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에 중학교가 설립되기까지
중학교를 설명하기 전에 초등학교를 말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완도에 초등교육을 시작한 것은 서울에서 보통학교가 세워질 무렵인 1905년 11월 21일 당시 제7대 군수인 김상섭이 자부담으로 완도 사립육영학교를 3년 과정으로 세웠다.
이 학교를 우등생으로 졸업했던 김홍추, 김춘수, 김재교, 황영철, 이사영, 송내호, 김내동 등은 유학을 하고 모교로 와서 선생을 하였다.
1909년 1회 졸업생을 배출을 하고 1910년 완도육영 보통학교로 개칭하게 되었다.
그리고선 1911년 다시 공립으로 개편되면서 완도공립보통학교로 개칭하였다.
사진 출처 : 완도초등학교
사립이 공립으로 바뀌면서 6년제로 완도동국민학교로 되었다.
1936년에는 일본인들이 따로 완도동몽학원(莞島童蒙學院)이란 학교를 세워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교에 갈 수 없는 학생들을 모아 사상 교육을 시키기도 하였다.
국민학교라고 부르던 것을 일제의 잔재라 하여 1996년 초등학교로 부르게 된 것이다.
필자는 이 학교 44회 졸업셍이다.
안타깝게도 내가 2학년 때 6,25 전쟁으로 그 좋았던 학교가 불에 타고 말았다.
그러나 국민학교를 졸업해도 이상 배울 학교가 없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기던 군민들이 뜻을 모아 설립하게 된 것이 공립 완도중학교였다.
설립의 중심에 스셨던 김상근은 7대 군수를 지낸 김상섭의 동생이다.
김상근이 취지문을 만들고 5천원을 기부하여 현재 완도군 의회 자리에 완도중학원이란 이름으로 70여 명을 모아 개교를 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완도중학교는 완도군에 단 하나밖에 없는 중학교였다.
완도에 중학교를 만들기 위해 1943년 7월 10일 중학교 설립기성회를 조직하고 완도의 어른들이 하나로 뭉쳤다.
이렇게 하여 1945년 10월 10일 개교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초대 교장에 최천열선생님이 취임을 했다.
1971년 3월 1일에는 남녀공학이던 학생을 남녀로 분리하여 여자중학교가 처음으로 개교를 했다.
당시 우리의 실정이 그러긴 하였지만 인가서를 보면 미군정청이 인가를 한 것을 보면서 씁쓸함을 금할 수가 없다.
자료 출처 : 완도중학교
이 글을 쓰면서 옛날이 많이 생각이 난다.
완도중학교 11회 졸업생이기 때문이다.
이때는 중학교를 가기 위해 국민학교 5학년 때부터 중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는 공부를 했다.
밤 10시까지 공부를 했는데 당시엔 전등불이 없어 램프나 호롱불을 켜놓고 공부를 했다.
시험에 떨어지면 중학교를 갈 수가 없었으니 공부를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6학년까지 담임을 맡으셨던 김용섭선생님을 잊을 수가 없다.
겨울철이면 차가운 도시락을 그대로 먹어야 하는데, 따뜻한 도시락을 먹을 수 있게 나무를 이용했던 난로에 먼저 올린 것을 한참 만에 위로 올리고 위에 있던 것을 아래로 내리는 그 번거로움을 오전 내내 하셨던 그 선생님에 그 따뜻한 마음을 잊을 수가 없다.
막상 입학을 하고 나니 왜 그렇게 공부가 하기 싫었는지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이 학교의 교훈은 “학행일치”, 교목은 소나무, 교화는 동백꽃, 교색은 파란색이다.
하나 잊을 수가 없는 일이 있었다.
나는 평행봉을 무척 좋아했는데 운동을 하다가 그만 큰대자로 떨어졌던 일이다.
다행스럽게도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그 일을 계기로 그렇게 좋아하던 평행봉 운동을 그만두었다.
또 하나 개교기념일에 마라톤을 했는데 왕복 5km 정도였다.
전교생 600명이 뛰었다.
나는 300등이었다.
그러나 참 재미있었고 그때가 자꾸 생각이 난다.
학교가 바닷가에 있어서 공을 차다가 잘못하면 물에 빠지는 것이 다반사였다.
사진 출처 : 완도중학교
1999년 3월 3일 더 넓은 부지로 옮겨 교실 24개인 새 학교로 이사를 했지만 지금도 옛 학교터를 지날 때면 그때의 생각들이 난다.
이사한 새학교
완도중학교 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