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16일 연중 제6주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태 5,17-37)
I tell you, unless your righteousness surpasses that of the scribes and Pharisees, you will not enter the kingdom of heaven.
말씀의 초대
계명을 지키고 충실하게 사는 것은 인간의 의지에 달려 있으니, 각자에게는 생명과 죽음이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는 합당한 것을 바란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지혜는 하느님의 지혜를 뜻한다. 세상의 권력자들에게는 그것이 보이지 않았기에 그들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없애시려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 주님께서는 법조문의 외적 준수보다는 깊은 내면에서부터 올바른 행위를 선택하는 것을 요구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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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김수환 추기경님이 선종하신 지 오늘로 꼭 다섯 해가 되었습니다. 2009년 2월 16일, 그분이 숨을 거두시자 추운 날씨에도 며칠 동안 명동 성당 앞에 늘어선 추모객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우리는 그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슬프면서도 아름다웠던 그 기억은 이 땅의 그리스도인뿐 아니라 교회를 넘어 그분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이 바르고 아름다운 삶을 사는 데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추기경님의 모습을 더욱 생생히 떠올리며 생각하게 되는 장소들이 있을 터인데, 저에게는 모교인 서울 신학교의 주교관과 우리 본당의 고해소입니다. 강의하러 신학교에 가, 지난날 부제품을 받기 전 추기경님과 마주앉아 면담을 한 주교관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우리 본당의 고해소에 들어가 그 문 안쪽에 누군가 붙여 놓은, ‘별이 지다.’라는 문구와 함께 환하게 웃으시는 추기경님의 모습을 담은 사진엽서를 보면서 저는 그분을 가슴속에 그려 봅니다. 그런데 추기경님의 ‘옹기’라는 아호의 뜻에 대해서는 선종하시고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야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지난해 이맘때 본당의 한 교우분에게서 추기경님 관련 사진과 그분을 추모하는 글을 모은 아름다운 책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 책에는 질그릇을 뜻하는 추기경님의 아호에서부터 그분의 삶과 죽음이 우리에게 특별했던 이유를 생각해 보게 하는 대목이 있었는데 많은 부분에서 공감하였습니다. “과연 우리는 질그릇인가? 뭇사람은 별과 같은 존재, 보석과 같은 존재로 인정받기를 원한다. 추기경님이 다르신 이유는 바로 별이 아니라, 보석이 아니라, 질그릇이 되셨기 때문이다”(김명훈).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직접적인 인연이 없어도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김 추기경님은 그러한 분이셨기에 수많은 이의 영적인 아버지가 되셨던 것입니다. 질박한 옹기그릇처럼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우리가 그리워하는 그분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의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22차 ‘세계 병자의 날’을 맞으며
-김종원신부-
지난 2월 11일은 제22차 ‘세계 병자의 날’ 이였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2년 매년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 기념일인 2월 11일을 ‘세계 병자의 날’로 지내기로 하셨습니다. 교황님께서는 병자들에 대한 봉사 정신을 확산시키고 봉사자들 을 격려하기 위해 이날을 제정하신 것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교서 ‘구원에 이르는 고통 Salvifici Doloris’안에서 보건 사목 분야 의 ‘새로운 복음화’를 강조하셨습니다. 곧 그리스도안에 있는 희망을 향하여 나아가는 믿음의 길 위 에서, 병들거나 고통받는 이들의 영성을 향한 갈망을 인식하며 그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 니다.
현 교황님이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제22차‘세계 병자의 날ʼ을 맞아 “믿음과 사랑 : 우리도 형 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1요한 3,16)라는 제목의 담화문을 발표하셨습니다. 교황님께 서는 이 담화문을 통해 ‘보살핌이 필요한 이들에게 우리가 따뜻한 사랑으로 가까이 다가갈 때, 우리 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그들에게 하느님의 미소와희망을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병원에 입원하는 사람들은 ‘소외’를 경험한다고 합니다. 환자복을 입는 순간 자신의 일터에서, 그 리고 가족과 동료들로부터 자연스럽게 소외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병자들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는 그들의 마음과 영혼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3일 전 병원 호스피스 병동에 29살 은지라는 친구가 ‘간 혈관 육종’이라는 병명으로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비 장과 췌장 그리고 뼈까지 전이가 되어서 오늘 하루를 넘기기 힘든 상태입니다. 작년 12월에 병이 있다 는 것을 발견하고 겨우 두 달도 채 못 되어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온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소외’를 경험하고 있는 많은 환자도 있지만, 이렇게 ‘소 외’조차도 경험해 보지 못하고 임종의 시간을 맞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인간 질병과 그에 따른 고통을 하느님의 손길을 알아채는 혹독한 시련으로 이해해왔 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병자들이 고통을 잘 감내할 수 있도록 특별한 사랑과 관심을 기 울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 안에는 지금 어디선가 많은 이들이 아파하고 있습니다.
-서공석신부-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가지게 된 것은 하느님이 사람들과 함께 계신 사실을 깨닫고, 그 함께 계심을 살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모세가 함께 계신 하느님을 존중하며 살기 위한 지침으로 율법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열 가지로 나누어 만들었습니다. 기원 전 1200여 년 전의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십계명이라고 부르는 것의 기원입니다. 그것이 유대교에 율법이 있는 경위입니다. 후에,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안정되면서, 그들은 그 십계명을 더 발전시켜 여러 가지 상황을 가상하여 조항을 많이 늘렸습니다.
율법은 그 시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상황들에 대한 실천 지침입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사라지고, 기원전 4세기 이후, 그 시대 유식한 사람들이 율사라 불리며, 율법 해석을 직업으로 하는 이들이 등장하였습니다. 그들이 등장하면서 율법 조항들은 많아졌습니다. 인간 삶의 여러 상황을 가상하여 율법을 철저히 지키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그때부터 그것을 지키는 데에 골몰한 이스라엘은 율법의 의미를 차차 잊어버리고, 그것을 엄격히 지키는 데만 신경을 썼습니다. 하느님이라는 숲은 잊어버리고 율법 조항이라는 나무에만 시선을 빼앗긴 꼴이 되었습니다. 율사들은 율법의 자구(字句)를 절대화하여 철저히 지킬 것만 사람들에게 요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에 대한 유대인들의 그런 자세를 비판하셨습니다. 그분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게로 시선을 가게 하는 율법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을 지킬 것만 강조하면서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이 잊어버린 하느님을 되찾아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의로움을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 조항 몇 개를 해석해 보이십니다. 율법은 ‘살인하지 말라’고 말하지만, 사람을 죽이는 일만이 아니라, 사람을 미워하고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어떤 행위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은 그분의 뜻을 소중히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미워하거나 해치지 않으십니다. 그와 반대로 하느님은 사람에게 자비로우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나를 대립시켜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이라는 숲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안에 함께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하느님이 아버지이시면, 이웃은 모두 형제자매들입니다. 형제자매는 서로 위해주고 사랑하며 축복하는 관계입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을 예수님은 해석하십니다. 이성(異性)을 바라보는 눈을 새롭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의 욕구를 기준으로 이성을 볼 것이 아니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기준으로 이성을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축복하고 배려하십니다. 그렇다면 이성을 보는 우리의 시선도 축복하고 배려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 시대 유대인들의 관행인 이혼 법에 대해서도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남성 위주의 사회였던 그 시대의 이혼 법은 아내가 싫어지면, 남편이 이혼장을 써주고 내보냅니다. 이스라엘이 유목민이었을 때, 좁은 천막 안에서 여성이 학대받지 않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배려하시는 하느님의 시선으로 자기 배우자를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는 율법에 대해서도 해석하십니다. 거짓 맹세뿐 아니라, 맹세 자체를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이 자기의 말을 절대 기준으로 삼겠다는 것이 맹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말이나 행위를 절대화하지 말고,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절대적인 분으로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율법은 사람들이 만든 것입니다. 구약성서가 하느님이 주신 율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자각하면서 사람들이 만든 율법이라는 뜻입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존중하고 그분을 기준으로 살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삶의 지침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을 위한 지침입니다. 따라서 시대가 달라지면 새롭게 표현될 수 있는 지침입니다. 같은 하느님이지만, 우리의 의식 수준이 달라지면, 그분과 함께 사는 방식도 달라집니다. 사람들이 몽매하였을 때, 그들은 높은 사람이 시키는 대로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신앙은 교회가 주는 교리를 믿고, 교회의 계명을 지키며, 교회교직자들에게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사람들 각자가 자기가 필요한 정보를 얻어 자유롭게 선택하며 삽니다. 오늘의 신앙생활은 각자가 하느님에 대해 듣고, 자유롭게 선택하여 하느님의 뜻을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이 축복하고 배려하시는 분이라, 신앙인 각자는 자기 방식대로 그 축복과 그 배려를 실천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두려워해야 할 일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각종 재해(災害)를 하느님이 내린 벌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자연 재해들이 자연의 어떤 조화로 발생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으십니다. 율법은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해 하느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살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이웃을 축복하고, 배려하고, 사랑하며 살 것을 원하십니다. 그것이 참으로 자유롭게 사는 길이고 율법을 완성하는 길입니다. 이웃과 경쟁하고, 이웃을 비난하는 마음이 자유롭지 못한 마음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앞에 자유로운 세계를 열어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고통, 곧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자유가 혹은 대자연이 만드는 그늘입니다. 사람들이 자유를 잘못 사용하여 혹은 대자연의 조화가 잘못 되어 생기는 그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이 그들의 자유를 잘못 사용하였을 때, 발생한 그늘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하며 그 그늘인 죽음을 감수하셨습니다. 그리스도신앙공동체는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다고 고백합니다. 비록 그런 그늘들이 있어도, 우리는 이웃을 축복하고 배려하고 사랑하며,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참다운 자유를 살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
멈춰선 자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봅시다.
-김기현신부-
오늘 복음 앞 부분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 말씀을 읽고 ‘나에게는 어떤 일들이 그러할까..’ 라는 것을 생각해 보았는데요. 몇 가지 떠오른 일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축일 선물을 챙겨 드릴 때의 일입니다. 작년에 개인적으로 실천해보고자 했던 것 중에 하나가 신자들에게 축일 선물을 챙겨 드려 보는 거였습니다. 본당 신자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거 같은데요. 제 때에 선물을 드린 적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겨우겨우 밀린 숙제(?)를 실행에 옮겼었습니다.
보통 그 달에 어떤 분들이 축일이신가.. 하는 것을 보고 선물을 샀는데요. 11월 즈음에 제가 좀 미워하고 얄밉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한테도 해야 하나.. 하기 싫은데.. 그 사람한테 선물 안 줬다고 감시하는 사람도 없는데 건너뛸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 독서를 읽는데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그 말씀을 읽으면서 중간에 있는 말씀이 저에게는 이렇게 들리더라고요.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는 선물을 할지도 모릅니다...’ 하고 말입니다. 제 수준을 말해준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그 수준이 아마도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과 같은 수준이 아닐까.. 합니다. 대부분이 그런 수준에 머물러 있을지도 모르겠는데요. 주님께서 바라시는 일은 그 수준을 넘어 사랑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이어지는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아마도 그러한 조건 없는 사랑과 희생이 바리사이들의 모습을 능가하는 일일 텐데요. 그 일이 우리에게는 무엇이겠습니까? 어렵게 생각되는 일을 떠올려 보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저 사람에게는 말 걸기 싫은데.. 저 사람에게는 인사하기 싫은데.. 저 사람과는 함께 하기 싫은데.. 저 사람에게는 이 일을 실천하지 못하겠어..’ 하는 일들을 한 번 해 보는 겁니다. 그 일이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일이 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닮은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해 주리라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농사로 먹고 살 수 있는가.. 하는 겁니다. 작년에 선배 신부님이 오셔서 주일 미사를 함께 봉헌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식사도 함께 했는데요. 가시기 전까지 시간이 남아서 마을 한 바퀴를 도는데 신부님이 이런 얘기를 들려주시더라고요. 동생이 시골에 내려가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본인도 안식년동안 함께 지내면서 집도 짓고 농사도 지었는데 너무 좋았다. 아마 내년 정도면 농사가 자리를 잡지 않을까.. 라는 이야기를 하셨는데요.
그런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농사가 좋은 것도 있지만, 사제로 살면서 입으로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오로가 천막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던 것처럼 일을 할 수 있다면 더 힘이 실리지 않을까...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몸으로 일해서 먹을 것들은 조금이나마 마련할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있으셔서 그런 거 같은데요.
그 말씀과 삶이 제 마음을 사로잡았던 거 같습니다. ‘나도 그렇게 살아보고 싶다... 농사로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는 안 되어도 다양한 먹거리를 스스로 준비할 수 있는 모습이 있었으면 좋겠다..’ 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는 감이 잡히질 않았습니다. 3년 동안 시골에서 살았고 농사도 짓긴 했지만, 대부분 스승이신 신자 분들이 시키는 대로 했었기 때문에 잘 모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있었는데, 이 번 사제 연례 피정에 들어가보니 신부님이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신부님을 찾아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고, 그 이야기들을 통해 약간의 방향을 잡을 수 있었던 거 같습니다. 다양한 작물을 심어보면서 조금씩 배워나가 보는 것이나, 귀농학교 같은 곳에 다니면서 사람들도 만나고 구체적인 현장의 이야기도 들어보는 것, 또 교구에 우리농 같은 곳에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나.. 들여다보는 것들을 이야기 해 주셨는데요.
아마도 그 일들을 배워나간다면 말씀만 연구하는 바리사이의 모습이 아니라 직접 생계를 위해 몸으로 일하고 땀 흘리는 바오로 사도의 삶이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그 일이 바리사이의 모습을 능가하는 일 중에 하나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세 번째는 아이들과 잘 어울려 지낼 수 있는가.. 하는 겁니다. 제 모습을 보면 아이들과 친밀한 모습이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신기하게도 제가 지도 신부를 하고 있는 단체가 어린이 사도직이라는 단체입니다. 또 시골 본당에 갔지만 저번 본당도 그렇고 이 번 본당도 그렇고,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걸 보면 뭔가 관심을 가지라.. 는 압박이 있는 것처럼 생각되어지는데요.
그 압박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일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바라사이들을 생각하면 왠지 아이들과 거리가 멀고 율법 공부만 할 거 같은데요. 그런 딱딱한 모습에서 벗어나 친밀함을 만들어 내는 것이 그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일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아마도 그 구체적인 일들은 ‘동반’이라는 단어와 ‘함께 있음’이라는 단어를 삶으로 살아내는 일이 될 거 같습니다. 조금 더 시간을 내어 함께 하고, 조금 더 관심을 갖는 일이 전과는 다른 친밀함을 만들어 내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멈춰서 있는 그 자리에서 할 걸음 더 나아가 봅시다. 그 일의 실천이 바리사이들을 의로움을 능가하게.. 또 예수님을 조금 더 닮은 신앙인이 될 수 있게 해 줄 겁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강론 중에 신자 분들에게 ‘같이 본당 농사 하면 좋겠죠?’했더니,
다른 질문과는 달리 ‘싫다..’ 는 표현을 확실히 하시는 거 같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신다. 다들 농사가 많으셔서 부담이 되시나보다.
세상에서 가장 선한 것, 악한 것"
- 박용식 신부-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마태 5,33).
오늘 복음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십계명 중 제5계명(살인해서는 안 된다)과 제6계명(간음해서는 안 된다), 제8계명(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을 말씀하십니다. 모든 계명을 다 잘 지켜야 하지만 그 중에서 제8계명을 묵상해 봅시다.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은 말로써 이웃을 해치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거짓을 말하든 진실을 말하든 상관없이 말로써 이웃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주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말로써 이웃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는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유다인의 지혜서인 「탈무드」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나라 왕이 신하 두 명을 불러 서로 정반대되는 임무를 맡겼습니다. 한 신하에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선한 것을, 또 다른 신하에게는 가장 악한 것을 가져오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임무를 맡은 신하들은 온 세상을 두루 돌아본 후에 답을 찾아왔는데 똑같은 답이었습니다. 둘 다 사람의 '혀'라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왕은 두 신하의 열띤 논쟁을 들어본 후 세상에서 가장 선한 것도 혀요, 가장 악한 것도 혀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인간의 혀는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선도 될 수 있고, 악도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세 치밖에 되지 않는 혀는 온몸을 다스릴 정도로 엄청난 힘을 갖고 있어서 혀를 통해 만들어 내는 말 한마디는 행복과 불행의 열쇠가 될 정도입니다. 무심코 내뱉은 말은 누군가의 마음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큰 영향을 주듯이 살아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혀는 민족에 따라 좋게도 나쁘게도 사용됩니다. 대부분 민족은 상대에 대한 우롱이나 경멸의 표시로 혀를 내민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혀를 내밀며 '메롱'하는 것이 그렇고, 미국에서는 동전을 입속에 넣고 혀를 내밀어 보이는 것이 굉장한 경멸과 모독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 버지니아본당 주임신부로 있을 때 성당에서 그런 모독을 당한 적이 있는데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생각이 나는 걸 보면 굉장히 불쾌했던 게 틀림없습니다. 반면에 혀를 내미는 것이 티베트에서는 존경의 인사가 되고, 뉴질랜드의 마오리족에게는 환영의 표시가 되는가 하면 아프리카에서는 혀를 굴려 이상한 소리를 내는 것이 기쁨과 환호의 뜻이기도 합니다. 하여튼 혀를 잘 사용해야 합니다. 야고버 사도는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혀를 삼가라고 권하면서 아무리 신앙심이 깊어도 혀를 제어할 수 없다면 그 신앙심은 무의미하다고 가르칩니다(야고버 1,26). 말로 이웃을 해치는 것은 살인보다 더 많은 피해를 주기도 합니다. 살인은 한 사람만 상하게 하지만 험담은 한꺼번에 여러 사람을 해칠 수 있습니다. 험담을 하는 자신을 해치고, 험담하는 말을 듣고 동조하는 사람을 해치고, 그 험담의 대상자를 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혀를 조심하지 않고 함부로 말해서 이웃을 해치는 사람은 남의 물건을 훔치는 사람보다, 성실하지 못한 사람보다,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보다 더 어리석고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둑질이나 다른 죄악은 보속하고 보상하기 쉽지만 말로서 끼친 죄는 보상하기 어렵기 때문에 말로써 이웃을 해치는 죄를 다른 죄보다 더 경계하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물건을 훔친 죄는 훔친 물건을 되돌려주면 보속이 되지만 말로써 끼친 피해는 주어 담을 수 없기에 보속을 다 하기 어렵습니다. 한번 뱉은 말은 쏜 화살이요, 엎질러진 물이므로 주워 담을 수 없고 기워 갚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남을 해치려는 악의가 없이 무심코 한 말이라도, 지나가는 말로 그냥 한 말이라도, 심지어 도와주려고 한 말이라도 상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면 그것은 잘못을 저지른 것입니다. 무심코 던진 돌에 지나가던 개구리가 맞아 죽을 수 있기 때문이죠. 진실이든 거짓이든 상관없이 말로써 상대를 해롭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몸에 귀가 둘이고 눈이 둘인데 입이 하나 밖에 없는 이유는 두 번 듣고 두 번 본 것을 한 번만 말하라는 뜻이고, 몸은 큰데 입이 작은 이유는 온 몸으로 체험한 것이라도 작게 말하라는 뜻이 아닐까요? 예수께서 오늘 복음에서 내려주신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을 잘 지키려면 이웃에게 해로운 말을 하지 말고 이로운 말만 해야 되겠습니다.
마음을 떠난 율법 준수는 형식주의
-최인각신부-
율법에서 사랑실천 배워
“나는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있노라면, 왠지 모르는 기쁨과 넉넉함이 밀려옵니다.
율법은 인간을 위하여 만들어졌고, 인간은 율법을 통해 사랑을 실천하는 법을 배웠기에, 율법과 인간은 긴밀한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율법을 폐지하지 않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을 없애지 않겠다는 말씀이며, 율법을 완성하겠다는 말씀은 인간을 완성하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된 ‘인간’과 하느님께서 삶의 길잡이로 주신 ‘율법’이 제 역할과 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예수님의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율법을 받아들이고 실천함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율법을 잘못 알아듣고 받아들인 것’이라고 지적하십니다. 율법을 잘못 전해주고, 잘못 받아들이도록 조장했던 이들과, 자기식대로 받아들인 이들을 향한 지적입니다. 그들은 율법의 취지나 정신보다는 자신에게 유리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복음을 자세히 보면 이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라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접속사 “그러나”를 강조하면, ‘하느님께서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은 잘못되었으니, 이제 새롭게 말한다.’라는 의미로 다가옵니다. 이런 해석이라면, 예수님께서 말씀(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폐지하러 오신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라는 말씀에 초점을 맞춰 보면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잘못하신 것이 아니라, 중간에서 전해주고 알아들은 이들이 잘못한 것이 드러납니다. 그렇기에 율법을 잘못 들려주고 받아들였던 이들이 바로잡으면, 율법은 본래의 취지대로 전달되고, 실천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과 같습니다. 부연설명하면, 예수님께서는 ‘그 말씀(율법)의 본래의 뜻은 이러이러하니, 이제부터는 내가 말하는 것을 잘 듣고 그대로 실천하면, 그 뜻(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의 본래 취지는 하느님과 이웃을 마음으로 사랑하라고 주신 선물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떠난 율법의 준수는 형식주의를 면치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겉으로 짓는 죄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는 결코 그 율법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율법 조항에 의하면, 형제에게 화를 내고, 욕하고 빈정거리며 원망하는 것, 화해하지 못하여 법정에 가는 것, 마음으로 간음하는 것,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거짓 맹세하는 것 등은 큰 죄에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음으로 짓는 죄까지 엄하게 다루며 말씀하십니다. 형제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고, 자신과 이웃의 영혼에 상처가 되는 것이라면, 결코 작은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더욱이 말할 때, “예”와 “아니요”를 분명히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율법에서 가르치는 바에 대해 조건을 붙이지 말고,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얼마 전 대법원은 50여 년 전에 간첩 혐의로 사형 집행된 이에게 무죄판결을 내렸습니다. 간첩이라는 죄명으로 이미 사형 집행된 사람에게 무죄판결을 내린 것을 보면서, 참으로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는 살인당한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 없는 이를 사형집행으로 몰고 간 진정한 죄인은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 죄인은 바로, 자기와 생각의 색깔이 다르다는 이유로 감옥에 가두고, 이를 방조하고 사형판결에 손을 들어주었던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이는 한편으로, “예”와 “아니요”를 구분할 용기가 부족한 우리 자신 때문에 저질러진 만행이 아닌가하며,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예”와 “아니요”를 구분하였던 제1심 재판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아니요” 하며, 자신의 양심에 따라 무죄판결을 내렸고, 그 후 그는 법관 재임용에서 탈락되는 아픔도 겪어야만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비난을 넘어 정의를 지킨 훌륭한 법철학자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영원히 기억될 비난과 칭찬은, 현재의 우리의 손에 달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온전히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려는 자만이 진정으로 웃으며, 하느님 앞에 나아갈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우리 모두가 그러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편견과 독선의 그물망에 갇히지 않는 믿음
-권철호신부-
진실의 가장 큰 적은 거짓이 아니라 편견일 수 있다는 말에 동의합니다. 돌이켜 보면 우리 삶은 거짓과 무지의 폭력에 의한 상처보다 편견의 폭력에 더 큰 상처를 받아왔습니다. 종교적인 분쟁이 그러하고 정치적인 이념이 그러했으며 지역적인 편견이 그렇습니다. 생활 속에서는 다르다는 것이 틀리다는 것으로 둔갑하고 마음의 나눔 없이 강요만이 자리했습니다. 편견은 독선과 벗하고 절대라는 지위에 은근슬쩍 돗자리를 폅니다. 결국 편견이 꿈꾸는 세상은 너 없는 나뿐인 세상, 나와 다른 사람이 아닌 나와 같은 사람만을 위한 세상을 꿈꾸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느 소설가의 말처럼 나쁜 사람이 ‘나뿐인 사람’이라면 가장 나쁜 사람은 바로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일 겁니다. 해서 진실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사람, 역시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자신만이, 자신의 의견과 주장만이 절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영원히 삶의 진실과 마주할 수 없고 진실의 영원한 반려자인 겸손과 더불어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서도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고 착각한 사람들이고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서도 최고의 자리에 대한 유혹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 속에서 예수님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고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 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율법과 율법 학자들 그리고 바리사이들을 혹독하게 비판하셨던 예수님이고 보면 우리 입장에서 혼란을 가중시키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비판이 사랑 없는 그들만의 편견에 대한 것이고 보면 예수님을 믿는 이들도 우리만의 편견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믿음과 편견은 외견상 고집스러움은 같을지 모르지만 삶 속에서는 전혀 다른 그림을 만들어 냅니다. 믿음은 다른 이에게 자신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지키고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모범이 되고 감동을 자아내지만, 편견은 자신을 바꾸는 대신 상대방을 향한 비난과 강요로 반발과 분노를 자아냅니다. 해서 믿음은 봉사와 희생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 하지만 편견은 다른 이를 희생 시키고 강제해서 세상을 바꾸려 합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서도 최고의 자리를 탐하기보다 최선을 다하되 절대라는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는 그 길이 그래서 신앙인의 삶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신앙은 절대이신 하느님 앞에 무릎 꿇는 행위이지만 인간에 대한 사랑을 그 발밑에 놓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품에 안고 무릎 꿇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음
-방삼민 신부-
주인이 하인들을 불러 놓고 말했다. “자네들은 오랫동안 우리 집에서 열심히 일해 주었으니 약속한 대로 내일이면 자유의 몸이 되게 해주겠네. 하지만 마지막으로 자네들에게 시킬 일이 있으니 끝까지 잘 해주게…” 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내일 아침까지 할 수 있는 만큼 새끼를 가늘고 길게 꼬아 오게. 꼭 가늘고 길게 말이야. 그럼 내일 아침에 보세나.”
주인이 들어가자 한 종이 말했다. “에이, 지독한 양반. 마지막까지 부려 먹으려는군.” 하면서 그는 새끼를 아무렇게나 꼬고는 일찍 자리에 들어가 버렸다. 하지만 나머지 종은 “그래도 세상에 우리 주인 같은 분이 어디 있나.” 하면서 시키는 대로 열심히 가늘고 길게 새끼를 꼬았다.
다음 날 아침 주인은 두 하인을 불러 놓고 이렇게 말했다. “자네들이 여러 해 동안 우리 집에서 일을 해 준 덕분에 살림이 늘게 되었으니 이제 약속대로 자네들에게 자유를 주겠네. 그리고 그동안의 보답으로 여기 엽전을 가져왔으니 자네들은 그 새끼로 가져갈 수 있을 만큼의 엽전을 꿰어 살림에 보태 쓰도록 하게.” 하는 것이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말할 필요도 없이 불평 많던 종은 한 푼도 가지지 못하고 열심한 종은 큰 상을 받게 되었다.
오늘 복음을 어떻게 해석할까? 글자 그대로라면 예수님의 요구는 너무 지나친 것 같다. “자네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라는 말씀이나 “바보라고 욕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라는 등 섬뜩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 말씀을 글자 그대로의 율법 조항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우리로 하여금 죄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는 예수님의 걱정스런 마음으로 알아들으면 어떨까? 또한 매사에 마지못해 시키는 것만을 하고 살아온 우리들의 잘못된 태도를 책망하는 말씀으로 알아들으면 어떨까?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이 말씀이야 말로 당신의 제자들만이라도 의무나 규정에만 매달리는 위선자들과 달리 스스로 죄를 멀리하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 자신을 투신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예수님의 부모 같은 마음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많은 신자들이 주일 미사만 지키면 신자의 도리를 다 한 것처럼 생각하고 산다. 과연 최소한의 의무만을 지키는 신자 생활이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임숙희-
시작 기도 오소서, 성령님, 우리 마음 안에 진정한 그리스교적 지혜를 불어넣으시어, 주님 법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하시고 온 마음으로 지키게 해주십시오.
세밀한 독서?(Lectio) 오늘 우리가 듣는 긴 복음 말씀에서 마태오는 유다인들로 구성된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아주 중요한 질문에 답변합니다. 어떻게 성경과 유다 전통에 충실할 수 있는가?? 마태오는 진정한 유다인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이 알고 있는 과거의 율법이 충만하게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외적으로 새로운 율법을 소개하지 않고,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더욱 명확하게 밝혀주시면서 제자들이 문자가 아니라 그 정신에 순종하고 살도록 가르치십니다. 제자들이 어떻게 율법을 삶에 적용해야하는지 예를 들어주는 여섯 가지는 모두 인간의 내적 태도와 동기를 들여다보라는 초대인데, 무엇보다도 화해를 위해 일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가슴 깊이 와 닿습니다.?(마태 5,?21???26) 예수님은 직접 행동에 옮기는 것만이 살인이 아니라 화, 멸시, 형제애를 파괴하는 것도 내적인 살인이므로 단호하게 피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우리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누군가에게 습관처럼 화가 나있을 때가 많습니다. ‘바보요, 정신 나간 사람들’?이라는 말을 아무 생각 없이 되풀이합니다. 우리한테 아무 쓸모도 없고 줄 것이 전혀 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마음 안에서 무시하거나, 그것을 드러내어 다른 사람들을 비참하게 하거나 초라하게 느끼게 하면서도 아무 죄의식을 갖지 않습니다. 이런 마음의 죄들은 주님이 요구하시는 대로 평화를 건설하기보다는 마음의 평화를 파괴하고,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는다는 점에서 개인에게도 공동체에게도 죽음을 가져옵니다. 요한의 첫째 편지는 예수님의 정신을 명확하게 요약합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1요한 3,?15) 인생에는 생명과 죽음이라는 두 가지 길이 있는데 인간은 어느 것이나 바라는 대로 받습니다. (집회 15, 17)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간 사람입니다.?(1요한 3,?14 참조) 마태오는 두드러지게 이 본문에서 “형제”?라는 단어를 되풀이하는 데?(22절 두 차례; 23절; 24절), 아마도 마태오의 초점이 형제애를 이루는 데 많은 어려움을 가지고 있던 마태오 공동체 자체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살인 행위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화해를 청하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마태오는 사제를 통해 하느님께 희생제물을 바치는 예배 행위가 화해하지 않은 형제와 화해하러 가는 행위 때문에 중단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성찰해보도록 초대합니다. 마태오는 먼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개선하지 않고는 하느님께 적절한 예배를 드릴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이사야도 같은 생각을 말합니다. “너희가 나의 얼굴을 보러 올 때 내 뜰을 짓밟으라고 누가 너희에게 시키더냐?? 내 눈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이사 1,?12???17 참조)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먼저 우리가 기꺼이 화해하려는 길을 찾고, 우리가 더 이상 타협의 여지도 없는 완고한 마음을 지님으로써, 우리 편에서 화해에 장애물을 놓지 않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 전체는 구약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고, 십계명을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에서 넘어서야 한다는 것은 예언서나 충실한 유다인이라면 동의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점이 있다면 마태오가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을 예수님 자신에 초점을 맞추어 소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오는 이 계명에 담긴 내적인 정신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 예수님의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초대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얼마나 온유했고, 부드러운 마음을 가졌으며, 그분이 어떻게 화해를 가져왔는지 오랫동안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분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차갑고 이기적이고 굳은 마음은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뀌어 갑니다. 예수님이 제자들한테 요구하시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인생은 화해의 여정입니다. 화해가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서로 참아주고 화해하며 형제애를 살지 않는다면, 결국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라는 우리의 정체성도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묵상?(Meditatio) 시편 119편에서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와 바꾸어 천천히 읽을 때, 우리는 “율법의 완성”?(로마 10,?4)?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관상할 수 있습니다. 그 시편 안에서 예수님의 인격이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분은 우리가 따라야 할 진정한 율법입니다.
기도?(Oratio) 당신 종에게 선을 베푸소서. 제가 살아 당신 말씀을 지키오리다. 제 눈을 열어주소서. 당신 가르침의 기적들을 제가 바라보오리다.?(시편 119,?17???18)
“예” “아니오”
-문봉한 신부-
“너희는 말할 때에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예, 알겠심더. 근데 언제·어디서 그래야 됩니꺼?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집회 15,15)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집회 15,17)
그라먼 누가·무엇을·어떻게 해야 되지예?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1코린 2,10)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마태 5,19) ①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24) ② 네 오른 눈이 죄를 짓거든, 빼어 던져 버려라.(마태 5,29) ③ 불륜을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자는 그 여자를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다.(마태 5,32) ④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마태 5,33) 네가 머리카락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마태 5,36)
죄송합니데이. 이때까지 지대로 지킨 적이 없어가 잘 몰라서 그라는데예, 왜 그래야 되는데예? “어떠한 눈도 본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셨다.”(1코린 2,9)
한 개만 더 물어보시더, ‘마련’된기 뭔데예? “그것은 세상이 시작되기 전,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미리 정하신 지혜입니다. 이 세상 우두머리들은 아무도 그 지혜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1코린 2,7.8)
‘예.’ 잘 알았심더. ‘아니오.’ 아직 잘 모르겠심더. “그분께서 네 앞에 물과 불을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라.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이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집회15,16.17)
-서공석신부-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복음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가지게 된 것은 하느님이 사람들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였습니다. 그것을 깨달은 모세는 함께 계신 하느님을 존중하며 살기 위한 지침으로 율법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주었습니다. 그 율법은 열 가지 지침으로 된 소위 십계명이라 불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유대교 율법의 기원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안정되면서, 그들은 그 십계명을 더 발전시켜 율법을 만들었습니다.
인간 삶이 겪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한 지침인 율법입니다. 당연히 율법의 조항들은 많아졌습니다. 조항들이 많아지면서 이스라엘은 율법의 의미를 잊어버리고, 그것들을 문자대로 지키는 데만 골몰하였습니다. 하느님이라는 숲은 잊어버리고 율법 조항이라는 나무에만 시선을 빼앗긴 꼴이 되었습니다. 율법을 가르치는 것을 직업으로 한 율사들이 생기면서 율법의 조항들은 더 많아지고, 엄격히 지킬 것만 요구하는 율법이 되었습니다. 율사들은 율법의 자구(字句)를 절대화하여 철저히 지킬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에 대한 유대인들의 그런 자세를 비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게로 시선을 가게 하는 율법이 되어야 한다고 믿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을 지킬 것만 강조하면서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이 잊어버린 하느님을 되찾아 하느님이이 보시기에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 조항 몇 개를 해석해 보이십니다. 율법은 ‘살인하지 말라’고 말하지만, 사람을 죽이는 일만이 아니라, 사람을 미워하고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어떤 행위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씀하십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은 그분의 뜻을 소중히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미워하거나 해치지 않으십니다. 그와 반대로 하느님은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나 자신을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이라는 숲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라는 나무만 보고 서로를 비교하면, 나무들 간의 각종 차별이 돋보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안에 함께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하느님이 아버지이시면 이웃은 모두 형제자매로 보입니다. 형제자매는 서로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에 대해서도 예수님은 해석하십니다. 이성(異性)을 바라보는 눈을 새롭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의 욕망을 기준으로 이성을 볼 것이 아니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기준으로 이성을 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축복하고 배려하십니다. 그렇다면 이성을 보는 우리의 시선도 축복하고 배려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 시대 유대인들의 관행인 이혼법에 대해서도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남성 위주의 사회였던 그 시대의 이혼법은 아내가 싫어지면 남편이 이혼장을 써주고 내보냅니다. 여성이 학대받지 않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배려하시는 하느님의 시선으로 자기 배우자를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는 율법 조항에 대해 해석하십니다. 거짓 맹세만 아니라, 맹세 자체를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이 자기의 말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겠다는 행위가 맹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말이나 행위를 절대화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앙인에게는 아버지이신 하느님만이 절대적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모든 판단은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한 맹세를 기준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율법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구약성서가 율법을 하느님이 주셨다고 말하는 것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자각하면서 발생한 율법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이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존중하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살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생활 지침인 율법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시대 사람들이 그 시대의 사람들을 위해 만든 지침입니다. 따라서 시대가 달라지고, 사람들의 생활양식이 달라지면, 그 지침들도 달라져야 합니다.
같은 하느님이 함께 계시지만, 우리의 의식 수준이 달라지면, 그분과 함께 사는 방식도 달라집니다. 사람들이 몽매하였을 때, 그들은 높은 사람이 시키는 대로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신앙은 교회가 주는 교리를 믿고, 계명을 지키며,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사람들은 각자가 필요한 정보를 받고, 자유롭게 선택하며 삽니다. 이런 여건에서 신앙생활은 각자가 하느님에 대해 듣고, 자유롭게 선택하여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느님이 축복하고 배려하시는 분이라, 신앙인 각자가 자유롭게 실천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두려워해야 할 일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각종 재해를 하느님이 내리신 벌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그런 재해가 어떤 조화로 발생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하느님이 내리신 벌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지배하거나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으십니다. 율법은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해 하느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자각하며 살기 위해 사람들이 만든 지침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이웃을 축복하고, 배려하고, 사랑하며 살 것을 원하십니다. 그것이 참으로 자유롭게 사는 길이고 율법을 완성하는 길입니다. 이웃과 경쟁하고 이웃을 비난하는 마음이 자유롭지 못한 마음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앞에 자유로운 세계를 열어 주셨습니다.
자유로운 세계에도 십자가는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자유 혹은 대자연이 만드는 그늘입니다. 사람들이 자유를 잘못 사용하여 혹은 대자연의 조화가 잘못 되어 생기는 그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유대교 지도자들이 그들의 자유를 잘못 사용하였을 때, 발생한 그늘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하며 그것을 감수하셨습니다. 신앙공동체는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다고 고백합니다. 비록 그늘이 있어도 우리는 축복하고 배려하고 사랑하며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참다운 자유를 살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
초보 운전자가 친구를 태우고 고속도로 주행을 나갔습니다. 너무 천천히 달리는 초보운전자 때문에 답답해하는 친구가 좀 더 빨리 달리라며 다그쳤지요. 하지만 초보 운전자는 여전히 같은 속도를 내며 정속 주행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친구가 어쩔 수 없다며 포기했지요.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고급 스포츠카가 옆으로 쌩~~하며 그 차를 추월해서 달립니다. 그 스포츠카를 보던 초보 운전자는 갑자기 속도를 올려 맹추격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친구가 말했지요.
“야! 왜 갑자기 속도를 올리는 거야! 너무 빨라!! 줄여! 줄이라고!”
이 말을 듣고서도 속도를 계속 올리던 초보 운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안 돼! 앞 차와의 간격을 100미터로 유지하라고 배웠단 말이야.”
철저하게 교통법규를 지키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교통법규를 오히려 어기고 있지요. 즉, 차간 유지는 잘하고 있지만, 과속을 함으로 인해서 더 큰 잘못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바보 같은 사람이 과연 있을까 라는 생각도 해보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우리들이 이렇게 바보 같은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작은 원칙은 철저하게 지키면서도 큰 원칙은 과감하게 무시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더 깊이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서 이러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당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종교지도자들로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면서 아주 열심히 생활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위선자라고 꾸짖습니다. 왜냐하면 철저한 율법 준수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사랑’의 계명은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차간 유지라는 교통법규를 철저히 지키기 위해 과속이라는 교통법규는 과감하게 어기는 사람과 똑같은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해서 더욱 더 주님의 뜻에 맞게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신학생 때 전례부 일을 오랫동안 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전례에 신경을 많이 쓰게 되었고, 세세한 전례 규정까지도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제대 초는 어느 쪽부터 켜고 어느 쪽부터 꺼야 하는 지를 더 따졌고, 복사들의 잘잘못을 이야기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전례 원칙의 가장 기본인 예수님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세한 규정들이 예수님보다 더 윗자리에 올라서게 되었습니다. 가장 전례적인 것을 따지면서, 오히려 예수님이 가려지는 가장 비전례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이 세상에서 가장 윗자리로 모시는 것. 이것이 바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이 중요한 것을 잊지 않고, 철저히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대를 조금만 나누어 준다면 그것이 바로 선물(랠프 월도 에머슨)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양승국신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기>
수도생활의 연륜이 쌓여져갈수록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가장 직면하기 어려운 주제가 뭔지 아십니까? 제 개인적으로는 관계가 어려운 형제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한 때 그 관계가 얼마나 괴로웠으면 그 형제 신발만 봐도 갑자기 미운 마음이 머리끝까지 ‘확’ 올라오면서 죄 없는 그 신발을 발로 차버린 적도 있습니다. 서점에 가서 책을 하나 골랐는데, 제목이 이랬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기.’
그뿐 아닙니다. 정말 어려운 일이 또 한가지 있습니다. 바로 순명입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이제 슬슬 무대 뒤로 물러날 준비를 해야 됩니다. 그런데 새까만 후배들이 슬슬 커가면서 중책을 맡게 되고 나의 원장도 되고, 나는 그에게 순명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게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는 누구입니까? 내가 원장일 때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입회했던 지원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제 나의 원장이 되어 나를 좌지우지하는 것입니다.
한때 나를 하늘처럼 여기고, 내 말 한마디에 벌벌 떨던 그를 이제 내 아버지로 여기고, 그에게 순명서약을 하고, 그의 말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아니라면 참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고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게 수도회 법이자 교회법인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법이요 사랑의 법이기에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그게 어쩔 수 없는 수도자의 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두 가지 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 따르고 추구해야 할 법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법이 있고, 두 번째 절대 따르지 말아야 할 법인 악마의 법, 부패한 냄새가 진동하는 썩은 율법학자의 법,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돌아가게 만드는 자기중심적 율법주의, 내 뜻대로 해석하고 내 마음대로 생각하는 아전인수 격 율법주의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법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이런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통해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서로 사랑으로 너그럽게 대하십시오. 이것이야말로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법입니다.” 결국 사랑의 법입니다.
반대로 악마의 법은 무엇입니까? ‘형제를 공격하고 그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는 것’입니다. 내 위주로 생각하고, 내 마음대로 해석하고, 내 자존심 죽어도 굽히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는 이기적인 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제정해온 율법의 조항들을 살펴보니 얼마나 많고 복잡하던지 즉시 두통이 시작되었습니다.
원래 율법이란 것, 제정될 당시 너무나 원리가 간단했습니다. 하느님을 보다 잘 공경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들에게 보다 효과적으로 봉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 좋은 취지의 율법이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신앙의 근본인 인간, 율법의 바탕인 사랑이 사라져가면서 율법은 반대로 인간을 힘들게 하고 인간을 부자유스럽게 만드는 족쇄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율법주의를 타파하라고 강하게 외치고 계십니다. 율법의 제정자이신 하느님, 율법의 주인공인 인간을 철저하게도 외면하고 무시하는 율법주의, 인간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힘들게 하고 인간을 시들게 하고 결국 인간을 죽이고 마는 율법주의를 배척하라고 당부하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가 목숨 걸고 지키기를 강조하는 법, 원칙, 규칙, 회칙에 대해서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그 원칙이 인간을 살리는 원칙입니까, 아니면 인간을 죽이는 원칙입니까? 그 율법이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율법입니까, 아니면 인간을 꽁꽁 옭아매는 유법입니까? 그 규칙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규칙입니까, 아니면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규칙입니까?
자비로운 아버지 하느님
-신효원-
개신교 계통의 중학교를 다녔는데 본관 현관에 수염이 허옇고 엄격한 표정을 한 할아버지의 초상화가 있었습니다. 하느님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죄, 심판, 지옥이라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무서운 분, 벌주시는 분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가까이 오실까 두려운 분이셨습니다. 세례 후에도 그런 하느님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오랜 냉담 끝에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을 주님으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보여 주신 하느님은 무서운 분이 아니라 사랑이시며, 우리가 당신께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자비로운 아버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죽으시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분은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이제 오시기로 약속된 분이 오셔서 예언서의 말씀이 이루어지고 율법이 완성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권위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귀가 열리고 마음이 열렸습니다. 온갖 규정과 규제로 족쇄가 되었던 율법이 새롭게 해석되었습니다. 왜곡되었던 하느님의 뜻이 구원의 기쁜 소식으로 다가왔습니다. 자칫 타성에 젖고 말씀에서 멀어지기 쉽습니다. 매사 하느님의 뜻보다 내 판단이 앞서기 마련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잠시 머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조용히 귀를 기울입니다. 내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그분의 음성에. 그러면 또 우리를 통해서도 예언서의 말씀이 이루어지고 율법이 새롭게 완성되겠지요
하늘 법도
-김찬선신부-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판공성사를 주다보면 간혹 죄가 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죄가 없는데 왜 고백소에 들어오셨냐고 물으면 의무적으로 판공성사를 봐야 한다고 하니 들어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죄 없는 사람을 제가 죄인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어떻게 사람이 죄가 없을 수 있습니까? 크던 작던 죄를 짓는 것이 인간이지요. 뭐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합니다.
얘기를 하다보면 왜 죄 없다고 하는지 알게 되는데 이런 분들에게 죄는 엄청나게 큰 죄만 죄입니다. 예를 들어, 살인을 저질렀든지, 남의 돈을 크게 떼먹었든지, 간통죄를 저지르든지, 큰 죄만 죄입니다. 그러니 남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하는 것쯤은 괜찮고, 돈을 조금 떼먹는 것도 괜찮고, 술집에서 가서 즐기거나 적당히 외도를 즐기는 정도는 괜찮습니다.
죄 관념에 있어서 이들의 또 다른 문제는 신앙인이면서도 세속적인 죄 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회적으로 크게 지탄받을 죄만 아니면 됩니다. 하느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을 하지 않았는지, 그래서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지는 않았는지, 반대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모른 체 하지는 않았는지 등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니 남한테 피해만 주지 않으면 되고, 하느님께서 더 싫어하시는 남에 대한 무관심은 죄가 아이고 남을 더 적극적으로 사랑하지 않은 것은 더더욱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할 때 정도 차이가 있을 뿐이지 이런 면은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 세상에서 남에게 피해 안 주는 것만도 어려운데 이 정도는 죄도 아니라고 스스로 면죄부를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그래서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살인죄도 용서하시는 큰 용서의 하느님이시지만 형제에게 성내는 작은 죄는 괜찮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형제에게 성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간음한 여인도 용서하시는 큰 용서의 하느님이시지만 음란한 생각을 하는 작은 죄는 괜찮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하느님의 체는 아주 촘촘하여 작은 죄도 다 걸러내십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저울은 아주 엄정하여 적당히 봐주지 않습니다.
하늘나라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입국이 허용됩니다. 하늘나라는 하늘 법도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입국이 허용됩니다. 이 세상의 법도, 최대한이 아니라 최소한의 사랑을 요구하는 이 세상의 법도, 적극적인 사랑이 아니라 피해를 주지만 안으면 되는 소극적인 사랑의 이 세상의 법도, 웬만하면 서로 눈감아주는 이 세상의 법도를 실천하는 사람은 안 되고 오직 하늘의 법도, 사랑의 법도를 사랑하는 사람, 사랑의 법도를 실천하는 사람만 입국이 가능합니다.
하느님을 싫어하면서 억지로 그리고 가까스로 하늘 법도를 실천하는 것은 마치 오기 싫어하는 자식을 자식된 도리로 오게 하는 것과 같기에 하느님께서 기꺼워하지 않으시고 그래가지고는 하늘나라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사랑해야지 참으로 행복하지 미워하지 않는 것으로 온전히 행복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