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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바라보라
히브리서 12:2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주현 후 다섯째 주일이다. 오늘은 한해의 첫 절기인 입춘(立春)이다. 절기는 시절과 기후를 미리 알려주는 전령과 같다. 이제 봄이 올 것이다.
교회력에도 절기가 있다. 구약 율법서는 그 제정 배경을 설명한다. 모든 사람에게 생일이 있듯이, 모든 날들에 하나님의 창조의 뜻이 있다.
주현절은 예수님을 알아가는 절기이다. 사랑의 절기라고 부른다. 색동교회의 자랑인 입례송은 절기마다 절기의 의미를 찬양하는 유명한 세계교회의 성가들이다.
주현절 입례송은 ‘예수님은 누구신가?이다. 1990년에 만든 한국의 성가이다. 그해 서울에서 JPIC(정의, 평화, 창조질서보전) 세계대회가 열렸는데, 그때 한국의 성가로 보급되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처럼, 예나 지금이나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주제이다.
이미 35년 전에 오늘의 지구인이 감당해야 할 창조질서보전이란 사명을 말하고 있다. 얼마나 선구적인가?
1)
오늘 본문은 주현절 요절이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2).
예수님은 누구신가? 늘 익숙한 것도 막상 내게 물으면 주저하게 된다. 신앙고백도 마찬가지다. 반복되는 똑같은 예배지만, 항상 고백하는 이름이지만, 나보고 네 언어로 말하라고 하면 어색하다.
이런 물음을 들을 때면 누구나 당황스럽다. 그런데 집요하게 질문할 필요가 있다. 남들이 모두 하는 정답이 아니라, 나만의 대답이 필요하다.
필리핀 마닐라 시내의 침례교회 앞에 이런 배너가 걸려있다고 한다.
‘예수는 대답이다’(Jesus is Answer).
지나가는 젊은이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면서 어깨를 으쓱한다.
‘누가 물어봤대?’
우리는 ‘예수가 정답’임을 잘 알고 있다. 거의 매주 예배를 통해 반복 학습을 하고, 고백한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소식을 전하면서 ‘구주, 그리스도, 주’로 오셨음을 증언한다.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
사람들은 나와 예수님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묻지 않는다. 어쩌면 너무나 분명한 대답이고, 정답이며, 해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뻔한 정답으로만 그치고 만다면 예수님은 내게 우상이 되기 쉽다. 사람들은 지하철에서 만나는 거리 전도자들의 “예수 천국”이란 말에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거부감을 느낀다.
사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예수 이름’을 듣고 반가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친구들 앞에서 초라한 모습으로 마주친 부모님처럼 부끄러워한다. 성숙하지 못한 모습이다.
내가 그리스도인인 것은 예수님과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람이란 뜻이다. 그 관계를 친밀하게 하고, 내 인생의 드라마로 엮어가는 일은 행복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내가 나의 주님을 늘 기억하고, 기도하며, 사랑하며 사는 일은 다행한 인생이다.
교회학교에서 하나님이 6일 동안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칠 일째에 쉬셨다는 것을 가르쳤다. 한 아이가 손을 들고 물었다.
“선생님, 기차는 누가 창조했나요?”
선생님은 당황했다. 분명 성경에 하나님이 기차를 창조했다는 말이 적혀있지 않았다. 또 다른 아이가 손을 들었다. 선생님이 물었다.
“너도 질문이 있니?”
“아니예요. 저는 저 아이의 질문에 대답하고 싶어요.”
선생님은 믿을 수가 없었다. 교사인 자신도 대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데 이 어린아이가 어찌 답하랴.
“좋아, 한 번 대답 해 봐라. 그럼 기차를 누가 창조했지?”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땅에서 기는 모든 것들을 창조하셨다고 되어 있으니, 당연히 기차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사실 제일 똑똑한 때는 어릴 때이다. 어린아이에게도 자기만의 통찰력이 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마르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신다. 남들 이야기 말고, 너는 나를 누구라고 믿느냐? 네 삶에 나는 어떤 의미가 있느냐? 나와 너의 관계에서 내 위치와 비중이 얼마나 되는 거지?
과연 내게 있어 예수는 누구신가? 내 입술로, 내 생활로 다시 고백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만약 더 이상 물음이 없다면,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별로 성장과 성숙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2)
마태복음 16장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시는 대목이 나온다. 복음서 중간 부분에 해당된다. 예수님이 행하신 공생애를 중간 결산하는 부분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중간시험을 치루신다.
먼저 예수님은 제자들의 대답을 돕기 위해 다른 질문으로 접근하신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3).
남들이 나를 가리켜 누구라고 하더냐?
그때 예수님과 제자들은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있었다. 갈릴리 북쪽의 이방지역으로 이곳에 바알 숭배 신당과 가이사 황제를 신격화한 거대한 신전이 있었다.
제자들은 그런 지역적 분위기에서 하나님 신앙과 우상숭배의 대립과 갈등을 느꼈을 것이다. 무엇보다 두려운 일은 로마 제국이 강요하던 황제숭배의 심리적 압박이었다.
사실 예수님에 대해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은 비교적 대답하기가 수월하였다. 정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마 16:14).
당시 예수님을 겪어 본 사람들은 어느 정도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예수님은 선지자이며, 그중에서 ‘탑 클래스’의 분이다. 제자들이 엘리야와 예레미야를 빗댄 것을 보면 백성의 기대가 얼마나 컸는가를 알 수 있다.
오늘까지도 유대인들은 가장 큰 절기인 유월절을 기념할 때 엘리야를 위해 빈 의자를 하나 남겨둔다고 한다. 메시야를 위한 빈 자리였다. 엘리야는 메시야를 준비하는 선지자로 알려졌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야의 전령자로 보았고,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심을 선포하는 선구자로 보았다. 제자들의 대답은 좋은 답이지만, 정답은 아니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그 시대만이 아니라, 지금도 유효하다. 여전히 예수전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화제가 된다. 요즘도 예수님은 어느 연예인 못지않게 핫이슈이다. 도마복음이니, 다빈치 코드니, 예수님에 대한 관심은 현재진행형이다.
독일의 성서학자 게르트 타이센은 추리소설 형식을 빌려 역사적 예수를 조명하였다.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그 시대의 분위기 속에서 규명하려고 한 것이다.
주인공 안드레아는 갈릴리 세포리스 출신으로, 로마 정보기관의 비밀요원이다. 그는 로마와 유대 혁명당원 사이의 이중간첩 역할을 한다. 그는 가까이에서 예수를 탐지하고, 탐문한 결과를 당국에 보고하였다.
유대인 정보원 안드레아는 주도면밀한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바루흐라는 인물을 통해 이렇게 보고한다. 바루흐는 예수의 죽음을 거부하며, 이렇게 실토하였다.
“아닙니다. 그는 죽지 않았어요! 그는 죽은 뒤에 변화된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짐승들의 지배는 영원히 계속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참 사람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고 모두가 그 속에서 예수의 모습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번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남들이 아니라,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신다. 그것은 정답, 모범답안을 말하라는 것이 아니다. 너는 나를 누가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은 해답을 내게서 찾는 것이다. 그 대답은 ‘나의 존재, 나의 삶, 나의 구원’이라는 나만의 것이다.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나만의 고백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대답하였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마르다는 대답하였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7).
베드로와 마르다의 대답은 공식문구의 교리문답이 아니다. 그들의 삶에 찾아오신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가장 적절한 응답이었다. 반복된 학습결과가 아니다. 그가 만난 예수님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베드로와 마리아처럼, 아무개는 대답하였다. 누구도 대답하였다. 대답은 모든 사람에게 돌아가며 이어진다. 그것은 어제와 오늘 신앙의 역사이다.
3)
어제 새벽에 아시안컵 축구를 보았는가?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사우디에 이어, 호주까지 연장전까지 치루면서 극적으로 이겼다. 각본이 있는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90분 이후 드라마를 썼기 때문이다.
이번 준결승 상대는 요르단이다. 예선에서는 2:2로 비겼는데 다시 맞붙는다. 요르단은 친숙한 나라이다. 색동교회가 후원하는 요르단 선교사 부부가 있고, 무엇보다 성경의 배경이 되는 나라이다. 왕정국가이지만 비교적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나라이다.
중동 평화를 이끈 전 국왕 후세인 왕 후계자 이야기다. 1999년부터 요르단을 통치하고 있는 압둘라 왕은 변장을 하고 공공장소를 시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목적은 일반시민들과 대화하고,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아보고, 공무원들이 백성들을 어떻게 취급하는지 점검해 보는 것이었다. 압둘라 왕은 공무원들이 백성들에게 봉사를 잘 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병원과 정부 기관들을 방문했다.
왕은 뉴욕에 머물고 있을 때 그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그는 군중들에게 둘러싸이지 않고는 호텔을 떠날 수 없었기 때문에, 변장을 하고 살짝 빠져나갔다. 그 방법은 성공적이었다. 그래서 귀국한 후에도 같은 방법을 썼다.
압둘라 왕의 변장 시찰이 시작된 후부터 요르단의 공무원들과 병원 직원들은 모든 사람들을 왕처럼 대접하기 시작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의 삶 중심과 언저리에서 나를 찾아오신다. 예수님은 변장을 하셨다. 날마다 내가 마주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어쩌면 예수님과 마주칠 수 있다.
과연 예수님은 누구신가? 나의 하나뿐인 삶, 우리 시대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리스도교는 뻔한 정답을 가르치는 교리종교가 아니다. 늘 생생하게 예수를 만나는 사람들의 신앙공동체이다.
당연히 교회는 예수의 생생한 사랑을 증거 해야 한다. 그런데 다만 교회 안에서만 말한다. 오히려 사회적으로는 침묵하고 있다. 그것은 오늘 교회가 지닌 병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 궁금하게 만들어야 한다. 정답만을 전도지처럼 강요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예수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만들어야 한다.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을 통해 증거해야 한다.
처음 중국 사람들은 성경을 번역하면서 하나님을 무엇으로 부를지 가장 적절한 이름을 찾았다. 결국 두 가지가 채택되었는데 ‘신’(神)과 ‘상제’(上帝)이다. 두 가지 사이에서 선택이 좁혀지지 않았다. 지금도 하나님의 이름에 따라 성경 번역본을 신역과 상제역으로 나눈다.
그러면 중국인들은 예수님을 무엇이라고 번역했을까? 야소이다. ‘그런가 야’(耶), ‘깨달을 소’(蘇)이다. ‘의심과 방황으로부터 깨어나게 하는 분’이란 뜻이다. 스탠리 존스는 중국인들의 지혜를 칭찬하였다.
내게 있어 예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은 나를 ‘의심과 방황으로부터 깨어나게 하는 분’이다. 더 나아가 내 삶에 변화와 혁명을 일으키신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개념에 머물러 있지 않다. 예수님은 내 삶에 참 주님이시다.
복음서의 기록목적이 여기에 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다”(요 20:31).
주현절은 참 중요하다. 나더러 예수님이 누구시냐고 다시 질문하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온 세상으로 흩어진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말한다. 그들이 흔들렸을 때 다시 예수를 사랑함으로써 믿음을 다잡았다.
“너희가 예수를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벧전 1:8).
우리는 예수님을 본 적은 없으나, 사랑한다. 믿고 소망한다. 주현절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제안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2).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여러분을 통해 날마다 사랑으로 동행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