돗밤실둘레길과 무섬마을
(2022년 2월 6일)
瓦也 정유순
1. 돗밤실둘레길
입춘이 막 지난 날씨는 제법 쌀쌀하다. 추위에 대비하여 새벽에 집을 나설 때 옷을 껴입었지만 찬바람은 속살을 파고든다. 선비의 고장 경상북도 영주시로 향하는 버스는 평택∼제천 간 고속도로 천등산휴게소에 들려 잠시 숨을 고른다. 천등산휴게소에는 고구려 유물을 전시해 놓은 공간이 있다. 고구려의 상징인 삼족오(三足烏)가 설치되어 있고, 기상의 상징인 개마무사상(鎧馬武士像)을 역동적으로 재현해 놓았다.
<삼족오>
개마무사(鎧馬武士)는 광개토대왕 때 나타나는데, 사람과 말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강철철편(鋼鐵鐵鞭)을 가죽으로 이어붙인 철갑(鐵甲)을 착용하고 긴 창(槍)을 주 무기로 사용함으로써 기동성과 공격력에 단단한 방어력을 부가하여 그 위용과 기세가 대단했다고 전해진다. 이곳에 개마무사상을 설치해 놓은 연유는 옛 중원의 중심지인 충주지방까지 고구려의 혼과 기상이 뻗쳐 있기 때문이다.
<개마무사>
휴식을 끝낸 버스는 충청북도 제천과 단양을 거쳐 죽령터널을 지나면 바로 영주시로 들어서 처음 만나는 곳이 정감록(鄭鑑錄)의 십승지지(十勝之地) 중 제일로 삼는 풍기(豊基)지역을 지나 영주시 이산면 행정복지센터 뒤편에 있는 주차장에 도착한다. 무섬마을에 가기 전에 이곳에 만들어 놓은 <돗밤실둘레길>을 먼저 걷기 위해서다. <돗밤실둘레길>은 이산면사무소∼망월봉∼약수봉∼흑석사∼제비봉∼명학봉∼묘봉∼이산면치안센터 옆으로 내려와 원점 회귀하는 둘레길로 총 길이가 5.6㎞이다.
<이산면사무소>
돗밤실이란 유래는 옛날부터 이곳에는 졸참나무가 많아서 굴밤(돼지밤)은 돼지 밥이라고도 하는데, 돼지의 다른 옛말인 도(돗)와 밤마을의 합성어인 돗밤실이 마을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하며, 한자로는 돼지저(猪) 밤율(栗) 마을리(里) 로 저율리이고, 영어로는 Acorn Village다. 가볍게 산행 준비를 끝내고 조금 가파른 목책 계단으로 된 들머리로 올라서며 <돗밤실 둘레길> 산행에 들어간다. 계단 맨 위쪽에는 <행복의 종>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소원을 울려준다.
<돗밤실둘레길 표지석>
소나무가 주를 이루는 숲 길을 걸으며 위기에 처한 토끼를 효자가 구해주자 소원을 들은 토끼는 떡을 좋아했던 달님을 위해 떡 잔치를 열어 달님이 소원을 들어줘 부모님이 무병장수 하였다’는 망월봉(望月峰, 232m)과 병을 고치는 약수를 욕심낸 모자(母子)가 거북바위로 변해버린 약수봉(藥水峰, 261m), 고양이와 거미의 이야기로 자손의 번창을 기원하는 묘봉(猫峰, 209m) 등 각 종 이야기 걸이를 만들어 발걸음을 편하게 한다.
<돗밤실둘레길 시작>
둘레길 중간쯤에는 <흑석사>라는 고찰이 있다. 흑석사(黑石寺)는 신라 때 의상(義湘)이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 이전까지의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임진왜란 이후 사세(寺勢)가 급격하게 기울었고, 1799년(정조 23)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는 폐사되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초암(草庵)이 1945년 중건하였고, 효령대군이 왕실에 부탁하여 만든 아미타불좌상을 정암산 법천사(法泉寺)에서 1950년에 이곳으로 옮겨왔는데, 조선 초기 대표적인 목조불상이다. 이 외에도 신라 후기인 9세기 유물로 석조여래좌상이 있다.
<아미타불좌상>
망월봉에서 약수봉으로 가는 중간에는 돗밤실출렁다리와 흔들다리를 만들어 놓아 아슬아슬한 재미를 더하게 한다. 소원이 한 땀 한 땀 묻어 있는 작은 돌들이 쌓여 이룬 돌탑과, 처음 들어설 때 문과 나갈 때의 문에 설치된 <행복의 종>이 돗밤실둘레길을 지나는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빌어준다. 행복의 종은 1950년대 이산면민의 소방 또는 수방사태 시 비상소집용으로 사용하던 종으로 면사무소에 보관 중이다가 돗밤실둘레길이 완공되면서 <행복의 종으로 변신하였다.
<돗밤실 출렁다리>
이 종은 한 번 울리면 맑고 은은한 종소리로 행복, 건강, 사랑을 가져다 줄 것으로 믿고 있다. 안내판에는 종소리를 ‘한 번 울리면 장수, 두 번 울리면 건강, 세 번 울리면 부자, 네 번 울리면 출세, 다섯 번 울리면 자손번창’이라고 안내하고 있다. 사람의 모든 바람과 욕망이 다 어우러져 이곳을 지나면서 행복의 종을 다섯 번을 욕심껏 울려보고 이산면 치안센터 옆으로 하여 행정복지지원센터 뒤편으로 원점회귀 하여 무섬마을로 차량 이동한다.
<행복의 종>
2. 무섬마을
마을 밖 주차장에서 하차하여 도보로 수도교(水島橋)를 건너간다. 무섬마을의 행정구역은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다. <수도리(水島里)>를 직역하면 바로 ‘물섬’이다. ‘물 위에 떠 있는 섬’을 뜻하는 순수한 우리말로 물섬으로 부르다가 ‘무섬’으로 변한 것 같다. 지명의 이름이 수도리가 먼저인지 또는 무섬이 먼저인지 알 수 없으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일제강점기 때 지적부(地籍簿)를 만들면서 한자화 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수도교>
수도교 위를 걸어가면서도 다리 이름을 ‘무섬다리’또는 ‘무섬교’로 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다리 아래로는 내성천이 모래톱을 켜켜이 쌓아가며 세월과 함께 흐른다. 낙동강의 지천으로 태백산 줄기에서 이어지는 내성천(乃城川)과 소백산에서 흐르는 서천(西川)이 만나 무섬마을을 북·서·남 삼면으로 산과 물이 태극 모양으로 휘감아 돌아 나가는 형세가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섬과 같게 만든다. 이 물은 예천군을 지나 문경시 영순면에서 낙동강과 해후한다. 내성(乃城)은 봉화의 옛 이름이다.
<내성천>
수도교를 건너 좌측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무섬마을에서 애국지사들의 거점이었던 아도서숙(亞島書塾)이 있다. 이는 ‘아시아 반도 내 수도리의 서당’이라는 뜻으로 1928년 10월 해우당 김낙풍의 증손자 김희진이 마을 청년들과 뭉쳐 세운 마을 공회당이자 양반·천민 구별 없이 모여 농촌 계몽활동과 민족교육을 한 교육기관이었다. 신간회 영주지회 등의 사무실로 지역 항일운동의 구심점이자 농민운동 및 반제운동의 거점이었으나, 1933년 7월 11일 새벽 일제는 경찰을 동원해 관련자를 체포하고 강제로 문을 닫았다.
<아도서숙>
아도서숙을 둘러보고 바로 앞의 치류정(峙流亭)과 이웃의 김종억 가옥 등 마을의 여러 집을 둘러보는데, 김기현 가옥인 백승당, 김한직 가옥인 주실고택 등 규모가 좀 있는 집은 경북 북부지역의 전통가옥인‘口’자형 집이 있으나, 이 마을에는 대부분의 집과 집 사이의 담장이 보이질 않는다. 그래서 관광안내소에 가서 물어보았더니 무섬마을에는 다른 마을과 달리 담장과 대문뿐만 아니라 농토, 우물, 사당 등 네 가지가 없다고 한다.
<치류정>
첫째는 지형 특성상 집지을 공간과 작은 텃밭을 가꿀 공간 정도는 있으나 충분한 양의 농사를 지을 땅이 부족해 ‘농토’가 없으며,
둘째는 풍수지리상 행주형(行舟形)으로 사람과 물건을 가득 실은 배가 떠나려는 형국이므로 배에 구멍이 있으면 가라앉기 때문이며, 강변 구덩이에 깨끗한 물이 고여 따로 ‘우물’을 팔 필요가 없다는 것이고, 풍수지리 적으로 행주형은 ‘부귀영화’를 뜻한다고 한다.
셋째는 마을 구성원 모두가 친인척이고 집주변으로 담을 쌓을 공간이 부족해 따로 ‘담장과 대문’을 만들지 않았으며,
넷째는 삼면이 물로 둘러싸인 무섬마을은 수해가 잦아 ‘사당’을 두지 않고 위패를 모시는 감실을 두었다고 한다.
<주실 고택(김한직 가옥)>
이곳에 사람이 정착해 살기 시작한 것은 1666년(현종 7년)에 반남박씨(潘南朴氏) 입향조(入鄕祖)인 박수(朴檖)가 처음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한 뒤, 그의 증손녀 사위인 선성김씨(宣城金氏) 김대(金臺)가 영조 때 다시 무섬에 들어왔다. 무섬마을의 선성김씨 문중은 반남박씨, 풍산김씨, 풍산류씨, 개성고씨 등과 혼인이 잦았다. 입향조인 김대 이후 6대 동안, 풍산류씨와는 11회에 걸친 혼인을 했다고 한다. 하천 안쪽으로 넓게 펼쳐져 있는 모래톱 위에 마을이 똬리를 틀고 앉아 있다.
<해우당 고택>
400여년의 역사를 지닌 무섬마을은 마을 전체가 문화재 같다. 대부분의 가옥이 100∼200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며, ‘口’자형 가옥과 초가로 추운지방에 많이 분포하는 까치구멍집이 상당수 보이는 것 같다. 특히 무섬마을의 입향조인 박수가 1666년에 건립한 가옥 <만죽재(晩竹齋)> 고택은 경상북도 민속자료(제93호)로 지정되었고, <해우당(海愚堂)> 고택은 1879년(고종 16) 의금부도사를 지낸 해우당 김락풍(金樂灃)이 중수한 집으로 경상북도 민속자료(제92호)로 지정되어 있다.
<만죽재 고택>
무섬마을의 김성규(金性奎) 가옥은 청록파 시인으로 유명한 조지훈(趙芝薰)의 처가다. 김성규 가옥은 잦은 수해와 풍해로 패옥이 되어 빈 터로 남아 있던 중 1999년 무섬마을이 경북북부 유교문화권사업대상지역으로 지정되어 다시 복원되었다. 김성규는 독립투사로 건국포장이 추서(1993)되었다. 조지훈은 김성규의 장녀인 김위남(金渭男, 필명 金蘭姬)과 혼인하여 신혼 초에 자주 이 집에 머물렀으며, 그 무렵에 이 마을을 배경으로 남긴 시가 <별리(別離)>다. 이 시비는 마을 우측 맨 끝에 있는 한옥체험수련관 앞에 있다.
<김성규 가옥(조지훈 처가>
푸른 기와 이끼낀 지붕 너머로/나즉히 흰구름은 피었다 지고/두리기둥 난간에 반만 숨은 색시의/초록저고리 당홍치마 자락에/말 없는 슬픔이 쌓여 오느니//십리라 푸른 강물은 휘돌아 가는데/밟고 간 자취는 바람이 밀어 가고//방울 소리만 아련히/끊질 듯 끊질 듯 고운 뫼아리//발 돋우고 눈 들어 아득한 연봉을 바라보니/이미 어진 선비의 그림자는 없어//자주 고름에 소리 없이 맺히는 이슬방울//이제 임이 가시고 가을이 오면/원앙침 비인 자리를 무엇으로 가리울고//꾀꼬리 노래하던 실버들 가지/꺾어서 채찍 삼고 가옵신 님하 <글씨는 부인 김난희(金蘭姬)가 씀>
<조지훈의 <별리>시비>
이 밖에도 무섬마을의 가옥 가운데 38동이 전통가옥이고, 16동은 100년이 넘은 조선시대 후기의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이다. 특히 문화재가 많아 김규진(金圭鎭) 가옥 등 9점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와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그야말로 마을 전체가 고택과 정자로 이루어져 있고, 안동 하회마을과 지형적으로도 비슷하지만, 하회마을과 달리 일반에 그리 알려지지 않아 옛 선비 고을의 맛을 흠씬 맛볼 수 있는 것도 무섬마을만이 가진 특징이다.
<섬계 고택>
아도서숙에서 한옥체험관까지 한 바퀴 둘러본 무섬마을은 풍수지리 적으로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 형태이며, 물 위에 뜬 연꽃 같다하여 연화부수(蓮花浮水)형, 매화꽃이 땅에 떨어진 형국의 매화낙지(梅花落地)형으로 선비의 기상을 나타내고, 산과 강이 만나 이루는 음양의 조화는 땅과 물의 기운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명당이며, 속세를 떠나 처사(處士) 같은 삶을 살다 간 시골 선비의 소탈한 생활방식과 단아한 채취가 물씬 풍기는 한국 특유의 전통을 잘 나타내는 곳 같다.
<무섬마을과 내성천>
무섬마을에 들어서려면 수도교를 건너야 한다. 이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마을과 바깥을 잇던 것은 외나무다리였다. 마을 주민들은 “외나무다리로 꽃가마 타고 시집왔다 죽으면 그 다리로 꽃상여가 나갔다”고 했다. 무섬마을로 들고 나는 시작과 끝을 보아온 외나무다리는 여전히 무섬마을의 안과 밖을 잇는다. 30년 전만 해도 마을 사람들은 나무를 이어 다리를 놓고 내성천을 건너 뭍의 밭으로 일하러 갔으며, 장마가 지면 다리는 불어난 물에 휩쓸려 떠내려갔고, 마을사람들은 해마다 다리를 다시 놓았다.
<무섬마을 외나무다리>
현재의 외나무다리는 지난 350여 년 간 마을과 뭍을 이어준 유일한 통로였다. 1979년에 건설된 현대적 교량이 설치되면서 사라지게 된 이 다리는 마을 주민과 출향민들이 힘을 모아 예전 모습으로 재현시켜 놓았다. 현대에서 과거로 삶의 질곡들이 외나무다리에 주렁주렁 얽혀 있다. 외나무다리 중간 쯤에 다다랐을 때 맑디맑은 내성천 물은 긴 여울을 만들며 아래로 흐른다. 그 위에 서있는 나는 착시현상으로 한 마리 잉어가 되어 물살을 거슬러 등용문을 찾아 올라간다.
<무섬마을 제2외나무다리>
외나무다리를 건너면 문수지맥트레킹길이다. 문수지맥은 태백산 줄기인 문수산(文殊山, 1,208m)에서 내성천을 따라 뻗은 지맥으로 무섬마을 건너편 강변으로 트레킹 코스를 만들었다. 데크로 단장한 길을 따라 수도교 쪽으로 걷다보면 언덕위에서 물과 마을이 내려다보는 환학암이 있다. 환학암(喚鶴菴)은 무섬마을 입향조인 박수의 부친 박경안의 호 ‘환학(喚鶴)’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오래된 지붕 위에 와송(瓦松)이 뿌리 내린 환학암 앞의 외나무다리는 무섬마을을 오가는 사람들의 시작과 끝을 이어준다.
<환학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