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삶의 문제는 종교의 이상을 실현하는 그 나라의 통치에 순응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신탁은 신앙과 삶은 물론 종교와 정치의 이상으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다른 길은 무거운 주제이지만
사람이 짐승인 것을 꺠닫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서로를 존중하는 인간관계의 문제요,
하나님 앞에서 사람은 누구나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는 깨달음으로 겸손해야 할 것입니다
인생이 짐승인 것을 깨닫는 삶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는 진실을 깨우칠 것입니다.
욥기서는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여자에게서 난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보라 그의 눈에는 달이라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별도 빛나지 못하거든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랴고 하였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티끌이라고 하면서 기도하였습니다.
적어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인생은
티끌의 겸손으로 응답받는 아브라함의 경지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시인은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라고 하면서
생명을 칼에서, 개의 세력에서 사자의 입에서, 들소의 뿔에서 구원해 달라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는
하나님의 나라와 주권적 통치를 찬양하였습니다.
또한 시인은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전도서는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인생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이 당하는 일을 짐승도 당하나니 그들이 당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짐승이 죽음 같이 사람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고 하였습니다.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는 인생은
인생의 일에 대한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하였습니다.
전도서의 궁극적 통찰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또한 욥은 주의 날이 어찌 사람의 날과 같으랴며
나의 허물을 찾으시며 나의 죄를 들추어내시나이까라는 깊은 내면의 성찰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스올이 내 집이 되기를 희망하여 내 침상을 흑암에 펴놓으매
무덤에게 너는 내 아버지라, 구더기에게 너는 내 어머니, 내 자매라 할지라도
나의 희망이 어디 있으며 나의 희망을 누가 보겠느냐며
고난받는 인생에 대한 체험적인 공부를 제대로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발견되는 인생은
티끌이요, 벌레며, 구더기와 지렁이요, 짐승인 것을 깨달으며,
그 죄를 회개하고 겸손함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신앙입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깨닫는 범상치 않는 글의 진행은
혼돈하고 공허한 가운데 빛을 비추는 창조의 생명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절박한 이해가 없으면
구원의 다른 길을 탁상공론으로 논쟁합니다.
참으로 구원이란 죽음을 선택한 절망의 낭떠러지 위에서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죽음 외에 다른 길은 없는가라는
생존의 기로에서 깨닫는 지혜의 몸부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진리의 광맥을 찾는 길은
꿈결의 소원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땅을 딛고 살아가는 오늘 하루.....
그 딛고 선 땅이 꺼지지 않고 하늘의 우뢰를 맞지 않는 순간을 기억한다면
언젠가 만날 죽음의 순간을 구원의 감사로 맞을 것입니다.
죽음을 감사하는 경지의 인생은 사람이 짐승인 것을 깨달은 삶이요,
신앙과 삶을 하나로 이룬 성숙한 경지이며,
종교와 정치의 소망을 하나님이 통치로 깨닫는 구원의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심코 툭 던져진 짐승인 사람의 구원받는 길은
사실상 예레미야의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찾으면
용서하리라는 신탁의 난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신앙과 삶의 문제는 무덤에게 너는 내 아버지라, 구더기에게 너는 내 어머니,
내 자매라고 하는 깊은 고뇌의 성찰이 없이
그냥 실천적 무신론이라는 말이 말해주듯 믿음의 도와 삶의 양식이 모순되는 충돌입니다.
흔히들 정치인의 거짓말은 종교적 신념과 같아서
거짓말을 해놓고 그것을 진실로 믿는 본질적으로 부패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믿음의 도는
종교적 신념이 아닙니다.
벌레에게 긍정의 힘을 불어 넣는다고
고해의 인생이 되지 않습니다.
종교적 신념은 거짓말을 해놓고 그것을 진실로 믿는 것처럼
일상적인 생활, 그 자체를 스스로 진실하다고 믿는 타성에 젖은 삶,
곧 모순된 삶의 매너리즘 현상입니다.
또한 종교인의 매너리즘은
신앙과 삶을 동일하게 생각하는 모순의 함정이며 의식의 오류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항상 거짓말을 하고 항상 옳다고 생각하는 종교적 신념은
자기 합리화의 매너리즘에 깊이 빠진 오류와 모순 덩어리입니다.
거짓의 달인은
삶의 문제로 절대 고민하지 않습니다.
오늘 말이 다르고 내일 말이 다른 정치인은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탐관오리일 뿐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믿음의 주체가 그 대상이요,
일반적인 종교의 믿음은 믿음의 주체가 자아인 신념입니다.
종교적 신념이 강한 사람은 피아를 구별하지 못하며
성경적인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짐승인 것을 깨닫는 것은
종교적 신념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하면된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신념의 논리이며
성경적 믿음이 아닌 인본주의 자기 긍정의 신앙입니다.
"적극적인 사고"와 "긍정의 힘"은
성경적인 믿음을 파괴하는 인본주의 주체사상입니다.
좌파의 주체 사상이 기독교 사상과 융합된 것이 기독교 인본주의 신앙이요
기독교 안에 침투한 좌파의 의식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 신앙은 신본적 개혁주의 신앙을 버리고
성경의 하나님은 한 분인데 믿는 사람의 숫자와 동일한 범신론적 인본주의 신앙으로 타락하였습니다.
여호와를 바알로 섬기고 바알을 여호와로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적 타락은
오늘날 기독교 신앙의 타락, 그 자체가 아닐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인본주의는 종교 다원주의의 길을 열었으며
범신론과 샤마니즘 무속 신앙과도 융합할 수 있는 종교적 연금술사의 이론과 논리입니다.
종교 다원주의는 21세기의 르네상스요,
포스트 모던 시대의 주류 사상으로 절대 진리에 대한 성경적 고찰을 파괴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신앙과 삶의 문제를 고찰하면 성경의 뿌리를 가진 믿음의 도는
포스트 모던 시대의 종교 다원주의 사상으로 인해서 실천적 무신론의 매너리즘에 빠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할 뿐만 아니라
빛의 갑옷을 입고서 어둠에 매여 사는 본질상 진노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형국입니다.
이렇게 구름에 가려진 빛의 현상은
말세의 성도가 겪는 경건과 복음의 능력을 상실한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찾아 왔건만
문 안으로 영접하지 않고, 문 밖에 세워두는 것은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말세의 현상입니다.
종교와 정치의 문제는
더욱 복잡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현충원을 참배하지 않고 제사를 드리지 않으며 신사에 참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타종교의 종교의식에 참여하지 않으며
차별금지법은 자유에 대한 침해요, 특히 종교의 자유에 대한 탄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종교의 가르침을 제한하고 재단하는 법은
성경에 대한 도전이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게 하는 악법, 그 자체입니다.
정치와 종교의 길은 다르지만
종교적 이상을 실현하는 정치는 성경에 "나라의 통치"라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다윗 시대 밖에 없습니다.
다윗은 왕의 통치라는 신정 국가의 이상을 실현하였고
천하의 왕이 통치하는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로 그 예표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담은 종교의 이상을 정치로 실현하였으며......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로 넘치는 종교적 이상의 통치를 실현할 영원한 메시야의 표상이 되었습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아브라함의 언약과 모세의 언약과 다윗의 언약을 영원히 성취한 메시야의 통치입니다.
종말론적인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에 화답하며
성경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여 천하만민이 하나님을 깨닫고 존귀와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과 삶, 그리고 종교와 정치적 성향으로 구원의 다른 길을 걷는 사람에게
구원의 다른 길은 없는가에 대한 반문은 "그렇다"는 성경적인 답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르는 진실과 진리의 길은
성경의 뿌리에 근거한 좁고 협착한 하나의 길 밖에 없습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길이요, 생명의 빛이요, 성령의 진리입니다.
철없는 정치 논객들의 정신없는 모순된 정치 논리는
결국 성경적인 왕의 통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공의와 정의의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지성의 빛이라는 탁월한 지력과 논리을 가졌어도
성경적인 삶과 정치의 궁극적인 이해가 없으면
그 지지하는 정치인의 구색에 맞는 프레임에 갇힐 수 밖에 없습니다.
정치 편향적인 논객의 행보는 왕의 통치라는 하나님의 뜻을 담아내지 못하고
시각과 시선의 한계를 편향과 편벽과 편협에 치우칠 수 밖에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성서지대의 구원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통치를 이루는 결실이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정치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는 메시야의 통치입니다.
☞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행16:30 -32)
☞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행4:12 )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6)
☞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딤전2:5 )
☞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일5:12)
☞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엡1:3-14)