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사 하면 많은 사람들은 양평 용문사를 떠올린다. 양평의 용문사는 서울에서 가깝고 큰 은행나무가 있어 사람들이 많이 찾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북 예천에 가면 양평의 용문사보다 훨씬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보물이 많은 또 하나의 용문사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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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백산 용문사'라고 쓰인 일주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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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기 |
| 용문사에 들어서면 먼저 ‘소백산 용문사’라는 편액이 붙은 일주문을 만날 수 있다. 소백산의 영역을 지나치게 해석한 아쉬움은 있지만 이해하고 넘어갈 만하다. 우리는 일주문을 지나 용문사 중수비 앞에 차를 세운다.
이 비석의 정확한 명칭은 ‘중수용문사기(重修龍門寺記: 명종 15, 1185년)’이다. 비석의 중간이 깨져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은 문화재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용문사는 우리나라 선불교의 큰 스님인 범일국사와 함께 당나라에 가서 불교를 공부하고 돌아온 두운(杜雲)조사가 창건(경문왕 10, 870년)하였다. 이후 고려 태조 왕건의 도움으로 용문사는 30칸의 당우를 가진 큰 절로 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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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수용문사기' 비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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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기 |
| 용문사와 관련해 중요한 또 하나의 스님이 조응(祖膺)선사이다. 스님은 절이 퇴락한 것을 보다 못해 제자인 자엄(資嚴)과 함께 절을 수리 중창한다(의종 19, 1165년). 그리고 1171년(명종 1)에 태자의 태를 이곳 용문사 앞산에 묻으면서 절은 호국 사찰로서 그 위상이 높아진다. 그런 의미에서 용문사는 두운과 조응의 절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두운은 신성한 스님이고 조응은 현명하고 덕이 있는 스님이다(杜雲聖僧也 祖膺賢德也). 만약 두운이 이곳에 자리를 잡지 않았다면 이곳은 승냥이와 여우의 소굴이 되었을 테고, 조응이 옛 것을 수리하고 쓰러진 것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무너진 담장과 깨어진 주춧돌이 풀 속에 묻혀있을 것이다.”
천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용문사에는 보물이 다섯 개나 있다. 대장전, 윤장대, 목불좌상과 목각탱, 용문사 교지, 팔상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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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장전에는 세 개의 보물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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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기 |
| 맞배지붕으로 단순하면서도 다포식으로 화려한 대장전(大藏殿:보물 145호)은 이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중수용문사기에 의하면 “계사년(명종 3, 1173)에 나라와 조정에 어지러운 일이 많았을 때에도 대선사(조응)가 발원하여 3만 명의 승려들에게 공양하는 재(齋)를 열었다. 이와는 별도로 윤대장(輪大藏) 두 개와 (이를 안치할) 건물 3간(間)을 만들고 7일간 법회를 열어 학자 300인을 초빙하였다. 낙성식 때에는 개태사(開泰寺) 영치(穎緇) 승통을 초빙하여 설법하였고 이를 통해 나라를 어려움으로부터 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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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개의 윤장대: 왼쪽의 것은 꽃살무늬, 오른쪽의 것은 격자무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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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기 |
| 대장전 내에는 회전식 불경보관대인 국내유일의 윤장대(輪藏臺: 보물 684호)가 있다. 목불좌상과 목각탱 앞 좌우에 한 쌍이 있으며 팔각등 모양을 하고 있다. 마루를 뚫고 그 밑에 중심축을 두었으며 중간 아래 부분에 손잡이를 만들어 돌릴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둘 중 왼쪽의 것은 꽃살 무늬로, 오른 쪽의 것은 격자무늬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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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에 목불좌상, 뒤에 목각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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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기 |
| 국내에 흔치 않은 용문사 ‘목불좌상과 목각탱’(보물 989호)은 목각탱 하단에 있는 조성기를 통해 1684년(숙종 10)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목불좌상은 석가모니 부처님으로 보이는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보관을 쓴 협시보살이 있는 삼존불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얼굴 표정이 근엄하고 법의는 통견으로 단조로운 편이다.
이 목각탱은 국내에 존재하는 것으로는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이다. 상하로 긴 직사각형 모양이며, 가운데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부처님들을 3단으로 배치하고 있다. 중앙의 본존불 뒤에는 보상당초문의 화려한 광배가 있으며, 다른 부처님들 주위 빈 공간은 구름과 광선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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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조의 수결(sign)이 있는 교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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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기 |
| 이 외에도 용문사에는 조선 세조의 친필 수결이 있는 교지(보물 729)와 현재 김천 직지사의 성보박물관에 가 있는 팔상탱화(보물 1,330호)가 유명하다. 교지에는 용문사를 보호하고 승려로 하여금 잡역을 면제해 주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팔상탱화에는 석가모니의 일생을 8개 장면으로 묘사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들 보물 말고도 용문사에는 여러 당우들이 있어 절의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그중 자운루, 회전문, 보광명전, 극락보전 등의 건물이 훌륭하고 또 가치 있다.
용문사를 보고 나오는 길에 죽림리에 있는 초간정(草澗亭)에를 잠깐 들렀다. 초간정은 소나무가 우거지고 물과 바위가 어우러진 명승지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을 지은 초간 권문해 선생(1534-1591)이 조선 1582년(선조 15) 처음 지었으며, 이후 시간의 흐름과 함께 훼손되었다가 1870년 후손에 의해 다시 지어졌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온돌방과 대청 그리고 우물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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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문사의 어린 은행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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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기 |
| 아침에 출발해 문경과 예천의 절들을 구경하고 나니 저녁이 가까워 온다. 10월인지라 해는 벌써 많이 짧아졌고, 계절 탓인지 나뭇잎들은 벌써 붉은 빛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양평의 용문사만큼 크지는 못하지만 이곳 용문사 작은 은행나무도 석양을 받아 황록색으로 밝게 빛난다. 저 은행나무가 노거수(老巨樹)가 되어 새로운 천년 용문사의 역사를 증언해 주기를 바라며 충주로 향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