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마 안중근, 그리고731부대 2007-12-09 –
1909년 10월 26일 허얼빈역의 연도에는 일찍부터 이토 히로부미를 환영하는 준비를
위하여 화려한 경관이 펼쳐져 있었다.
이토 일행이 지나가는 동청 철도(東淸鐵道)의 각 역과 철도에는 엄중한 경계망이 펼쳐
져 있었다.
허얼빈역의 연도에는 수천의 러시아 군인들과 의장대가 정렬하고 외국의 사절단과 일
본의 거류민들이 눈부시게 화려한 복장으로 열지어 서 있었다.
오전 9시 10분 이토를 태운 특별 열차가 허얼빈역의 플랫폼에 미끄러져 들어오자, 축
포가 메아리치며 장중한 군악대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득의만면한 이토의 뒤에 러시아
주청공사(駐淸公使)를 비롯하여 청나라의 고급 관리들이 줄지어 있고, 이토 바로 옆에
는 일본 총영사 가와카미와 만주 철도 이사 다나카, 비서관 모리가 따르고 있었다
.
만면에 웃음을 가득 담은 이토는 러시아군 의장대를 통과하여 각국 영사관 직원들이
도열해 있는 앞자리에 가서 의례적인 인사를 한 뒤 방향을 바구어 장교단이 서 있는 쪽
으로 향하려고 하였다.
그 순간 러시아 장교단 뒤에 숨어 있던 안중근이 사람들의 울타리를 밀어 헤치며 전광
석화 처럼 뛰어나와 권총을 들고 이토를 향해 세 발의 총탄을 발사하였다. 백발의 이토
히로부미는 불의의 총격을 받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는 이어서 이토 곁에 있던 가와카미, 다나카, 모리에게 한 발씩 쏘아 치명상을 입힌
뒤 권총을 내던지고 품에서 태극기를 꺼내어 "조선 독립 만세!"라고 소리 높여 외쳤다
.
이토를 환영하는 분위기에 휩싸여 있던 역 앞은 순식간에 벌어진 이 사태에 이내 대혼
란에 빠졌다.
안중근은 그곳을 경비하고 있던 러시아 군인들에게 체포되었다. 안중근의 총격을 받고
쓰러진 이토 히로부미는 출혈 과다로 25분 뒤에 숨을 거두고, 안중근은 일단 러시아
헌병대에 구금되었다가 이틀 뒤인 28일에 일본 헌병대에 인도되었다.
안 의사는 하얼빈 공원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듯 했다.
안 의사가 여순 감옥에서 사형집행 직전 두 동생들(정근·공근)에게 “내가 죽은 뒤에 내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쟁해달
라”는 최후의 유언을 남길 정도로 그만큼 하얼빈을 사랑했다.
그러나 안 의사의 바람과는 달리 안 의사의 유해는 사형집행 후 하얼빈 공원에 묻히기
는커녕 조국의 국권이 회복됐음에도 불구하고 어디에 묻혀있는지 조차 확인되지 못하
고 있다.
그후 후손들이 하얼빈공원에 그의 유비를 이곳에 세운다.
빙등제 준비로 분주한 조린 공원을 1시간 이상을 헤멘후 유비를찿아 오랫동안 묵념을
올렸다.
눈물이 글썽해지며 추위에 콧물과 뒤섞인다.
무거운 마음으로 731 부대로 향한다.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하얼빈에 있던 일제 관동군 산하 세균전 부대이다.
1936년에서 1945년 여름까지 전쟁포로 및 기타 구속된 사람 3,000여 명을 대상으로
각종 세균실험과 약물실험 등을 자행했다.
1936
년 만주 침공시 하얼빈 남쪽 20km 지점에 설립한 세균전 비밀연구소로 출발하였
으며, 당시 방역급수부대로 위장하였다가 1941년 만주 731부대로 명칭을 바꾸었다.
설립 당시의 사령관은 1930년대 초 유럽 시찰을 통해 세균전의 효용을 깨닫고 이에 대
비한 전략을 적극 주창한 사람은 세균학 박사 이시이 시로[石井] 중장(中將)이다.
부대 예하에는 바이러스, 곤충·동상·페스트·콜레라 등 생물학 무기를 연구하는 17개 연
구반이 있었고, 각각의 연구반마다 마루타 라고 불리는 인간을 생체실험용으로 사용했
다
.
1940
년 이후 해마다 600명의 마루타들이 생체실험에 동원되어 최소한 3,000여 명의
한국인·중국인·러시아인·몽골인 등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만행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살아남은 150여 명
의 마루타들까지 모두 처형한 것으로 알려졌다
.
1947
년 미 육군 조사관이 도쿄[東京]에서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1936년부터 1943
년까지 부대에서 만든 인체 표본만 해도 페스트 246개, 콜레라 135개, 유행성출혈열
101개 등 수백 개에 이른다.
생체실험의 내용은 세균실험 및 생체해부실험 등과 동상 연구를 위한 생체냉동실험,
생체원심분리실험 및 진공실험, 신경실험, 생체 총기관통실험, 가스실험 등이었다.
1940년 10월 27일에는 난징[南京]의 1644 세균전 부대와 함께 중국 닝보[寧波]에 페
스트균을 대량 살포하여 100명 이상을 사망하게 하였고, 1941년 봄에 후난성[湖南省]
의 한 지역에 페스트 벼룩을 공중 살포하여 중국인 400여 명을 희생시켰다.
특히 이 작전을 수행하던 중에 일본군도 경험 부족으로 자체 1개 사단의 병력이 감염
당한 사례가 있었다고 한다.
최근 731부대 장교가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문서가 일본의 한 대학에서 발견되어 일본
군의 세균전 및 생체실험이 사실로 입증되었다.
이에 따르면 페스트균을 배양해 지린성[吉林省] 눙안[農安]과 창춘[長春]에 고의로
퍼뜨린 뒤 주민들의 감염경로와 증세에 대해 관찰했다는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
고, 이로 인해 중국인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종전 후 이시이 시로를 비롯한 부대원들은 세균전 연구결과를 모두 미군에 넘기는 조
건으로 전범재판에 회부되지 않고 면책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정부는 일본의 전쟁범죄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731부대의 시설을 유네스코 세
계유산으로 등록을 추진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23개 시설을 대상으로 2001년 3월초부
터 본격적인 복원공사를 진행중에 있다.
하얼빈 시내로 돌아와 커피생각이 간절해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민박집에서 만
난 한국 기업가로부터 저녂을 함께 하자는 연락이 온다.
서라벌이라는 한국 음식점에서 소고기 안심으로 후한 대접을 받은후 박영희 자가와 민
박집 주인으로부터 노래방 대접 까지 받는 호사를 누리게 된다.
그래서 발맛사지는 내가 쏘기로 하고 집에 숙소에 돌아오니
새벽2시다.
북두칠성의 고향 하얼빈의 마지막 밤이 이렇게 아쉽게 지나간다.
내일은 내 조국 대한민국 으로 돌아간다.
어느 여행지인들 기억에 남지 않겠냐 마는 하얼빈은 각별하게 남아 있을 듯 하다.
하루 빨리 통일이 되어 다음에는 열차를 이용해서 북한을 통해 꼭 다시 가고싶다.
안녕 하얼빈~
이토가 하얼빈역에 들어온 방향
이토가 안의사의 총을 맞고 절명한 곳
도마 안중근이 이토를 쏜 위치
도마가 이렇게 이토를 쐈을 것이다
하얼빈 역 앞의 구두닦이 아줌마들.얼마나 추운지 옷두께를 보시라
조린공원(하얼빈공원) 이조린은 중국의 항일 운동가 이며 이곳 구석에 도마의 유비가
쓸쓸히 서있다
안중근 유비 앞
안의사 유비 뒤
빙등제 준비로 분주다. 이곳에서 빙등제가 열린다
빙등제 준비하는 노동자의 간식시간. 이추위에 체하지나 않을런지...,
731부대 입구
퇴각 하면서 모두 파괴하고 남은건물이 별로 없다
이 건물은 공개를 하지 않고 있다
귀신이라도 나올듯이 을시련 스럽다
광활한 우리 옛 영토 만주벌판,연해주 다시 찿아야 할텐데...,
아들아! 아버지 세대에 못한것 너희 세대에서 꼭 찿아와라
하얼빈시 교향악단 지휘자.이분이 하얼빈 진달래민박 주인장 이다.
첫댓글 하얼빈은 보기만해도 춥네요. 귀한 사진 잘 보았습니다..저도 이 코스로 한번 가보고 싶네요. 대성중학교는 많이 깨끗해졌네요.
잘 보고 갑니다.
사진이 큼직해서 보기 좋습니다~~대장 말대로 추워 보입니다~~우리 조상들의 한이 서린곳 잘 보앗았습니다...^^
8일간의 여정을 마치 파노라마 보듯이 감상 잘했구요, 연길, 심양, 할얼빈 사진 잘보았습니다. 여행경비는 도합 얼마나 들으셨는지 가능하면 공개 하셨으면 좋은덴데요...
항공료 제외하고 공항에서 100 만원 환전해서 돌아오니 36만원 남았으니 64만원 정도 썼네요.+
아는 분이 심양을 꼭 가보고 싶어 하셨는데, 제가 대신 다녀온 것 같군요. 날씨 탓인지 밝은전망님의 역사의 고증() 탓인지 그 곳의 아픔과 추위가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우리의 역사가 저리 보존 되고 있다니 제가 있는 이 나라가 마냥 작게만 느껴지기도 합니다. 많은 경비를 들여 다녀오신 귀한 여정, 따뜻한 방안에서 공짜로 구경해서 어쩌죠 정말 덕분에 귀한 공부하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다시 기회가 오면 또 소개해 주실거죠 따뜻한 연말 보내시고 희망찬 새 해 맞이 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