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현재, 대한민국 고속도로는 몸살을 앓고 있다. 승용차, 고속버스, 대형
화물차, 트럭이며 레미콘 차까지, 갖가지 종류의 수많은 차량이 스물네 시간 도로 위를 질주한다. 명절때면, 서울-부산 간 428km를 열 두
시간 걸려 주파했느니 아예 길 위에서 밤을 샜느니 하는 무용담이 만발한다. 명절 때만 그런 것이 아니다. 주말에 가족 나들이라도 나섰던 사람들은
적지 않은 시간을 고속도로 위에서 보낼 각오를 해야 한다. 그래서 모두들 앞 차에 밀려 움직이지 않는 차 안에서 이렇게 생각한다. “아예
처음부터 도로를 널찍하게 닦았어야지.” 구한말 은둔의 왕국 조선을 여행했던 구주 각국의 외교관과 선교사들은
문명국가 조선에 별다른 수송수단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조선 제1의 항구인 제물포와 수도인 한양을 연결하는 도로라고는 폭
1.5미터의 흙길이 전부라는 믿을 수 없는 증언으로부터 도시와 도시 사이에는 자동차는 고사하고 모든 바퀴달린 수레조차 지나다닐 길이 부재한다는
조사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열악한 도로 사정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등에다 짐을 지고 산길을 걷고 언덕을 넘어 물건을 져 나르던
보부상이 구한말까지 건재했던 데는 다 그만한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6.25 동란 중에는
도로망이 부실하여 UN군의 중화기가 거의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웃지 못할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그런데, 거의 모든 물자를 인력에 의지해
원시적으로 운반하던 나라가 100년도 못되어 세계 유수의 고속도로망을 보유한 교통대국으로 성장했다. 2005년 현재, 대한민국의 고속도로는
23개 노선 총 연장 2,804.36km, 두 가닥의 민자 고속도로를 보태면 2,922km로 세계 10위권의 네트워크다. 1965년 당시
대한민국이 보유한 자동차 총 대수가 41,000대다. 인구 700명당 1대 보유라는 세계 최저수준의 교통문화 후진국에서 불과 40년 만에 세계
일류국가군으로 진입한 기적적 도약. 이러한 성취는 오로지 한 인물의 비범한 결단에서 비롯하였다. 1967년
4월 대한민국 제6대 대통령 선거. 박정희 후보는 고속도로 건설을 공약으로 들고 나왔다. 그가 품은 고속도로의 꿈은 기실 오랜 역사를 지닌
것이었다. 1954년 미국 포병학교에서 위탁교육을 받을 당시, 이 열혈장교는 ‘일반도로에 비해 3배의 교통량을 소화하고 두 배의 속력을 낼 수
있으되 사고율은 5분의 1에 불과’한 고속도로라는 시설에 매혹되었다. 그때 가슴에 품은 “나라가 발전하려면 우리도 고속도로를 깔아야 한다”는
신념은, 10년 후 마침내 웅장하게 피어날 결정적 계기를 맞이한다. 1964년 12월 6일, 서독의 뤼브케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부부를 공식초청했다. 전쟁의 상처가 아직도 국토 곳곳에 남아있던,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대한민국. 그
나라의 정부는 세계 어느 나라로부터도 돈을 빌릴 수 없었다. 그 나라의 청년들은 아무리 일이 하고 싶어도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분단의
상처를 공유한 서독은 세계에서 우리에게 가장 호의적인 나라 가운데 하나였다. 그들은 우리 정부에게 한국인 간호사와 광부들을 받아줄 용의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수많은 우리 젊은이들이 바다를 건넜다. 그리고, 우리 정부는 그들의 월급을 담보로 서독에서 1억4000만 마르크의 차관을
들여왔다. 그 돈은 우리 경제가 발전하는 첫 걸음을 떼는데 더없이 소중한 종자돈 구실을 했다. 첫 인력수출로부터 삼 년이 지나, 서독 정부와
간호사 광부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러, 박대통령은 서독으로 날아갔다.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단상에
올라섰다. 그 순간 함보른 탄광 광부들로 구성된 브라스 밴드가 애국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차츰 커지던
애국가 소리는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목부터 목멘 소리로 변해갔고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에 이르러서는 울음소리가 가사를 대신해
버렸다. 대통령 부부, 300여명의 우리 광부와 50여명의 우리 간호사 모두가 고개를 박고 어깨를
들먹였다. 밴드의 애국가 연주가 끝나자 박정희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코를 풀더니 연단으로 걸어 나갔다.
“여러분 만리타향에서 이렇게 상봉하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대통령의 준비된 연설은 여기서 몇 구절 더 나가지 못했다. 이 구석 저 구석의
흐느낌이 통곡으로 변해갔기 때문이다. 그러자 박정희는 연설원고를 옆으로 밀쳐버렸다. “광원 여러분, 간호사 여러분, 가족이나 고향 생각에
괴로움이 많을 줄 알지만…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하여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결국 대통령은 연설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본인도 울어버렸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광부들에게 파고다담배 500갑을 선물로 나눠주고, 돌아갈 차에
올랐다. 차 속에서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 애쓰는 박정희를 보고, 곁에 앉은 뤼브케 서독 대통령이 자기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박정희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1964년 12월 10일 서독 루르탄광지대에서 있었던 일이다... 불과 40년 전의 이 ‘사건’을 지금 이 나라에서 아직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을 것이다. ... 애국가를 부르며 흐느끼던 광부들도 사실은 100대1의 경쟁을 뚫고 선발된 사람들이다. 63년
파독(派獨) 광부 500명 모집에 4만6000명이 몰려들었다. 상당수가 대학졸업자와 중퇴자들이었다. 당시 남한 인구 2,400만 명에 정부공식
통계에 나타난 실업자 숫자만도 250만 명이 넘었다. 이런 시절이니 매월 600마르크(160달러)의 직장에 지원자가 밀려드는 게 당연한 일이다.
이들은 루르탄광 지하 1000m와 3000m 사이 막장에서 1m 파 들어갈 때마다 4~5마르크를 받았다.
66년 12월, 3년의 고용기간을 채우고 142명의 파독광부 제1진이 귀국했을 때 거의
전원이 1회 이상의 골절상 병력을 안고 있었다. 사망자도 있었고, 실명한 사람도 있었다. 간호사의 사정도 비슷했다. 66년 1월 128명이
독일로 떠날 때의 고용조건은 월 보수 440마르크(110달러)였다. 독일 땅에 도착한 한국 간호사들이 처음 맡았던 일은 알코올 묻힌 거즈로
사망한 사람의 몸을 닦는 작업이었다. 70년대 중반에는 서베를린에만 한국 간호사가 2000명이 넘었다. 66~76년 독일로 건너간 한국 간호사가
1만30명, 광부들은 63~78년까지 7800여명이 건너갔다. 이들의 송금액은 연간 5000만 달러로 한때 GNP의 2%대에
달했다. 요즘 일요일이면 수백명의 필리핀 근로자들이 혜화동 성당 부근에 모여든다. 이국생활의 고단함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일 것이다. 우리 광부가 서독으로 떠날 무렵 필리핀의 1인당 GNP는 257달러, 한국은 79달러였다. 60년대 한국은 지금
안산공단 부근에서 곧잘 마주치는 근로자들의 모국 파키스탄으로 제철소 건설과 운영의 노하우를 물으러 시찰단을 보냈던 나라다. 올라가는 역사만
기억하고 내려갔던 역사는 잊고 사는 국가가 있다. 그런 국가는 잊고 싶은 역사의 바로 그 대목을 되풀이하게 돼 있다. 그것이 제멋대로의 선택적
망각에 대해 역사가 내리는 벌(罰)이다. 애국가 마지막 구절을 통곡으로 대신 할 수밖에 없었던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설움을 까맣게 잊고 사는
오늘의 한국이 두렵고 걱정스러운 것도 이 때문이다. 다음날 대통령은 쾰른 방문 길에 고속도로를 이용했다.
본-쾰른의 고속도로 20km를 시속 160km로 주파하면서, 두 차례나 차를 멈추고 차에서 내려 노면, 중앙분리대, 교차시설 등을 직접
살펴보았다. 차에 동승한 뤼브케 대통령의 의전실장은 경제전문가였다고 한다. 그는 고속도로 건설과 관리방법, 소요비용 및 시일, 자금조달 방법,
고속도로망, 건설장비, 동원인원 등에 관한 박대통령의 질문에 일일이 답하고 서독 지도를 펼쳐보였다고 한다. “고속도로망은
서베를린을 중심으로 어디든 뻗어 있어 30분 이내에 전국 어디로든 갈 수 있습니다. 아우토반은 독일의 상징이자 꿈입니다”라는 설명을 곁들여서
말이다.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전후 서독의 경제부흥을 진두지휘한 에르하르트는 당시 총리로 재직
중이었다. 그는 “분단국이 공산주의를 이기는 길은 경제적 번영을 이룩하는 길 하나 뿐이다”라고 역설한 뒤, 고속도로의 효용에 관해 질문하는
박대통령에게 “나는 아우토반에 진입할 때, 그리고 인터체인지 램프를 돌아나올 때 마음속으로 고속도로에 경의를 표합니다”라고 답변했다. 대통령은
그때 모종의 결단을 내렸음이 틀림없다. 박정희 대통령은 왜 고속도로에 그렇게 집착했을까. 당시는 철도가
대한민국의 거의 유일한 운송수단이었다. 하지만 철도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미 그 한계를 노정하고 있었다. 1962년터 추진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결과 급격한 생산량 증가, 기자재량의 폭주, 생활반경의 확대 등으로 수송량과 여객량이 폭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요 물자의
수송의 상시적 차질은, 물자별 열차 및 화차를 배분하는 일이 경제장관 회의의 제1안건이 되는 지경까지 사태를 몰고 갔다. 매년 화물 10.2%,
여객 11.5%의 증가가 예상되었기에 교통수송 체계의 구조적 개혁은 시급한 과제였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 ‘돈’이었다. IBRD(세계은행)
교통조사단은 대한민국에 고속도로를 건설한다는 아이디어 자체를 아예 무시했다. 한국의 국력과 장비, 기술 및 제반 여건으로 보아 고속도로의 건설은
아무래도 무리라는 것이 그들의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당시 일본이 건설중이던 도메이(東名) 고속도로(도쿄-나고야)의 건설비를 기준하면,
경부고속도로의 예상 건설비는 3,500억원이었다. 1967년 국가예산이 1,643억원이었으니, 우리 국민이 2년 동안 손가락만 빨고 있어도 겨우
완공을 할까 말까 하다는 계산이었다. 박대통령은 관계기관별로 추정 건설비를 조사하라고 했다. 갑론을박, 난상토론에 이은 수많은 더하기와 빼기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공사비를 최대한 절약하면 공사기간 3년에 300억원의 건설비로 고속도로를 닦을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때였다. 이번에는 야당과 국민의 반대가 발목을 잡았다. 자동차도 없는 나라에 고속도로가 왠 말이냐.
놀러다니는 사람한테나 좋은 일 시키는 거지. 전 국민이 대대손손 빚에 허덕일꺼다.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와 다를 것이 없다. 돈 내고 길
다니라는 게 말이 되느냐. 사람은 못다니고 자동차만 다닌다니, 이거 차 안 가진 국민들을 차별하는 것 아니냐. 그 많은 돈을 들여 새 도로를
내느니, 기존도로를 보수하는 편이 합리적이다. 목청을 높여 반대를 하기는 쉽다. 그러나 묵묵히 일을
만들어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기야 휴지가 처음 만들어질 때도 버릴 물건을 왜 돈 들여 만드느냐, 화장실 뒤지로는 신문지면 충분하지 라는
비난여론이 들끓었단다. 박완서는 단편 <후남아, 밥 먹어라>에서 70년대 초 재미교포에게 시집간 새댁이 겪는 문화충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계단 밑을 이용한 깊숙한 창고에는 새하얗고 보드라운 화장지가 길길이 쌓여 있었다. 그건 그녀가 감히 꿈도 못 꿔본
부(富)티였다. 황홀했다. 친정에선 재래식 변소에서 신문지를 뒤지로 쓰다가 미국으로 시집온 거였다. 언니들은 어쩌다 가본 호텔 화장실에서 흰
두루마리 화장지를 둘둘 말아 핸드백 속에 숨겨가지고 와서 화장을 지울 때만 아껴가며 썼다. 크리넥스를 쓴다는 건 곧 부의 척도였다.” 외국
관광객용으로라도 필요하기는 하다는 논리가 아니었더라면 화장지의 생산은 불가능했을 터, 그랬더라면 반대자들은 여전히 신문지로 모든 것을
해결하셨을지. 1987년 대통령 선거, 고속도로를 만든 인물은 유명을 달리했으되, 고속도로 건설에 반대했던
사람들은 고속도로를 누비며 선거운동을 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시중에 퍼졌다. 보고 겪은 일의 폭과 깊이가 얕고 좁은 사람은 그 범위를 벗어난 일을
도모하기가 불가능한 법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홀로 묵묵히 집단의 반대와 맞서며 일을 도모해가는 삶, 선구자들의 삶은 그래서 늘
외로운 투쟁의 연속이다. 1968년 2월 1일 서울 원지동. 대통령 부부와 건설 관계자,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경부고속도로의 기공식이 거행되었다. 박대통령은 “우리의 꿈을 우리의 손으로 건설해보자”라고 연설했다. 막상 시작은 했지만 사방에서 문제가
터져 나왔다. 우선 중장비. 단시 우리나라의 중장비 총 보유대수는 1,647대에 불과했고 그나마 거의 다가 6.25 전후에 도입된, 거의 사용이
불가능한 노후장비였다. 정부는 미국, 영국, 프랑스, 스웨덴 등의 중장비업체에 사정 사정을 거듭하며 협상을 진행, 1969년 2월 외상이나마
필요한 장비를 겨우겨우 갖출 수 있었다. 전문인력도 문제였다. 무엇보다도, 도로 기술자가 없었다. 다급한대로 사명감이 투철한 육사출신 위관급
장교 22명을 선발해 혹독하게 교육했다. 지원 자격을 독신자로 제한한 건 그만큼 시도 때도 없이 전투같은 교육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곧이어
ROTC 장교 12명이, 3차로 공대 및 공고 토목과 출신 50명이 교육 후 곧바로 현장에 배치되어 기술을 습득하고 후진을 양성했다.
공기를 단축하는 것이 건설비를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모든 사람들은 그야말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도로
건설에 매달렸다. 언 땅 위에 짚을 깔고 휘발유를 뿌린 뒤 불을 지르고, 트럭 꽁무니에 버너를 매달고 반복운행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땅을 녹인
뒤 지반을 다졌다. 옥천에서는 무려 열 세 번의 낙반 사고가 있었다. 소백산맥에서는 수 천 명이 달려들어도 하루에 겨우 2미터 남짓밖에 터널을
파들어가지 못했다. 난공사구간에서 하루 종일 30센티미터를 가까스로 전진한 뒤에는 까닭모를 서러움에 바위벽을 붙들고 울기도 했다. 임시가교가 열
번 이상 떠내려가자 책임자들은 아예 공사현장에 야전침대를 가져다놓고 숙식을 해결했다. 전쟁(戰爭)같은 돌관작업(突關作業)을 거쳐 드디어 소백산맥
한 가운데 당제터널이 뚫린 날은 1970년 6월 27일 밤 11시였다고 한다. 터널 양 쪽에서 인부들이 만세를 불렀다. 하행선은 이미 한 달
전에 준공되어 있었다. 마침내 1970년 7월 7일, 공사 시작 2년 반 만에 경부고속도로(京釜高速道路)가
완공되었다. 총 공사비는 당초 예정에서 불어난 429억원(그래도 역시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건설비였다), 개통식 행사 세 시간 전까지 도로
도색작업을 했을 만큼 치열한 전투였다. 대통령은 고속도로 테이프를 자른 뒤 샴페인 한 병을 도로에 뿌렸다. 그리고 공사 관계자들을 일일이
치하했다. 대통령이 훈장을 달아주는 동안 젊은 위관급 도로 기술자들은 부동자세로 선 채 눈물을 흘렸다. 고속도로 아스팔트에 뺨을 비비고 감격에
겨워 꺼이꺼이 통곡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대통령도 울었다. 한국인의 피와 땀과 집념으로, 우리나라의 재원과 우리나라의 기술과 우리나라 사람의
힘으로 세계 고속도로 건설사상 가장 짦은 시간에 가장 저렴한 공사비만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길을 닦은 것이다.
그 해 12월 8일,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정중간 214km 지점, 추풍령 고개에 기념물을 만들었다.
경부고속도로 준공기념탑과 위령탑을 세운 것이다. 대통령은 기념탑 제막식에서 공사 중 유명을 달리한 77명의 넋을 기리며 “서울-부산 간
고속도로는 조국 근대화의 길이며 국토통일의 길이다”라는 비문을 새겨 넣었다. 경부 고속도로 개통 이후, 철도의 화물수송 분담률은 1967년
54.6%에서 1975년 29.1%로, 여객수송 분담률은 44.4%에서 24.9%로 줄었고, 도로는 화물의 경우 같은 기간 47.5%에서
62.5%로, 여객의 경우 54.3%에서 74%로 증가했다. 1969년 289만대였던 경부고속도로 이용차량은 1975년 1899만대로 늘어났고
1978년에는 무려 4060만대의 차가 ‘우리의 도로’를 마음껏 누볐다. 화물차의 비중은 56.6%, 승용차는 26%였고 나머지 17.4%는
버스였다. 고속도로는 사람과 화물의 유통에 일대혁신을 불러 일으켰다. 주행비 절감, 주행시간 단축, 피로도
경감, 교통사고 감소 등이 고속도로가 가져온 긍정적 효과다. 기차역이 지나지 않는 소도시를 즉각 연결이 가능한 네트워크 안으로 끌어들였고, 문
앞에서 문 앞까지 배달이 가능한 특성을 살려 화물 운송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였다. 신속한 대량수송과 이에 따른 재고기간 단축, 하역과정 단순화로
인한 파손율 감소, 유통경로 단축에 따른 원가 절감 등이 가능해진 것이다. 수송시간의 단축으로 인해 대도시 근교에 비닐하우스로 상징되는
‘온상재배 은색혁명’을 견인하기도 했다. 고속도로 축을 따라 공장들이 들어섰다. 오늘날, 경부 고속도로가
한강의 기적을 견인한 대한민국 경제의 대동맥임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경부고속도로가 생기기 전에는 서울-대전 간을 버스로 오가는 데만 무려
여덟 시간이 필요했다. 어지간한 도시는 최소한 1박2일로 일정을 잡아야 겨우겨우 왕복이 가능했다. 두 지역 사이를 오가는 이동시간이 줄어들면,
국민들의 공간개념 시간개념이 창조적으로 개선되는 법. 경부고속도로는 대한민국을 일일생활권으로 개편한 혁명의 전초기지였다. 고속도로 개통 이후,
대한민국은 공간적 심리적 문화적으로 ‘하나의 생활권, 하나의 공동체’로 완전히 거듭났다. 선진국으로 가는 길이 열린
것이다. 서독에 간호사로, 광부로 가셨던 분들의 뒷이야기. 지난 2006년 독일 월드컵, 그들은 응원단이 되어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그 분들을 만나고, 필자는 다음과 같은 칼럼을 신문에 기고했었다.
<16강전이 모두 끝났네. 살아남은 자들은 묵묵히 다음 경기를 준비하고 패자는 팬들의 박수를 받으며
하나 둘 경기장을 떠나가는군. 이제 이틀 동안은 경기가 없다지. 축제의 끝물, 다시금 우리 대한의 청년들을 마음속에
그려보네. 자네 기억하나. 정말로 암울했던 우리들의 20대를. 희망이 없고 미래가 없는데다 일자리마저 없었던
50년대와 60년대를. 무엇보다도 하루 세끼를 끓여먹을 무언가가 없었네. 그 때 독일에서 광부를 뽑는다고 뉴스를 했어. 면접에서 떨어질까봐
숯덩이와 바윗돌에 열흘 밤낮을 두고 손바닥을 문질렀네. 온 동네서 하나밖에 없는 대학생 아들이 노동일하러 바다 건너간다고 나 모르게 밤마다
사립문 밖에 나가 눈물짓던 어머니. 독일 갈 차비는 고사하고 서울 갈 교통비도 모자라 우리 모두는 월급을 선불로 받아 여비며 비행기 삯을 치러야
했지. 막장에서 올라온 저녁, 얼음만큼 시원한 맥주 한 잔 생각이 간절했지만, 이 한 잔 음료수 값이 고향 식구들 일주일
밥값이라 생각하면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어. 천국문처럼 보이던 맥주집 문 앞을 언제나 눈을 질끈 감고 돌아섰다네. 부모님 얼굴도 부모님
얼굴이지만, 올망졸만 가슴에 새겨지던 열네 살, 열 살, 여섯 살, 네 살, 나이 어린 동생들의 초롱초롱한 눈동자.
우리 중 누군가는 통역으로 뽑혀갔지. 광부들 가운데 선발한, 독일어를 읽고 쓸 줄 아는 ‘광산통역.’
영전하는 동료들을 진심으로 축하했네. 적어도 그 친구들은 목숨을 걸고 일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말이지. 우리
청년들이 월드컵에 출전했다네. 지역 예선을 뚫고 독일까지 건너와 세계의 강호들과 대등하게 맞섰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우리의 아들들이 자랑스러워.
그리고 관중석과 경기장과 도심 곳곳에서 눈부시게 빛나던 대한민국의 청년들. 사 십 여 년 전, 광산을 찾아온 대통령께서 ‘우리 생전엔 누리지
못하더라도, 부디 후손들에게 물려줄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만들어주자’고 말씀하시다 그만 눈물을 쏟으셨지. 우리 모두가 따라 울었네. 국가가
마음먹고 마련한 선물이 기껏해야 일인당 담배 세 갑에 불과했을 만큼 우리는 정말로 가난한 나라의 백성이었으니. 그 때나 지금이나 울면서 따라
부르는 우리 애국가, 하지만 40년 전의 눈물과 2006년의 눈물은 의미가 다르지. 탄가루만 자욱이 뒤집어쓰던 얼굴에 청홍흑백으로 태극기를 그릴
수 있다니, 병원 영안실에서 무서움에 떨며 외로움에 울며 알코올 솜으로 시신을 닦던 앳된 손에 태극기를 쥐고 흔들 수 있다니, 우리가 인생을
헛산 것은 아니지 싶어. 청년들 얼굴의 저 알록달록한 태극기는 그래, 우리 인생의 자랑스런 훈장(勳章)이
아닌가. 설기현이라고 들어봤나? 2002년 이탈리아 전에서 종료 3분인가를 남기고 동점골을 터뜨리며 우리
가슴을 뜨겁게 달궜던 청년. 이번에도 준마(駿馬)처럼 상대 문전을 헤집고 다니더군. 시연을 들어보니 이 친구, 아홉 살 때 탄광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광부의 아들’이라는 거야. 그렇다면 설군은 우리 동료의 아들, 우리 모두의 아들이 아닌가. 우리
응원단이 큰 목소리로 노래부르며 거리를 지나가네. 내 귀엔 고향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그리며 숨져간 자네들한테 어서 달려가 더운 술 한 잔이라도
부으라는 소리로 들려. 지하 어딘가에서 열리고 있을 망자(亡者)들의 잔치판, 연신 돌아오는 축하주를 받아 자시고, 아들 자랑 아들 동료들 자랑에
한국 축구까지 덩달아 자랑하시느라, 지금쯤 기현 군 아버님 입가에는 보름달 같은 함박웃음이 활짝
피어있겠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풍요로운 생활은 앞선 세대의 희생 위에
피어난 꽃이다. 수많은 반대자들의 숱한 비난을 무릅쓰고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묵묵히 걸어간 선구자들과 그들의 신념이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나니, 그대여 경부고속도로 추풍령에 이르거든 경부고속도로 준공탑과 위령탑을 찾아 순국선열 호국영령 산업전사 제위께 부디 더운 술 한 잔
부어 올리고 그윽한 감사의 뜻을 표할 일이다. 장원재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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