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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 <제 148회>
<줄거리>
괴질에서 벗어난 백제는 본격적으로 조물성 공략을 서두르며 성을 포위해 간다. 고려는 괴질에 의한 피해에 전전긍긍하며 급기야 내군장군 복지겸마저 쓰러진다. 다급해진 왕건은 성 앞에 배수진을 치고, 연산진의 유금필 일행을 불러들여 전열을 가다듬으려 하지만 견훤은 전면전을 피하고 국지전으로 시간을 끌며 괴질로 지쳐가는 고려군을 괴롭히는데...
씬 조물성 백제군 진영 외경 (낮)
씬 동 견훤의 군막 안
모두들 물러갔다. 견훤과 최승우만이 마주해 있다. 그들은 서로를 빤히 보고 있다.
견훤 파진찬은 지금 나에게 할 말이 많은 모양일세. 표정이 그러하이..
최승우 그러하옵니다, 폐하.
견훤 조물성에 가서 고려왕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전하라 하였더니 왜 가지 않고 나를 또 찾아왔는고...?
최승우 폐하...
견훤 말해보게.
최승우 어차피 폐하께오서는 이미 여기 조물성 전투에서 승리를 하신 것이옵니다.
견훤 헌데...?
최승우 그러나 백제와 고려의 싸움이 모두 끝난 것은 아니옵니다. 아닌 말로 고려의 왕이 이 조물성을 버리고 송도로 가버리면 그만이옵니다. 우리는 성 하나를 얻는 단순한 것으로 끝나는 것이옵니다.
견훤 그야 그렇지. 하지만 황제들의 싸움에서 짐이 이겼다는 것은 천하의 백성들이 다 알게 되겠지. 아니 그런가?
최승우 잠시는 기분이 좋으실 수 있으나 그것뿐이옵니다. 보다 큰 실리를 취하는 길은 어떻게 하든 이 곳에서 고려의 왕을 만나시고 폐하의 위엄을 크게 드러내시는 일이옵니다.
견훤 그래서 항복을 하라고 시키는 것이 아닌가?
최승우 하오나 폐하, 말씀 드렸다시피 저들은 항복을 아니 하옵니다. 다만, 심각한 어려움에 처해있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 이 난관을 벗어나고자 할 것이옵니다.
견훤 그거야,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일일세.
최승우 고려왕의 약점은 마음이 약한데 있사옵니다. 이만에 가까운 군사들을 두고 혼자만 쉽게 빠져나갈 위인이 아니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이용해야 하옵니다. 그 선에서 협상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옵니다.
견훤 그러니까 무릎을 꿇지 않을 것이다. 그말 아닌가?
최승우 예, 폐하. 허나 무릎을 꿇지 않더라도 꿇은 것과 같은 효과를 얻어내도록 해 보겠사옵니다.
견훤 (생각하다가 크게 웃는다) 하긴 그래. 꿇는 것은 어렵겠지. 그래도 일국의 황제라 하는 사람이니까. 허나 말이야, 그만한 댓가를 받아내지 못한다면 우리가 왜 이 조물성까지 왔단 말인가?
최승우 이번에는 신이 사신의 역할을 맡아 가보겠사옵니다. 맡겨 주오소서.
견훤 경이 말인가? 그건 아니 되네. 가서 무슨 일을 당할 지 아는가? 장수들은 몰라도 자네는 아니 되지..
최승우 신에게 맡겨 주시오소서. 결코 폐하께 누가 되지 않는 해답을 해 올리겠사옵니다.
견훤 대체 무슨 생각이 있는 겐가? 짐도 조금은 알아야 될 게 아닌가?
최승우 고려의 왕을 더 이상 궁지에 몰아넣으면 일이 틀어지옵니다. 이찬이 얘기한 것처럼 저들이 수용할 수 있는 안을 내 놓아야 할 것이옵니다. 한쪽으로는 바짝 압박을 하면서 또 한쪽으로는 협상할 수 있는 안을 제시하는 것이옵니다.
견훤 그게 무엇인가 묻고 있지 않은가?
최승우 저쪽에도 전투를 계획하는 책사들이 있사옵니다. 고려의 책사들과 만나고 나서 결론이 나올 것 같사옵니다. 허나, 분명한 것은 유리한 쪽은 우리 백제라는 것이옵니다.
견훤 (한참 생각하다가) 파진찬이 그토록 자신있게 하는 이야기라면 일단 믿어봄세. 그렇게 하세.
최승우 장수들에게 전투령을 하달 하시오소서. 겉으로는 고려왕이 송도로 돌아갈 수 있는 길마저 끊는 척 군사를 돌리시고 또 한편으로는 성을 공격하는 대형을 갖추어 주시오소서. 그 사이에 신은 조물성으로 가서 저들을 만나보겠사옵니다.
견훤 알겠네. 그리 하세.
최승우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옵니다, 폐하.
견훤 궁금하구먼... 파진찬의 생각이 참으로 궁금해.
그렇게 고개를 외로 꼬는 견훤의 그 표정에서...
씬 동 백제군 진영
공격 준비들로 부산하다. 기마병들이 오가고 장수들이 말을 타고 집결하기 시작한다. 애술과 신덕이 오다가 마주치며 말한다.
애술 헤헤헤... 폐하께오서 드디어 공격을 결심하신 모양이올시다.
신덕 그러게 말입니다. 군을 삼군으로 갈라서 제일군은 먼 길을 돌아 조물성의 배후 길을 끊는다 하오이다. 아마도 고려왕의 퇴각을 막으려는 것 같소이다.
애술 압니다. 그러면서 성을 전면 공격하려는 것이겠지요. 하하하.... 아마도 일방적인 전투가 될 것입니다. 제일군은 벌써 출발을 하였다지요?
신덕 예, 태자마마들이 제일군을 맡았다고 하더이다. 벌써 떠났답니다.
애술 우리도 어서 준비들 하십시다. 얘들아, 서둘러라. 출병이다. 서둘러라.
그 부산함에서...
씬 길
신검과 양검, 용검, 금강들이 상귀와 부달, 소달들을 이끌고 가고 있따. 그 위세가 대단해 보인다. 공격용 장비들과 방패부대, 장창부대 등이 끝도 없이 줄을 이어 가고 있다. 카메라 앞을 지나치는 그 긴 행렬에서...
씬 조물성 밖 고려군 진영
배현경이 크게 놀라며 보고를 받고 있다. 홍유들도 보고 있다.
배현경 지금 무어라고 하였느냐? 백제군이 군을 셋으로 나누어 조물성의 배후로 가고 있다?
첨병 예, 장군. 분명하옵니다. 제 일군은 백제국의 태자들이 맡아 조물성 배후를 치기 위해 길을 돌리고 있사옵고, 제 이군은 백제장군이 신덕이 맡아서 성을 전면 공격하려 하옵니다.
홍유 그렇다면 백제국의 왕은 어디 있느냐?
첨병 제 삼군이라 하여 중간 기점에 자리를 잡고 예비군을 편성하고 있사옵니다.
박수문 저들이 공격대형을 나누어 온다면 우리도 대형을 나누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홍유 배장군, 저들이 아마도 우리를 분산시키려는 계획을 갖고 있는 것 같소이다.
배현경 그런 것 같소이다. 더구나 우리 조물성의 배후로 가는 것은 폐하의 퇴로를 끊겠다는 것이지요. 예삿일이 아닌 것 같소이다. 전선이 그만큼 넓어지면 이미 사기를 잃은 우리 군사들인지라 결정적으로 불리해 집니다. 그만큼 쉽게 무너질 수 있어요.
그때, 박수경이 부장들과 허겁지겁 달려온다.
배현경 오, 박장군, 어떻게 되었소? 우리 영내는 어찌 돌아가고 있소?
박수경 예상한 그대로이옵니다. 괴질로 쓰러지는 군사들이 계속하여 성안으로 후송되고 있사옵니다. 싸울 군사들이 몇 아니 되옵니다.
홍유 이런, 이런... (어쩔 줄을 모른다)
박수경 이미 돌림병에 대한 두려움이 심하여 진을 탈출한 병사들도 부지기수라 하옵니다. 부장들의 말로는 도저히 통솔조차 불가하다 하옵니다.
배현경 홍장군, 어쨌든 이런 사실들을 성안에 알려야 겠소이다. 전령을 띄웁시다.
홍유 이미 전령을 보냈소이다. 시급한 사안이 아닙니까?
배현경 저들이 우리의 약점을 본격적으로 물고 늘어지는 것 같소이다. 큰일입니다. 군사들이 통솔되어야 싸우는 것이 아닙니까? 어쨌든 우리도 군을 정비하여 저들과 마주해야 겠소이다.
홍유 그래야겠지요. 부장들은 서둘러라. 적군이 온다한다. 서둘러라... 대형을 갖추어라.
그들이 또 다른 부산함에서...
씬 동 성안
유금필들과 왕건이 처참한 군사들의 병동을 돌아보고 있다. 임시 병동으로 쓰이는 건물 곳곳에 끝도 없이 많은 병사들이 쓰러져 있다. 물을 달라거나 구토를 하거나 사시나무 떨 듯 떠는 군사들도 보인다. 죽은 시체들이 줄지어 들려 나가고 있다. 물을 찾으며 밖으로 나가려는 병자들을 경계하는 군사들이 발로 쳐 넣으며 들어가라고 소리치고 있다. 약을 달라고 울부짖는 병사들도 여러 곳에 보인다. 돌아보는 왕건의 눈에는 이슬이 맺힌다.
왕건 어쩌면 좋겠는가? 하루에도 수백 명이 죽어나가고 있어.
유금필 이 정도인지는 몰랐사옵니다, 폐하.
신숭겸 태평군사가 죽고 내군의 복지겸 장군마저 쓰러졌다는 것은 이 돌림병의 사태가 얼마나 위중한가를 말해 주는 것이옵니다. 폐하, 여기서 더 머뭇거릴 일이 아니옵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폐하께오서는 속히 황도로 돌아가시오소서.
왕건 이보게, 아우.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이미 수천의 병사가 죽었어. 싸움한번 못해보고 말일세. 그리고 지금도 죽어가고 있어. 저들이 황제인 나를 따라 여기까지 왔는데 저들을 버리고 나만 가라고..?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박술희 하오나 폐하, 폐하께오서는 만백성의 어버이시옵니다. 돌림병에 해를 당할까 우려되옵니다. 옥체를 보전하셔야 천하를 다스리실수 있는 것이 아니옵니까?
왕건 나는 못하네. 설령 내가 천하를 얻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는다 하여도 한은 없네. 나는 병사들과 함께 할 것이야. 그것이 어버이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도망치는 짖은 못해.
그때, 급히 부장하나가 달려와 예를 올리고 전한다.
부장 폐하, 적진에서 올라온 보고이옵니다. 지금 백제군이 군을 셋으로 나누어 한편으로는 성을 공격하고 또 한편은 우리 조물성의 배후 길을 끊는다 하옵니다.
그 말에 모두들 놀란다. 왕건과 유금필, 신숭겸, 박술희, 신방과 내군의 별감들이다.
왕건 저들이 온다고...? 드디어 온다는 말이지? 가세, 제장들과 의논을 해야겠네.
유금필 폐하, 숭겸아우의 말이 옳사옵니다. 폐하께오서는 황도로 가시오소서. 이곳은 신들이 맡겠사옵니다.
왕건 (역정을 내며) 지금 여기서 돌림병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어. 그것은 어려울 때일수록 황제가 병사들과 함께 있었다는 것이야. 알겠는가? 끝까지 병사들과 함께 있었다는 그 신의가 중요한 것이야. 믿음 말이야. 지금 여기서 그걸 버리면 결국은 제국도 잃고 천하도 잃는 것이야. 알겠는가? 가세...
아무도 말을 하지 못한다. 역시 왕건인 것이다.
씬 동 성안 군영
제장 회의가 열리고 있다. 왕건을 비롯해 유금필, 신숭겸, 박술희, 최지몽, 윤신달, 김락, 김언, 염상, 왕신들이다.
왕건 백제군이 공격을 곧 시작할 모양이오. 우리로서도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소이다. 생각들을 말해주시구려.
김락 저들이 우리의 배후를 끊으려고 하는 것을 보면 저들 또한 아주 이 기회에 끝을 보려는 것 같사옵니다. 의외로 방법은 간단하옵니다. 우리 또한 죽기로서 저들과 싸울 뿐이옵니다.
염상 폐하, 이미 아군은 돌림병에 대한 피해가 막중하옵니다. 과연 얼마나 싸우고 또한 버틸 수 있을 지 의문이옵니다.
김언 저들이 우리의 궁핍함과 다급함을 보았사옵니다. 이미 서로가 서로를 다 읽은 싸움이옵니다. 김락 장군의 말처럼 저희 고려는 배수의 진을 쳐야 하옵니다. 모두 싸우다 장렬히 죽는 길뿐이옵니다.
신숭겸 무슨 말씀을 그리 하는 게요? 폐하가 계시는 이곳에서 죽는 이야기를 하다니.... 불충하오. 싸워서 이겨야 하는 것이오. 져서 죽을 전투라면 무엇하러 한다는 말이오?
김언 죽기로 싸우겠다는 뜻이올시다. 진다고 말하지는 않았소이다.
유금필 허나, 전투가 어려운 것은 사실일세.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만이 결론이 보이는 것이야. 자, 이제 어찌 싸울가를 의논합시다.
박술희 이미 선봉은 배현경, 홍유 장군들이 성밖에 나가 있습니다. 우리도 군을 나누어 저들을 대적해야 합니다.
왕건 헌데, 왜 내봉성령 최응이 아직까지 아니 보이는가? 무슨 일이 있는 겐가?
최지몽 몸이 좀... 불편하다 하옵니다.
왕건 (놀라며) 몸이 불편해? 어떻게 불편한 것이야?
최지몽 아직 잘 모르겠사옵니다. 지금 의원이 갔사옵니다.
왕건 의원이....?
그러다 왕건은 입을 다문다. 뭔가 상상이 가는 것이다. 그때 다시 신방이 급히 아뢰어 온다.
신방 (E) 폐하, 신 내군부장 신방이옵니다.
왕건 들게.
신방이 들어와 군례를 올리고 말한다.
신방 폐하, 백제에서 지금 사신이 오고 있사옵니다.
왕건 항복을 권하는 사신인가?
신방 아직 잘 모르겠사오나 수레에 꽃힌 깃발을 보아서는 백제국 파진찬 벼슬인 최승우라 하옵니다.
왕건 최승우.......?
유금필 최승우라면 백제국의 책사이옵니다. 모든 백제국의 전쟁을 입안하는 자이옵니다. 삼최의 한사람이라는 바로 그자이옵니다.
모두들 ............?
씬 조물성 성밖
최승우가 홍유, 배현경들이 보고 있는 군사들 가까이 수레를 몰아 오고 있다. 마치 신선처럼 고고한 자세로 부채를 들고 바람을 내며 여유롭게 오고 있다. 앞세운 흰 깃발 다음에는 대 백제국 파진찬 최승우라고 씌어 있다. 그들은 아주 여유 있게 고려 군사들 군영으로 들어선다. 박수문 형제가 달려와 앞을 막는다.
박수문 백제국의 관리가 여기는 어떻게 왔는가?
최승우 나는 사신으로 왔소이다. 귀국의 폐하를 뵙고자 하오.
다시 또 홍유와 배현경이 달려나온다. 잠시 탐색전이 지나고 홍유가 묻는다.
홍유 그대는 백제국에서도 참으로 고귀한 신분인데 여기까지 온 그 용기가 가상하구려. 목이 달아나면 어쩌려고 오시었소?
최승우 아무리 죽고 죽이는 전장터이지만 그대로 예의는 있소이다. 설마하니 무기를 들지 않고 왔는데 죽이기야 하겠소이까? 허허허.. 폐하를 뵙게 해 주시구려. 아니면 이곳의 내봉성령을 만나고 싶구려.
배현경 이미 성안에 전령이 갔으니 기다리시구려.
최승우 그렇게 하지요.
최승우는 그렇게 계속 부채를 부치고 있다. 그때, 성안에서 말을 타고 달려나온 부장 하나가 보인다. 가까이 오면 홍유에게 뭔가 귓속말을 남긴다. 홍유가 끄덕인다.
홍유 폐하께서 허락을 하시었소. 성으로 가시오. 박장군, 성으로 뫼시오.
박수경 예, 장군.
씬 동 성안 성루
유금필과 장수들이 성밖을 보고 있다. 다시, 최승우의 마차가 오는 것이 보인다. 그 마차는 점점 더 조물성 가까이 이르고 있고...
씬 동 성안 최응의 처소
의원이 진맥을 보고 있고 최응이 추위에 떨고 있다. 병색이 완연하다.
의원 그래도 대단하십니다. 다른 분들 같았으면 벌써 인사불성이 되셨을 것이옵니다. 채식만 하면서 사신 것이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사옵니다. 열이 어떠하시옵니까?
최응 견딜만 하오. 하지만, 너무 추... 춥소.
의원 고열 때문에 그러하옵니다. 열이 이미 가슴과 턱밑까지 이르렀으니 어찌 견디시기 쉽겠사옵니까? 그래도 그 참으심이 대단하시옵니다.
그때 최지몽이 들어선다. 예를 하고 가까이 온다. 그 뒤로 왕건이 들어서고 있다. 최응이 억지로 일어나 단정히 예를 한다.
왕건 이게 어쩐 일인가? 최응이 자네마저... 괴질에 걸렸단 말인가?
최응 송구하옵니다.
왕건 아, 아... 하늘이 짐을 버리는 모양일세. 어찌 백제국에는 약을 내려주고 우리 고려국은 이렇게 고통을 주신단 말인가?
최지몽 지금 밖에 백제국에서 파진찬 최승우라는 자가 사신으로 와 있다 하옵니다.
최응 최승우가.....?
왕건 자네는 그대로 있게. 내가 만나볼 것이야.
최응 아, 아니옵니다. 신이 가야 하옵니다. 그자도 어차피 신을 만나러 온 것이옵니다. 뭔가 할 이야기를 가지고 왔을 것이옵니다. 신이 가야 하옵니다.
왕건 괜찮겠는가?
최응 예, 폐하. 참을만 하옵니다. 의관을 대령하라. 어서 대령하라.
의원 움직이시는 것은 무리올습니다, 내봉성령..
최응 그것은 내가 판단하기 나름인 것이야. 괜찮소이다.
씬 동 성밖
최승우가 계속 그렇게 기다리고 있다. 얼마쯤 지났을까? 성 위가 수런거리더니 최응이 그 단아한 모습을 드러낸다.
최응 백제국에서 온 손님이시다. 어서 성문을 열어라.
그 성문이 열리자 최승우가 성루의 최응을 한번 바라보다가 미소 짖더니 마차가 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한다.
씬 동 성안 마당
제장들과 최응이 최승우를 맞고 있다. 최승우는 마차에서 내려 그저 의식적인 예를 가볍게 올리고는 곧장 최응을 본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동안 말이 없다. 그러나 서로를 읽으려는 치열한 시간이 지나친다. 두 사람 서로 빙긋이 웃는다.
최응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파진찬.
최승우 우리는 구면이구려.
최응 그런 것 같습니다.
최승우 어려운 난국이올시다. 돌림병이 극성을 부리고 있는데 희생이 많다 들었어요. 얼마나 고통이 크시오이까?
최응 아직은 견딜만 합니다. 자, 안으로 가시지요?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최승우 예.. (몇 걸음 가다가 최응의 병색을 보았다) 대 고려국의 신동께서도 몸이 좀 좋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최응 하하하... 이 지독한 더위에 한기를 느끼고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이오이까? 좋지 않다는 것은 틀린 말씀이십니다. 가시지요?
최승우 ............ (끄덕인다)
씬 동 성안 군영
최승우가 왕건에게 군례만 올린다. 무릎을 꿇지 않는 것이다. 제장들이 모두 날카롭게 쏘아보고 있다.
왕건 (애써 여유) 그대가 백제국의 대소사를 좌우하는 큰 사람이라 들었소이다. 삼최의 한 분이라지요? 최씨 세 천재 중에 한 사람이 바로 그대라고 들었소이다마는...
최승우 과찬이시옵니다. 소인은 천재가 아니옵니다. 오히려 여기 고려의 신동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사온데.. 오늘 만나보니 사실이었사옵니다.
최응 .......... (계속 병증을 참고 있고)
유금필 여기까지 어쩐 일로 오신 게요?
최승우 먼저 아국의 폐하께오서는 고려국의 책사이며 많은 전장을 주도하였던 태평군사의 죽음을 애도하신다 하셨사옵니다. 또한 무서운 괴질로 하여 숱한 인명의 피해가 속출하고 있음도 안타깝다 하셨사옵니다. 삼가 위로의 말씀을 올린다 하시옵니다.
왕건 고맙구려.
최승우 여기 친서를 뫼셔 왔사오니 보아주시오소서.
그것을 전하면 왕신이 다시 받아 왕건에게 올린다. 서찰을 펼쳐 읽으면 들려오는 견훤의 소리
견훤 (E) 족하 보시게나. 괴질과 싸우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신가? 짐은 백제국의 황제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 연민의 정을 크게 느끼노라. 이미 그대도 고려라는 국가의 주인이 되었고 나 또한 대 백제국의 황제가 되었네. 이제 신라는 어차피 그 위엄을 잃었고 머지않아 사직의 문을 닫게 될 것일세. 신라는 우리 공동의 적이네. 나는 백제국의 뒤를 이은 것이고 그대는 고구려의 후예일세. 헌데 어떻게 지금에 와서 그대는 불구대천의 원수인 신라를 가까이 하고 있는가? 짐은 그것이 섭섭하여 오늘 조물성으로 와 그대를 만나자는 것일세. 폐 일언하고 지금 그대는 몹시 다급하고 위험에 처해있네. 그것을 피할 방도를 알려줄 것인 즉, 내가 보낸 파진찬 최승우와 의논해 주시게나. 현명한 선택을 하기 바라네.
왕건이 읽기를 마치고 그것을 접어 탁자에 놓는다.
왕건 잘 읽었소이다. 귀국의 황제께서 짐에게 지금의 공격을 면할 길을 알려주겠다 하셨는데 그게 무엇이오이까?
제장들 ................?
최승우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아무 것도 어려울 것이 없사옵니다. 이 시대를 좌우하는 범과 용이 바로 두 분이시옵니다. 두 분께오서는 천하를 놓고 겨루시고 계시옵니다. 한번 만나보심이 어떠하옵니까?
그 말에 모두들 웅성거린다.
왕건 만난다...? 그래서 어쩌자는 것이오?
최승우 지금 시급한 것이 고려에는 괴질을 물리칠 약이 필요하다는 것이옵니다. 또한, 서로가 전쟁을 피하고 화친을 맺을 수 있다면 지금도 그 많은 전란의 공포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위해 큰 다행이 될 것이옵니다. 소인은 그 두가지를 위해 왔사옵니다.
최응 그것이 뭐가 그리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문제는 만나는 방법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어떠한 예법과 절차가 있는 것이오이까?
최승우 별것 아니올시다. 물론 만남에는 예의가 필요하오이다. 우리는 평범하게 사람 사는 일상의 법칙만 서로 지켜주기를 원하고 있소이다. 대 백제국의 황제께오서는 고려국의 황제폐하보다 보령이 십 년이 위시옵니다. 그렇다면 뻔한 것이 아닙니까?
신숭겸 무엇이 뻔하다는 것입니까?
최승우 십 년 아랫사람이 십 년 윗분에게 어찌 대하여야 하겠습니까?
박술희 그렇다면 어찌 대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시오이까?
최승우 마땅히 상부의 예가 합당한 줄 아오이다.
박술희 상부..........?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겐가? 상부라니...?
제장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한다. 모두들 기분이 나쁘다. 왕건은 아무 말이 없다. 최응은 냉소만 짖고 있다.
최승우 이미 전쟁이 아니면 화친이옵니다. 그것이 백제국의 결론이옵니다. 또한 만약의 사태를 생각하여 이미 군대가 이 조물성 주변을 포위하기 시작했사옵니다.
김락 지금 누구를 겁주려는 것인가? 그대의 목은 몇 개나 되는고.....?
최승우 (미소) 이 사람의 목 하나 따위로 대세를 결정지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소이까? 허나, 그렇지가 못하외다. 지금은 되도록 싸움을 피하고 두 나라가 화친을 맺어야 할 때이옵니다. 그래서 소인이 온 것이옵니다. 상부라는 것은 큰 형님 이상으로 존경과 예의를 말하는 것이옵니다. 두 분의 춘추가 마땅히 그만하온데 어찌 이를 과하다 하시오이까? 아니 그렇소이까, 내봉성령?
최응 글쎄올습니다.... 무릇 이는 국가간의 화친에 관한 내용이올시다. 이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결론을 내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실무를 담당한 관료끼리 의견을 나누어 봄이 어떻겠습니까?
최승우 물론 그런 절차가 있어야지요. 바람직한 일입니다. 허면, 어느 분이...?
최응 외교에 관한 일은 이 사람이 맡고 있습니다. 저와 이야기를 하시지요. 폐하, 허락하시겠사옵니까?
왕건 물론 그런 절차는 당연히 필요한 것일세. 함께 가서 의견을 나누어 보라.
최응 망극하옵니다, 폐하.
유금필 아니 되옵니다. 내용 자체가 듣자하니 의논해 볼 가치가 없는 일이옵니다. 상부라니요? 어떻게 백제의 왕 따위가 폐하의 큰 형님이나 어른으로서 존재할 수가 있사옵니까? 이는 굴욕이옵니다. 싸움을 명하시오소서, 폐하.
신숭겸 유금필 장군의 말이 옳사옵니다. 상부는 아니 되옵니다, 폐하.
김언 폐하, 저 최승우의 목을 베어 성문에 거시고 백제군을 불러 싸우시오소서. 상부란 말도 아니되옵니다.
염상 신 또한 그리 생각하옵니다. 저 자의 목을 베시오소서, 폐하.
최승우 .......?
최응 진정들 하십시오. 사신의 목을 베는 일은 없습니다. 폐하께서 실무를 담당한 관료끼리 의논을 명하셨습니다. 이미 내려진 영을 반대하는 것 또한 옳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폐하, 하오면 신들은 먼저 가 보겠사옵니다.
왕건 그렇게 하게.
최승우 하오면.....
그렇게 그들이 물러간다. 유금필이 다시 중앙으로 나와 무릎을 꿇으며 청한다.
유금필 폐하, 신 유금필 다시 아뢰옵니다. 상부란 있을 수 없사옵니다. 백제국은 우리의 적이옵니다. 폐하께오서 어찌 적의 괴수에게 상부를 칭할 수 있겠사옵니까? 신은 목숨을 걸고 반대하옵니다. 통촉하시오소서, 폐하.
모두들 통촉하시오소서, 폐하....
씬 동 성안 어느 처소
최응과 최승우가 마주해 있다. 여전히 탐색전은 이어진다.
최승우 많이 불편한 것 같소이다.
최응 천만의 말씀입니다. 허허허... 자, 파진찬께서 말씀하신 내용은 충분히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고려의 황제폐하께오서 무릎을 꿇는 것을 보고 싶으신 것입니다?
최승우 그렇소이다.
최응 솔직히 인정을 하시니 고맙습니다. 즉, 이렇게 되는 것이겠지요. 여기서 상부를 허락하게 되면 그쪽에서 백제국의 황제가 이리로 오시던가 아니면 우리 폐하께서 그리로 가셔야 합니다.
최승우 그렇겠지요.
최응 또한, 이미 상부의 예를 하기를 약속하였다면 그 만남의 의식 속에서 어느 한쪽이 인사를 올리고 또한 받아야 합니다. 그때, 어찌해야 하는가가 관건이 되겠습니다.
최승우 바로 보셨소이다.
최응 허면, 말씀하시지요.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최승우 예법대로라면 무릎을 꿇고 술을 따라 올리셔야 합니다.
최응 그것은 어려우니 다음 내용을 말씀하시지요.
최승우 두 번째는 생각한 바가 없소이다. 전쟁이 되겠지요.
최응 그러나 첫 번째는 우리도 용납이 아니 됩니다. 싸울지언정 어찌 신하로서 그 주군을 무릎 꿇릴 수 있겠습니까? 이러면 어떻겠습니까?
최승우 말씀하시지요.
최응 지금은 전시이니 만큼 군례로 대신하도록 말입니다.
최승우 그건 좀 생각해볼 일입니다. 허면 상부라는 존칭은 고려국에서 이해가 되는 것이오이까?
최응 마땅히 십 년이 위신데 존칭을 하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최승우 하하하.... 일단 그 점은 그럼 이해가 되었소이다. 허나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병졸들이 죽어가고 또 그 시체들이 태워지고 있음을 알고 있소이다. 기왕이면 고집을 부릴 것이 아니라 그만 무릎을 꿇고 예를 다함이 어떻겠소이까? 허면 모든 것이 다 쉽게 풀리는 것이올시다.
최응 그렇다면 더 쉬운 방법도 있습니다.
최승우 오호.. 그래요? 그건 무엇입니까?
최응 바로, 파진찬 그대를 이곳에 가두어 놓고 협상을 하는 것이지요. 분명 백제의 황제는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아주 간단하고 쉬운 방법이지요.
최승우 (긴장하였다가 미소) 그런 예법은 없소이다.
최응 지금 죽느냐 사느냐 하는 마당에 예법이 다 어디 있소이까?
그러자 최승우는 잠시 굳어진 채로 오랫동안 최응을 보다가 웃는다.
최승우 하하하.... 과연, 최응이라는 신동은 대단하오. 물론 그러하오. 나를 여기다 놓고 협상할 수도 있지. 좋소이다. 더 이상은 물러나지 못하겠다는 것 같은데... 일단, 수용하겠소이다. 상부로 존칭해 올린다는 것, 그리고 군례로서 인사를 대신한다는 것. 그러나 내가 혼자서 정할 수는 없는 일이오. 기왕에 내가 여기까지 왔으니 어떻소이까? 최공께서 우리 폐하를 뵙고 인사를 드리는 것이?
최응 좋습니다. 그리하지요.
최승우 많이 불편해 보이십니다. 정말로 괜찮은 것이오이까?
최응 죽어가는 사람도 많습니다. 저는 아직 살아있습니다. 하하하...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최승우 앞으로 고려국의 모든 책략과 정책은 젊은 신동 그대가 맡아 하시겠구려? 태평군사가 갔으니 말씀이오.
최응 백제에도 최공께서 계시지 않습니까? 우리는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것 같습니다. 전쟁을 통해서 말입니다.
최승우 하하하... 나는 화친을 하러 왔다고 하였소이다.
최응 어차피 누군가 한쪽은 이기고 또 한쪽은 져야 이 삼한이 조용해집니다. 그러자면 전쟁은 결국 계속될 것입니다. 다른 분은 몰라도 우리 두 사람은 아는 일이 아닙니까?
최승우 하하하... 하하하.... (계속 웃다가) 그렇게 되겠지요. 엄청난 폭풍과 해일이 지나가고 난 뒤에 비로소 천하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겠지요. 우리는 그 속에서 목숨을 건 장기를 계속 두고 말이오.
최응 목숨을 건 것이 국가를 건 것이지요.
최승우 과연 그렇소이다. 과연 그래요. 하하하... 자, 일차 협상이 끝났으니 그만 돌아가 봐야겠소이다. 그럼 최공이 우리 폐하를 뵈러 오는 것으로 알고 있겠소이다.
최응 그렇게 하겠습니다. 먼저 가시지요.
최승우 예...
두 사람 그렇게 일어선다. 다시 또 강렬하게 그 눈빛이 교차한다. 그 시선들에서...
씬 다시 동 성안 군영
최응이 참석을 했다. 병증은 더 심해 보인다. 식은땀도 흘린다. 간신히 온몸을 지탱하고 있다. 왕건이 묻는다.
왕건 경의 병세는 어떠한고...?
최응 견딜만 하옵니다.
왕건 그까짓 백제의 왕을 만나고 아니 만나고가 뭐가 그리 중요한가? 이 진중에 경이 없으면 어찌되겠는가? 짐은 그것이 걱정이로다.
최응 많은 장졸이 죽어가고 있사온데 신이 이 어려운 때에 괴질에 걸린 것은 그야말로 신하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불충에 속하옵니다. 신이 슬프고 안타까운 것은 신의 병이 아니라 폐하께오서 이 어려움을 피하시기 위해 백제국 왕에게 고개를 숙이시는 일이옵니다. (목이 메어) 신이 그 일을 청하게 되었사오니 너무도 가슴이 아프옵니다.
왕건 나는 이미 결정을 하였노라. 그대가 하는 말을 다 알고 있노라. 백제의 왕에게 두 무릎을 다 꿇는 것도 아니고 군례로 대신한다고 하였어. 그만하면 된 것이야. 우리가 길을 지나다가도 나이많은 동네 어른에게 인사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야. 그 정도로 생각하세.
최응 망극하옵니다, 폐하.
유금필 아니 되옵니다, 폐하. 굽어 살피시오소서. 우리는 아직 진 것이 아니옵니다. 전투를 할 수 있사옵니다, 폐하.
신숭겸 그러하옵니다, 폐하. 상부를 허락할 수는 없사옵니다.
박술희 신도 그리 생각하옵니다. 백제의 황제를 만나서는 아니 되옵니다.
왕건 그만들 하게. 이미 내가 결정한 일이야. 그대들도 알 것이야. 이 싸움터에 나와서 억울하게 죽어가고 있는 저 가엾은 목숨들 말이야. 나는 원한다면 무릎을 꿇을 수도 있어. 장졸들의 목숨을 살리는 일인데 그까짓 무릎을 꿇는 일이 무엇이 대수란 말인가?
김락 결코 있을 수 없는 말씀이시옵니다. 폐하께오서는 대 고려국의 황제이시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을 수는 없사옵니다.
염상 그러하옵니다, 폐하. 신들은 참으로 이 순간이 너무도 부끄럽고 황망하옵니다. 폐하...
왕신 그러나, 폐하께오서는 병졸들의 어버이시고 백성들의 어버이시옵니다. 자식이 아파 죽어가는데 그냥 있을 부모가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그만 폐하를 괴롭히시는 것이 신료된 자들의 본분이라 여겨지옵니다. 그만들 하시오소서.
왕건 옳은 말일세. 일단 우리가 만남으로서 전쟁을 피하고 나이 많은 사람에게 상부라 불러줌으로서 약을 구할 수 있다고 하네. 그리고 영원히 화친하여 전쟁까지도 하지 말자 하네. 피할 일은 아닐세. 이보게, 최응이?
최응 예, 폐하.
왕건 내가 가서 만나 본다고 하겠네. 먼저 자네가 가서 이 이야기를 잘 매듭짖게.
최응 예, 폐하. 하오나 신 최응, 더 이상의 좋은 방법을 찾지 못하고 폐하를 부끄러운 자리에 뫼시려는 이 죄, 훗날 다 청하여 받겠사옵니다. (통곡하며) 용서하시오소서, 폐하. 죄인 최응을 용서하시오소서, 폐하.
그 통곡 소리에 모두가 숙연해진다. 왕건도 눈물이 글썽해진다.
왕건 죄인은 바로 나이니라. 내가 부덕하여 오늘 이러한 처지에 몰린 것이야. 아무도 죄를 지은 자 없도다. 가라.. 어서 가라.. 장졸들의 목숨이 급하니라. 어서 가라...
최응 예, 폐하.
유금필 너무도 황망하옵니다, (울며) 폐하. 망극하옵니다.
제장들 망극하옵니다....
씬 조물성 성밖
최응이 말을 타고 가고 있다. 왕신과 함께 부장들의 호위를 받으며 가고 있다. 그렇게 적진으로 멀어져 가고... 그 담담한 모습에서.
씬 성안 군영 혹은 성루
왕건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먼 곳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
왕건 별일이 없어야 할 터인데... 괴질에 걸려서도 짐과 장졸들을 구하겠다고 적진 속으로 가는 저 모습이 참으로 딱하도다. 아아, 나는 어찌 이리도 박복하단 말인가?
씬 동 성밖 고려군 진영
배현경과 홍유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계속해 최응의 말이 지나쳐 가고 있다. 모두들 숙연하다.
배현경 우리 폐하께오서 무릎을 꿇으신다고..?
홍유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사과를 하고 항복이나 다름없는 의식을 하러 가는 것 같소이다.
배현경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어쩌다가 우리가 이렇게까지 되었단 말인가? 어쩌다가.... 우리 고려가....
씬 송도 황궁 외경
씬 동 성안
시중 김행선이 신료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하고 있다.
김행선 지금 전선의 상황이 최악을 달리고 있다 하오이다. 우리 고려가 백제의 대군을 맞아서 싸움도 못해보고 모두 돌리병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에요.
무 폐하께서는 혼자 돌아오시지 않겠다고 하셨다 합니다. 걱정이 너무 큽니다.
왕규 그래도 황제폐하께서 그 무서운 괴질이 도는 곳에 계신다는 것은 나라 장래를 생각해서도 아니될 말씀입니다. 속히 돌아오시라고 청해 올려야 할 것입니다.
추언규 그렇구말구요. 하룻밤 사이에 수백씩 죽어나간다는 그곳에 폐하께서 계신다니 말도 아니 됩니다.
왕식렴 이 사람은 평양의 일이 바빠서 조정 일에 참여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잠시 또 들려서 보니 폐하께서 너무도 어려운 지경에 처하신 것 같습니다. 지금이라도 다시 군사들을 소집하여 뒤를 바치고 폐하의 지친 군대들을 교대하여 싸워야 할 것입니다.
김행선 그러나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걸립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졸지에 돌림병에 당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유가 없어요. 방법이라면 폐하께서 속히 여기 황도로 돌아오시는 것이올시다.
왕식렴 이미 돌아오시지 않겠다고 천명을 하셨답니다. 그렇다면 다른 방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방책 말입니다.
김행선 허허, 이걸 어찌하노... 뭐 다른 길이 있어야 말이지요.
씬 동 황궁 황후전
오씨가 유씨를 옆에 앉혀 놓고 수많은 궁인(부인들)을 불러 훈계하고 있다. 거기 제조상궁과 김상궁, 연이들을 비롯한 숱한 궁녀들도 시립해 있다.
오씨 지금 전장에 나가 계시는 폐하께서 큰 어려움에 처해 계시네. 돌림병이 돌고 수백 수천의 병졸들이 죽어가고 있다네.
모두들 .............
오씨 나는 황후로서 폐하와 장졸들이 밖에 나가 싸우고 있는 동안 우리 황궁의 여인네들 또한 마음으로나마 정성을 다 바쳐야 한다고 생각하네.
유씨 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황후마마.
오씨 폐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는 이 황궁 안에서 가무음곡은 물론이거니와 방정맞은 웃음소리가 들려온다면 모두 엄벌에 처할 것이야. 안과 밖이 한마음이 되어야 하늘이 도와주시는 게야. 알겠는가?
모두들 예, 황후마마....
오씨 여기 있는 충주부인은 마땅히 나와 같은 황후의 예로써들 대하여 그 지시와 영을 잘 따라야 할 것이야. 이보게 아우님?
유씨 예, 황후마마.
오씨 지금 국가의 일이 매우 급하고 위중하니 여기 부인들과 궁인들을 잘 다스리고 이끌어 폐하가 오실 때까지 기도를 드리도록 하세. 어느 곳의 여인들이나 다 마찬가지일세. 안에서 잘 해야 바깥일도 잘되는 것이야. 자네가 마음을 모아주게. 분명 백제국의 황실 여인들도 우리와 같은 마음일 게야.
유씨 예, 황후마마. 그리하겠사옵니다.
씬 백제국 황궁 외경
씬 동 황후전 안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박씨는 기분이 모처럼 좋다. 고비도 그렇고...
박씨 저 조물성 싸움에서 고려군이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다는 구먼. 별 싸움도 없이 돌림병으로 죽어간다는 게야.
고비 전령이 하는 말을 들었사옵니다. 참으로 얼마나 다행이옵니까, 황후마마?
박씨 암,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을 것이 어디 있겠는가? 요즘 모처럼 두발 뻗고 잠을 잔다네. 우리 태자들이 모두 안전하니 말일세.
고비 그러하옵니다.
박영규 이제 더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옵니다. 지금 그곳에서는 황제폐하가 가 계시옵니다. 또한 고려의 왕도 와 있사옵니다. 이 얼마나 통쾌한 일이옵니까, 황후마마?
이상궁 소인이 들어도 근자에 참으로 이만한 낭보가 없었사옵니다. 감축드리옵니다, 황후마마.
박씨 암, 감축 받을만 하네 그려. 양쪽에 모두 의원이 나와있는 싸움일세. 그런데도 우리쪽 의원이 약처방을 잘써서 병을 물리쳤다니 얼마나 대단한가? 차라리 그놈의 돌림병이 이 삼한땅 전체를 삼키어서 없앴을 것을 없애 버리고 전쟁도 끝이 났으면 좋겠구먼. 지긋지긋허이. 전쟁, 전쟁.. 또 전쟁... 나는 평생 그 소리를 듣고 살았네. 정말 지긋지긋해.
씬 조물성 백제군 진영
장수들이 도열해 있다. 수많은 군막 사이로 그 도열한 장수들 사이를 지나 최응이 들어서고 있다. 병증은 계속 되지만 그는 애써 참으며 그렇게 걸어 들어간다. 백제의 한다하는 장수들이 모두 보인다. 저만큼에서 최승우가 능환, 종훈등과 함께 보고 있다가 홀로 나와 최응을 맞는다.
최승우 어서오시오, 최공. 우리 폐하께오서 기다리시고 계십니다.
최응 예, 파진찬. 이렇게 환대를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최승우 자, 이 쪽은 이 나라 최고의 벼슬이신 이찬, 능환님이십니다.
최응 예, 최응이라 하옵니다.
능환 오, 반갑소...
최승우 이쪽은 군사 종훈이라 합니다.
종훈 종훈이라 합니다.
최응 최응입니다.
그때, 견훤이 저 쪽에서 나온다. 모두들 썰물처럼 허리를 숙이며 예를 표한다. 태자들과 공직을 비롯한 장수들이 모두 와 있다. 최응이 서서 보고 있다가 가볍게 군례를 올린다. 보고 있던 태자 신검이 소리친다.
신검 네, 이놈... 최응이라 하였는가? 황제폐하께서 납시셨는데 어찌 무릎을 꿇지 않느냐?
최응 지금은 전시이고 나는 항복의 사자로 온 게 아니라 상대국의 사자로 온 것이오. 군례면 되었지. 어찌 무릎까지 꿇으라 하시오이까?
금강 우리는 그대를 항복의 뜻을 가지고 온 사자로 아느니라. 무릎을 꿇어라. 어서 꿇어라.
최응 하하하... 백제국은 본래 이렇게 예의들이 없소이까? 강제로 꿇려서 받는 절이 무엇이 그리 대단하겠소이까? 아니 그렇사옵니까, 폐하?
견훤 하하하.... 그대가 고려의 신동인가? 과연, 배포 또한 든든하구먼... 암, 우리는 아직 서로가 서로를 겨루는 상대국이야. 군례면 되었네. 헌데, 그대도 괴질에 걸렸다고 들었는데...
최응 병 이야기를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서로의 의견을 나누러 왔사옵니다.
견훤 하하하... 나는 인정으로서 하는 이야기일세. 약을 줄 터이니 들게나.
모두들 ............
최응 나라를 대표해온 사신이옵니다. 더는 시험하지 마오소서. 혀를 깨물고 죽을 지언정 어찌 소인 혼자 약을 받을 수 있겠사옵니까? 신은 백제국 황제폐하를 뵙고 고려국의 폐하를 뫼시는 일에 대하여 의논하러 왔사옵니다. 대답이 결정 되었사옵니까?
견훤 이미 신료들과의 의논이 있었네. 그래, 고려국에서는 어떤 결론을 내렸는고..? 다시 한번 묻고 싶구먼, 그래.
최응 우리 고려국 황제폐하께오서는 이곳으로 납시어 백제국 황제폐하를 뵈옵고 인사를 드리기로 하였사옵니다.
신료들 .............
견훤 그것뿐인가?
최응 또 있사옵니다. 아국의 폐하보다 십 년이나 춘추가 많으신 백제국 황제폐하를 상부로서 뫼신다 하셨사옵니다.
견훤 (한참보고 있다가) 그 약속은 틀림이 없는가?
최응 예, 폐하. 틀림이 없기로 소인이 이렇게 온 것이옵니다. 또 한가지 있사옵니다. 상부라는 존칭을 올리게되면 이미 큰 형님이나 부모의 예에 근접하는 가까움을 뜻하옵니다. 듣자하니 앞으로 양국이 화친하기를 바란다는 말씀이 계신 것으로 아옵니다. 그에 관한 것을 보장해 주시오소서.
견훤 화친을 보장하라. 암, 그 얘기도 있었지. 어떻게 보장하면 될꼬..?
최승우 말로만 하는 화친은 잘 이루어질 수가 없는 법이옵니다. 양쪽에서 두 황제분의 인척이 서로가 중인이 되어 양국으로 나뉘어 있음이 어떠하옵니까, 폐하?
견훤 그것도 그럴 듯한 말이네 그려. 화친을 하자면 그 정도는 되어야지. 서로를 보장할 수 있는 뭔가가 있어야지. 암....
능환 그것은 우리가 손해이옵니다. 이미 고려국의 형편이 어려워 우리에게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는데 그까짓 화친을 위해 우리 쪽에서 볼모까지 교환한다는 말이옵니까? 있을 수 없사옵니다.
최응 분명 말씀드렸습니다마는... 소인은 대등한 나라끼리의 자격으로서 온 것이올시다. 고개를 숙이러 온 것은 아니옵니다. 자존심을 밟게되면 협상은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옵니다.
견훤 암, 암.. .그렇지.. 그 점은 인정해. 중요한 것은 지금 나를 보고 상부라 하겠다 하는 그것이야. 다시 말하면 내 아우가 되겠다는 것이야. 나는 큰 형님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가?
최응 ...............
제장들 ...............
견훤 왜 대답이 없는가? 고려의 왕이 그리하겠다고 하였는가?
최응 ...............
견훤 그리 하였어?
최승우 ................?
최응 예, 폐하.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사옵니다.
견훤 분명히, 분명히 대답하였다는 말이지? 제장들 들었는가? 들었어?
모두들 예, 폐하.
견훤 하하하..... 으핫하하하..... 하하하..... 그렇다. 나는 형님이 된 것이다. 상부가 된 것이야. 상부 말이야...... 이제 나는 큰 형님이 되었고 고려의 왕은 내 아우가 된 것이다. 이제 우리가 만나는 일만 남았구나. 형과 아우가 만나는 일만 남았어....! 하하하하.....
(148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