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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5. 묵상글 (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 지혜로운 두려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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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5.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지혜로운 두려움
오늘 복음과 창세기는 공교롭게도 모두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하느님의 자리에라도 있다는 말입니까?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믿으면 두려울 것이 없다고 공통적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제가 요즘 자주 얘기하듯 제대로 믿어야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데 심판자 하느님으로만 믿으면
두려움이 오히려 더 커지고 더 많아질 겁니다.
탈란트의 비유에서 한 탈란트를 받은 사람이 그러했지요.
그는 하느님을 뿌리지도 않고 거둬가는 모진 악덕기업가로 믿었기에
받은 탈란트를 그대로 땅속에 묻었잖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을 믿되 오늘 주님 말씀처럼 믿어야 합니다.
“참새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그러니까 두려워하지 않게 하는 믿음은, 하느님은
늘 나의 곁에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시라는 믿음과
나를 다 알고 계시기에 위험에서 구출해주시는 하느님이시라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하되 제대로 두려워해야 합니다.
특히 오늘은 성 보나벤투라 축일이니 지혜로운 두려움을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혜로운 두려움 1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인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은 이 세상 목숨을 뺏을 수는 있어도 영원 생명은 어쩌지 못하는데
하느님은 이 세상 목숨과 영원한 생명을 다 좌지우지하시기 때문입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지혜로운 두려움 2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아닌 계신 것을 두려워한다.
살다 보면 고통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내가 고통스러울 때 내 곁에 아무도 없는 것이 두려움입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죽을 때 아무도 없는 것이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내 고통과 죽음에 사랑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두려움보다
더 큰 두려움이 실은 사랑하는 하느님께서 아니 계신 두려움입니다.
지혜로운 두려움 3
악을 두려워하지 않고 죄악을 두려워한다.
고통은 악의 경험 곧 우리가 싫어하는 것을 겪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통은 우리를 교만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영적으로 성숙케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성숙하고 지혜롭다면 고통 가운데서 사랑할 수 있어야 하고,
더 나아가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고 악의 경험인 고통을 사랑할 것입니다.
반대로 모든 것이 편안할 때 하느님을 찾지 않게 되고
하느님과 멀어지게 되는 그 죄악을 두려워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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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5.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제자들을 격려해 주십니다. 곧 그 어떤 박해와 고난을 겪더라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당신께 대한 믿음과 의탁의 요청입니다.
사실, “두려움”의 원래 이유는 에덴동산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는 그들을 찾으시는 하느님께 말합니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창세 2,10)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숨은 이유가 사실, 아담의 말처럼 알몸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처벌하시는 분으로 여겼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자비로우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원죄는 단지 금기사항을 위반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하느님의 모습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을 주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빼앗는 하느님, 자유보다 속박하는 하느님, 용서보다 처벌하는 하느님으로 왜곡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움의 반대는 용기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풍랑이 있는 호수 위에서 “겁내지 마라.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불신이 두려움을 불러왔으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심은 곧 당신께 대한 믿음의 촉구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두셨을”(마태 10,30) 만큼 제자들을 소중히 여기시고 보살피고 돌보시는 하느님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곧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두려움을 몰아내라는 말씀입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진정 두려워해야 할 분이 누구신지를 밝히십니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오로지 주님만을 두려워하라는 이 말씀은 처벌에 대한 노예적 두려움이 아니라, 희망과 믿음을 지닌 ‘사랑의 두려움’입니다.
이를 <집회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계명을 지킨다.”(집회 2,15). “주님을 두려워함이 주님을 사랑함의 시작이며, 주님에 대한 사랑의 시작은 믿음이다.”(집회 25,12)
그러니 오늘 <복음>에 세 번 나오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과 한 번 나오는 “두려워하여라.”는 말씀은 다 같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이 “믿음”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활동하시거나 우리를 박해나 고통으로부터 빼내주시리라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는 그 박해와 고통을 함께 견디어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고난으로부터 구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구해주시고,
고통으로부터 보호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보호해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십자가로부터 구원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속에서 구원하십니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는 말합니다.
“예수님은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게 아니라 당신 자신이 오십니다.
당신 자신을 내어주심으로써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박해와 고통 속에서 동행하시는 그분을 만날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 사랑하는 법을 배울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 그분에 대한 믿음으로 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두려워하지 말라.”(마태 10,31)
주님!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박해를 받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진리이신 당신께 희망을 두고,
주님이신 당신께 믿음을 두게 하소서!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두신 당신의 사랑으로 제 두려움을 몰아내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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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5.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두려워하지 마라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 경외심은 다른 모든 두려움을 몰아내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살게 합니다. 사도행전 9장을 보면 사울은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드나들며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설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계 유다인들은 사울을 없애 버리려고 벼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유다와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온 지방에서 평화를 누리며 굳건히 세워지고, 주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면서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효가 늘어갔습니다. 진정한 두려움은 주님을 차지하게 합니다. 경외해야 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은 다른 모든 두려움을 몰아내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을 살게 합니다(사도9,31. 히브12,28). 잠언에는 “주님을 경외함은 지식의 근본이다”(잠언1,7).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너는 매우 큰 상을 받을 것이다”(창세15,1)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게도 “두려워 마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 준다”(이사41,10). “내 가르침을 마음속에 간직한 백성아, 사람들의 모욕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악담에 낙심하지 마라”(이사51,7)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도 더 귀하다”(마태10,31).고 하셨고,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고 하시며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14,27). 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셔서 힘을 주신다는 것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전하고 말씀대로 살고자 할 때 예기치 않은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천상의 것은 서로를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기를 원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분명 ‘아니오’ 하고 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어떤 인간적인 힘도 천상 생명에 대한 우리의 희망을 파괴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분은 수많은 참새보다 더 나를 귀하게 여기시는 분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드러나게도 부르시고, 때로는 침묵하시고, 때로는 어떤 일을 우리를 통해 이루시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제때 그분의 뜻에 응답할 수 있습니다. 응답은 좋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이 뒤틀릴 때, 그때야말로 결단의 순간이고 신앙이 증거되어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사랑이시고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마르8,38). 주님께서는 우리의 힘이시니 주님을 경외하고 세상 것에 두려워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운명은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설 때 ‘잘 왔다. 그간 내 뜻대로 살았으니 이제 편히 쉬어라.’ 는 말씀을 듣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까? 아니면, ‘너는 아무래도 잘못 온 것 같다. 좀 더 단련을 받아야 하겠는걸?’ 하는 말씀을 들어야 하겠습니까? 주변 사람에게 원성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랑과 봉사의 삶으로 칭송을 받으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주님을 증거하는 사람이겠습니까? 세례명을 받은 하느님의 자녀다운 품위를 지켜 주님과 하느님 아버지 앞에 떳떳하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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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5.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전임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지사장 신부님이 잠시 뉴욕으로 왔습니다. 신부님은 4년 동안 열심히 일하였고, 제게 넉넉한 운영자금을 남겨 주었습니다. 저는 신부님이 남겨주신 운영자금으로 팬데믹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신문 홍보를 위해서 미국 51개 주를 모두 다녔다고 합니다. Mary Hopkin이 감미롭게 불렀던 ‘Those were days.'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우리말 번역은 ’지나간 시절‘입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옛날에 선술집이 하나 있었지/ 우린 거기서 한 잔, 두 잔 잔을 기울이곤 했어/ 우리가 얼마나 웃으면서 시간을 보냈는지 기억나?/ 우리가 하려고 했던 거창한 계획들도/ 그때가 좋았지 친구야/ 우리는 그날들이 끝나지 않을 줄 알았지/ 우린 영원히 노래하고 춤추려고 했었지/ 우리가 선택한 인생을 살려고 했었지/ 우린 싸움에서 절대 지지 않으려고 했었지/ 우린 젊었고 우리의 길에 확신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바쁜 세월은 쏜살같이 우리를 스쳐 지나갔고/ 우리의 빛나던 신념들을 그 세월 속에서 잃어버렸지/ 우연히 그 술집에서 너를 마주친다면/ 우린 서로 웃으며 말하겠지/ 그때가 좋았지 친구야/ 우리는 그날들이 끝나지 않을 줄 알았지/ 그때가 좋았지 친구야, 그래 그때가 좋았지” 지나간 날들의 추억을 회상하며 환하게 웃는 신부님의 모습이 부럽기도 했습니다. 저도 이곳의 임기를 마치면 ‘지나간 시절’을 회상하며 ‘그때가 좋았지’라고 말하려 합니다. 그러게 하려면 지금의 시간을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창세기의 마지막을 읽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면서 한 가족의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사악을 100세에 얻었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니 기꺼이 제물로 바치려고 했습니다. 이사악은 큰 아들 에사우에게 장자의 축복을 주려고 했으나 야곱과 아내 레베카의 속임수로 야곱에게 축복을 주었습니다. 야곱은 형의 분노가 두려워서 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가량 일하였습니다. 야곱은 라반의 딸들과 결혼하였고 12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12지파의 시작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동생 요셉을 미워했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동생을 편애한 것도 있고, 동생 야곱이 꿈 이야기를 하면서 형들의 기분을 상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사서 이집트로 가는 상인들에게 팔려갔습니다. 요셉은 유혹을 뿌리쳤지만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꿈’ 풀이를 잘하였고, 파라오의 마음에 들어서 이집트에서 크게 성공하였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사는 땅에 큰 기근이 들었고, 형들은 이집트로 식량을 구하러 갔습니다. 그곳에서 형들은 성공한 동생 요셉을 만났습니다. 자신들의 잘못을 알고 있던 형들은 크게 걱정했지만 동생 요셉은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섭리하신 것이라고 말하며 가족들은 이집트로 초청하였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죽자 형들은 걱정이 되어서 요셉에게 다시 용서를 구합니다. 그러자 요셉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오늘 그분께서 이루신 것처럼, 큰 백성을 살리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이 죽으면서 창세기의 아브라함과 가족들의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요셉은 하느님 품에서 ‘지나간 시절’을 이야기할 것 같습니다.
요즘 복음에서 우리는 제자들을 파견하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2명의 제자들을 따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의 자세를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준비해 주시는 하느님을 믿고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대에 돈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모욕을 받기도 하고, 고통을 받기도 하겠지만 하느님께 받을 상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달릴 길을 다 달린 제자들도 하느님 품에서 이렇게 말할 것 같습니다. “그때가 좋았지 뭐” 두려움 없이 담대한 몸과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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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5.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된 삶, 영원한 삶
-하느님 중심의 삶-
12년전 돌아가신 셋째 형님의 혜안慧眼에 감탄하게 됩니다. 아들들에게 주었다는 정직, 효도, 우애 가훈의 세 말마디중 첫째의 덕목 정직입니다. 정말 까맣게 잊고 지내는 그러나 참으로 첫째로 놓아야 할 덕목이 정직입니다. 참된 삶, 영원한 삶의 우선적 조건이 바르고 참된, 거짓이 없는 정직한 삶입니다. 정직한 삶 자체가 구원입니다. 참으로 한결같은 하느님 중심의 삶이 정직한 삶입니다. 셋째 형님은 세례자 요한 예언자처럼 의롭고 정직하게 사셨습니다. 아주 예전 18년전인 2005년에 써놨던 ‘사랑하는 내 형님은’ 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올 팔월에 정년퇴직을 앞둔 세례자 요한 내 형님은
초등학교 선생님이시다
옛날 시골에서 그 어렵다는 사범학교를 나오셨다
술 담배 일체 안 하시고
오로지 가정과 학교 일에만 전념하셨다
아들 셋에 손자가 둘인 할아버지다
그러나 마음은 언제나 젊어 평생을 열정의 청년교사로 사셨다
세월도 형님을 비켜갔다
법없어도 사실 참 선량하고 순수한 분이시다
이 점에서는 내 요셉 큰 형님도, 베네딕도 둘째 형님도 똑같다
생각만 해도 자랑스럽고 든든한 형님들이다
구십 노모를 모시고 계시며
때때로 목욕도 시켜드리고 손톱 발톱도 깎아 드리는
보기 드문 효자이시다
요즘은 신앙에 맛들여 내 강론과 시도 빼놓지 않고 읽으신다
인터넷에서 강론을 읽으신 후 꼭꼭 틀린 글자들은 정정하여
이메일로 보내 주신다
천생 타고난 자상스런 선생님이시다
요즘도 가르치는 일에
마지막 열정을 쏟으시는 형님은 동생인 내가 방문할 때마다
꼭 마중나오시고 떠날 때는 버스 터미널까지 나와 차표를 사주시고
또 몇만원 주머니 속에 슬며시 넣어주신다
그리고 차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손흔들어 주고 돌아가신다
어렸을 때는 가장 많이 싸운 그러나 싸운 후엔 곧장 까맣게 잊어버렸던
다정하면서도 열정 가득한
사랑하는 내 바로 위에 세례자 요한 세째 형님이시다”
세상을 떠났지만 하느님 중심의 참된 삶, 영원한 삶을 사셨기에 지금도 제 마음엔 물론 세 아들들 마음에도 좋은 추억들로 가득히 살아계신 형님입니다. 엊그제는 셋째 형님 대신에 큰 아들인 조카 프란치스코가 거금을 제게 주었고 마침 생각난 18년전 시였습니다.
살아있다하여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때 비로소 참으로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맨먼저 가르칠 자녀교육의 우선순위는 하느님을 알게 해주는 신앙교육인 것입니다. 참사람되는 공부의 첫째가 바로 하느님을 아는 공부입니다. 우선적인 결정적 요소가 부모의 신앙입니다. 부모의 신앙과 삶을 보고 배우면서 비로소 참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 공부가, 신앙이 있어 영혼 건강, 정신 건강에 성인다운 참삶입니다. 광야인생, 이런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잃어버리고 막 함부로 살면 세상 것들에 중독되어 괴물도 될 수 있고, 폐인도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잃어버린 재앙이, 불행이 괴물이요 폐인입니다. 그래서 제가 누누이 강조하는바, 선택-훈련-습관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사랑을 선택하고 훈련하여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값싼 은총이나 구원은 없습니다. 죽을때까지 은총과 더불어 부단히 이렇게 노력하고 훈련할 때 비로소 참나의 성인입니다. 성서의 위인들이나 교회의 성인들이 바로 참된 삶, 영원한 삶의 모범입니다.
오늘은 프란치스코회의 제2창립자로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는 성 보나벤투라 주교기념일입니다. 13세기 당시 도미니코회의 아리스토텔레스 계열의 지적인 천사적 박사 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성 아우구스티누스 계열의 프란치스코회의 영적인 세라핌 박사 성 보나벤투라는 좋은 보완관계를 이룹니다.
성인의 보나벤투라 이름도 프란치스코 성인과의 각별한 관계를 짐작하게 하는 전설적 일화가 있습니다. 보나벤투라는 “잘 왔노라”, “좋은 소식이로다”라는 의미로 보나벤투라를 봤을 때 프란치스코 입에서 저절로 타져나온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전기도 성인의 작품입니다. 성 보나벤투라가 추기경 서임시 일화도 그의 겸손함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추기경 서임 칙서를 전하러 교황사절이 도착했을 때 성인은 설거지를 하고 있었고 설거지가 다 끝낼 때까지 추기경 모자를 나무에 걸어두고 기다리라 하였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성인은 참 소박하고 겸손했습니다. 또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보나벤투라의 지혜가 놀라웠던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를 찾아가 “그 높은 지성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묻자 십자가를 보여주며 “이것이 나의 지혜의 삶입니다.” 대답했다 합니다. 한 할머니가 “수사님의 지혜를 하느님께서 아시니, 천당에서 분명히 하느님의 앞자리에 앉을 거요.” 칭찬하자 “저보다 할머니가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실 수도 있죠”하고 대답했다는 일화입니다. 추기경이 된 보나벤투라는 공의회 참석중 1274년 7월15일 새벽녘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물론 다수의 동서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이 임석한 가운데 57세 나이에 병환으로 선종합니다.
오늘 창세기의 요셉의 형님들에 대한 관대한 처사가 감동적입니다. 아버지 야곱의 신앙을 보고 배워 평생 끊임없이 하느님을 사랑하며 기도하면서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했기에 하느님을 닮은 멋진 삶입니다.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하느님의 자리에도 있다는 말입니까?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오늘 그분께서 이루신 것처럼, 큰 백성을 살리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아이들을 부양하겠습니다.”
하느님의 꿈이 꿈쟁이 요셉을 통해 실현되는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듯 합니다. 하느님은 굽은 선들로도 똑바로 쓰실 수 있는 분입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입니다. 이어지는 말이 또 감동입니다.
“나는 이제 죽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여러분을 찾아오셔서, 여러분을 이땅에서 이끌어 내시어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실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요셉은 죽습니다. 앞서 야곱의 죽음 장면에 대한 묘사도 거룩한 선종의 죽음임을 깨닫게 합니다. ‘야곱은 자기 아들들에게 분부하고 나서, 다리를 다시 침상위로 올린 뒤, 숨을 거두고 선조들 곁으로 갔다.’ 이렇게 한생을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하다 거룩한 유언을 남기고 편안히 아버지의 집으로 귀향할자가 몇이나 될런지요.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하느님을 잃어버린 영혼의 죽음입니다. 영혼없이, 생각없이 자기를 잊고, 잃고 사는 이들은 살아있다 하나 실상은 죽어있는 유령같은 좀비같은, 괴물이나 폐인같은 삶입니다. 그래서 끊임없는 기도와 끊임없는 회개로 하느님 중심의 삶의 회복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다음 말씀이 그대로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육성처럼 들립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참새보다 더 귀하다.”
정말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경외하는 사람은 세상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육신 생명에 대한 과도한 집착에서 초연하여 영원한 삶을 삽니다. 그는 육신의 죽음보다 영혼의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순교성인들이 영혼 승리의 참 좋은 본보기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두려워할 때, 경외할 때 영혼 건강, 정신 건강에 세상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하는 삶이 참된 삶, 영원한 삶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우리의 모두임을 깨닫습니다. 예닮의 여정과 함께 가는 귀향의 여정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참되고 영원한 삶으로 이끌어 줍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주님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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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5.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그분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곳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세상입니다. 즉 이곳의 주인은 바로 아버지 하느님입니다. 이곳을 창조하신 분께서 주인이 아니라면 누가 주인이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 이후의 세상 즉 천국도 아버지 하느님께서 거처하는 곳이고 그곳 역시 하느님의 세상이라 말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숨 쉬는 이곳도, 그리고 천국이라 불리는 다른 세상도 모두 아버지 하느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아버지 나라에 살고 있고, 이 세상 이후에도 아버지의 나라에 살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우리가 정말 두려워서 해야 하는 분이 누구신지 알려주십니다.
다른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의 주인이신 아버지 하느님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늘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살고 있음에 기뻐해야 함을 주님은 자기 삶으로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은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이 진정으로 두려운 것인지 말입니다. 오히려 잠시 후면 지나갈 바람과 같은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하는 분 그분은 모든 것의 주인이신 아버지 하느님이십니다.
라면 잔치
갑작스레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갑작스레 주방에 들어가 뭘 먹을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라면 먹자. 오늘 월요일이잖아
친구는 제 뒤에서 말했습니다.
신학교를 함께 졸업한 우리에게 월요일은
라면 먹는 날이었습니다.
(신학교의 월요일 아침은 무조건 라면^^)
손이 바빠졌습니다.
물을 올리고, 파를 썰고, 멸치 액젓을 조금 넣고, 고춧가루도 준비하고 양파와 마늘도 넣고….
짜자잔….
아주 오랜만에
친구와 라면으로 추억을 먹었습니다.
라면도 맛있었는데 추억이 더 맛있었던 한끼였습니다.
맛있는 추억 누구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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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5.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군 생활이 힘들다고 합니다. 단체 생활, 훈련 등 사회에서 체험하기 힘든 것을 하면서 그 안에서 어려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하기 싫은 것을 견디어 이겨낸 뒤에 많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게 되지요. 저 역시 군 생활을 30개월 했고, 이 기간을 통해 크게 성장했음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다시 가라고 하면 못 갈 것 같습니다.
군대 훈련 중에서 기억나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화생방 훈련입니다. 밀폐된 공간에 방독면을 쓰고 들어가서 잠시 뒤에 방독면을 벗으라고 조교들이 명령합니다. 벗는 순간, 숨쉬기 힘든 고통을 체험하게 됩니다. CS탄을 이 밀폐된 공간에서 터뜨려서 눈물 콧물을 다 쏟게 합니다. 겨우 5~10분 정도의 시간일 뿐인데, 최악의 시간을 보낸 것 같습니다. 못 견디겠다면서 밖으로 나가려는 사병을 조교들이 막으면서 일렬로 줄을 서서 ‘어머니 은혜’를 부르게 합니다. 다 부른 뒤에 밖으로 나왔을 때, ‘여기가 천국이구나’ 싶었습니다. 맑은 공기를 마시는 것, 숨을 제대로 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천국 체험을 하게 됩니다.
숨을 쉬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영혼도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숨을 제대로 쉬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는 영혼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습니다. 하느님과의 대화라는 기도를 통해 영혼을 깨끗하게 정화할 수 있으며, 이 세상을 힘차게 사는 힘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두고 어느 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현세를 살면서도 마음은 천상에 두고 있어야 한다.”
천상에 마음을 두는 방법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기도를 뒤로 미룹니다. 세상의 악함에 물들어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헐떡이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로 마음을 천상에 두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육신을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하십니다. 대신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라고 하시지요. 바로 현세를 살면서도 마음은 천상에 두는 삶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 이 세상 안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더 긴 시간을 하느님 나라에서 보내야 하는데, 그 나라에 들어갈 구원의 삶이 아닌 순간의 만족만을 위한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기도와 묵상을 통해 영적으로 숨을 제대로 쉴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우리, 그래야 기쁘게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순간적인 쾌락과 즐거움을 탐하는 것이 아닌,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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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것은 무엇이나 나에게서 멀리 있지 않다고 여긴다(테렌시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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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5.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홀로 있어도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람들 앞에서도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 앞에서도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도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를 박해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보다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더욱 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보다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더욱 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사람들보다
그리스도를 박해하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더욱 더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홀로 있어도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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