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 문학가구상
『초토의 시』
1956년 시집 『초토(焦土)의 시』를 펴낸 구상(具常, 1919~2004)은 해방 직후 북녘에서 일어난 『응향』 필화 사건과 6·25 때의 여러 일화로 말미암아 낯설지 않은 시인이다. 1919년 함남 문천에서 태어난 그의 본명은 구상준이다. 1941년 니혼대학 종교과를 졸업하고 귀국한 그는 함흥 『북선매일신문』에 기자로 들어간다.
그는 1946년 ‘원산문학동맹’에서 펴낸 동인 시집 『응향』에 시 「길」 · 「여명도」 · 「수난의 장(章)」 등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온다. 『응향』이 나오자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는 여기에 실린 몇몇 시인의 작품이 회의적, 공상적, 퇴폐적, 현실 도피적 반동성을 띠고 있다고 몰아붙인다. 『응향』 필화 사건에 휘말려 혹독한 시련을 겪은 그는 ‘표현의 자유’가 없는 이북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이듬해인 1947년 가족과 화가 이중섭을 비롯한 친구들을 남겨둔 채 혼자 남한으로 넘어온다. 그는 『연합신문』 문화부장으로 일하면서 『백민』에 「발길에 채인 돌멩이와 어리석은 사나이」를 비롯해 1948년 「유언」, 1949년 「사랑을 지키리」를 발표한다. 또 『문예』에 「옥상 실존(屋上實存)」, 『신천지』에 「백련(白蓮)」, 1950년 『문예』에 「구상 무상(具常無常)」 등을 내놓아 남한 문단에서 기반을 굳힌다.
〈응향〉 필화 사건 뒤 월남한 시인 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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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25가 터지자 구상은 대전 · 대구 · 부산 등지에서 임시로 발족한 ‘문총구국대’의 선봉에 선다. 그는 전란의 충격 때문에 정신병 증세를 보이던 서정주를 비롯해 뜻하지 않은 전쟁으로 시련에 처하게 된 여러 동료 문인을 발벗고 나서 도와준다. 9·28수복 1주일 전에는 아직 인민군이 포진하고 있던 서울에 위험을 무릅쓰고 들어와 지프를 타고 달리며 임시 전선 신문인 『승리일보』를 거리에 뿌리는 대담성을 보이기도 한다. 압록강 혜산진까지 올라간 유엔군이 중국 인민지원군의 개입으로 밀리면서 1951년 1·4후퇴 때는 남쪽으로 향하는 기나긴 피난 행렬이 생긴다.
이내 동원령이 내릴 즈음 구상은 ‘서울신문사’ 사장이던 박종화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좌 · 우익을 가리지 말고 문인들에게 기자 신분증을 발급해 그들이 국민방위군에 나가는 일을 막자고 한 것이다. 그러나 좌익에 대해 강한 반감을 품고 있던 박종화는 구상의 제안을 거절한다. 할 수 없이 구상은 『승리일보』 기자 신분증을 발급해 동료 문인들을 피신시키고, 정작 본인은 마지막 순간에야 서울을 벗어난다. 평양에서 피난민 행렬에 섞여 내려온 김이석과 양명문 그리고 작곡가 김동진 등이 그가 나눠준 기자 신분증의 혜택을 받는다. 구상은 피난지 대구와 부산에서 다른 누구보다 종군 작가단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다. 아울러 그는 피난지에서 첫 시집 『구상 시집』을 펴내 『응향』 필화 사건으로 꺾일 뻔한 문학적 소망까지 이룬다.
첫 시집 〈구상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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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영남일보』로 자리를 옮긴 그는 주필 겸 편집국장을 맡는다. 곧 이어 정치 파동이 발생하자 그는 「고현 잡화(告現雜話)」 · 「침언 부어(沈言浮語)」 · 「성외 춘추(城外春秋)」 같은 칼럼을 통해 신랄하게 정권을 비판한다. 이 일로 말미암아 ‘영남일보사’는 신문을 압수당하고, 구상은 특무부대에 쫓겨 달성공원 하상 부락으로 피신하는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한편 그는 이 무렵 남녘으로 넘어와 부산 · 제주 · 마산을 거쳐 대구에 온 화가 이중섭을 만나 오랜만에 술집에서 회포를 푼다.
구상은 몸과 마음이 황폐해져 정신 이상 징후까지 보이는 이중섭을 입원시키고 한동안 곁에서 돌본다. 그러나 몇 해 뒤인 1956년 이중섭은 행려병자로 떠돌다가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숨을 거둔 채 발견된다.1)
환도령과 함께 부산이나 대구에 있던 문인들은 거의 다 서울로 돌아간다. 그러나 구상은 대구에 남아 글을 쓰고 효성여대와 청구대학 등에서 강의를 맡는다. 1953년 사회 평론집 『민주 고발』을 펴낸 그는 1956년 ‘청구출판사’에서 두 번째 시집 『초토의 시』를 내놓아 문단의 주목을 받는다.
하꼬방 유리딱지에 / 애새끼들 얼굴이 / 불타는 해바라기마냥 걸려 있다. // 내려 쪼이던 햇발이 눈부시어 돌아선다. / 나도 돌아선다. / 울상이 된 그림자 나의 뒤를 따른다. // 어느 접어든 골목에서 걸음을 멈춰라. / 잿더미가 소복한 울타리에 / 개나리가 망울졌다. // 저기 언덕을 내려 달리는 / 소녀(少女)의 미소엔 앞니가 빠져 / 죄 하나도 없다. // 나는 술취한 듯 흥그러워진다. / 그림자 웃으며 앞장을 선다.
전쟁을 배경으로 인간의 존엄성과 예술가로서의 실존적 고뇌를 담고 있는 연작 시집 〈초토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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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15편으로 이어지는 연작시로 구성된 이 시집은 전쟁의 폐허와 거덜난 살림살이, 그 암울한 처지에서 비롯되는 비애와 충격을 담아내고 있다. “나는 시의 주제가 나의 전인적(全人的)인 생명과 인격 속에서 발생될 것을 바란다. 즉 세계 사상에 있어서의 자기 존재를 극명하고 인간의 유의식(類意識)이 명하는 바 공동 이상을 나의 시의 사명으로 삼고자 한다.”고 스스로 밝힌 대로,
시인은 개인의 감정과 역사 의식 가운데 어느 한쪽에 치우침이 없는 범속한 중용 정신을 지켜나가고자 무척 애쓴다. 물론 이런 태도의 바탕에는 그의 가톨릭 신앙이 꽤 넓게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시인 구상은 맹목적으로 신을 찬양하거나 신에 의존하기보다 인간의 불안과 고통, 절망을 되도록 솔직하게 열어 보이는 자세를 취한다. 그래서 때로는 이단자 같은 태도로 신에게 맞서 인간으로서의 고통과 절망을 토해내고, 부정과 긍정을 거쳐 다시 이를 부정하는 정신을 거듭 보여준다.
내가 명오(明悟)가 열리자부터 회의하고 고민하는 것은 우주 자연의 신비나 인간 사회의 모순 그 자체보다는 어쩌면 가톨릭이 정해놓고(?) 가르치는 바 우주관 · 역사관 · 인간관, 나아가서는 신(神)께 향한 회의와 반발과 거기 따른 불안과 고통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때마다 나만이 특별히 저주받은 영혼이 아닌가 하는 지독한 절망에 빠지는 수가 있다.
구상, 『구상 문학선』(성바오로출판사, 1975)
『초토의 시』로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받은 뒤 그는 대학 강단을 오가며 왕성한 집필 활동에 나선다. 1958년 그는 『승리일보』 주간으로 취임하고, 1961년에는 수상집 『침언 부어(沈言浮語)』를 펴낸다. 1962년에는 『경향신문』으로 자리를 옮겨 논설 위원 겸 일본 도쿄 지국장을 역임한다. 이 무렵부터 희곡과 시나리오에도 관심을 기울여, 1965년 희곡 「수치」를 드라마센터 무대에 올린다. 이어 1967년에는 『세대』에 시나리오 「갈매기의 소묘」, 1969년에는 『월간문학』에 시나리오 「단군」 등을 발표한다.
육군고급부관학교 영내에서
왼쪽에서 세 번째가 김종문, 네 번째가 구상, 여섯 번째는 유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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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그는 미국 하와이대학교 교환 교수로 초빙된다. 그는 외국 생활을 하면서 1972년 『월간문학』에 「요한에게」 등을 발표하고, 1973년에는 하와이대학교 교재용으로 『한국 전승 문화 독본』을 펴낸다.
하와이에서 돌아온 뒤에도 창작에 대한 그의 열정은 수그러질 줄 모른다. 문예지에 활발하게 작품을 발표한 그에게 1980년 대한민국 문학상이 주어진다.
이어 그는 1981년 시집 『까마귀』, 1982년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1984년 『드레퓌스의 벤취에서』, 1985년 『구상 연작 시집』, 1986년 『구상 시 전집』을 펴낸다. 군사 독재의 패악이 극에 이른 1987년 3월 시인 구상은 「까마귀」라는 시를 통해 “어른은 젊은이를 물 먹여 죽이고······ / 이 독사의 무리들아, 회개하라.”고 독재 정권을 겨냥해 서슬 푸른 비판의 칼날을 휘두른다. 1990년에는 『문학사상』에 연작시 「관수제 시초(觀水濟詩抄)」를 발표한다. 1996년 그는 오랫동안 몸담고 있던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의 정교수 자리에서 물러난다. 그러나 대학원 강의를 지속하고 문학 강좌에 나가는 등 나이가 들어도 지치지 않는 문학열을 보여준다.
1997년 구상은 일흔여덟이라는 나이에도 아랑곳없이 서울 동숭동 문예진흥원 강당에서 ‘공간 시 낭독회’ 200회 기념 행사로 열린 ‘시의 축제’에 시 「근황」을 들고 나온다. 「근황」을 통해 노시인은 지나온 시간의 축적물인 ‘현재’의 삶에 대한 성찰과,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이끌리는 운명의 불예측성을 겸손하면서도 솔직한 어조로 들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