이 나를 세상에 내보려고 하나 보다 싶어서 원통해하며 혼자 엉엉 울었는데, 그 말이 맞았던 겁니다. 아무 준비 없이 세상으로 나왔어요.

10년 동안 승려 생활을 했지만 그것 자체가 나를 완성시킬 수는 없었어요. 어느 정도의 상처를 치유하고, 그 기간 동안 어떤 하나의 체험을 한 건 사실이지만 진리를 깨친 그런 상태가 아니었죠. 다시 옛날의 죽음이 달라붙기 시작했어요. 떼어지지가 않았어요. 삶이 죽음의 부속품처럼 여겨졌죠. 그때 찾아온 불면증이 10년간 이어졌어요. 잠을 못 잔 상태에서 낮에 사람을 만나니 흐릿한 물체로만 보였고, 인간을 혐오하게 됐어요. 소주를 몇 병 먹어도 그냥 취할 뿐 잠은 오지 않는 가혹한 불면증이었습니다. 또 다시 죽음을 결행하기를 몇 번, 그렇게 힘들게 살아갔죠."








"1960년대 후반 내내 무교동 술집에서 거의 매일 술을 마실 때였어요. 통행금지에 걸리면 주모에게 통사정해서 거기서 자기도 하고 그랬죠. 1970년 11월 어느 날이었었는데, 술집 바닥에 버려져 있는 신문에 한 노동자의 죽음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었어요. 항상 죽음에는 관심이 많았으니까 눈에 띈 거죠. 본격적으로 그 죽음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어요. 이 죽음이 뭔가? 내 죽음과 어떻게 다른가? 그런데 전태일의 죽음은 개인의 단순한 생의 포기가 아니었어요. 거대한 사회 현실의 모순이 들어 있었죠.

그전에는 현실 참여적인 시를 쓰는 사람을 바보처럼 여기기까지 했어요. 그런데 전태일 이후로 내가 바뀌기 시작했어요.나 혼자만이 아니었어요. 그 당시 대학생들, 지식인들을 전부 각성시킨 사건이었죠. 하나의 죽음이 우리 시대 전체에 가혹하게 경종을 울린 거예요.

아무런 이론도 의식의 토대도 없이 그냥 거리로 나가기 시작했어요. 나는 누군가가 열어젖힌 시대의 대열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작은 존재였어요. 물론 시대의 언어가 되고 싶은 시인의 간절한 꿈은 있었지만.

그러면서10년 이상의 심각한불면증이 없어져 있었어요. 정말 특별한 체험이었습니다. 내 몸 안에 있는 깊은 골짜기에 갇혀 있다가 뛰쳐나오면서 그리 되었을 거예요. 잠을 자면서 새로 태어나는 최초성을 다시금 맞이할 수 있었어요."


"나는 1970년대를 '노동자(전태일)의 죽음으로 시작해 노동자(YH 노동자 김경숙)의 죽음으로 닫힌 시대'라고 정의합니다. 1970년대 후반 영등포에서 노동학교 교장을 했었는데, 친구들, 선배들을 데려다가 노동자들에게 무료 강의를 하게 했죠.

그러다가 1980년에 내란 음모죄로 잡혀 갔는데, 나처럼 내란에 안 어울리는 사람까지 엮어서 간 거죠. 나야 술이나 한 잔 먹을 줄 알았지 무슨 내란을 하겠어요? 내란음모 외에도 서너 개 법을 함께 적용시켜서 남한산성 육군 교도소 특별사방으로 데려갔어요.

같이 갔던 문익환 목사는 육군참모 총장 정승화가 갇혔던 방에, 나는 김재규가 갇혔던 방에 들어갔어요. 방이 개미굴처럼 되어있어서 어디에 누가 있는지도 몰라요. 헌병이 지키는데 철장도 없고, 삼십 촉짜리 전구를 끄면 암흑이었어요. 죽을 때 통일을 외칠까, 민주주의를 외칠까, 짧은 시를 읊고 죽을까 그런 걸 생각하며 살아야 했어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극한 상황이었어요. 책 하나 볼 수 없었고 오줌 싸는 통 하나만 있었지요. 현재의 삶이 박탈되어 버리자, 과거가 현재의 자리를 대신해주기 시작했어요. 어렸을 때 술을 많이 마시던 우리 할아버지가 기억났고, 이웃집 아저씨나 건넛마을 누구처럼 과거에 전혀 관계가 없었던 사람들, 아무 의미가 없는 과거의 부스러기 같은 존재들이 내 기억 속으로 들어왔어요.

또 후회가 되는 일도 많이 생각났어요. 할머니한테 좀 더 예쁜 애기가 되어드릴 걸, 할머니가 나를 예뻐할 때 왜 그걸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이런 과거의 결핍들이내 속에서 마구 솟아나왔어요.

만약 내가 다시 산다면 이 얼굴들을 재현하고 싶다, 시로 그 얼굴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현재를 지탱하는 힘이 되어 주었어요. 메모도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단지 구상을 하는 것 자체가 생에 힘을 줬어요. 항문에서부터 불길이 솟아올라 내장을 거쳐 올라오면서 비굴함은 물러가고 당당해졌어요."






"화엄은 ‘네가 있으므로 내가 있는’ 거예요. 아니, 나는 세계나 네가 먼저 있으므로 내가 있게 되는 것이죠, 관계가 존재의 앞이지요. 가령 혼자 있으면 ‘나’라는 말도 필요가 없지요. ‘나’는 수많은 관계의 산물입니다. 내가 입고 있는 옷, 내가 집에 가기 위해 타는 버스를 생각해보세요. 내가 태어나기 전 조상들은 또 어떻습니까? 수많은 우주 갈래에서 온 게 나입니다. 나는 많은 관계의 귀착점이자 무한한 관계가 전개되는 출발점이에요. 어디에 ‘나’만 뚝 떨어져 있을 수가 없어요. 그만큼 우리 존재는 불완전하고 임시적이에요. 이런 점에서 ‘관계’는 우리 삶의 총칭이에요.

죽음에서 시작한 1950년대의 허무주의와 1970년대 이후 거리에서 찾은 방향성, 이 두 가지를 아울러서 지금은 화엄이 나의 지향점이 되었어요.

[만인보] 역시 내가 꿈꾸는 화엄의 한 표현입니다. [만인보]는 현실을 떠나간 사람들을 재현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과 손을 잡게 하는 작업이에요."


"지난 몇 천 년 동안은 시의 시대였지요. 그런데 이제 시가 지겨워진 때가 온 거예요. 그래서나 같은 사람이 시인을 하고 있는 지금은 '시인이라는 것들은 어디 변방에 가서 혼자 울든지 말든지 해라', 이런 시대이지요. 그렇다고 시가 없어지는 건 아니에요.

조금 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1960년대 하수도 시설이 온전치 않았던 시절, 분뇨차가 와서 똥을 빨아들일 때 베토벤의 월광곡을 틀었어요. 그 냄새 나는 속에서 말이지요. 이게 베토벤을 모독하는 걸까요? 오히려 베토벤인지뭔지 아무것도 모르던 서민들이 클래식을 들을 수 있었던 기회였지 않습니까? 이렇게까지 참혹한 과정을 겪으며 베토벤이 대중화됐어요. 시도 마찬가지에요. 지금은 시가 온갖 문화 형식 속에 들어있습니다. 광고 한 구절구절이 시 아닙니까? 김소월의 시도 어디 대중가요에 쓰이고 그러지요. 이렇게 가도 돼요. 요즘 사람들이 시를 자주 안 읽는다고 해서 시가 죽은 게 아니란 말이에요.

옛날 우리 시의 조상들이 시를 많이 누렸으니까, 이제쯤은나 같은 시인들이 조금은 쓸쓸하게 구석에서 혼자 시를 읊어도 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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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6.05.16 18:30

    첫댓글 고은 시인의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 작성자 16.05.17 18:21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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