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성왕 12년(413) 8월 가을에 구름이 낭산에서 일어나 바라보니 흡사 누각과 같았고
강하게 향기 풍겨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아 왕은
"이는 반드시 신선이 내려와서 노니는 것이니, 이곳은 복지(福地)일 것이다"라고 했다.
이후로 사람들이 나무를 베는 것을 금했다.
이처럼 낭산은 신유림(神遊林)이라 하여 신라 때 매우 중시했다.
사천왕사지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걸었다.
거북이 두 마리는 목이 잘린 채로 힘차게 누워 있었다.
아직도 사천왕사지는 발굴을 하고 있다.
선덕여왕 임시주차장은 평일이라 차도 사람도 하나도 없었다.
마을 길에 접어드니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하강선마을은 두 칸짜리 옛집과 허물어져가는 빈집에
까만 고양이가 방에 놀고 있다.
중간선. 상강선 마을 집집마다 둘러보았다.
마을 이름은 선녀가 하강하는 마을이니 얼마나 좋은가.
그러나 가난이 졸졸 흐르는 마을이다.
신라시대 가난한 백결 선생이 아마도 이 강선마을에 살았을 것이다.
고추 말리는 아낙들의 손길이 바쁘다.
해외 유학파 스타스님 의상도 이 황복사지서 고뇌의 풀을 잘랐지.
마을 산길에는 사람이 다니지 않아 빙 둘러서 독서당에 갔다.
철길과 산업도로로 날샌 것들이 줄기차게 다녀 소음이 극에 달했다.
접근성이 안 좋아 찾아오는 이가 없으니 완벽하게 방치 수준이다.
기와는 새것으로 입혔는데 청마루는 내려앉았고 방 천장은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먼지 뽀얀 청마루에 앉지를 못해 돌 위에 앉아 글을 쓰고 있다.
12살 어린 나이에 당나라 조기 유학을 가서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고, 어지러운 신라를 구하려 했던
반체제 지식인 최치원은 세상이 허락하지 않아 해인사서 종적을 감추어버렸다.
여기 독서당에서 공부했지만 지금같이 단 1초도 쉬지 않고 울려대는 차 소음에
최치원의 혼도 이곳을 떠났을 것이다.
다시 내려와 차 소음을 들으면서 문무왕을 화장했다는 능지탑을 지나 가난한 절 중생사에 갔다.
이미 어둠이 내려앉았는데 시린 불빛도 없었다.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지장전 마애불에 촛불 하나가 바람에 일렁인다.
그제야 개들이 달려오고 스님이 나온다.
보살도 없고 스님 혼자서 손수 공양 하신단다.
나도 발길이 급한데 한사코 차 한 잔 하고 가라신다.
연잎차 한 잔에 30세에 이 절에 와서 40년 동안의 구구절절 이어온 사연 이야기를 풀어놓으신다.
해탈이 개와 노스님 그리고 적막한 중생사, 언제 와도 눈물이 날 것 같다.

2코스(4㎞, 2시간~2시간 30분): 사천왕사지-하강선마을-중강선마을-상강선마을-황복사지 석탑-독서당-능지탑-중생사-사천왕사지
kjsuoja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